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60화 (360/489)
  • ◈ 360화. 버려진 땅에도 꽃은 피는가 (3)

    블러드 엘프.

    단지 피와 살육에 미쳐버렸을 뿐인 게 블러드 엘프라면.

    세계수는 어찌하여 자신의 핏줄에게 그러한 운명을 안배하였는가?

    유감스럽게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이들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블러드 엘프, ‘엘시도어’가 출현합니다.]

    그 메시지를 처음으로 목격했던 초신성들은 유스라 왕국 지하 깊숙한 곳에 묻혀버렸으니까.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따르리라. 이 순간, 저들에게 블러드 엘프는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

    악전고투.

    범람하는 균열에 맞서던 중국의 플레이어들.

    그들이 가쁜 숨을 내쉬며 엘시도어를 바라본다.

    “무슨 움직임이…….”

    “움직임은 둘째 치더라도 저 검술에 담긴 위력은 대체 뭐야? 아니, 균열 하나를 클리어하는 데에 채 1분도 지나지 않았다고! 차원이 달라도 몇 차원이나 달라.”

    “그보다, 저게 우리를 왜 돕는 건데?”

    쓴웃음이 나온다.

    “모르지. 뭐, 메시지에선 블러드 엘프라는데. 블러드 엘프가 되면서 철이라도 든 건가? 어쨌든, 덕분에 살았어. 이제 상처만 어떻게 하면…….”

    플레이어는 너덜거리던 자신의 뱃가죽을 떠올렸다.

    300레벨 [레어] 등급의 장비로도 막을 수 없었던 몬스터의 일격.

    중상이지만,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해야…….

    “어라?!”

    없었다.

    상처가.

    오직 상처가 남겨졌던 육체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붉은 실과도 같은 피가, 사내의 상처가 어떤 이유로 치유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

    그 붉은 실은 블러드 엘프, 엘시도어와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엘시도어는 얼핏이나마 자각했다.

    무언가 다르다.

    피를 뒤집어썼을 때의 감각.

    그때 느꼈던 희열이 아니다.

    끈적하고 비릿하기만 했던 피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온기, 온기라.

    “하.”

    엘시도어는 작게 웃었다.

    어머니, 세계수에게서 느꼈던 온기와 비슷했기에.

    엘시도어는 자신에게서 일렁이는 붉은 아우라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일대의 피를 응시했다.

    보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벌레만도 못하다고 여겼던 인간들에게 어째서.

    어머니와 똑같은 온기가 느껴지는 것인지는.

    ‘뭐, 됐어.’

    다만, 엘시도어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온기가 낯설어서인가.

    눈앞의 몬스터가 거슬려서인가.

    이유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잡초를 솎아낸 땅에 꽃을 피우라는.

    호열의 명이었으니까.

    덕분에 엘시도어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꽃을 피우는 데에 더없이 중요한 것은 온화한 온도.

    따뜻한 피가 적절한 온도를 맞춰준 덕분.

    엘시도어 자신부터가 개화, 만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킨베르가 담뱃불을 밟아 끄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면 하잖아, 귀쟁이.”

    그날, 중국에는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붕괴된 균열만 하더라도 열 하고도 다섯이었으니, 대다수가 붕괴를 앞둔 균열을 저지하려다가 균열 내부에서 사망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일반인 사망자는 없었다.

    -엘시도어가 블러드 엘프로 전직했다던데?!

    -전직이란 표현이 맞나?

    -어쨌든ㅋㅋㅋ 장난 아니더라

    -ㄹㅇ 누가 알았겠냐? 피에 미친 싸이코 엘프가 광역 힐링을 상시 발동하는 블러드 엘프로 전직하게 될 줄이야ㅋㅋㅋㅋㅋ

    피의 꽃이 생명력을 뿜어낸 덕분이었다.

    엘시도어의 활약은 차갑게 얼어있던 땅에 봄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물론, 다른 꽃들이 피어나기에는 아직 이를지도 모를 터.

    허나, 엘시도어는 썩 흡족했다.

    “이 땅은 따뜻하군.”

    이 순간, 그가 느끼는 온기만큼은 진짜였으니까.

    저벅저벅.

    그런 엘시도어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중국의 플레이어……. 아니, 모험가들을 대표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악의는 없습니다. 거슬리신다면 당장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라.

    지나치게 극진한 태도는 자신이 모험가의 세계에서 어떤 악명을 떨쳤는지 자각하게 했다. 그러니 엘시도어는 주제 파악을 잊지 않았다.

    설령, 꽃으로 피어났다고 한들.

    그 꽃은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 피어난 게 아니었으니까.

    엘시도어는 한마디 말을 남긴 채 등을 돌렸다.

    “감사 인사는 내가 아닌 그분에게 전해라.”

    “그분이라 하시면……?”

    ……멈칫.

    엘시도어의 발이 멈춘다.

    마탑의 수석, 흑암룡,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워낙 이명이 많아 고르기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 입에 달라붙지 않는데.’

    게다가 곧장 그 이름들을 입에 담기에는, 그동안 호열을 건방진 인간 놈이라 불렀던 자신의 과오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엘시도어는 무심하게 덧붙였다.

    “내가 그분이라 칭할 이는 오직 한 분뿐이다.”

    그래, 당장은 그걸로 충분했다.

    *

    AAU 지부장 회의.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표정들이 볼만하네.’

    고작 하루.

    AAU는 격동의 롤러코스터에 올라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난데없는 천하통일의 궤멸. 그 탓에 중국이 균열을 처리하지 못해 국가 붕괴에 위기에 처한 상태.

    ‘다들 여러모로 기대했던 거겠지.’

    비로소 AAU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중국을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던 이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블러드 엘프, 엘시도어 중국을 구하다!]

    [엘시도어, “모든 건 그분의 뜻이다.”]

    [밀착취재 : 이호열은 어째서 중국을 구원했는가?]…….

    이번에도 역시나.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형태로 사태를 진정시킨 호열이 있었으니까. 런던 지부장, 베이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지부장들더러 들으라는 듯 입을 연다.

    “역시, 유스라 총책임자님이십니다! 아르카나 대륙 진입 준비를 위해 지부장 회의에도 불참의 뜻을 전해오셨는데. 그 바쁘신 와중에 천하통일 사태까지 진정시키다니요.”

    박민재도 적당히 장단을 맞췄다.

    아니꼽고, 얄미웠기 때문이었다.

    이익을 위해서 그때마다 태도를 바꾸는 몇몇 지부장.

    그들과 얽힌 국가들이.

    “어디 그뿐이십니까? 엘시도어, 그 골칫덩이를 완전히 환골탈태시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확실히 화원에서 식물을 가꾸는 게 정서에 좋기는 한가 봐요?”

    슥─

    회의장을 훑는 박민재의 시선.

    참고로 박민재의 코스모 시절 별명은 미친놈이었다.

    CEO에게도 달려들던 상또라이.

    “이거 회의장에도 화분 몇 개씩 가져다 놔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지, 그거론 부족하려나? 몇몇 분들은 아예 지부장실을 식물원으로 리모델링해야 될 것 같기도 하고요.”

    한국인의 매운맛.

    박민재의 노골적인 발언에 사레가 들렸나.

    “크흠.”

    몇몇 지부장들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지만 그뿐이었다.

    발끈한다는 건 제 발에 찔릴만한 짓을 했다는 뜻에 불과했으니까.

    박민재는 그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폈다.

    ‘곧 새 국면이 찾아온다.’

    아르카나 대륙 통하는 포탈이 열린다.

    광활한 기회의 땅 앞에서 얄팍한 긍지는 흔들리고 말겠지.

    씁쓸했지만 경악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본래 인간이란 그런 존재니까.

    박민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의 긍지와 여유도…….’

    어쩌면 유스라 총책임자님이 나와 같은 한국인이라는 데에서 기인하는 건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니 박민재는 쓸데없는 우월감 따윈 가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를 명심할 뿐이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워낙 맡은 바가 많은 호열이었다.

    앞으로도 지부장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시는 일이 잦아질 수밖에 없을 터. 때문에 박민재는 호열의 몫까지 더욱 눈을 부릅뜰 생각이었다.

    나아가기도 바쁜데 뒤통수를 맞을 순 없잖아?

    *

    마탑의 로비.

    [목표 좌표 : 아르카나 대륙]

    “떠, 떴다!!”

    포탈 앞에서 캠핑 중이던 플레이어들로부터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드디어!

    열렸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이.

    박휘강의 눈앞에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위해선 두 세계를 아우르는 지식과 힘이 필요했다. 기이할 정도의 업적을 이룩한 자는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지만, 위대한 업적은 영원토록 잊히지 않으리라.]

    탐험가란 어떤 존재들인가?

    지도 한 조각.

    때로는 주점에서 떠도는 소문으로 보물의 위치를 추적하는 이들이다. 탐험가 중에서도 숙련자라고 할 수 있는 연맹 탐험가 박휘강이다.

    그에게 이런 수수께끼는 식은 죽 먹기였다.

    “역시, 호열 님이십니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잇는 위대한 업적을 세우시고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는 듯.

    이름 하나 남기지 않으신 이 청렴결백함.

    “저였으면 그냥 이름부터 새겼을 텐데. 포탈을 사용할 때마다 제 이름을 플레이어들에게 각인시키는 거니까요! 너무 관종이라고요? 에이, 새삼스럽게. 관종이니까 방송하죠.”

    호열이 이름을 남기지 않은 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거늘…….

    박휘강은 물론, 플레이어들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것보다 ㄹㅇ 바로 진입할 거임??

    -방송 안 끊겼으면 좋겠다ㅠㅠㅠ

    -그래도 녹화는 해줘 휘강아

    -그래 다시보기 다 챙겨볼 테니까 넷튜브에 올려!!

    고작 포탈 입구에서 고민에 빠지기에는.

    포탈 너머에 있을 아르카나 대륙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물론, 박휘강은 서두르지 않았다.

    “일단, 정확한 좌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호열 님께서도 아르카나 대륙은 위험하다고 주의하셨으니까요! 대격변 이전에도 성벽 밖에선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제국이 제공하던 울타리마저 무너진 상태.

    그것도 모자라 현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수의 악마들이 호시탐탐 자신들의 육체를 노리고 있을 터. 그 사실을 상기하자 진입을 앞둔 플레이어들에게 현실적인 고민이 엄습했다.

    “……그보다 숙소가 있기는 하려나?”

    “숙소는 개뿔. 멀쩡하다고 할 수 있는 도시가 제국 수도, 안토니움 하나라고 하셨잖아? 그냥 안토니움에서 가까운 곳에 떨어지기만을 기도해야지.”

    “나 다른 건 몰라도 화장실은 앉아서 해결해야 하는데.”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그 사실에만 들떠서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못한 이들은 난감했다. 이래서야 제로 산맥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륙에서도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활동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고민도 잠깐.

    “어쨌든, 못 먹어도 고 아니겠어? 여차하면 복귀하지, 뭐.”

    이윽고, 가장 선두에 있던 플레이어가 포탈에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목적지의 풍경.

    이질적인 게 확실히 아르카나 대륙이 맞았다.

    “……응?”

    분명 지금의 아르카나 대륙에 멀쩡한 도시나 영지는 없다고 들었다.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조차도 성벽이 무너지는 수모를 겪었다고 했었으니까.

    그런데 다른 의미로 또 한 번 이질적이었다.

    “뭐, 뭐가 이렇게 화려해?!’

    아니, 화려하다 못해서 휘황찬란하다.

    대체 저 드넓은 영지와 대저택은 어떤 도시란 말인가?

    의문을 가진 플레이어의 눈앞.

    이윽고 구체적인 목적지의 정보가 떠오른다.

    [목표 좌표 : 아르카나 대륙 - 클라우디령]

    “……잠깐만, 클라우디라면 분명?!”

    고작 세월에 묻혀서 감춰지기에는.

    너무나도 위대한 가문.

    클라우디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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