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53화 (353/489)
  • ◈ 353화. 환영인사치고는 격하군 (1)

    현실로 복귀.

    남태민이 스마트폰을 켜서 날짜를 확인한다.

    까치발을 들고 함께 액정을 들여다보던 레오니가 흠칫한다.

    “……진짜 하루밖에 안 지났잖아?”

    처음 아르카나 대륙을 밟아본 이들의 소감?

    고작 시차에 놀라는 게 무색할 만큼.

    이루말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악을 금치 못했던 건 역시 끝을 알 수 없이 떠오르던 버프겠지. 거대 연합 세 길드 마스터와 스칼은 버프의 내역을 직접 수기로 기록해 왔다.

    “미래를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물론, 버프는 플레이어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을 지라도.

    몸으로 버프의 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아르카나인이었으니까.

    순수마력학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이 입을 열었다.

    “다들 상상도 못하고 있을 거예요. 아르카나 대륙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요. 정말 희망이 싹 트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한데, 그런 걸 저희만 보고 왔다고 생각하니까……!”

    비교적 순진한 견습 마법사들을 붙잡고 이야기해도, 거짓말하시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호들갑이 무색하게도 어째 돌아오는 대답들이 없었다.

    뱅그릿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하하. 제가 쓸데없는 말이 많았죠?”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

    오직 키코만이 뱅그릿의 반응에 애써 고개를 돌렸다.

    “으어어.”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써클.

    키코가 다 죽어가는 소리로 되물었다.

    “……죄송해요. 뱅그릿 선임님, 혹시 뭐라고 하셨나요?”

    “아, 아니요. 별말 안 했습니다.”

    “……그러세요? 으어어.”

    전설의 대장장이 월스와일의 엄청난 작업 속도.

    “결국, 이렇게 두 발로 서서 돌아왔군!”

    덕분에 하르콘은 바라는 대로.

    드워프 기술력과 마탑의 마법 제련의 정수가 담긴.

    기이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의족을 장착하게 됐건만.

    “진짜 죽을 것 같아요…….”

    정작 키코는 3일을 밤낮을 꼬박 지새우다시피 했으니. 뱅그릿의 호들갑에 장단을 맞춰줄 기운이 없는 게 당연했다. 치유마법학 선임, 벨리에 유시아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치유마법만으론 부족해. 뭔가 조금 더…….”

    아니, 키코보다도 정신이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할 일을 끝마친 키코와 다르게.

    벨리에는 여전히 악과를 삼킨 드래곤들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 중으로, 아르카나 대륙에서 필요한 연구 자료들을 잔뜩 수집해 온 상태였으니까.

    그러니 자연스럽게 뱅그릿의 시선이 옮겨간다.

    ‘그럼 마티스 선임님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흠칫했다.

    심각하기 짝이 없는 마티스 선임의 표정.

    뱅그릿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도 진입하시기 전까지는 괜찮아 보이셨는데.’

    이 수석님이 발현하신 포탈.

    포탈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 정확하게는 드워프의 아이언 캐슬 호에서 눈을 떴던 순간부터. 마티스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봐선 안 될 걸 보신 것처럼 말이지……?’

    ……절레절레.

    물론, 뱅그릿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티스 선임께도 당신만의 고민이 있으신 거겠지.

    왜, 자신에게도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긴 것처럼 말이야.

    더욱 진해진 아르카나 대륙의 마력 농도.

    뱅그릿은 마탑에서도 탁월한 마력친화력을 가졌다.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에 찾아온 마력 농도의 변화를 포착하고, 그에 관한 대비책을 세워 정기 학회에서 발표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 대륙에서 평상시처럼 마법을 발현했다가는.’

    상상 그 이상으로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을 테니까.

    “상상만으로 머리가 아프네요.”

    사실 뱅그릿은 어떤 견습, 숙련 마법사보다도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이 걱정이었다. 벤쉬가 짙어진 마력으로 화염 마법을 발현하는 상상을 하니, 저절로 관자놀이에 손이 향했다.

    “……단단히 말해둬야지, 정말.”

    물론, 모든 건.

    벤쉬 선임이 아르카나 대륙을 밟았을 때의 이야기지만.

    뱅그릿이 피식 웃으며 자신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비로소 혼자다.

    문득, 걸음을 멈춘 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말은 더없이 의미심장했다.

    “……운명을 빗겨나갈 순 없는 거였나.”

    마티스가 줄곧 침묵을 지키던 이유는 간단했다.

    아르카나 대륙을 밟는 순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깔린 방대하기 짝이 없는 적합한 마력을.

    “…….”

    마티스가 손가락의 반지를 바라본다.

    여전히 검게 물든 마도구. 그렇다, 그 방대한 적합한 마력은 틀림없이 이호열 수석님의 과거와 배경에서 비롯된 적합한 마력이었다.

    그렇기에 마티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흑화(黑化).

    결국, 이 수석님께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흑화를 경험하신 게 분명하다고.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 여파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뱅그릿의 말대로 활기가 넘치는 아르카나 대륙이었거늘. 이 수석님의 적합한 마력은 마치 밝은 빛의 그림자처럼 더욱 어둡게, 한없이 깊게, 아르카나 대륙에 내리깔려 있었다.

    ‘흑화의 순간에는 온 세상이 진정으로 한없이 깊은 어둠에 잠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터…….’

    그렇기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수석님께서는 대체 어떻게 흑화를.

    과거의 역류를 극복하실 수 있던 것일까?

    마티스가 고개를 내젓는다.

    흑마도학의 창시자의 관점으로 봐도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만, 안도할 뿐이었다.

    이 수석님이 오롯이 이 수석님일 수 있으셔서.

    흑화의 여파로 과거에 잠식되지 않으셔서.

    마티스가 호열의 집무실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수석님.”

    *

    다행이다.

    ‘역시 기이가 정답이라니까.’

    하르콘의 새로운 다리는 상상으로 잘 작동해 줬다. 희생이 불가피한 전투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내 마음이 마냥 편할 수가 없었거든.

    어쨌거나 내 빈자리를 대신하다가 두 다리를 완전히 잃었던 하르콘이었으니까. 물론, 새로운 다리를 선사한 것만으로 하르콘의 공적을 퉁칠 생각은 없었다.

    “모두 고대해도 좋다.”

    사실 시간만 충분했다면.

    나는 하르콘을 비롯한 이들에게 아르카나 대륙을.

    느긋하게 관광시켜 줄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여유가 없었지만.’

    진입이 자유로워지는 시점에서는 자연스럽게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은 물론이요. 재건 중이거나 수복 중인 제국령의 다른 지역도 둘러보게 될 터.

    그중에는 당연히…….

    “그대들에게 나의 영지는 언제나 열려있으니.”

    ……우리 광활하신 클라우디 가문의 영지도 포함되어 있지 않겠냐!

    하여튼, 클라우디 가문의 역사를 인정한 뒤부터.

    한껏 두각을 드러내는 가주의 성질머리가 문제다.

    ‘저택으로 초대해서 밥이라도 해먹일 거야, 뭐야?’

    공적을 세운 이들을 저택으로 초대하고 대접하고 말겠다는 게 영락없이 고상한 귀족같군. 그보다 이런 귀족적 사고에 점차 익숙해지는 내가 싫어진다…….

    그럼에도.

    졸졸졸─

    나는 집무실에 복귀하자마자 고상하게 찻잔을 채웠다.

    보자, 녹차가 우러나기 전까지…….

    역시, 정해진 일과를 생략할 순 없었으니까.

    나는 책상에 쌓인 업무를 살폈다.

    “하루의 공백인가.”

    고작 하루로 호들갑 떨지 마라, 그랑펠.

    막말로 주 5일제만 지켜도 주말, 이틀의 공백은 생기거늘.

    너처럼 단, 하루도 쉬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거든?

    ‘게다가 내가 어디 현실에서만 시달리냐고.’

    현실보다 시간이 네 배는 느린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크고 작은 일에 오지랖을 뻗쳐대는 나였다. 그러니까 대충 주 14일제로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그런데…….

    ‘……뭐야, 이건 또?’

    하나둘, 일상적인 서류 확인을 마친 나의 눈에 들어온 건 유달리 화려한 봉투 한 장이었다. 마탑의 수석인 나조차도 처음 보는 마탑 발신의 편지.

    ‘심지어 마력 촛농으로 봉인되어 있다라…….’

    마탑에서 수석인 내 편지를 훔쳐볼 간 큰 이는 없겠다만.

    어쨌든, 당사자가 아니면 확인할 수 없도록.

    특수한 과정을 거친 서류라는 뜻.

    나는 읊조렸다.

    “나쁘지 않군.”

    ……무슨 내용인지 확인하지도 않았으면서.

    단순히 심미적으로 합격이라고 후한 말을 내뱉지 마라, 그랑펠.

    게다가 이런 서류가 난데없이 책상 위에 놓여있는 이유를.

    나는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분명 탑주 짓이다, 이건.’

    무려 수차례.

    유낙서스의 브레스를 막아선 후유증.

    숨이 멎어가던 탑주는 내게 말했었다.

    -“다음 탑주 자리를 자네에게 맡기겠네, 이 수석.”

    탑주 나름의 유언이었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그 부탁을 거절했다.

    방금도 말했잖아?

    세상에 주 14일제로 일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고. 말 그대로 몸이 두 개라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근데, 그것도 모자라서 탑주 자리까지 떠맡으라고?!

    이 고양이가 마지막까지.

    사람을 부려 먹기로 작정했구나 싶었다.

    그래서 거절과 동시에 되돌려줬다.

    -“그대의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탑주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착각은 자유다, 고양이.’

    아마도 탑주 본인은 자신의 장례식에 참여한 나를 보고 잘 숨었다,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나는 제시를 통해서 댁의 행방을 전부 전해 들었거든.

    그러니.

    “사명에 충실한 줄 알았거늘.”

    나의 입에선 일단, 차가운 말이 나올 수밖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서류를 확인했다. 가볍게 마력을 두른 손가락으로 촛농을 매만지자 봉인이 녹아내리고 서류가 펼쳐졌다. 이윽고, 나의 입이 열린다.

    “그런가. 새로운 절차인가.”

    나의 속이 뒤집어졌다.

    ‘……진짜 이 고양이가!’

    그것은 탑주의 유언으로 수정된 마탑의 규율.

    새로운 탑주를 투표로 뽑겠다는 개정안.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하여튼 절차라면, 설령 그것이 악습이라도 일단은 지키고야 마는. 나의 성질머리를 이용한 개수작이 분명했다……!

    ──────

    1. 온순한 거인

    2. 마탑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자

    3. 흑암룡

    ──────

    입방정이 사태를 파악시켜 준다.

    “후보는 유그위드, 마르셀로, 그리고 이 몸인가.”

    누군가는 이쯤에서 묻겠지.

    자의식 과잉이 심한 거 아니냐고. 쟁쟁한 두 후보를 제치고 벌써부터 차기 탑주로 뽑힌 다음의 걱정부터 하는 건 아니냐고. 그래, 그런 거였으면 내가 흔쾌히 자의식 과잉이라고 인정하겠다.

    그런데 뒤에 따라붙은 이 추가 개정안은 아무리 봐도…….

    ──────

    투표권은 마탑에 자격을 증명한 자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다. 그것이 마법사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모험가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

    나를 차기 탑주로 뽑히게 하려고 작정한 거잖아?!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따로 있겠지.

    탑주, 그 고양이가 어떤 고양이인데.

    “개방된 마탑에 걸맞은 규율이로군.”

    폐쇄가 독이 된다는 걸 깨닫게 된 마탑은 모든 걸 개방할 계획을 세운 상태였으니까. 개방된 마탑의 차기 탑주는 새로운 방식으로 선출되어야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이 있단 것이었다.

    ‘마탑 내부 투표만으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아무리 마탑에서 관계도, 영향력을 쌓은 나라고 하더라도.

    유그위드와 마르셀로가 쌓아온 공적을 따라갈 순 없을 터.

    그러나 플레이어에게 투표권이 주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연히 날 뽑으려고 들 거 아냐!’

    마르셀로와 유그위드.

    두 사람은 대다수의 플레이어와 접점 자체가 적었으니까.

    이쯤 되면 빠트릴 수 없는 기이의 탐구, 즉 인터넷 서핑이었다.

    과연, 나의 예상은 정확했다.

    ‘이런 젠장.’

    커뮤니티는 이미 나를 향한 유세 열기로 뜨거웠다.

    -최초의 플레이어 출신 탑주 가보자!!

    -ㄹㅇㅋㅋ 신분상승 가보자고

    -뭔진 몰라도 재밌을 것 같으니까 이호열 찍는다ㅋㅋㅋㅋ

    마탑에서 자격 증명 퀘스트를 받는 것부터.

    쉽게 클리어하는 공략까지.

    아주 그냥 나를 탑주로 당선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나, 이호열.

    속에서부터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이러다가 진짜 탑주 자리를 떠맡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엄습하고 있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탑주에게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까지 뒤통수를 친다고?’

    심지어 믿었던 마르셀로마저.

    ‘내가 마르셀로 탓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이런 일이 생겼다는 건 마르셀로 또한 이 탑주의 수작에 동참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원망스러운 건.

    “과연, 타당한 절차로군.”

    그놈의 절차에 죽고 못하는 피곤한 성격이었다.

    이래서야 긍지에 익사하기 전에 과로사로 먼저 죽겠구나. 내가 타는 목이라도 축이고,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간구하려고 녹차가 담긴 찻잔을 집어 든 순간이었다.

    스스스─

    별안간 양피지에 글씨가 떠올랐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의 필체였다.

    그런데 내용이 어째 심상치 않다……?

    ──────

    이호열 수석에게.

    ──────

    단 한 줄이지만 담긴 뜻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이 수석,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 법입니다.

    ──────

    ……예?

    *

    같은 시각.

    [퀘스트 : 차기 탑주 선거]

    퀘스트를 수행 중인 플레이어들의 눈앞이 점멸한다.

    새로운 퀘스트 목표가 갱신된 것.

    그런데, 퀘스트 목표가 심상치 않았다.

    “……이, 이게 뭐야? 너한테도 떴냐?”

    “떠, 떴어!”

    “설마……. 탑주 선출 과정에서 뭔가 마찰이 있었나?!”

    ─온순한 거인과 흑암룡의 증명의 대련을 목격하라. (진행 중)

    초대형 떡밥에 세상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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