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2화. 재활용 쓰레기 (2)
모든 엘프는 그들의 수장, 아젠트레스를 따른다. 그렇다면 뒤따르는 의문이 있다. 어째서 엘시도어는 아젠트레스 일행과 떨어져 단신으로 현실에 떨어졌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엘시도어는 강했으니까.
악마로 혼란한 아르카나 대륙에서 날뛰었다고 한들.
누구도 감히 엘시도어를 앞을 가로막을 수 없었으니까.
“블러드 엘프……? 그런 엘프가 있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투를 반복한 엘시도어.
그는 아젠트레스도, 심지어는 자신도 알지 못한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엘프의 중에서도 전투적인 감각이 특화된 블러드 엘프(Blood Elf)로.
초신성들이 흠칫한다.
“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엘시도어라면……. 그 미친 엘프 새끼라고!”
“잠깐만. 그 자식이 갑자기 여길 찾아온 건데?!”
우왕좌왕도 잠시였다.
엘시도어는 자비는 물론이요, 인내심이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가 금광의 구조를 훑는다. 그 뒤에선 붉은 아우라가 흘러나온다.
“누군지 몰라도 이런 곳을 회담장으로 정하다니. 의도가 뻔하군. 깊숙한 장소에 출입구가 하나.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죽여버리겠다는 거잖아, 이건?”
엘시도어의 말에 초신성들이 동요한다.
“뭐라는 거야, 저 새끼가?”
어색한 침묵 끝, 몇몇 초신성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간다.
‘아니, 듣고 보니까…….’
마냥 개소리가 아니었다.
어째서 하필이면 유스라 왕국의 지하 금광이었을까.
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는 이 세상에 넘쳐난다. 왜, 비인기 균열만 하더라도 기껏해야 그 내부에 저레벨 플레이어 한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확실히 그쪽이 뒤처리가 편해.’
재수가 없어 마주친다?
도망치기 전에 죽여버리면 문제가 될 게 없다.
회담이 끝나고 균열을 클리어한다면 증거도 남지 않는다.
한데, 금광이라니.
이번 표적이 유스라 왕국에 머무는 하르콘이었다고 해도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킨베르가 보여준 반면교사까지.
‘정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가, 다섯 별에겐?’
그러나 이제 와서 다섯 별에게 따져 물을 여유 따윈.
나머지 초신성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횃불.
이윽고, 불빛에 드러나는 엘시도어의 모습.
“확실히 그놈보다 썩었군.”
흐읍.
엘시도어는 크게 심호흡했다가 웃었다.
“고맙다. 알량한 죄책감 따윈 느끼지 않게 해줘서.”
슥─
엘프 특유의 몸놀림으로 가속한다.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게 아니다.
마치 바람을 타고 나아가듯.
엘시도어가 부드러우면서도 쾌속으로 초신성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문답무용.
그건 사냥꾼의 움직임이었다.
호열이 악마를 대하듯.
엘시도어도 인간을 사냥감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푹!
쓰레기를 사냥감으로 대하고 있다는 게 맞는 거겠지.
“으, 으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쓰러진 열댓의 초신성들.
엘시도어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응시했다.
금광 출입구와는 반대편.
심층부로 꽁무니를 내빼는 초신성들의 뒷모습을.
차가운 목소리가 울린다.
“학습 능력이 없나 봐?”
내뱉는 대사가 묘하게 누구와 닮아있었지만.
역시나 엘시도어는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걸음을 옮길 뿐.
저벅저벅.
“사, 살려……!!”
푹!
뭔가.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야 즐거울 줄 알았거든.
‘그동안 지루한 화원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축복의 위계질서].
어머니의 축복을 거머쥔 호열에게 엘시도어는 반항할 수 없었다. 허나, 그 오만한 인간은 내게서 어떤 변화를 본 것일까. 품격의 화원에 머무르라는 명령을 거둔 상태였다.
푸욱!
덕분에 오래간만에 쥐는 검과 즐기는 살육이었다.
과거, 자신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이 순간이 더욱 즐거워야만 했다. 놈들의 비명이 즐거운 환호처럼, 피가 포도주처럼 달콤해야 했단 뜻이었다.
“크흐으으윽……!”
그런데 즐겁지 않았다.
피는 피였고.
비명은 비명에 불과했다.
엘시도어는 그제야 자각할 수 있었다.
그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이래서야 난감한데.”
화원에 쓰러진 쓰레기가 떠오른다.
허구한 날, 꽃과 식물만 바라보고 있어서 감수성이 풍부해진 걸까. 어쩌면 나 또한 그 쓰레기처럼 과오를 청산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는 거겠지.
하지만 엘시도어는 자각하고 있었다.
하르콘.
-오늘의 기분은 좀 어떤가, 엘시도어?
궁전의 시녀들.
-죄송합니다, 엘시도어 님. 그런데 어제는 접시를 말끔하게 비우셨더라고요? 다행이다. 그래도 어제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던 거군요!
그리고 이호열.
-그대도 언젠가 긍지를 깨닫는 날이 오겠지.
‘어쩌면 나는…….’
진심으로 그들과 함께 걷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내뿜는 밝은 빛 근처라면.
뒤집어쓴 핏물조차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닐까.
발목을 붙들고 있는 수많은 원혼의 무게를 잊어버린 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시도어는 착각하지 않았다.
“주제 파악을 해야지.”
그들이 찬란히 빛나는 존재였다는 걸 알게 된 만큼. 자신에게 목숨을 빼앗긴 이들 또한 찬란하게 반짝일 수 있는 존재였다는 걸. 엘시도어는 깨닫게 되었으니까.
푹!
그러니까 함께 걸을 생각은 품지 않았다.
다만, 먼발치에서 뒤쫓을 뿐.
씻어낼 수 없는 손이라고 한들 쓰임새는 있었으니까.
그래, 지금처럼.
‘하르콘, 네가 양지의 검이라면.’
나는 음지의 검이 되겠다.
이호열, 그조차도 알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고, 잔혹하고, 동시에 날카로운 검이.
저벅저벅.
엘시도어가 금광 심층부에 진입했다.
나름대로 머리를 썼나.
발을 내디디는 순간, 갖가지 함정들이 발동.
푸슈슈슉!
엘시도어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마, 말도 안 돼…….”
허나, 엘시도어는 단 하나의 역습도 허용하지 않았다.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자, 초신성들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그와 동시에 찾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초신성 중에서도 유달리 밝게 타오르는 다섯 별, 오성(五星)을.
그런데.
“……?”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초신성들의 당혹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다.
엘시도어가 입을 연다.
“꼬리를 자르고 튀었나. 뭐, 상관없지만.”
이 정도로 박살을 내놨으면 당장은 움직일 수 없을 테니.
그렇다면 남은 건 잔당처리뿐이다.
엘시도어가 초신성들을 향해 나아갔다.
누군가 엘시도어에게 물었다.
“……이, 이호열의 명령이냐?”
엘시도어는 되물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
“……!”
초신성은 입을 다물었다.
저런 엘시도어를 통제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이호열이 유일했다. 그 방법은 알 수 없으나, 엘시도어를 교정 교화한 게 바로 이호열이었으니까.
하지만.
‘이호열이 우릴 공격하라고 지시했다고……?’
믿기지 않았다.
이호열, 그가 보여준 행보를 떠올린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았으니까.
“그, 그럼 너는 어째서 우릴……?”
엘시도어가 말을 잇는다.
“너희가 눈에 띄려고 했으니까.”
“……!”
“감히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으니까.”
자신 같은 구제불능 쓰레기에게 기회를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호열, 그는 설령 자신의 목숨을 노린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놈의 긍지라는 걸 찾을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었을 것이다.
엘시도어는 웃음을 삼켰다.
‘괜히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겠지.’
세상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바라본다는 거야.
그러나 쓰레기의 속내는 쓰레기밖에 알지 못한다.
동족인 엘시도어는 장담할 수 있었다.
한번 선을 넘은 쓰레기는 언제라도 다시 선을 넘을 수 있다.
과거를 씻고 새로 태어나겠다고?
그런 새끼가 있다면 엘시도어는 그 새끼의 멱살을 잡아챌 심산이었다. 후려갈겨서 바닥에 때려눕히고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놈의 발목을 잡고 있을 과오를.
“주제 파악이 중요한 법이라고 늘 말했는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화원에 기절한 모험가, 킨베르는 마음에 들었다. 하르콘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반죽음이 되어서 황금 궁전까지 달려오고, 어쭙잖게 용서를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나쁘지 않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군.’
모험가에겐 모험가만의 시야가 있을 터.
킨베르와 함께라면.
보다 효율적으로 쓰레기들을 처리할 수 있을 듯싶었다.
엘시도어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초신성.
그중 살아남은 건 도주한 다섯 별과 킨베르 하나뿐.
성대한 별의 회담은 그렇게 끝났다.
엘시도어가 피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거사가 코앞인데, 소란은 삼가야지.”
곧 마탑의 포탈을 통해 아르카나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유낙서스의 희생으로 말이야.
엘시도어는 그 숭고한 희생에 쏟아질 관심이.
이깟 쓰레기들의 최후에 분산되는 걸 원치 않았다.
우르르콰쾅─!
그래서 금광을 무너트려 버렸다. 다른 국가나, 땅이라면 폐쇄된 금광에 피해가 막심할지 몰라도 유스라 왕국이었다. 주변에 널린 게 금광이라는 뜻.
누구도 저들의 죽음을 알지 못하리라.
“쓰레기는 쓰레기다운 최후를 맞이하도록.”
엘시도어가 금광을 등지고 걸었다.
보자, 품격의 화원에 넘실대는 생맹력이면 지금쯤이면 기절했던 킨베르도 정신을 차렸을 터. 그를 추궁……. 아니, 너그럽게 대화를 나눠봐야 했다.
일찌감치 꼬리를 자르고 내뺀 녀석들.
다섯 별.
오성.
엘시도어에게 녀석들을 살려둘 생각은 없었으니까.
*
류오쥔춘은 진정한 오성을 바라봤다.
“그동안 노고가 많았다.”
타인을 지배하고 포식하며 성장하는 클래스, [군주].
초신성은 그러한 군주의 육성법을 그대로 답습시켜 키워낸 정예들이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오성은 초신성 내부에서 두각을 드러낸 게 아니다. 오성이 있었기에 초신성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오성 중 하나, 백성륜이 고개를 숙였다.
“주군의 명을 실행하고 복귀하였습니다.”
꼬리가 길면 언젠간 그 실체가 밟히게 된다.
오성은 자신들에게 뒤따른 불필요한 꼬리를 잘라낼 생각이었다.
때문에 별의 회담에서 말도 안 되는 표적을 지목했다.
하르콘.
이호열과 성전 연합군의 역린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사자 심장의 기사를 표적으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류오쥔춘은 오성에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믿겠다. 너희라면 어련히 잘해냈겠지.”
“신뢰해 주셔서 망극합니다.”
오성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보고하지 않아도 되나.’
그러나 그들 중.
백성륜만큼은 찝찝함을 거둘 수 없었다.
별의 회담에서 열렸던 일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킨베르, 녀석은 어째서.’
그런 모순된 행동을 보였을까.
킨베르는 지금쯤 시체가 되어있을 것이다.
어찌어찌 금광을 빠져나갔다고 한들.
초신성들의 포위망을 완전히 따돌릴 순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백성륜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하지 못했다.
주군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
백성륜의 머리를 혼탁하게 하는 생각은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이내, 류오쥔춘이 오성 앞에서 선언했다.
“초신성이 하르콘을 노린다는 소식은 머지않아 세상에 만연해지겠지. 이호열, 그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바로 우리가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순간이다.”
이르면 앞으로 수 시간 내외가 될 수 있다는 말.
류오쥔춘은 전신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오성과 더불어 언제든 접속기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류오쥔춘은 차분히 그 시기라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류오쥔춘이 기다리던 때는 오지 않았다.
수 시간, 수일, 아니.
하르콘이 두 발로 멀쩡히 걷게 되는 순간까지도.
쏟아지는 속보.
-역전의 용사 하르콘, 새로운 다리 얻어……! 남태민 曰, “전장에 서는 것도 더는 무리가 아니야. 오히려 전보다 더욱 민첩해지셨다…….”
류오쥔춘이 오성에게 묻는다.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라.”
“…….”
“별의 회담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냐?”
그러나 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날의 진실은 무너진 금광과 함께 파묻히고 말았으니까.
허나, 그날의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제 발로 다가오고 있었다.
같은 시각.
품격의 화원.
“……여기까지가 내 추측이다.”
“그러니까 다섯 별이란 게 천하통일과 관련되어 있다?”
“뭐, 확신하기 위해선 증거가 필요하겠지만.”
“아니, 충분해.”
엘시도어가 고개를 젓는다.
증거라니 쓸데없는 걸 찾는군.
쓰레기들에겐 과분할 정도로 지나친 수고였다.
“설령 관련된 게 아니어도 상관없어. 천하통일 그들 또한 어차피 똑같은 쓰레기들이다. 치우는 김에 같이 치운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어?”
천하통일.
명실상부한 랭킹 1위 길드.
그들을 이토록 가볍게 여기다니.
그러나 킨베르는 가볍게 듣지 않았다.
그야 엘시도어에게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걸.
더불어 농담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킨베르도 웃었다.
“동감이다, 귀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린 놈들의 소굴, 중국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