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56화 (356/489)

◈ 356화. 내게는 전부 보인다

장담하는데, 나는 내 명에 못 살 거다.

‘그걸 굳이 내뱉을 필요까진 없잖아!’

물론, 이것도 절차에 충실한 덕분에 내뱉은 말이겠지.

왜, 차기 탑주 후보 퀘스트.

그 내용을 보면 온순한 거인부터 그놈의 흑암룡까지.

전부 이명으로 입후보되어 있었으니까.

‘풀네임이 안 뜬 게 천만다행이긴 한데…….’

그럼에도 내가 내 입으로.

흑암룡을 자처하는 건 여전히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당연하지만 나의 철면피는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부터 쏟아질 반응을 감당하기 위해선.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게 중요했거든.

“……방금 뭐라고 그런 거야?”

무려 차기 탑주 후보의 자진 사퇴.

나의 선언에 그렇지 않아도 들썩거리던 사파이어 홀.

그 분위기가 더욱 소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이전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 사퇴라니요?!”

“벤쉬 선임님, 붙잡고 흔드셔도 전 아무것도……!!”

“그럼 대체 아는 게 뭡니까, 뱅그릿?”

“글쎄요, 벤쉬 선임님의 다음 출탑 신청서 결과요?”

“뭐, 뭐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당혹스러워도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마탑, 그중에서도 간부진이 동요하고 있단 거겠지. 거기에는 유그위드도 예외일 수 없었다.

유그위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온다.

“설마 제가 약을 올려서 노한 건가요, 이 수석?”

차기 탑주라고 부를 때, 살짝 약이 오르긴 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게 이유겠냐.

천하의 그랑펠을 아직도 몰라?

‘내가 기분대로 움직였으면 말이지.’

다른 건 몰라도 레이먼 션이랑 천하통일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걸? 성인군자가 아닌 나, 이호열의 관점에서 그놈들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멀쩡하게 살아있잖아?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냐.

그랑펠의 모든 행동에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한낱 감정 따위가 나를 움직일 순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차기 탑주 선거에 사의를……?”

“마탑의 규율에서 허점을 목격했으니까.”

“……!!!”

그래.

누누이 말했듯 그랑펠의 긍지가 동하기 위해선 그놈의 명분이란 게 더없이 중요했다.

거절하고 싶다고 거절할 수 있을 증명의 대련이 아니고, 차기 탑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마음대로 후보에서 사퇴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쯤에서 마르셀로가 물어왔다.

“이호열 수석님, 마탑을 대표하여 묻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충분히 대표할 만하지.’

조금 전, 유그위드는 원로 마법사의 직위를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러니 현시점에서 마탑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건 공동 수석인 나와 마르셀로였다.

“어떠한 허점을 목격하신 것인지 정식으로 의문을 제기하겠습니다.”

웅성웅성─

원로 마법사에 이어서 공동 수석까지.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게 지켜보는 이들 시선에선 내가 뜨거운 감자, 트러블메이커로 비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유그위드의 속내도 꿰뚫어 본 나였다.

마르셀로의 속내를 알아채지 못할 리가 있나.

‘나를 위해 판을 깔아주는구나, 마르셀로.’

그러니까 나는 당황할 수도 없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사파이어 홀을 마치 강단이라도 된 것처럼.

여유롭게 거닐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나와 유그위드의 전투를 기억하는가.”

그런 나의 의도를 파악한 모양.

사파이어 홀이 다시금 전장으로 바뀌어갔다.

그쯤에서 유그위드를 바라봤다.

“유그위드가 증명의 대련에서 발현한 마법은 최상위 마법으로, 그 위력은 크고 작은 도시를 몇 개나 증발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후폭풍이 그대들에게도 전달되었을 터.”

유그위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계획된 행동이었으니 변명하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

내게도 그런 유그위드를 비판할 의도는 없었다.

“최상위급 마법을 마탑 내부에서 발현한 행위는 그 목적을 막론하고 묵인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증명의 대련 도중이었다고 한들, 처분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유그위드가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에 관해서는 듣고 있던 마르셀로도.

사파이어 홀의 관중도 할 말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침묵 속에서.

또각─

걸음을 멈추고 손을 뻗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에겐 의문이 드는 것이 합당하다. 나는 어떻게 규율을 어기지 않고, 유그위드가 발현한 최상위 마법을 받아낼 수 있었는가.”

스릉─!

곧게 뻗은 손으로 허리춤에서 귀철을 뽑아 들었다.

객석.

그중에서도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린다.

“……미친, 그게 검술이었다고?!”

“그냥 검술이 아니라 그거잖아, 에고 소드!”

“에고 소드가 드래곤으로 변신도 가능해?!”

“이 멍청이들아, 딱 봐도 그냥 예를 드시는 거잖아.”

마지막 말이 정답이다.

‘칭찬 스티커라도 붙여주고 싶은데.’

사실 직관적인 설명을 위해선 [전설, 흑암룡 이호열]을 다시 발동하는 게 가장 간편했다. 허나, 무지막지한 효과를 가진 [전설]을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할 수 있다면 밸런스 파괴가 따로 없겠지.

[전설, ‘흑암룡 이호열’ : 5시간 50분]

쿨타임 탓.

따라서 같은 전설급인 귀철로 대신 예를 들 수밖에 없다는 뜻.

그런 피치 못할 속내가 있었거늘.

나는 태연하게도 귀철을 치켜들었다.

“그것은 내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슥─

나는 귀철을 치켜들었다.

-주인이여, 나는 오늘 마법 그 자체를 베는 것인가?

그런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라, 귀철.

‘이건 전투보다 강의에 가깝거든.’

스왁─

파괴력을 적당히 조절한 귀철이 휘둘러지자 전장에 날카로우면서도 움푹 팬 검상(劍傷)이 나타났다. 마치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울리듯 뒤늦게.

콰콰콰드득─!

굉음이 사파이어 홀을 가득 채운다.

역시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플레이어가 아닌 마탑 측에서.

“그, 그러니까……. 마법이 아닌 방법으로 유그위드 님의 최상위 마법을 압도하셨던 거잖아요? 그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지브릴 ㅇ……!”

“당신 때문에 쳐다보시잖아요. 좀 닥쳐봐요, 린느.”

“아앗…….”

내 자랑을 하려던 건 아니었거늘.

‘이놈의 자세가 문제다. 자세가.’

꼿꼿한 자세 덕분에 자화자찬처럼 보이는 감이 없지 않겠군.

그러나 이런 태도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금은 거만하다고 누구의 지적받을 자리도 아니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마탑은 더없이 폐쇄적이다. 마법으로 세워진 이 금자탑에 외부의 영향력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것이 득이었는가, 실이었는가. 나는 판단하지 않겠다. 그러나 증명의 대련, 규율에서는 명백한 허점이 존재했다.”

마르셀로가 나의 말에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규율에 따르면 증명의 대련에서 중위급 이상의 마법 발현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마법이 아닌 다른 수단과 방법에 관해선 별다른 명시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마탑은 완전한 개방을 위해.

천천히 빗장을 풀기 시작할 것이다.

마탑의 규율에 관해서 플레이어들도 차츰 알아가게 될 터.

그런 의미에서 『증명의 대련』은 위험했다.

마법사들의 프라이드를 생각하면 플레이어들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게 되는 일이 태반일 거다. 그중 불순한 의도를 가진 플레이어가 규율의 허점을 이용해 비겁한 수를 쓴다면?

‘중위급 이상 마법 발현이 금지된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쯤이야. 수단과 방법에 제약을 두지 않는다면, 플레이어들에겐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대련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사회가 말이야, 그렇게 꿈과 희망이 넘치지 않거든.’

꽃밭 그 자체.

그랑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만,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찌들어봤던 나는 알고 있었다. 마탑의 호의를 권리로, 아니 그 이상으로 보고 이용할 플레이어들?

솔직히 넘쳐날 거다.

그런 이들에게.

마탑이 쑥대밭이 되는 꼴?

“따라서 나는 수석으로서 정식으로 제안하겠다.”

마탑의 수석으로서 지켜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마탑이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규율을 세우기를.”

그 순간, 눈앞이 점멸한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마탑의 완전한 재건에 한 발짝 더 나아갔다는 메시지.

‘그나저나.’

마르셀로 낙하산으로 마탑 공동 수석이 되었을 시절.

마탑의 규율을 완전히 숙지하는 데만 하느라 며칠 동안 잠을 설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규율만 줄줄이 적힌 서적이 웬만한 전집 세트보다 방대했거든.

‘내가 언제 그걸 다시 세우고 있겠어.’

당연한 말이지만, 나한테 그런 막중하다 못해 버거운 일을 떠맡을 생각은 없었다. 여유는 더더욱 없었고. 그러니까 나는 그쯤에서 다시금 본론을 꺼냈다.

“그렇기에 도의적인 뜻에서.”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탑주의 수작을 돌아보면 알 수 있었다.

마탑의 규율을 개정하는 건 오직 탑주만이 주도할 수 있는 일. 그 말인즉슨, 마탑의 규율을 새로이 개정하는 건 차기 탑주의 역할이 된다는 뜻이었으니.

“나는 차기 탑주 후보에서 물러나겠다.”

그것이 바로 내가 도의까지 들먹이면서 탑주 후보에서 사의를 표한 이유였다……! 그래도 이럴 때만큼은 그랑펠이 엄격하디 엄격한 규율 준수 덕을 보게 되는구나.

다른 건 몰라도 규율을 대하는.

그랑펠의 성질머리만큼은 마탑도.

플레이어들도 더없이 잘 알고 있을 터.

“……근데 그게 사퇴할 정도인가?”

간혹 사태파악을 못 한 이들이 있다고 해도.

“승리를 인정했다가는 옳지 못한 방법을 써서 이긴 게 되는데, 천하의 이호열이 그걸 잘도 인정하겠다. 한 치의 부끄럼도 없이 살아온 거 보면 모르냐?”

“역시, 모든 게 모순을 보여주기 위한 대련이었던 거야!”

“하긴 서로 대련할 이유가 딱히 없긴 했지……?”

곧바로 그 의문을 거두어들였다.

철컥─

나는 그쯤에서 귀철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다시금 원상 복구되는 사파이어 홀의 풍경.

그런 내게 유그위드가 작게 속삭인다.

“정말로 이 늙은이 머리끝에 있군요, 이 수석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거 마지막 인사를 수정해야겠군요. 지금처럼 변함없이 잘 지내리라 믿습니다, 이 수석. 그대를 믿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겠지요. 더불어…….”

유그위드의 시선이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된 듯한 마르셀로를 향한다.

“순수하지만 능력만큼은 더없이 탁월한 우리의 차기 꼬마 탑주님을 잘 부탁합니다. 그대의 도움이 있다면 마르셀로는 능히 탑주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유그위드는 규율 위반으로 원로 마법사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당연히 차기 탑주 후보 자격에도 결격 사유가 생긴 것.

거기에 더불어 나는 도의적으로 후보직에서 물러났으니.

차기 탑주 후보 중 남은 선택지는 마르셀로뿐.

마르셀로가 자연스럽게 차기 탑주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꿍꿍이가 있던 나와 유그위드만 알아차린 줄 알았거늘.

누구 덕분에 곧 자리의 모두가 깨닫게 되었다.

“……잠깐만!”

별안간 객석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

“그, 그러면 차기 탑주 후보는 우리 마르셀로 수석밖에 남지 않은 거잖아?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콜로세움 도박의 신, 락키드 님의 감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하루 종일 도박 생각만 하고 있던 락키드 덕분에 말이지.

물론, 락키드의 환희에 찬 소란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가?

말했다시피.

칼 같은 규율준수주의자.

“그림자 용병단원, 락키드.”

“?!”

나의 부름에 락키드가 화들짝 자세를 고쳐앉는다.

이쯤 되면 말은 필요 없겠지?

나는 슬며시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정숙.

새로운 규율을 써내려간다고 해도.

기본적인 에티켓은 바뀌지 않을 거거든.

*

천하통일 충칭 지부.

뚜우─

사내는 기약 없이 이어지는 신호음에 혀를 찼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뭘 하고 있는 거야?”

총회의가 코앞이었거늘.

서로 말을 맞춰야 하는 톈진 지부장과 도통 연락이 되질 않았다.

처음에는 톈진이 뒤통수를 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주군을 위해 뭉친 이들이 아닌가?”

과격했을지언정.

주군을 향한 충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으니까. 만약, 진실을 고한다고 해봤자 주군께서는 밀고한 이를 더 크게 벌하시라는 걸.

천하통일의 모두는 지켜봐 왔기에 알고 있었다.

뚜우─

“그런데 어째서 받지를 않나?”

자신의 전화만 피하는 건가, 싶어 톈진 지부에도 연락을 해봤거늘.

간부부터 말단까지, 누구 하나 연락이 닿는 이가 없었다.

이래서는 마치…….

“하늘로 솟은 거냐, 땅으로 꺼진 거냐.”

둘 다 아니라면…….

“재수 없게 균열에 휘말리기라도 한 거냐?”

혹시나 싶어서 균열의 관측 소식 또한 확인했던 사내였다. 하지만 톈진에 균열이 생성되었다는 소리는 조국에서도, 업데이트 내역에서도, AAU의 예고에서도 없었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가능성.

“……습격?”

절레절레.

사방이 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천하통일이긴 하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질 않았다.

제로 산맥도 아니고 톈진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천하통일의 본진을 습격한단 말인가?

“나도 신경이 날카로워졌었나 보군.”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고.

천하통일 총회의는 정말로 오래간만이었다.

총회의에서 오가는 안건의 무게를 알고 있기에.

벌써부터 신경이 곤두선 게 분명하리라.

뚜우─

이젠 신호음이 늘어지던 순간이었다.

벌컥!

별안간 문이 열렸다.

비서가 소식을 들고 온 건가.

사내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물었다.

“톈진 지부에서 회신이 왔나?”

그런데, 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무도 없었다.

사내는 그제야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렸다.

‘……[은신]?’

저벅저벅.

그와 동시에 복도에서 질척거리는 발걸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그 기척의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태연하게 [은신]을 해제한 킨베르.

그리고.

엘시도어가 무미건조하게 내뱉는다.

“광저우에도 없고, 톈진에도 없고, 베이징에도 없다.”

“……톄, 톈진? 과, 광저우, 베이징?!”

“초신성의 다섯 별.”

협박이 아닌 단순한 말뿐이었거늘.

“오성을 어디에 숨겼지, 버러지.”

사내의 눈앞이 번쩍였다.

[상태이상, ‘공포’가 발생합니다.]

.

.

.

천하통일 광저우, 톈진, 베이징.

그리고 충칭 지부 함락.

엘시도어와 킨베르의 중국 상륙.

불과 30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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