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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62화 (362/489)

◈ 362화. 환영하마 (2)

나의 입술 사이로.

태연한 걸 넘어서.

오만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화원의 벌레만도 못한 존재여.”

악마에게만큼은 언제나 가혹한 그랑펠.

근데 어째 최근 들어 발언 수위가 더 강해진 것 같지 않냐……?

왜, 예전 같았으면 ‘벌레’ 수준에서 끝났을 텐데.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니.’

단순하게 악마의 행태에 실망해서 좋은 말이 튀어나오지 않는 건 아닐 거다. 악마를 향한 그랑펠의 취급은 밑바닥에서 단 한 순간도 상향 조정된 적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전성기 성질머리 참 대단하다.’

[저주, 어둠의 이해].

그를 통해 상승하고만 그랑펠에 대한 이해도가.

나의 입방정을 더욱더 까칠하게.

더욱더 그 시절스럽게 바꿔놓은 거겠지.

‘발동하지 않아도 1할의 이해도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둠의 이해].

그리고 그와 연동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숙련도가 100퍼센트에 도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이. 단순히 찰랑거리게 될 머리카락만 걱정하는 건 아니라고.

나는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아니, 지금은 됐다.’

그런 사치스런 고민에 빠져있기에는.

눈앞에 풍기는 악마의 냄새가 지나치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거악, 칠죄종 색욕.

“어떻게, 어떻게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냐……?”

놀란 표정이다.

틀림없이 내가 플레이어들과 함께 아르카나 대륙으로 넘어간 줄 안 모양이야? 초대형 이벤트이긴 했다. 거기에 언론에서도 워낙 떠들어댔어야지.

[성전 연합군, 드디어 아르카나 대륙으로 출격!]

[이호열, “내가 가는 곳이 곧 길이다.”]

[전문가 일동, “이호열에게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성전 연합군.

그들이 가슴 속에 품었던 긍지에 변함이 없는지 어떤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다만.

어쨌거나 성전 연합군 소속인 대다수의 플레이어다.

그런 성전 연합군의 총대장으로서.

내겐 연합군의 대륙 진입을 지켜볼 필요가 있을 터.

그야 아르카나 대륙은 어떤 균열보다 위험한 장소였으니까.

‘하늘의 마안만 하더라도 그래.’

아르카나 대륙에 처음 진입한 플레이어들?

막말로 패닉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자신들이 알던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대륙의 현재 상황이다. 하지만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과는 다르게 친절한 튜토리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분명 나의 도움이 필요하리라 여긴 거겠지.’

하지만 틀렸다.

선약.

모든 일엔 우선순위가 존재하는 법.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무엇을 말하는 거지?”

“네가 이 땅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그랑펠의 뒤끝.

그것도 악마를 향한 뒤끝은 예상을 가뿐하게 뛰어넘을 수준이거든. 혼혈의 악마 그레모리와 직면한 이후부터. 나는 그레모리에게 피를 나눠준 색욕의 존재를 한 순간도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볍게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향기에 이끌려 화원에 찾는 벌레들은 필사적으로 손바닥에서 벗어나려고 드는 법. 그러나 너는 나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구나. 그게 아니라면.”

역시나 매도가 이어진다.

“나의 손바닥 안이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거겠군.”

“……!”

“벌레만도 못하기에.”

거악(巨惡) 자존심에 흠집이라도 났다는 것일까. 러스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더니 곧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으로 향한다. 의식을 위한 마법진이리라.

그래도 상황판단은 빠르군.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거야.’

혼혈의 악마 그레모리는 물론. 한쪽 팔을 잃은 상태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칠죄종인 질투를 사냥해 낸 나였다. 애초에 잘라낸 것도 나이긴 했다만.

‘팔을 자를 땐 마르셀로와 뱅그릿의 도움이 있긴 했지.’

어쨌든, 그 이후 악룡 유낙서스까지 쓰러트린 나였다.

색욕은 그런 나의 행보를 보며 판단을 내린 것이리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내게 범접할 수 없다. 자신 또한 그레모리처럼 피를 섞어 [『기이』]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선택한 피를 섞을 마왕이 바로.

‘십좌의 마왕.’

십좌.

상위 마왕, 놈들인 거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주에서 맞닥뜨렸던 상위 마왕 서열 1위.

바알 앞에서도 꼿꼿한 고개를 굽히지 않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내뱉을 말이야 간단했다.

“내게 어떤 발악을 보여줄지 궁금하구나.”

“발악이라고?”

“결국, 배를 까뒤집는 결말에 변함은 없을 테지만.”

“……!!”

나, 이호열의 근심 걱정과는 무관하게.

그랑펠이 상위 마왕의 소환을 두려워할 인물이냐?

오히려 크게 기뻐할지도 모른다.

일석이조.

거악과 상위 마왕을 함께 뿌리 뽑을 기회라고 말이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익히 마주했던 두 상위 마왕.

가미긴과 바알을 통해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얼마나 많은 재물이 필요한지를. 그 덕분에 이렇게 훤히 색욕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었거든.

‘대규모 제물 의식에 중국보다 적합한 장소는 없어.’

천하통일로부터 시작된 붕괴.

엘시도어가 붕괴한 균열을 곧장 폐쇄하기는 했다만. 요동치는 부정적인 감정이 완전히 사라질 순 없다. 거기에 제물의 머릿수 또한 방대하기 짝이 없는 중국이었으니까.

스릉─!

나는 귀철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유감이구나.”

가미긴 소환 때처럼 악마들을 제물로 바쳤다면.

나는 의식을 가만히 지켜봐 줬을지도 모른다.

일석이조가 뭐냐?

제물로 바쳐지는 악마까지 고려해 계산기를 두들겨 보면…….

그랑펠은 처음으로 악마에게 너그러움을 베풀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엘시도어의 수고를 허투루 돌릴 순 없지 않으니.”

이번 의식에서 제물은 중국의 시민이었다.

타인의 희생으로 악마를 몰이 사냥한다?

효율을 떠나서 그랑펠의 고귀한 긍지가 용납할 수 있을 리 있겠냐.

색욕이 이죽거렸다.

“말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유감스러운 건 오히려 나다. 의식은 이미 시작되었다. 한번 시작된 상위 마왕을 위한 의식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거, 누가 할 말인데.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해충만도 못한 네 말이 처음으로 옳았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그렇다. 의식은 이미 시작되었다.”

“……?”

[구마의식].

악마 사냥꾼과 악마의 정신력 싸움.

그 줄다리기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

의식의 모든 것을 지배하리니.

나는 색욕에게 말했다.

“네게는 지금의 광경이 그리 보이는 모양이구나.”

“……뭐?”

어안이 벙벙한 듯한 색욕의 표정.

놈을 뒤로한 채 나는 시선을 옮겨 주위를 둘러봤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평온하기 짝이 없다. 상위 마왕 현현 의식을 위한 마법진 또한 발현되지 않았다.

그걸 넘어서 쏟아지는 시선이 따갑지 그지없다.

웅성웅성.

“이, 이호열이다!”

“이호열? 그게 누군데?”

“진짜 검열이 무섭긴 하다. 어떻게 이호열을 몰라? 류오쥔춘, 그 비겁한 가짜랑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 플레이어의 정점. 한없이 깊은 어둠부터 시작해서 호칭만 하더라도 수십 개가 넘는……!”

……아무리 그래도 수십 개는 과장이 심하잖아?

‘어쨌든.’

허공에서 마주한 나와 색욕이었다. 그 모습이 주위 시선을 끌 만했으니. 아주 그냥 스마트폰 카메라부터 시작해서 드론 카메라까지. 나의 모습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물론, 중요한 건 색욕.

녀석은 아직도 헛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나는 성장했다.

“끝내자꾸나.”

거악 칠죄종마저도 ‘고작’으로 취급할 정도로.

“……!!!”

녀석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뒤늦게 행동하려고 하는 눈치였지만.

이제는 이쪽이 기다려 줄 생각이 없다.

“방문객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네 배가량 빠르다. 보자, 클라우디 가문의 저택이 아무리 넓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복구된 건 또 아니거든.

‘저택에서 흑역사의 낌새를 파악하기 전에…….’

집주인인 내가.

저택으로 돌아가 플레이어들을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는 움직였다.

악마를 사냥할 때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

악크샨.

그들처럼.

고작 거악 따위에게 거창한 마법은 사치다.

검과 은제 볼트가 장전된 석궁을 집어 든 양손이면 충분하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푸슉!

쏘아져 나간 석궁 볼트가 색욕의 어깻죽지를 관통한다.

몸을 비틀어서 피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바람에 뼈라도 맞은 모양이군.

“큭.”

축─

늘어진 어깨가 나, 이호열의 알량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지만. 그랑펠이 해충만도 못한 악마의 감정 따위 신경 쓸 리 있나.

툭─

쇄도.

가볍게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간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동속도는 [민첩] 스탯의 영향을 받는다. [천적관계]가 발동되었다고 하더라도 내 순수한 육체 능력은 나보다 레벨이 낮은 무투 클래스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낮다.

“!”

그럼에도 색욕이 당황할 정도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건 그동안의 발버둥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걸음마다 더해지는 마력 발산의 추진력과 엘시도어의 움직임을 모방한 덕분.

또한 내가 주도하는 구마의식 속이다.

고작 거악 따위가.

나의 속도를 따라올 순 없다.

[거악, 칠죄종 색욕에게 ‘치명타’가 발생합니다.]

[거악, 칠죄종 색욕에게 ‘출혈’이 발생합니다.]

[거악, 칠죄종 색욕에게 ‘무력감’이 발생합니다.]…….

전투가 아니다.

말 그대로 사냥.

그것도 일방적이기 짝이 없는.

천적과 사냥감의 천적관계.

콰카카캉!

나는 빌딩 옥상에 처참하게 나가떨어진 색욕을 내려다봤다.

놈의 피가 옥상 바닥을 흥건하게 적셔가고 있다.

“빌어먹을…….”

녀석이 입술을 짓이겨 물고는 말했다.

“주제 파악이라는 걸 했다고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땅에 떨어지고 단 한 순간도 네 녀석을 얕보지 않았으니까. 그야 네놈은 최후의 생존자였지 않느냐?”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간다.

“악크샨과 클라우디의 생존자여. 믿기지 않는다. 어찌하여 하나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을 두 개씩이나 짊어지고 있는 것이냐? 관심이 가는구나. 진정으로 순수한 관심이…….”

이름값 하는 악마구만.

‘순수하긴 개뿔이.’

혓바닥으로 입술을 훑는 모습이 역시 악마의 말은 한마디도 믿을 수 없다는 걸 다시 상기하게 한다. 그러나 색욕은 이윽고 애써 치켜세운 상체를 다시 바닥에 뉘었다.

대(大)자로 드러누웠다고 하기에는 기괴했다.

목과 팔과 다리를 이상한 각도로 꺾은 채.

그러한 색욕에게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나는 주제 파악을 하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상위 마왕, 그들을 지배해 네놈을 뛰어넘고자 마음을 먹었으니까. 그러나 그대의 냉정함에 깨닫게 되었다. 나는 너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이윽고 마지막 말이 이어진다.

“그러니 내가 네 녀석의 제물이 되겠다. 부에르!!”

그와 동시에.

나는 떠올렸다.

마왕.

그들을 소환하기 위해선.

재단이 필요하다는 걸.

프로스트 탈환.

과거 데카라비아는 별 모양으로 시체를 배치해 제단을 만들었고, 가미긴을 불러내고자 했던 카림제바 또한 ‘차원의 틈’ 균열을 말의 형상처럼 발현했었다.

그러니까 기괴하게 꺾인 색욕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이 재단이자.

제물이 되어 상위 마왕을 소환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 그랑펠이 보일 반응은 더없이 명확했다.

내 차가운 시선이 갈라지는 하늘을 향한다.

[열 번째 왕좌의 마왕, 부에르가 출현합니다.]

“일석이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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