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화. 버려진 땅에도 꽃은 피는가 (2)
하르콘은 내게 말했다.
-“총대장님도 짐작하고 계시다시피 그건 일반적인 검의 운용이 아니었습니다. 바람을 가르는 것이 아닌, 그저 바람에 편승한 듯한 궤적. 그러한 검상을 남길 수 있는 자는 이 세계에 유일합니다.”
천하통일을 쑥대밭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엘시도어일 것이라고.
솔직하게 감탄했다.
꼼수든 뭐든 어쨌거나.
하르콘보다 높은 검술의 경지에 도달한 나였거늘.
‘……짐작하고 계시기는 하르콘. 전혀 몰랐는데.’
경험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하르콘은 남겨진 흔적만으로 엘시도어의 검격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으니. 물론, 그게 가능했던 건 하르콘이 엘시도어와 나름 친밀한 관계를 맺은 덕분이었다.
-“기분은 좀 어떤가, 엘시도어?”
하르콘은 황금 궁전에 들를 때마다 엘시도어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었으니까. 엘시도어의 짓이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납득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암, 엘시도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엘시도어는 강하다.
유낙서스와 비교할 순 없지만,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세계수의 직계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엘프였다.
노력 따윈 개나 줘버려도 타고난 재능만으로 현시점의 플레이어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의 존재란 것이다.
‘천하통일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야.’
더군다나 천하통일은 빛 좋은 개살구다.
류오쥔춘이 등골을 빨아댄 탓이지.
귀중한 전력인 고레벨 길드원조차 업신여겼던 놈이다.
그런 자식이 저레벨 길드원들을 위한 육성책을 세워놓기는 했을까? 그랬다면 미련없이 천하통일을 버리지 않았겠지. 그런 천하통일이 엘시도어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각─
그러니까.
나는 성전 연합군 회의가 끝나고 곧장 품격의 화원으로 향했다. 하도 표정을 구기고 있길래. [축복의 위계질서]를 해제했더니, 뜬금없이 중국까지 가서는 천하통일을 박살 내다니.
‘어디 이유나 좀 들어보자.’
류오쥔춘.
혹은 천하통일 소속 플레이어가 시비를 걸기라도 한 거냐?
품격의 화원에 들어선 나는 일단, 꽃부터 살폈다.
심미안이 그냥 지나치기도 섭섭했거니와.
‘자고로 칭찬은 엘프도 춤추게 하는 법이니까.’
물론, [축복의 위계질서]를 내세운다면 즉각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근데, 류오쥔춘의 독선을 실컷 비판하다 와서인가. 어딘가 좀 찝찝했단 말이지.
‘그리고.’
언제나 중요한 건 명분인 법.
자신의 업무에 소홀히 했다면 또 모를까.
엘시도어는 그동안 성실하게 화원을 돌본 듯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풍성하게 자라난 비약초들.
하이엘의 축복이 깃든 물을 공급하지 않는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생기를 잃기는커녕 언뜻 봐도 ‘영약’으로 성장한 비약초들이 몇몇 보였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착용 시,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광물과 모든 식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
[설명 :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지식이 담긴 마도구.]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약의 걸출한 효과들.
‘영약이야 다다익선이지.’
문득, 영약빨.
그 산증인의 이름이 떠오른다.
초월자, 철완의 우르스.
우르스는 유낙서스, 아젠트레스의 엘프 무리, 칠죄종 식탐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담력을 보여줬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있기에 내보일 수 있는 배짱이었겠지.
‘근데, 내가 또 섭취하기는 좀.’
하지만 우르스가 영약을 계속 섭취할 수 있던 건 순전 특이체질 덕분이었다. 나만 하더라도 영약 두 개를 동시에 섭취했다가 황천에 절반쯤 몸을 담그고 왔었잖아?
물론, 아까운 영약을 썩힐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겠지.’
성전 연합군에 영약을 배분하자.
‘나한테 필요한 몇 개만 챙겨두고.’
다시 획득할 수 없는 영약이라면 아까워서라도 나눌 수 없었겠지만. 품격의 화원을 보고 있자니 영약이 마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거든.
나는 생각을 마치고 나서야 운을 떼었다.
“잡초를 솎아낸 모양이로군, 엘시도어.”
얼마나 자리를 비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맡은 업무에는 최선을 다했구나 엘시도어.
나름대로 따뜻한 칭찬이었거늘.
카랑─!
……손에 들고 있던 모종삽은 왜 떨어트리는 건데?
그리고 왜 나를 그런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냐?
이유가 짐작이 안 됐지만, 자고로 다물고 있으면 절반은 가는 법.
과연, 침묵을 지키자 엘시도어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의 말이 옳다. 나는 중국으로 넘어가서 쓰레기, 잡초를 뽑고 돌아왔다. 멋대로 품격의 화원을 비운 행동에 관해서는 책임을 지겠다.”
아니, 누가 들으면 내가 악덕 고용주인 줄 알겠다야. 네가 칼을 들고 설칠 때야 화원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명령은 거둬들인 지 오래전이잖아?
그보다.
‘이렇게 흔쾌히 인정할 줄은 몰랐는데.’
그랑펠식 화법이 뒷걸음질치다가 쥐를 잡은 꼴이려나?
물론, 얻어걸린 기회라고 해도 헛되이 하지 않아야 하겠지.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 행동에 합당한 사유가 있으리라 믿겠다.”
“…….”
정작 이유를 묻자 길어지는 침묵.
‘설마, 재미로 그런 짓을 한 건 아닐 거 아냐?’
세상에 어떤 미친 작자가 단순 흥미로 중국까지 쳐들어가서 천하통일을 쑥대밭으로 헤집어 놓을 수 있겠어? 물론, 락키드를 그런 꼴로 만들었던 걸 보면.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떨쳐냈다.
그 시절의 엘시도어와 지금의 엘시도어는 눈에서 느껴지는 독기부터가 달랐거든. 이내, 고심하던 엘시도어가 대답했다. 그 대답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그것이 나의 긍지였으니까.”
……잠깐만, 너도 기승전긍지냐!
하여튼 전염성 한번 대단하시다, 긍지.
나는 엘시도어의 눈을 응시했다.
숲을 닮은 엘시도어의 깊은 동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대충 긍지로 떼우려고 변명한 건 아닌 듯싶었다.
그러니 나의 대답은 간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의 긍지라면 더는 묻지 않겠다.”
하여튼 그놈의 긍지!
자신의 긍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큼 타인의 긍지도 존중하시는 우리의 그랑펠 님이시다. 그것이 긍지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면 더는 물을 수 없다는 거겠지.
‘선을 넘었으면 또 몰라도 죽은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애초에 내가 화원을 들른 이유도 그 때문이거든. 이번에도 빛을 발한 건 그랑펠식 화법이었다.
“허나, 그대라면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니, 무엇을 말하는 거지?”
나는 꽃잎을 어루만졌다.
“잡초를 고른 뒤에 해야 할 일을.”
“……!”
그렇다.
엘시도어는 긍지에서 우러나온 행동으로 잡초, 천하통일을 솎아냈다. 행동의 결과는 보다시피. 류오쥔춘이 천하통일과 조국을 내던지고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 그대로 중국이 버려진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금 엘시도어를 바라봤다.
“그대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엘프의 고향, 시슬리에 비교하면 나의 화원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었지.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엘시도어.”
“…….”
엘시도어의 시선이 품격의 화원으로 향한다.
누가 봐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화원의 경치.
나는 그쯤에서 엘시도어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이러한 결실을 맺어낸 그대라면 능히 해낼 수 있을 터. 설령 주인에게 버려진 땅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라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리라 믿겠다.”
“……!”
“나의 믿음을 배신하지 말도록.”
“…….”
입을 다물라고 한 기억은 없었거늘.
엘시도어는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보답하겠습니다.”
엘시도어에게선 처음 듣는 경어였다.
[블러드 엘프, 엘시도어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
중국.
류오쥔춘이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한 순간부터.
[세뇌]는 자연스럽게 해제된 상태.
천하통일의 길드원들은 기나긴 세뇌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우린 여태까지 뭘 하고 있던 거지?”
“고생만 죽어라 하고……!!”
“빌어먹을.”
스쳐가는 그간의 기억.
군주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
모든 행동이 되려.
자신들을 좀먹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천하통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생성되는 균열을 막아야 하는 국가 수뇌부.
그들도 무력감에선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주석, 지안웨이.
“대 괴수 전투 부대의 위치는?”
류오쥔춘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후유증.
더군다나 플레이어도 아닌 일반인이기에.
두통은 여전히 극심했다.
파르르─
다리가 휘청거려 중심을 잡기도 어렵다.
그러나 지안웨이는 주석으로서.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작전실로 나섰다.
그러나 곪을 대로 곪았던 고름이었다.
쉽게 수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비보를 전하는 작전참모가 울상을 짓는다.
“모든 부대가 제로 산맥에 투입된 상태입니다.”
“뭣?”
대 괴수 전투 부대의 창설 목적은 오직 하나다.
균열이 붕괴하는 순간.
강한 화력으로 몬스터를 단시간에 처치하는 것.
한데, 그 막중한 임무를 맡은 이들이 어째서.
제로 산맥에 파병되어 있단 말인가?
그 이유보다 중요한 건 그들이 조국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복귀까진 얼마나 걸리지?”
“……최소 사흘로 예상됩니다.”
“뭐라고? 이런 사태에 사흘씩이나?!”
균열의 붕괴도는 실시간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특히 이미 붕괴도 90퍼센트를 넘어선 균열이 존재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참모가 어렵사리 말을 잇는다.
“그것도 항공모함이 온전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뭐라?”
“천하통일의 전투를. 정확하게는 사냥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대 괴수 부대는 막대한 물자를 소비하고,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로 산맥, 바다에 서식하는 몬스터에게 선미가 파괴되었다는 소식도…….”
“이런 빌어처먹을…….”
지안웨이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래, 자신에게 화를 낼 자격은 없을지도 모른다.
플레이어의 힘에 거역할 수 없었든, 뭐든.
어쨌거나 조국이 천하통일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휘둘릴 대로 휘둘리게 된 건 모두 자기 잘못이었으니까. 그러나 류오쥔춘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대를 믿었다.’
어쩌면 대격변 이후.
조국에 필요한 지도자는 그 사내가 아닐까 하고는.
그러나 류오쥔춘.
그는 십수 억의 믿음을 보란 듯이 짓밟아버렸다.
무책임하게 십수 억의 목숨을 내다 버렸다.
지안웨이는 주먹을 쥐었다.
‘……AAU.’
그들이 머지않아 대의적인 차원에서 지원군을 보내오겠지.
허나, 지안웨이는 기뻐할 수 없었다.
대가로 어마어마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건 상식이었으니까.
‘중국은 붕괴보다 더 어두운 앞날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안웨이는 마음 편하게 이를 갈 수도 없었다.
가파르게 치솟는 균열 붕괴도.
마침내 참모가 지안웨이에게 절망적인 소식을 알려왔으니까.
“베, 베이징 균열이 붕괴했습니다!!”
“……!!!”
.
.
.
중국의 모든 플레이어가 낙담에 빠져있던 건 아니었다.
극소수였다만.
천하통일에 가입하지 않은 플레이어도 존재했으니까.
“젠장.”
다만, 그 수준이 턱없이 낮을 뿐.
[무덤가의 음유시인]
[적정 레벨 : Lv.400]
[붕괴도 : 95.6%]
“크흑.”
탈출 성공.
몇몇 플레이어들이 균열 밖으로 튕겨 나오다시피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전부 극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로 도망칠 수 없었다.
‘다른 국가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겠지.’
배를 부여잡은 사내가 자조적으로 내뱉는다.
“……구경거리가 따로 없겠어, 그래?”
400레벨이면 여전히 고레벨에 속한다.
하지만 고작 400 적정 레벨 균열 하나에 국가가 존폐 위기에 처한다는 건. 더군다나 수천만의 플레이어를 보유한 중국이 그런 상황에 부닥쳤다는 건.
세상의 비웃음을 사도 싼 일이었다.
“트롤로 멸망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게 생겼잖아?”
모든 건 천하통일.
류오쥔춘.
그 새끼가 초래한 일이었다.
비효율적인 경험치 독식도 모자라 고레벨 플레이어들을 갈아버리다시피 한 녀석이었으니까. 지금의 중국에 우수한 플레이어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사내가 균열을 응시한다.
[붕괴도 : 96.9%]
[붕괴도 : 97.8%]
[붕괴도 : 99.0%]…….
“……명복을 빌겠다.”
급격하게 치솟는 붕괴도.
실패한 플레이어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짐작게 했다.
이윽고, 무너지기 시작하는 균열.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나도 뒤따라가겠어.”
철컥─
도망칠 수 없기에 비장하게 검과 방패를 치켜든 순간이었다.
붕괴한 균열에서 쏟아지는 밝은 빛.
그 눈부신 역광 가운데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
아니, 그건 사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뾰족한 귀를 가졌다.
스릉─
사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강했다.
일격.
그저 칼질 한 방.
적정 레벨 400.
붕괴 균열이 정리되는 데 걸린 수고.
-……저, 저거 엘시도어잖아?
-ㅁㅊ 저 괴물이 왜 중국에 있냐?!
-잠깐만, 저 싸이코가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데?!
블러드 엘프.
“너희들은 이제부터 꽃이다.”
“……꽃이라니? 그, 그게 무슨?”
“그런 싹수가 아니어도 그렇게 거듭나야만 한다.”
버려진 땅.
그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피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분의 명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