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46화 (346/489)

◈ 346화.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2)

유낙서스.

타락한 악룡을 억누르고 있던 건 영겁의 세월 동안 짊어지고 있던 막중한 짐이었다.

모든 드래곤의 지도자. 동시에 만물의 어머니, 세계수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던 책임감이. 악의도, 드래곤으로서의 본능도 억제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만물의 왕답게 날뛰어도 좋다, 유낙서스. 그대는 내가 상대한 그 어떠한 악마, 마왕, 거악보다도 강대한 난적으로 기록될 테니까.”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부터.

어째서인가.

정말로 모든 짐을 내려놓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유낙서스는 내려놓았다.

스스로도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그저 짐을 내려놓은 것만으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노룡이 회춘하여 다시 타오를 수 있을 줄이야. 유낙서스는 순수하게 반응했다.

‘즐겁다.’

꼬리를 흔들고, 불길을 내뿜어대면서 희열을 표출했다.

속절없이 날뛰는 자신의 모습은 해츨링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그러나 유낙서스는 개의치 않고 마지막 불꽃을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불태웠다.

만물의 왕다운 위용을 드러냈다.

피시시시─…….

그랬던 극염이 천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끝인가.’

그제야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유낙서스의 눈에 들어온 건 파괴된 일대도 아니요, 붉다 못해 검게 타오르는 자신의 육체도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은빛 머리카락의 사내, 클라우디였다.

“당신이실 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무너진 내면 속 선악의 균형.

악룡이 된 유낙서스에게 이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유낙서스와 말을 섞을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무엇인가?

그에 관한 답은 클라우디가 내놓았다.

“이것은 구마의식이다, 유낙서스.”

구마의식.

사냥꾼과 사냥감.

의식 속이기에 나눌 수 있는 의식의 대화.

입으로 내뱉는 게 아니기에.

누구도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만물의 왕?

아니, 왕의 체면을 내려놓은 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저는 두려웠습니다, 클라우디시여.”

두렵다.

드래곤.

그것도 드래곤들의 우두머리격인 엘더 드래곤에게서 나약한 말이 튀어나온다. 유낙서스의 눈가엔 갓 태어난 해츨링 시절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고여있었다.

“악과를 삼킨 시점에서 언젠가 이렇게 될 날이 올 줄 알고 있었거늘. 당신께 이런 추태를 보이고 싶지도, 악룡으로서 당신께 사냥을 당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으로부터 멀리 도망친 걸지도 모릅니다.”

클라우디는 답했다.

“그대의 심정을 내가 알고 있다.”

유낙서스는 울었다.

그것은 흉포한 피어 따위가 아니었다.

유낙서스는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눈앞의 사내, 클라우디, 흑암룡께서 짊어지신 짐의 무게를.

자신의 짐과 가혹하기 짝이 없는.

클라우디가 짊어진 짐을 동일시할 순 없으리라.

그러나 비슷한 처지이기에 유낙서스는 마음을 다해 물을 수 있었다.

“……당신께선 어찌 버티실 수 있으신 겁니까?”

자신은 자신보다 막중한 짐을 짊어진 클라우디께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클라우디를 위로할 존재는 없었다.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시기에…….

클라우디는 누구의 이해도, 위로도 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한 클라우디가 답했다.

“내겐 필요치 않다.”

언제나와 같은 대답.

허나 자신에게 더는 뒤가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어서인가.

유낙서스는 감히 미소를 지었다.

불경한 생각을 품었다.

클라우디.

당신께서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저 필사적으로 인내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그러나 유낙서스는 생각을 내뱉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말했다시피 짐을 짊어져 보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인내하는 자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유낙서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당신 앞에서 저는 면목이 없습니다.”

꺼져가는 극염의 불씨.

새하얗게 태운 육체.

흐려가는 시야 속에서 영겁의 삶을 회고했다.

후회가 남지 않아서인가.

주마등 따윈 지나가지 않았다.

그 대신 뒤늦게 자각하고 말았다.

“최후까지 폐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클라우디시여. 얌전히 죽기는커녕 당신의 위로에 기다렸다는 듯. 짐을 내려놓고 해츨링처럼 날뛰기나 하다니…….”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현실.

자신의 난동에 내성이 없을 모험가들의 세계였다.

클라우디께서 자신을 막아서기 전까지 자신이 끼쳤을 피해를 고려하면……. 이대로 편히 눈을 감아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려할 것 없다.”

“……?”

“그대의 상처는 내가 남긴 것이 아니다, 유낙서스.”

“……!”

상처……?

유낙서스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되돌아보았다. 클라우디께서는 자신에게 칼도, 마법도 들이대지 않으셨다. 그렇다, 클라우디께서는 온전히 자신의 투정을 받아내 주시기만 하셨으니까.

그러나 클라우디의 말씀대로.

육체엔 선명한 상처가 남아있었다.

유낙서스는 알아차렸다.

가슴팍, 육체 곳곳에 남겨진 그을림.

“……이 마력흔은 마탑이군요. 이런, 본의 아니게 용마대전을 재현하고 말았습니다. 후후, 부끄러운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육체 뒤편에 남겨진 상처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자신의 비늘과 가죽을 뚫어내고 남겨진 건.

선명한 검상(劍傷)이었다.

유낙서스는 흡족하게 웃었다.

“또한 누구의 검격인지는 몰라도 저는 기쁩니다. 노쇠했다고 한들, 저의 육체에 상처를 남긴 이들입니다. 훗날, 클라우디께서 신뢰할 수 있는 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자비로우시게도.

당신께선 제 마지막 짐마저 덜어주셨군요.

마지막 남은 죄책감마저도 해갈되어서일까.

“소신은 이것으로 끝인 모양입니다.”

유낙서스는 서서히 멎어가는 심장.

드래곤 하트를 느꼈다.

멈추어가는 심장은 더는 뜨거운 피를 돌게 할 수 없을 터.

그런데, 어째서일까.

육신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유낙서스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

세계수.

어머니의 축복을 품고 계신 클라우디셨다.

그 따스함의 자신을 보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유낙서스. 그대는 쇠약한 노룡으로도, 흉악한 악룡으로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극염의 횃불로서 누구보다 화려하게 기록될 것이다.”

당신께서는 마지막까지도…….

말 그대로 무한한 감사를 표하고 싶었건만.

그럴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유낙서스는 말을 삼키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스스스─

지옥의 불.

녹색의 불길이 악룡을 휘감는다.

유낙서스가 알지 못하게.

지옥의 불길이 유낙서스를 집어삼켜 나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클라우디는 말했다.

“영겁의 세월 동안 고생했구나, 유낙서스.”

*

마탑은 이례적으로 출입을 전면개방했다.

그 소식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처럼.

검은 의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마탑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

앵커가 카메라 앞에서 소식을 전했다.

-“보시다시피 마탑을 향한 조문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인, 탑주가 보여준 희생정신이 우리 사회에 큰 경종을…….”

용호상박의 전설은 수정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유낙서스를 가로막았던 의문의 고양이가 흑암룡의 펫이 분명하다는 소문을, 당사자인 흑암룡이 직접 반박했기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샤이닝.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정장과 드레스를 갖춰 입은 록스, 드미트리, 카밀라가 마탑의 계단을 올랐다.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드미트리가 속삭였다.

“다들 알고 있었어? 탑주가 고양이인 줄?”

“아니, 몰랐는데.”

“근데 왜 이렇게 놀라는 기색들이 없어?!”

드미트리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아니, 겉모습을 바꾸는 마법이야 마탑의 지도자 정도 되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쳐. 그런데 내가 아는 그 마탑 마법사가 누군가를 위해서 그런 희생을 한다고?”

제로 산맥.

그 자리에서 고양이 탑주의 활약을 두 눈으로 지켜봤기에 더욱 믿기지 않았다. 오죽 믿기지 않았으면, 천하의 드미트리가 그 엄청난 고양이가 이호열의 펫이라는 소문에 더 솔깃했겠냐고.

드미트리가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젠장, 그러면 뒤에서 마탑을 잘근잘근 씹어댔던 나는 뭐가 되는 건데? 개과천선이야, 뭐야. 마음이 불편해. 차라리 조의금이라도 받으면 반성의 뜻으로 두둑하게 넣었을 텐데.”

“마탑을 씹다니, 간도 크구나?”

록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카밀라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찾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누구를 찾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찾았어, 제시는?”

“록스, 그거 무슨 의미?”

“순수하게 궁금해서야, 당장은.”

카밀라는 록스 쪽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답했다.

“……안 보여. 먼저 와있나.”

카밀라는 제시와 탑주의 관계를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드넓은 시야 덕분에 탑주를 품에 안고 있던 제시의 모습을 목격했었다. 급하게 눈물을 닦아낸 듯했던 제시의 눈가도.

이윽고 다다른 추모 공간.

“어라?”

그곳에서 샤이닝은 찾고 있던 제시가 아닌 뜻하지 않은 경쟁자들과 마주했다. 자신들과 천하통일에 더불어 트로이카로 묶이게 된 거대 연합이었다.

“……야, 비켜봐.”

상황을 알아챈 플레이어 몇몇이 길을 텄다.

덕분에 서로 얼굴을 직면하게 된 거대 연합과 천하통일.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거대 연합과 샤이닝은 같은 성전 연합군 소속이었다.

드미트리가 먼저 친근하게 입을 연다.

“어이. 꼴이 말이 아닌데, 남태민이.”

“너는 얼굴이 말이 아니다, 드미트리.”

“……주둥이 멀쩡한 거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

남태민과 드미트리.

두 근육질의 사내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남태민은 덕지덕지 감은 붕대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마탑 치유마법 서비스 효과가 워낙 좋아야지. 사실 이런 건 바로 풀어도 되는데……. 그래도 우리가 좀 고생했다는 티는 내봐야 하지 않겠어?”

“뭐야, 남태민이 이미지 관리를 위해 머리를 쓴다고……? 너, 그거 너네 브라더 아이디어지? 너랑 나는 거기까지 머리를 굴릴 수가 없는데?”

“어떻게 알았냐? 날 닮아서 감은 좋네.”

히사기와 록스도 서로 악수를 건넸다.

“부상은 괜찮아, 히사기?”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드래곤한테 달려들었으니까.”

두 사람은 나름대로 살가운 안부를 나눴지만, 서로의 눈빛엔 많은 뜻이 담겨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타인을 온전히 신뢰하는 성격이 되지 못했다.

“여, 하이.”

“레오니! 혹시 제시 봤어?”

“……걜 왜 나한테 물어? 그것보다 빨리 놔라.”

거, 쪽팔리게.

여전히 제시를 찾기 위해 정신이 팔린 카밀라는 레오니를 대충 껴안았다. 키 차이 때문에 간신히 카밀라의 품에서 벗어난 레오니가 묻는다.

“먼저 왔겠지. 아무리 그래도 마탑의 일인데.”

“그렇겠지?”

“그쪽 공주님은 얼굴 보기 참 힘드네.”

“그게 제시 매력이야.”

“아주 그냥 어련하시겠어.”

우연찮게 만났지만, 딱히 함께 걷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덕분에 드미트리는 들뜬 눈치였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 연합에겐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거든.

“그래서 소감이 어때?”

“소감? 뭔 소감?”

“너, 여기서 모른 척하면 겸손이 아니라 기만인 거 알지?”

1페이즈 2,500레벨.

2페이즈 3,500레벨에 육박했던 유낙서스.

유낙서스 레이드에 참가한 것만으로.

1~2레벨이 상승한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러한 유낙서스에게 일격을 먹였던 거대 연합의 세 사람이었다.

같은 콩고물이라고 하더라도.

콩고물의 묵직함엔 차이가 있는 게 당연했다.

무엇보다 아르카나의 랭킹 시스템을 통해 훤히 공개된 상태였다.

드미트리가 퍽─ 남태민의 옆구리를 치며 속삭인다.

“소감이 어때? 아르카나 역사상 최고의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는 데 한몫해내고. 공식 랭킹 1위, 2위. 그리고 6위까지 달성한 소감들이 말이야!”

무려 50레벨 상승.

덕분에 각각 플레이어 공식 랭킹 1위, 2위, 6위를 차지한 거대 연합의 길드 마스터들이었다. 퍽─ 남태민은 얻어맞은 옆구리를 되돌려주며 답했다.

“난 너 같은 길드원 있으면 속 터져 죽을 거다.”

“뭔 소리야, 갑자기?”

“그렇지 않냐, 록스?”

남태민, 히사기가 위로 치고 올라간 탓.

3위 류오쥔춘.

4위 스칼에 이어 랭킹 5위로 떨어진 록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가끔은 그렇지.”

더 나아가 한참 후발주자라고 생각한 레오니.

그녀가 자신의 턱밑까지 쫓아온 상황.

뒤늦게 눈치챈 드미트리가 탄식을 삼켰다.

“내가 계산에 약해서……! 미안하다, 록스.”

“하루 이틀도 아니면서 뭘.”

“그 대신 내가 확실하게 정보 수집할게.”

록스에게 상처 아닌 상처를 주고 나서도 드미트리의 궁금증은 해갈되지 않았다. 그렇다. 애초에 축하의 뜻을 전한 것도 사실은 본론을 위한 포석에 불과했으니까……!

드미트리가 은근하게 묻는다.

“그래도 압도적으로 높은 처치 기여도를 기록하신 건 명백하게 이호열 총대장님이시잖아? 그래서 묻는 건데……. 혹시 이호열 총대장님께서 어떤 전리품을 습득하셨는지 물어도 되려나? 왜,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드래곤의 전리품이ㄴ……!”

그러나 드미트리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또각─

귓가에 울리는 익숙한 구두 소리.

“진정으로 그것이 궁금한가.”

무미건조한 목소리.

……설마?

드미트리가 오들오들 떨면서 고개를 돌린 곳엔.

“내가 무엇을 습득했는지.”

“으, 으히익……!”

“궁금하느냐고 물었다.”

호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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