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58화 (358/489)

◈ 358화. 버려진 땅에도 꽃은 피는가 (1)

입방정이 아니다.

정말로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한 말이다.

그 나이에 중2병이라니.

‘진짜 너도 참 대단하다.’

류오쥔춘.

그 자식.

자기를 본좌라고 자칭할 때마다 알아봤어야 하는데……!

하여튼 또다시 개수작을 꾸미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런 난장판에 건구우우욱?!’

이래서 전적이 중요하다.

덕분에 몇 줄의 메시지만으로도 천하통일이 무엇을 노리고, ‘건국’이라는 행동을 저질렀는지 짐작할 수 있었거든. 한마디로 천하통일은 이름값을 하려는 계획이리라.

지금의 아르카나 대륙은 들끓는 용광로나 다름없었다. 재건을 시작한 제국을 필두로, 흉조에서 쏟아져나온 수많은 세력이 각자 새싹을 틔우고 있는 상황.

쉽게 비유하자면 춘추 전국 시대.

[군주] 클래스도 모자라서 [폭군]으로 상위 전직까지 마친 류오쥔춘에게 그런 아르카나 대륙이란? 정말로 바다에 풀린 물고기가 따로 없을지도 모르겠지.

‘용성락을 통해 대륙을 지켜보고 판단을 내린 거야.’

하여튼 호의를 권리로 아는 게 문제다.

내가 너희 좋으라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을 여는 게 아닌데 말이지. 물론, 정상적인 방법으로 류오쥔춘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복귀할 수 없을 거다.

보유한 접속기는 편도행 열차나 다름없을 테고, 그렇다고 마탑의 포탈을 이용하기에는. 류오쥔춘은 그랑펠의 인내심을 폭발하게 하는 몇 안 되는 인간 중 하나였으니.

‘마탑 포탈을 쓰는 꼴을 내가 두고 볼 것 같냐?’

나의 입에선 싸늘한 말이 흘러나왔다.

“모방한다고 거머쥘 수 있는 게 아니거늘.”

……잠깐만, 그랑펠.

‘넌 그쪽으로 화난 거냐?’

4가문과 다섯 백작.

확실히 비슷한 냄새가 풍기긴 했다.

무엇보다 류오쥔춘은 용성락의 눈을 통해 지켜봐서 4가문의 존재를 알고 있을 터. 하필이면 다섯 백작이라니, 내 4가문을 의식해서 넷보다 하나 더 많은 다섯으로 한 건지도 모르지.

그러나.

‘제발 이상한 경쟁심 좀 가지지 마라, 그랑펠.’

저쪽은 흑역사고, 우리는 드높은 긍지잖아?

허나, 나의 호소가 무색하게도.

악마와 다를 바 없는 류오쥔춘에게는.

더없이 가혹할 수밖에 없는 그랑펠의 긍지였으니.

“허나, 아르카나 대륙에서 설칠 생각은 하지 말거라.”

곧 처분이 떨어졌다.

“하이엘, 디엔드. 부름에 응답하라.”

“하이엘, 주군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디엔드, 주군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내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하이엘과 어둠을 휘감은 디엔드.

어째 똑같은 말투와 행동이 합이 맞는 게.

서로가 서로를 물들게 한 것 같아서 입맛이 씁쓸했지만…….

나는 충직한 오른팔과 왼팔에 명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들에게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각인시켜 줄 시간이다. 나의 허락 없이 그들이 무엇하나 거머쥘 수 없게 하거라.”

그랑펠의 긍지는 물론이요.

나, 이호열의 관점에서도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다. 성전 연합군이 아르카나 대륙에 발동 중인 버프를 통해서 강해지는 건 두 팔 벌려 환영이었지만.

‘천하통일은 엄연하게 적대 세력이니까.’

특히 류오쥔춘, 그 자식이 뭐가 예쁘다고.

내가 개고생 하면서 뿌린 버프를 누릴 수 있게 하고 싶겠어?

그런 면에서는 그랑펠과 간만에 마음이 통했다.

[저주, 어둠의 이해]를 통해서.

그랑펠의 과거를 1할쯤 알게 된 덕분인지.

뭣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만.

‘……좋아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긍지를 깨달았든, 흑역사에 물들었든.

어쨌든,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철학적인 고민에 빠져있기에는.

당장 짊어진 짐의 무게만으로도 상당히 벅찼거든.

“하이엘, 주군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디엔드가 주군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하이엘과 디엔드가 아르카나 대륙으로 복귀하고, 나는 다시금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다. 포탈에 드래곤 하트를 융합시키는 것도 어디 조상님이 공짜로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다.

『탐색, 간섭, 발현』

나는 마탑의 포탈과 드래곤 하트의 구조를 번갈아 가며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기이』]의 존재인 드래곤의 심장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건 마찬가지로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작업에 몰두하다가 문득, 읊조렸다.

“업무 집행 방해죄 또한 처분에 포함하겠다.”

……확실한 건 뒤끝 하나는 나보다 네가 더 심한 것 같다, 그랑펠.

*

천하통일의 소식을 접한 건.

오후 업무를 끝난 뒤 저녁이었다.

하이엘 혹은 디엔드가 소식을 들고 복귀한 건 아니었다.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성전 연합군 회의를 앞두고, 여느 때처럼 기이를 탐색-인터넷 서핑-하던 덕분에. 나는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속보를 누구보다 빠르게 접한 것뿐이었으니까.

[속보] 천하통일 궤멸……?

[속보] 천하통일 핵심 지부 연락 두절

[속보] 류오쥔춘 행방 묘연…… 천하통일 간부 曰,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류오쥔춘에 관해서는 노코멘트하겠다.”

그런데, 궤멸이라니?

‘앞뒤가 안 맞잖아?’

건국 메시지를 통해서 자신들의 개수작을 세상에 널리 알렸던 천하통일이다. 그에 관해서 분명 언론들이 할 말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째 기사도 댓글도 커뮤니티 게시글도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천하통일의 건국은 그랑펠의 무거운 긍지도 움직이게 할만한 대사건이었다. 특히 메시지가 떠올랐다면 플레이어 커뮤니티만큼은 뜨겁게 달아올랐어야 할 텐데…….

-ㅁㅊ 진짜 개박살이 났네

-저게 다 피라고? 근데 또 사망자는 없고???

-와씨 흉흉하네ㄷㄷㄷㄷㄷㄷ

-어쨌든 쌤통이면 추천 좀ㅋㅋㅋ

플레이어들은 천하통일의 최후에만 관심이 팔려있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지금부터 머리를 부여잡고 혼자서 고뇌했겠지.

건국과 궤멸에 어떤 개수작이 담겨있는지를 꿰뚫어보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천하통일이 종적을 감추었다.”

우리 성전 연합군에는 이런 상황에서 신뢰할 수 있는 듬직한 인물들이 넘쳐나거든. 특히 나보다도 류오쥔춘에 관해서라면 잘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있잖아?

“그대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묻겠다.”

각각 가온과 이나즈마의 길드 마스터.

남태민과 히사기.

나의 질문에 히사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시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습니다. 대격변 이전부터 류오쥔춘은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려올 정도로 철저한 사내였으니 말입니다.”

남태민이 히사기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앙숙인 둘 사이에 웬일인가 싶었는데.

그만큼 류오쥔춘이 질리는 존재라는 거겠지.

“사실 그 비열한 성격을 생각하면, 저 난장판이 된 천하통일의 자작극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얼핏 봤을 땐 습격을 받아서 류오쥔춘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거나 도망친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남태민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말을 잇는다.

“세상에 누가 저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제로 산맥이면 또 몰라도 천하통일의 안방이나 다를 거 없는 중국으로 쳐들어가서는.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천하통일을 쓸어버리다니.”

부상자들의 모습을 살핀 하르콘이 작게 읊조렸다.

“확실히 이런 경지의 검술은 흔치 않지.”

표정이 의미심장한 게…….

‘어째, 누구 짓인지 짐작이 가는 듯한 모양인데?’

나, 이호열의 심정으로는 당장에라도 하르콘에게 캐묻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르콘이 말을 아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그에 관해선 둘이 있을 때 물어보자.’

더욱이 이제부턴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애초에 류오쥔춘과 천하통일에 관한 화제?

성전 연합군 회희에서 다룰만한 안건이 아니었다. 그랑펠에게 있어서 류오쥔춘이란, 악마와 다를 바 없기에 생각할 가치도 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래, 사태의 핵심은 따로 있었다.

“시작해도 좋네.”

“네, 넵! 총대장님!”

나의 허락에 추켜 올라가는 안경.

남철민이 허겁지겁.

노트북을 열고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운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AAU 협약에 서명하지 않은 국가입니다! 천하통일이라는 초거대 길드의 힘과 적극적인 현대화기의 도입. 덕분에 여태까지 중국 내부에 생성되는 균열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해 왔습니다.”

제로 산맥에서도 본 광경.

그건 한두 번 합을 맞췄다고 가능한 연계가 아니었다.

물론, 현대 화기의 힘을 적극적으로 빌린 이상.

천하통일의 플레이어들은 온전한 경험치를 습득할 수 없었겠지.

허나.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일이었으니까.’

류오쥔춘.

녀석에게 그런 건 사소한 문제조차 되지 않았으리라.

길드원을 거악의 제물로 넘기기까지 했던 게 녀석이니까.

길드원이나 조국 플레이어의 성장을.

녀석이 조금이라도 신경 썼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곪아가던 속은 쉽게 치유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쉽게 터지고 말지.’

타다다닥─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자 홀로그램 위로 떠오르는 추정치.

“최소 2억. 앞으로 한 달간 중국에 생성되는 균열을 방치했을 때 발생하게 될 인명피해의 추정치가 2억 명입니다. 거기에 만약, 세력을 확장하는 특성을 보유한 언데드 계열 몬스터가 출현하기라도 한다면…….”

쑤욱─

그래프가 천장을 향해 치솟는다.

3억을 넘어, 4억, 5억을 향해서.

‘너희도 짐작하고 있었겠지. 결말이 이렇게 되리란 걸.’

건국 메시지를 목격했던 나다.

이 또한 놈들의 계획 일부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좋은 말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끝까지 실망스럽구나. 류오쥔춘.

나는 읊조렸다.

“머무른 자리까지 아름다워야 하거늘.”

……틀린 말은 아닌데.

하필이면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붙어있는 문구를 읊고 그러냐, 그랑펠……!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자리에 한국인이 나, 남태민, 남철민 셋밖에 없다는 거겠지.

남태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틈을 타서 나는 말을 이었다.

“비굴하고 무책임한 퇴장이로군.”

자기 입으로 자신이 본좌라고 떠들어대면서 십수 억의 인구를 버리고 무책임하게 자취를 감출 줄이야. 이쯤 되면 레이먼 션을 앞질렀다고 봐도 무방하다, 류오쥔춘.

‘졸렬하기 짝이 없어.’

여신교단 성기사 단장, 탈림.

그가 홀로그램에 떠오른 지도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지도상으로 중국은 대다수 국가들과 육로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군요. 만약, 균열이 붕괴된다면 중국뿐만 아니라 인근의 국가들도 막대한 피해를 당하겠습니다.”

이쯤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꺼내보자.

중국은 AAU 협약에 가입되지 않는 유일한 국가였다. 그걸 오히려 역으로 이용해 전 세계를 상대로 외교적인 우위를 점했었다. 물론, 말이 좋아서 외교적 우위였지.

‘사실상 배 째라는 말투였으니까.’

그랬던 중국이 천하통일의 궤멸로 무너지리란 게.

명확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AAU, 전 세계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중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망하든 말든 내 알빠임?

-그러게 누가 몬스터한테 총 쏘래?ㅋㅋㅋㅋ

-울고 보채도 사라진 경험치는 안 돌아오거든요~

-쟤들이 트롤만 안 했어도 아르카나 엔딩 봤음 ㅅㄱ

-일단 국경부터 막아야 할듯

당연한 말이지만.

일개 플레이어인 내가.

국가 사이에 얽힌 감정의 골까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중국의 행보에 많은 국가가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쯤은 안다. 제로 산맥 때만 해도 항공모함을 끌고 온 천하통일의 만행을 강력하게 규탄했던 AAU였으니까.

허나, 탈림이 말했듯 균열은 대재앙이다.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기에.

AAU는 적절한 시점에서 중국을 지원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에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하리라.

‘보상이 됐든, 뭐가 됐든 말이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현실의 정치라는 거니까.’

하지만 그랑펠이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있겠냐?

수억의 목숨이 달린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저울질 따윈 하지 않는 그랑펠의 긍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랑펠의 성질머리는.

적어도 이 자리.

성전 연합군의 일원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

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됐다.

이윽고, 새롭게 떠오르는 홀로그램.

“그에 맞춰서 중국 구원 작전을 설계해 봤습니다!”

남철민의 말에 집중하는 성전 연합군 전원.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위안이 된다.

긍지에 물든 게 나 혼자가 아닌 것 같았거든.

그때 하르콘이 문득, 입을 열었다.

“철민 군. 잠시, 설명을 보류해 줄 수 있겠는가.”

“……네? 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나를 향해서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총대장님.”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르콘?”

“이 사태의 ‘적임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적임자라고?

과연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이다.

역시, 짐작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구나?

*

품격의 화원.

엘시도어는 한가로이 꽃을 가꾸었다.

그 건방진 인간이 어떤 꽃을 심어놓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만.

이 몸의 손길이 닿아서인가?

“훗.”

내뱉는 거만한 웃음.

“이 정도면 시슬리의 꽃에도 뒤지지 않겠구나.”

그러나 엘시도어의 자화자찬은 오래가지 못했다.

엘프의 발달한 청력.

덕분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으니까.

또각─

찔리는 바가 있었거늘.

“크흠.”

엘시도어는 태연함을 연기했다. 킨베르, 쓰레기는 분명 자신들의 행적에 관해선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증거가 남지 않은 덕분이라고 했었지.

그러나 엘시도어는 누구처럼 철면피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울리는 서늘한 목소리.

몸을 돌리자 그곳엔 꽃을 어루만지는 호열이 있었다.

곧 이어지는 말에.

툭!

엘시도어는 모종삽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잡초를 솎아낸 모양이로군, 엘시도어.”

“……!”

역시, 이 사내는 모든 걸 꿰뚫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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