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45화 (345/489)

◈ 345화.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1)

눈앞이 점멸한다.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발동됩니다.]

스킬의 이름은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자. 사실 그렇다 치고 넘어갈 기분은 아니긴 하다. 보다시피 거만하기 짝이 없는 그랑펠을 관통하면서도, 내 뼈까지 때리는 스킬명이었으니까.

살랑살랑.

하지만 내가 넘어가자고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저주의 경험 덕분에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 ‘그거’잖아.

그랑펠의 치렁치렁한 장발……!

이 사태의 원흉은 분명 그랑펠의 과거 때문이리라.

[어둠의 이해 (저주) : 적합한 마력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켜 준다. 단, 적합한 마력의 원천이 되는 과거와 직면해야만 한다. - 현재 적합한 마력 친화력 : 10%]

어둠의 이해를 통해서 그랑펠의 과거를 이해한 덕분에. 이름부터 해괴망측한 스킬,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습득했고, 그 스킬의 효과로 과거의 그랑펠처럼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난 게 분명했다……!

‘미치겠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랑펠의 과거를 1할밖에 이해하지 못해서인가, 그나마 머리카락이 허리를 넘을 지경으로 자라나진 않았다. 그럼에도 어깨는 가뿐히 넘는 게 누가 봐도 헤어스타일 변화를 알아차릴 정도.

‘내가 아르카나 대륙이었으면 말이라도 안 하지.’

그런데 여긴 현실이잖아?

지켜보는 눈이 과하게 많단 말이다.

그 눈에는 웬수들의 눈도 있단 말이다.

‘아이돌 머리 따라 염색했냐고 몇 주는 놀렸는데.’

이건 최소 석 달은 정도는 시달릴 각이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상황을 받아들이자, 호열아.

모두에게 드러난 이상.

차라리 더욱더 뻔뻔해지는 게 낫다는 걸.

숱한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잖아?

‘그리고…….’

수치심을 호소할 상황이 아니기도 하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나를 맞이하는 화염 덩어리가 보인다.

극염룡(極炎龍).

남은 수명을 하얗게 태워 전력을 다하고 있는 유낙서스였다.

“그것이 그대의 최선인가, 유낙서스.”

문득, 떠오른다.

언젠가 기이를 탐구하던-인터넷 서핑- 도중.

목격했던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에 순위를 매겨놓은 자료를.

그 1위가 분명 작열통이었지.

나는 굳건하게 결의를 다졌다.

‘타죽는 것보다야 수치사가 나을 테니까.’

하지만 결심이 무색해지게도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으니.

제로 산맥의 수습을 마친 뒤.

나를 지원하러 온 성전 연합군이었다.

“……이 수석님?”

정확하게는 마르셀로.

그리고 벨리에를 포함한 마탑의 선임 마법사 몇몇이.

나의 이런 몰골을 목격하고 만 것이었다.

“이호열 수석님……. 맞으시죠?”

떨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치렁치렁거리는 머리카락을 보고 무슨 꼴인가 싶은 거겠지. 차라리 원래부터 긴 머리를 싹둑 자른 거라면,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건가, 추측이라도 할 수 있지. 이건 그 반대니까.

‘변명도 불가능하다.’

물론, 변명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이놈의 성격.

나는 언제나처럼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물러나라. 이것은 나의 싸움이다.”

어째 말투가 조금 더 건방져진 것 같냐……?

정확하게는 무게를 잡는다고 해야 하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스킬명에 걸맞은 말투다. 나는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잠깐, 성질까지 전성기로 갈 필요는 없잖아?’

나, 이호열의 수치심으로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는 그랑펠의 성질머리였거늘. 그러한 그랑펠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져서인가. 내뱉는 말투에서 미묘한 변화가 생긴 거겠지.

“그대들이 감히 나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면.”

까칠한 게 고슴도치가 따로 없다.

다행스러운 건 눈치 빠른 마르셀로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슥, 마르셀로가 고개를 숙이고는 답했다.

“본부에 따르겠습니다.”

고맙다, 마르셀로……!

마르셀로와 선임 마법사들이 물러가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스킬을 체감했으니, 그 정확한 효과와 한계를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겠지.

[천상천하 유아독존 (10%) : 불세출, 여신조차 모독하는 희대의 천재.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재능을 발휘한다.]

여신조차 모독?

진짜 설명은 한술 더 뜨네, 이거.

그보다.

‘그랑펠의 재능이라.’

여태까지도 충분히 그 재능 덕을 봐왔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남의 마법을 보자마자 따라 발현하질 않나. 그러한 마법적 재능에도 뒤지지 않는 육체적 잠재력이 있어 검기(劍氣)도 곧장 발현해 내지를 않나.

낯이 뜨거워질 정도의 재능 덕분에.

여기까지 긍지에 가라앉지 않고 발버둥 쳐온 나였으니까.

그러나 마력을 발산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이 그랑펠의 전력이 아니었다는 걸.

시야에서 비산하는 찬란한 은빛.

그건 흩날리는 머리카락 같은 게 아니었다.

비루한 나, 이호열의 육체에.

보잘것없는 플레이어의 한계에.

억압되어 있었던 위대한 가문 클라우디의 가주.

그랑펠의 전력이었다.

『그랑펠의 재능은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지이이잉─

손아귀의 귀철이 강렬하게 공명해 온다.

-나의 주인이시여. 진정으로 저를 감격게 하시는군요.

귀철을 감싸고 있던 검강이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아니, 빛을 발하는 걸 넘어서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나는 변하지 않는 사실을 떠올렸다.

검기란 생사의 갈림길에서 더욱 짙어진다는 걸.

까도 까도 끝이 없구나, 정말로.

과거를 1할밖에 들춰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 정도의 검기라니.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9할의 과거에서.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냐, 그랑펠?

.

.

.

“허억.”

판금 갑옷이 크게 들썩인다.

어깻죽지에 새겨진 라이언 하트의 상징 사자 문양.

극염룡의 열기에 문양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허어억.”

기도부터 폐까지.

극심한 화상을 입은 모양이다.

불 속에서 숨을 쉰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크윽…….”

하르콘은 필사적으로 상반신을 들어 올려 주위를 살폈다.

자신과 함께 목숨을 걸었던 모험가.

아니, 자랑스러운 제자들이 보였다.

모두의 상태가 자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런……!”

그중에서도 남태민이 크게 위독해 보였다.

바바리안의 야성은 통증을 잊게 하는 것이지, 상쇄하는 게 아니다.

드래곤의 비늘을 몇 개씩이나 뜯어낸 대가는 클 수밖에 없을 터.

꿈틀……!

하르콘은 손을 움직여 품을 뒤졌다.

위급할 때 사용할 엘릭서를 찾기 위함이었다.

엘릭서는 단 한 병뿐.

그러나 하르콘은 엘릭서를 손에 쥔 채 남태민에게 기어갔다.

질질─

말을 듣지 않는 하반신을 끌며 남태민에게 나아가던 순간이었다.

기척이 느껴졌다.

눈꺼풀을 힘겹게 뜨자 거기에 마탑의 수석, 마르셀로가 있었다.

하르콘은 말했다.

“……나보다 태민 군을.”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하르콘 경.”

마르셀로는 흘러나오는 탄식을 삼켰다.

처참하게 뭉개진 것도 모자라 끓어오르는 판금 각반이 눈에 띈다. 무릎부터 발끝까지 으스러졌으리라.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이러한 상태로 타인을 걱정하다니.

“벨리에 선임이 그를 치유할 겁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사투였으리라.

마르셀로는 치유 마법을 발현했다.

으스러진 두 다리를 제외하고 하르콘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었다.

“……!”

그래서인가, 하르콘은 목격할 수 있었다.

유낙서스와 마주한 호열을.

하르콘이 입을 열었다.

“……마르셀로 수석, 하나만 물어도 되겠는가.”

“얼마든지요.”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건 내가 알고 있는 경이 맞는 거겠지?”

누군가는 말하리라.

길어진 은빛 머리칼이 그리도 충격이었느냐고.

그러나 마르셀로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르콘이 질문을 던진 데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걸.

그건 검에 일평생을 바친 하르콘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는 변화였다.

“검강……? 아니, 저런 건 검기도, 검강도 아니야.”

검기(劍氣)의 윗 단계 검강(劍罡).

그러나 저건 검강조차 초월한 듯 보이는 무언가였다.

그 행방이 묘연했던 지난 6일간.

호열이 극한의 수련을 거듭했다고 가정해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했다.

검강이 밝게 빛나는 것.

빛나는 것도 모자라서는.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것.

두 경지엔 수십, 수백 배의 차이가 있을 테니까.

그러니 하르콘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게 정말로.

자신이 알고 있는 호열이 맞는 것이냐고.

마르셀로는 답했다.

그 대답은 어째서인가, 미묘했다.

“저 또한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

.

.

위화감을 알아차린 게 언제부터였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르카나 대륙에서부터였다.

정확하게는 클라우디께서 황혼의 마력에 관심을 보이시던 때부터.

위대한 가문, 클라우디.

그러한 클라우디 가문에서도 클라우디, 그 자체라 불리셨던 그랑펠 님이셨다. 그런 그랑펠 님께서 어찌하여 황혼의 마력 따위에 관심을 두신단 말인가?

물론, 황혼의 마력을 곧장 이해하시는 것을 보고 메어리는 감탄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클라우디의 위대함 앞에 황혼의 마력은 따위로 취급될 만큼 하찮은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보다 가까이에서.

보다 긴 시간을 지켜보며 깨닫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어도.

클라우디께서는 그 시절의 능력을. 백분 발휘하지 못하고 계신 게 확실하다고. 그런 클라우디를 감히 우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빗자루를 타고 날아왔던 메어리였다.

그런 메어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비로소 되찾으셨군요.”

그 시절, 과거의 찬란하셨던 능력을.

“…….”

제시는 그러한 메어리의 뒤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다.

마주하지 못한 일주일 사이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나신 걸까.

물끄러미, 호열을 바라보던 제시가 입을 열었다.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세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각자의 감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관점이 다를지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명백히 존재한다.

지금의 전장에도 그러한 사실이 존재했다.

지이잉─

남철민을 일깨운 건 분석관의 직업병이었다.

또 한 번의 긴급 업데이트.

──────

[긴급 업데이트]

신규 보스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극염룡(極炎龍) 유낙서스’ : Lv.3,500

──────

“……!”

악과를 삼킨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의 레벨이 2,500이었다.

그런데 페이즈가 진행되고.

무려 레벨이 추가로 1,000레벨이 상승하다니.

‘자료는 어떻게든 남고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걸 활용할 날이 올까?

드론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으면서도 이런 자료를 쓸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했다. 그야 수천 레벨이라니. 도달할 엄두가 나질 않는 경지였으니까.

그러니까 더욱더 믿을 수 없었다. 드론으로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으면서도, 음성까지 선명히 듣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그러한 괴물을 총대장님, 호열이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처음엔 생각했다.

모든 드래곤 위에 군림하는 흑암룡이시기에.

유낙서스가 전력을 다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유낙서스는 어떻게 봐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의 유낙서스는 만물의 왕이 아닌, 폭군처럼 날뛰고 있었으니까.

호열은 그러한 유낙서스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건 평범한 사냥이 아니었다.

마치…….

-“최후까지 어울려주마, 유낙서스.”

-“미지근하구나, 그게 진정한 전력인가.”

-“그대의 모든 걸 하얗게 불태우란 말이다.”

투정을 받아주는 모습 같았다. 어린 짐승처럼 날뛰는 유낙서스와 너그럽게 어울려주시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철민은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삼켰다.

“히끅.”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3,500레벨짜리 몬스터를 손바닥 안에서 놀리고 계신다는 건……. 보수적으로 생각해도 총대장님의 레벨이 최소 4,000레벨에 육박한다는 것을.

“그, 그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수치인가?”

대격변 이전, 이후에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레벨 시스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00레벨마다 레벨 업의 필요한 경험치가 크게 증가하는, 일명 통곡의 구간이 존재한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방대한 정보들.

대격변 이전, 출몰하던 몬스터들의 평균 레벨.

대격변 이후, 현실에 업데이트된 균열의 적정 레벨.

그리고 균열에 등장하던 몬스터들의 평균 레벨.

그 수치를 아무리 조합해 봐도…….

“……불가능해.”

호열의 추정 레벨, 4,000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보고 있는 지금의 광경은……?

각기 다른 관점들 사이에서.

재차 하나의 사실이 드러난다.

천천히 사그라져가는 열기.

호열이 입을 연다.

“영겁의 세월 동안 고생했구나, 유낙서스.”

만물의 왕이 쓰러졌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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