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2화. 내가 있는 세계에선 (1)
콜로세움.
제로 산맥의 지각변동은 수만 개에 달하는 전장을 만들어 냈다.
거대 연합의 분석관, 남철민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으으…….”
악과를 삼킨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거대 연합의 베이스캠프가 송두리째 박살 나 버렸다. 현시점에서 베이스캠프에 남아있는 이들은 비전투직과 일반인들밖에 없었으니, 피해는 막심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만…….
쑥대밭이 된 지금.
안전한 저지대였다는 건 더 이상 위안이 될 수 없었다.
‘무기를 들어야 해.’
철컥─
남철민은 인벤토리를 열어 방패를 장비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나뒹구는 태블릿 PC를 주워 들었다. 다행히도 작동한다. 이 정도의 지각 변동이었다면 분명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을 터.
“제발, 제발…….”
남철민은 간절하게 빌었다.
산맥에서 비행 중인 드론 중 하나라도 멀쩡하기를.
곧 입술을 깨물던 남철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살았다!”
127대 중 단 한 대.
살아남은 드론이 흙먼지가 자욱한 제로 산맥을 촬영해 송신해 오고 있었다. 남철민은 재빨리 드론에 접속, 드론을 조작했다. 가장 먼저…….
“태민이는 무사한가?”
허전한 목덜미.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충격이라 걸치고 있던 헤드셋은 어디에 떨어진 건가, 보이지 않았다. 태민이는 물론, 거대 연합 모두와의 연락 수단이 끊어진 상황.
스스스─
흙먼지가 가라앉는다.
제로 산맥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철민은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미리 말하지 않았던가?
지각 변동 탓.
제로 산맥의 풍경은 콜로세움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이게 무슨……?”
남철민이 장비를 장착한 건 순전히 교훈 덕분이었다.
제로 산맥의 역류.
얼마 전, 고지대의 몬스터가 저지대로 떠내려왔던 일이 있었다. 그 바람에 제로 산맥이 하마터면 신규 플레이어가 발을 내디딜 수 없는 지역이 되어버릴 뻔했었지.
남철민은 분석관답게 제로 산맥의 불확실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에 대비해 장비를 착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이래선 세웠던 계획들이 쓸모없어져…….”
요동치듯 솟아오른 제로 산맥이 거대한 벽이 되었다.
성전 연합군은 물론, 연합군에 소속되지 않은 플레이어들까지도 뿔뿔이 흩뿌려 놓은 것이었다. 그만으로도 전력 손실이 극심하기 짝이 없었는데.
“젠장!”
제로 산맥의 몬스터들이 섞여들었다.
고지대, 저지대 서식지를 가릴 것 없이!
플레이어와 몬스터,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심지어 드래곤 피어의 여파 때문에 몬스터들에겐 흥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남철민의 머리가 절망적인 견적을 내놓는다.
‘버티는 건 가능해.’
과거에 비해 플레이어의 수준은 크게 상승했다.
거기에 얼핏얼핏 눈에 띄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속한 그룹이라면, 어쩌면 버티는 걸 넘어서 다른 그룹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고작 제로 산맥 몹들이 아니잖아……?”
그렇다.
성전 연합군의 적은 제로 산맥의 몬스터가 아니었다.
악과를 삼킨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란 말이다.
슈우우웅─
드론을 조작해 고도를 상승시킨다. 유낙서스를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이래서는 부디 유낙서스가 무사하지 않기를 바라야만 했다.
‘브레스까지 가정할 것도 없어.’
이런 지옥 같은 난전 속에서 유낙서스가 조금이라도 날뛰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 성전 연합군, 아군에겐 걷잡을 수 없는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하리라.
“제발…….”
그러나 반복될 수 없기에 기적이란 건가?
“빌어먹을.”
유낙서스는 건재하기 짝이 없었다.
추락 때문에 오색빛을 내뿜은 백색의 겉날개는 찢어발겨진 상태.
허나, 그 어떤 광물보다 높은 강도를 자랑한다는 드래곤 스킨에는 추락으로 인한 상처 따윈 보이지 않았다. 마법 폭격으로 인한 상처조차 겉보기에는 미비할 뿐이다.
그와 반대로.
콰득!
드래곤의 발목을 붙잡았던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의 골렘은 마력 심장이 짓밟히고 부서져 특별할 것 없는 바윗덩이로 돌아가 버린 상태였다.
“!”
남철민은 다급하게 메신저를 켰다.
지금 정신에 스마트폰을 확인할 이가 누가 있겠느냐마는.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취해야만 했다.
누구 하나에게라도 소식을 전해야 했다.
-유낙서스는 멀쩡해 최대한 전력을 비축하면서 장기전으ㄹ…….
그러나 이내, 남철민의 손가락은 멈추고 말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태블릿 액정에, 드론 카메라에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엥?”
허공을 제집 안방이라도 된 것처럼 뛰어다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아무리 정보에 밝은 남철민이라고 한들. 마탑에서도 그 실체를 아는 이들이 많지 않은 고양이에 관해선 알 방법이 없었다.
“산맥의 네임드 몹인가?”
아니면 보스몹?
그래서 처음엔 제로 산맥의 몬스터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태블릿 액정 한편에서 갱신되는 커뮤니티의 반응.
남철민은 흘겨봤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저 고양이가 브레스를 막아냈다고?!”
성전 연합군에 집중한 바람에 그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믿기지 않았다.
대체 저 고양이가 뭐길래.
드래곤 브레스를 견뎌낸 것도 모자라서.
제 발로 드래곤에게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봐, 용용이 네 상대는 나다.”
“!”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에서 느꼈기 때문이었다.
“……저 빛은?”
고양이의 몸을 휘감은 빛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자리를 비우신 총대장님의 존재감을!
남철민,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재차 갱신되는 커뮤니티 반응.
-호열 님 펫이라고? 그럴싸한데……?
-악크샨 늑대급이면 할 만하지 않나?
-드래곤 브레스를 받아낸 걸 보면 충분해!
-고양이가 세상을 구한다!!!
남철민은 결단을 내렸다.
스스슥─
지워지는 메시지.
그리고 다시금 쓰이는 메시지.
-누구라도 확인한다면 지금 당장 유낙서스가 떨어진 쪽으로 달려! 고양이……. 그러니까 총대장님의 펫이 시선을 끌어주는 지금이 우리에겐 유일한 기회야!
*
마법사란 족속은 운명이나 기적 따위 믿지 않는다. 그런 게 존재했다면 자신들이 지금껏 살아있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일 테니.
마탑.
자신들이 진리를 향해 나아가던 와중.
마탑의 행보에 짓밟힌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기적은 물론이요, 운명의 여신조차 짓밟힌 이들에겐 단 한 번도 미소를 지어주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탑주도 알고 있었다.
‘꺼지기 직전, 선명히 타오르는 촛불 같은 게 아니다.’
이 순간, 자신에게서 솟구치는 힘에는 이유가 있다는 걸.
그러나 그 힘의 원천을 파헤쳐 올라가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래도 좋았다.
크롸라라라─!
동공이 검게 물들어서는.
흉포하게 날뛰는 저 노룡을 상대하기 위해선.
누가 내어준 힘이라도 감사하게 받아야 하지 않겠나.
가뜩이나 인간보다 뛰어난 고양이의 오감이 더욱 예리해진다.
드래곤 피어가 육안에 선명히 보였다.
사뿐─
탑주는 음파를 피해내고는 곧장 꼬리로 마법진을 그렸다.
평상시 같았다면 전투 도중.
마법진을 그리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거다.
마법진까지 새겨넣는 정식 발현의 위력은 주문만 외우는 발현보다 그 위력이 배는 뛰어나지만, 급박한 전장에서 그러한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 법이었으니.
그러나.
‘상호 간의 신뢰는 중요하지.’
이 수석에게서 목격하지 않았나, 모험가의 가능성을.
-“패턴입니다! 연속해서 두 번의 큰 공격을 쏟아냈으니. 저희에게도 딜링 타임이 주어진 거죠. 그게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탑주는 스칼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패턴이라고 했겠다, 큰 공격 다음에는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고 했어. 그런 탑주의 믿음은 배신당하지 않았다.
『메테오 스트라이크』
꼬리로 그린 마법진에서 유성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탑주조차도 마력을 쏟아부어야만 발현해 낼 수 있는 초고위 마법. 몸 상태가 온전치 못한 지금, 유성 서너 개가 한계로 발현한다고 해도 마력 탈진을 면치 못할 터인데.
‘몸을 휘감은 의문의 빛 덕분인가?’
탑주의 발현에는 거침이 없었다.
크르르르─
그럼에도 만물의 왕께선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영겁의 세월 동안 쌓아온 격식을 내던진 채. 타고난 야성만으로 전투에 임하는 드래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재앙이었으니까.
쩌억─!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지척까지 날아들자 유낙서스의 주둥이가 벌어진다.
콰득─!
흉악한 주둥아리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유성을 그대로 씹어버린다.
탑주가 꼬리를 흐느적거렸다.
“몸은 걸레짝이어도 이빨까지 빠지진 않은 모양이군.”
고양이의 육체를 칭찬한 게 무색해진다.
드래곤, 대체 어떻게 생긴 몸뚱이란 말이냐. 마법을 씹은 것도 모자라 해체해서 마력으로 변환. 곧바로 드래곤 브레스를 쏘아댈 준비를 하다니.
슥─
탑주가 고양이의 눈으로 제로 산맥을 살핀다.
모험가, 숙련 견습 마법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제로 산맥의 짐승들을 상대하고 있다. 브레스가 조금이라도 튀었다가는 저들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을 터.
또 한 번 받아내는 수밖에.
“참 얄궂기도 하지.”
탑주는 더 이상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평가하지 않았다.
어차피 밑바닥은 드러난 지 오래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정신력이 얼마나 버텨주느냐, 그리고 육체를 휘감은 정체 모를 빛이 언제까지 남아있느냐가 관건이었으니까.
크롸아아아아─!
탑주가 또 한 번 쏟아지는 브레스의 궤도를 비틀어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이번에는 털과 수염이 몇 가닥 그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털이 녹아내리고, 연약한 살갗이 화상으로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타다닷─!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려온 건.
만물의 왕, 드래곤이 쌓은 성채를 타고 오르는 소리.
그것도 모자라 드래곤에게 쇄도하는 이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이‘들’이 있었다.
선봉장은 탑주도 알아볼 수 있는 사내였다.
제국의 라이언 하트 기사단, 기사단장 하르콘.
생사의 갈림길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검기(劍氣). 선명하다 못해 강렬한 검강을 두른 하르콘의 검이 유낙서스의 배후를 노렸다. 이어서 그런 하르콘의 주위에서 떠오르는 세 개의 그림자들.
대검.
쌍검.
창.
하르콘과 마찬가지로 선명한 검기를 두른 3인.
남태민과 히사기.
그리고 레오니가 피투성이가 된 채.
유낙서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탑주는 웃고 말았다.
“무모하기 짝이 없군.”
초고위 마법조차 집어삼켜 자신의 마력으로 치환하는.
규격 외의 괴물이다.
그런데 그 작디작은 검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역시 뇌까지 근육 덩어리인 검사들답다며.
조소를 터트렸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탑주는 간과하지 않았다.
만물의 왕.
드래곤이 쌓아올린 성채를 뚫어내고.
이 자리까지 달려온 저들의 저력을.
그러니까 탑주 또한 유낙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건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자신의 육체가 한계에 다다른 이상.
이보다 좋은 기회가 더는 없으리라는 걸.
탑주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움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브레스를 온전히 받아낸 탓일까.
근원을 알지 못하는 힘을 빌려도 발현까지는 불가능하겠군. 어쩔 수 없나, 이빨이 없다면 잇몸으로 맞부딪히는 수밖에. 탑주는 육체에 마력을 응축시켰다.
간섭과 발현, 일체를 포기한 채.
“!”
자신이 하나의 마력 폭탄이 되기를 각오한 탑주가 내뿜는 기세는 유낙서스조차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탑주는 기대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비늘 몇 개를 떨어트리는 데 그치겠지.’
하지만 내 역할은 시선을 끄는 것이다.
탑주가 믿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유낙서스의 뒤편에서 뛰어오른 하르콘과 모험가 삼인방이었지.
아차, 그리고 한 명 더.
와이번의 위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용기사도 잊어선 안 되겠군.
“이봐. 몇 번이고 말하게 하지 마라, 용용이.”
그러니까 탑주는 꼬리를 세웠다.
털을 바짝 세우고.
처음으로 흉포하게 하악질했다.
“이것이 용마대전이란 걸 잊었나. 네 상대는 나다.”
그러한 탑주가 하찮고도 귀찮아 보였던 것인가.
슥─
유낙서스가 앞발을 들어 올려 탑주를 그대로 후려갈겼다.
콰콰콰쾅─!
만물의 왕이란 호칭은 마력적인 부분에만 한정된 호칭이 아니다. 설령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들. 날 수 없다고 한들. 육체 능력만으로 드래곤은 여전히 최강의 생물체라는 뜻이다.
쌔애애액─!
탑주가 빛의 속도로 나가떨어진다. 피를 토해내는 와중에도 눈은 감지 않는다. 저들의 검이 유낙서스의 등에 박혔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젠장 할.
‘이래서야……. 아무것도 안 보이는군.’
대신 보이는 건 길어야 십수 초 뒤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런 속도라면 평범한 바위에 부딪혀도 육체가 터져나가겠군.
쑥대밭이 된 산맥을 생각하면 뼛조각 하나라도 건질 수 있을까.
탑주는 다시금 웃었다.
‘나에 비하면 얼어 죽은 자네는 호상이었군, 세니오스.’
미련은 남았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 미련을 떠올릴 바엔.
차라리 기도라도 올리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
부디 내 죽음이 개죽음이 되지 않기를.
‘……아니, 개가 아니라 고양이 죽음인가.’
시덥지 않은 생각도 잠깐.
탑주의 눈이 감겼다.
그러한 탑주의 육체가 정말로 십수 초 뒤.
‘무언가’에 부딪혔다.
그러나.
“……?”
탑주의 육신이 터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탑주가 부딪힌 무언가는 바위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포근했다. 그렇다고 사후세계 혹은 어머니의 품속이라 하기엔……. 피부에 와 닿는 촉감이 지나치게 미끈거렸다.
그래, 마치 고급스러운 비단에 전신이 휘감긴 듯한 느낌…….
이내, 탑주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봐, 이 수석. 자네는 고양이라면 질색하지 않았나.”
털이 빠지는 걸 넘어서 피투성이가 된 고양이.
그런 고양이, 탑주를.
개의치 않고 품에 안은 이 수석.
호열이 답했다.
“그대의 말이 옳다. 나는 여전히 고양이를 싫어한다.”
그 음성이 차갑지 않았다.
“허나, 그대는 긍지 높은 범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