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화. 당신이 없는 세계선 (4)
할짝.
“적당히 태웠군. 딱 고소할 정도로.”
탑주는 그을린 털을 핥았다.
‘방금 걸로 수명의 5할은 날아갔겠어.’
마탑의 그 어떤 마법사보다 자신의 상태를 냉정히 파악할 수 있는 탑주였다. 당연하다.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는 금단의 마법을 발현하기 위해선 자신의 그릇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법이니.
‘썩 나쁘지 않은 거래였나.’
혼백 분리 마법.
탑주는 드래곤 브레스와 맞닿는 순간.
자신의 정신을 육체와 분리, 그 피해를 최소화했다. 보다시피 육체엔 피해가 남았지만, 정신과 정신에서 비롯되는 마력은 그 여파를 피해 갈 수 있었으니까.
만약, 웬만한 마법이었다면 자신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겠지. 초고위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라고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날아든 건 무려 드래곤 브레스.
탑주, 자신의 육체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걸 고려하면…….
흘려내는 데에 실패하고 그대로 사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시피.
할짝.
고작 털 몇 개가 그을리고 끝이었다.
죽을 때가 돼서 뒤늦게 마법적 성취를 이룩한 게 아니냐고? 웃기는 소리군. 방금도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마법사 중에서 흔치 않은 주제 파악을 할 줄 아는 마법사라고.
덕분에 알았다.
“이런, 몸이 걸레짝인 건 피차일반이었군. 용용이?”
나와 마찬가지로 정상이 아니구나, 드래곤.
“탑주님!!”
“다들 봤지? 저게 우리 마탑의 탑주님이시라고!”
“어, 어떻게 저런 브레스를 흘려보내신 거죠?”
선임 마법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탑주는 웃었다.
온화한 미소가 아닌 차가운 미소였다.
“하.”
저렇게 보는 눈들이 없어서야, 마탑의 미래가 심히 우려되는군. 그중에서도 어깨까지 들썩거리는 벤쉬 윌리엄 선임을 보고 있자면 조소를 넘어서 한숨이 나온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 무렵의 나보다는 낫나.’
이내, 재차 빛을 발하는 드래곤의 날개.
아니, 정확히는 날개를 대신하고 있는.
마탑의 마도구 백색의 겉날개.
그와 마주한 탑주에게 주마등처럼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숙련 마법사 시절 무렵부터. 금단의 마법을 연구하다가 마탑 원탁 회의의 공식 안건으로 회부된 것도 수십 번.
‘어쩌면 나는 시기를 잘 타고 태어났을지도.’
그 시절의 마탑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규율을 중시한다고 한들.
타인에게 진심어린 관심이 없기에 처벌 또한 가볍기 짝이 없었으니.
‘이 수석, 그대 같은 존재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마도 자신은 일찌감치 마탑에서 쫓겨나서는.
제국 마법사나 귀족이 되어 속세에 찌들어 있었을 거다.
탑주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뭐, 그런 결말도 나쁘지 않았겠군.”
쿠와와아아아─!
밀어닥치는 엄청난 압력.
어찌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저런 브레스를 쏘아댈 수 있단 말이냐.
육신이 온전치 않다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탑주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누군가는 묻겠지.
브레스야 피하면 그만 아니냐고.
단거리 텔레포트라면 가뿐하게 피할 수 있지 않으냐고.
물론,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버린다면 저 브레스와 직면하게 되는 건 누구인가?
다름 아닌 현실, 모험가들의 세계였다.
‘민폐는 이미 충분히 끼치고 있지.’
한 줄기 브레스에 수백만의 목숨과 몇 개의 도시가 파괴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그런 브레스를 감당하기 위해 탑주는 동시에 두 가지의 마법을 발현했다.
콰아아아아─!
브레스의 궤도를 미세하게 비틀어 자신에게 집중.
쿠콰콰콰쾅─!
적중하는 순간, 혼백 분리 마법을 발현.
육체와 정신을 분리했다.
물론,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혼백 분리 마법은 마력 소모가 상당하니까.
이번에도 성공.
그러나 육체에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한다.
이번엔 콧수염이 몇 가닥이나 타들어 갔다.
‘잔여 피해만으로 이런 꼴이라니.’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콧대 높은 마탑이 괜히 용마대전에서 완패를 선언한 게 아니라고. 물론, 탑주는 2차 용마대전의 승패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항복하여 끝낼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저 드래곤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조금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용용이.”
몸 상태, 그 이상으로 엘더 드래곤의 정신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모험가들의 소식에 따르자면 정확한 이름은 ‘악과를 삼킨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라고 했었나.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으나, 악과(惡果)라는 게 문제겠어.’
사실 그러한 정보가 아니더라도 이상한 낌새는 충분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죽일 듯 브레스를 쏟아냈던 유낙서스가 갑자기 몸을 비틀기 시작했으니까.
크롸라라라─!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패턴입니다! 연속해서 두 번의 큰 공격을 쏟아냈으니. 저희에게도 딜링 타임이 주어진 거죠. 그게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파닥파닥─!
방금까지 드래곤과 마주해서 그런가.
와이번의 날갯질이 상대적으로 앙증맞기 짝이 없다.
탑주의 시선이 향한 곳엔 모험가가 있었다.
기사의 갑옷.
햇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
어디로 보아도 마탑의 일원은 아닌데.
다행히 마르셀로와는 구면인 모양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스칼 경?”
“끼어든 거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마르셀로 수석님. 하지만 이호열 총대장님이 부재 중이신 지금 드래곤이 출현한 이상, 저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해라니요. 용기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조소를 흘렸겠지.
고작 모험가 나부랭이가 무엇을 안다고 떠드느냐며.
그 잘난 부활의 권능이나 발휘해 보라며.
적당한 마법을 모험가에게 쏘아댔을지도 모른다.
‘편협하기 짝이 없는 작자였군, 과거의 난.’
그러나 그러한 자신은 더는 없다.
그 편견을 깨준 이가 있지 않았던가?
역시나 그였다.
‘여러모로 고마워할 게 많군.’
이번에도 이 수석 덕분이었다.
호열에게서 아르카나인과는 다른.
모험가만의 가능성을 목격했던 탑주였으니까.
그런 탑주가 스칼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이 기회란 말인가, 모험가?”
……고양이가 드래곤 브레스를 받아낸 것도 모자라서 내게 말을 걸고 있다. 스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마르셀로가 간결하게 설명한다.
“탑주님이십니다.”
“고, 고양이가 마탑의 탑주였다니……!”
“사정상 외형을 바꾸신 탑주님이십니다.”
“아하.”
곧장 납득한 모양인가, 스칼은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날뛰는 드래곤에게 공격을 적중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알고 계시듯 원래 보스 레이드라는 건 장기전이지 않습니까?”
보스 레이드라.
완전히 다른 두 세계의 의사소통 문제로 완전히 알아들을 순 없었다. 그러나 대충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지. 탑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탑주님께서 지금처럼 드래곤 브레스를 탱킹……. 그러니까 받아내 주실 수 있으시다면 아군에겐 공격할 틈이 생깁니다. 그런 공방이 반복되고 드래곤의 체력이 적정선까지 떨어지면…….”
스칼의 동공이 이글거렸다.
“제가 드래곤 위에 올라타겠습니다!”
“……?”
탑주가 고양이 특유의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탑주님께서 오해하시겠군.
마르셀로가 부지런히 설명을 덧붙인다.
“스칼 경은 용기사입니다.”
“아하. 하긴 믿는 구석이 있으니 자신 있게 나선 거겠군.”
살랑─
꼬리가 흔들린다.
나쁘지 않았다.
그 정도 계획은 있어줘야 자신도 목숨을 걸만 하지 않겠는가?
탑주는 결론을 내렸다.
이호열 수석, 그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은.
스칼이라는 모험가가 내린 계획이 최선이겠노라고.
‘저 괴물을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할 테니.’
용기사의 운명을 거머쥔 모험가.
이 사내에게서 부디 이 수석.
그대와 비슷한 밝기의 빛을 목격하기를 바랄 수밖에.
탑주가 이윽고 명령을 내렸다.
“선임 마법사 전원은 들어라. 지금부터 결전용 마도구의 사용을 허가하겠다. 허가 대상은 용마대전의 숙적, 지금 우리들의 머리 위를 나는 드래곤이다.”
허가가 떨어짐과 동시에.
파지지지직─!
수많은 마법이 허공을 수놓는다.
빙결, 화염, 전격…….
파괴력을 담당하는 속성 마법들이 포문을 열고.
환각부터 치유 마법까지.
비전투 마법들이 속성 마법의 취약점을 보완한다.
“우리도 움직일까요?”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골렘의 마력 심장이 강렬한 빛을 내뿜는다.
우르르르─!
준비 자세를 취하듯 육중한 몸을 웅크리기도 잠시.
하늘을 향해 도약.
“저, 저게 뭐야!”
“록스. 너네 천조국……. 진짜 합체 로봇 같은 것도 만들어 뒀던 거냐? 바다에서 솟구치는 저거 뭔데? 태평양에 숨겨뒀던 거야? 역시 그 영화들 실화 기반이었구나?”
“……뭔 소리야?”
묵직한 도약은 제로 산맥의 플레이어를 경악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하르콘은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덕분에 외칠 수 있었다.
“전원 공세 준비!”
스릉─!
하르콘이 검을 빼 든다.
이런 거리에서 공격 준비라니, 곧장 이해할 순 없었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 대화를 주고받던 남태민과 스칼을 비롯. 성전 연합군 전원이 무기를 치켜든다.
하르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온다!”
하늘로 솟구쳤던 골렘.
척─!
거대한 손아귀가 드래곤의 발목을 붙잡았다.
쌔애애애애액─!
그 육중한 몸무게를 전력으로 사용해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를 제로 산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드넓은 궁수의 시야, 지켜보던 카밀라가 말을 더듬는다.
“저런 마탑에 우리 제시가 의젓한 숙련 마법사가 됐다는 거지? 역시 대단하다니까 제시는. 그래, 다 좋은데……! 저, 저런 게 여기로 떨어지면 우리들 멀쩡할 수 있는 걸까나?”
“……!!!”
드래곤에 더해진 골렘의 무게.
충격량은 핵탄두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터.
광활한 제로 산맥 입장에선 흠집 정도에 지나지 않겠지만.
문제는 그러한 제로 산맥에 넓게 포진한 플레이어였다.
카말리와 마찬가지로 샤이닝의 간부.
드미트리가 옆에서 호들갑을 떤다.
“여기 계신 마탑 마법사님들이 어떻게 해주시지 않겠어? 힘을 모아서 마법을 발현하면 막을 수 있겠지! 우리 머리 위에 정통으로 떨어질 것처럼 보이진 않으니까…….”
말꼬리를 끊는 소음.
콰카카카쾅!
골렘이 발목을 붙잡아 움직임을 봉쇄한 덕분.
선임 마법사들이 쏟아낸 마법이 유낙서스에게 적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숙련 마법사, 지브릴이 입을 열었다.
“……저런 건 막을 수 없어요.”
마탑의 호사가인 지브릴은 알고 있다.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를 둘러싼 마탑의 소문을.
한 분을 제외하면 모두가 대륙에서 명성이 자자한 명가의 핏줄. 유일한 평민 출신이신 뱅그릿 톰 선임마저도 명문가를 무색하게 만드는 타고난 마력 친화력의 소유자이시란 걸.
그러한 선임 마법사들의 전력은 통상적으로…….
“최소 저희 숙련 마법사의 열 배.”
거기에 결전용 마도구까지 고려한다면.
지금은 못해도 오십 배는 되리라.
그런데, 그러한 숙련 마법사님들의 합공조차 드래곤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비늘에 생채기를 내는 데에 그쳤다. 고작 자신들이 힘을 보탠다고 해도…….
“저희는 절대…….”
“아니요, 지브릴.”
“……?”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서는 게 아니잖아요?”
지브릴이 떨리는 고개를 들어 올리자 클레가 있었다. 평상시엔 부드럽고 유약하기 짝이 없는 클레. 그녀가 오히려 평온한 표정으로 떨리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나서야 할 때니까, 나서야만 하니까 하는 거죠.”
지브릴은 솔직한 감상을 뱉어냈다.
“……이 수석님 곁에 있으면서 물들었나요, 클레?”
“네? 갑자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아니에요.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어요.”
지브릴은 정신을 추슬렀다.
이 수석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클레의 말은 옳았다.
마탑의 마법사라면 응당 나서야 할 때가 지금이었다.
마법사란 마법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 만물의 왕만큼 자신의 능력을 여실히 발휘할 수 있는 상대도 없을 테니까.
스와아아아악─!
충돌이 임박했다.
골렘과 유낙서스의 형체가 급속도로 거대해진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려 마력 방벽을 발현했다.
히사기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장난 아닌데.”
“왜, 혼자 중얼거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차원이 다릅니다.”
클래스, 마창사.
절반은 마법사이기에 종종 마탑에도 드나들었던 히사기였다. 덕분에 마법사들과 마주치며 그들의 마법적 수준을 간접적으로 체감했다고 생각했거늘.
짐작했던 바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다.
“스킬과 마법을 차이를 감안해도 이건…….”
마력으로 방벽을 발현하는 건 마력 효율이 최악으로 치닫는 마법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규모의 마력 방벽을 발현하는 것도 모자라 유지할 수 있다니.
히사기가 레오니에게 덧붙인다.
“솔직히 따라잡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레오니는 쌍검을 거머쥐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따라잡아야지. 그래야 뭐라도 도움이 될 테니까.”
시큰둥 할 수밖에 없었다.
비효율적인 마법이라고 했냐?
자신만 하더라도 그것보다 훨씬 비효율적인 짓, 우리들의 총대장님이신 호열을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걱정을 품고도 전장에 나선 상태였으니까.
“다들 피차일반으로 노력 중 아니겠어?”
“……저거 갑자기 뭐래냐?”
“제게 친근하게 묻지 마십시오, 남태민 군.”
“얼씨구. 쌍으로 그냥.”
긴장감을 풀기 위해 대화를 나누기도 잠깐.
콰콰콰콰쾅─!
굉음과 동시에 제로 산맥에 추락한 유낙서스와 골렘.
결과만 말하자면.
마탑의 마법사들이 발현한 마력 방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콰득!
콰드득!
콰득!
충격으로 튀어 오른 무수한 암석 파편.
미사일처럼 날아드는 파편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하지만 간과하고 있던 게 문제였다.
드래곤.
설령, 온전치 않은 상태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만물의 왕이라 불리는 그 생명체를.
콰지끈─!
“?!!”
소음이 들려온 건 마력 방벽이 아니요, 모두가 발을 내디디고 있는 대지였다. 광활하기 짝이 없다던 제로 산맥이 유낙서스와 골렘의 추락으로 격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플레이어들의 시야에 점멸하는 메시지.
[악과를 삼킨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가 필드를 변형시킵니다.]
[제로 산맥이 만물의 왕을 경배합니다.]
[제로 산맥이 왕을 위한 성채를 쌓아올립니다.]
……제로 산맥이 성채를 쌓아올린다고?
의문은 찰나였다.
이윽고, 평평하던 대지가 정말로 드높은 성벽처럼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그 탓에 성전 연합군이 뿔뿔이 흩어져 고립되기 시작했다.
“들려?”
“응, 들려! 아무래도 암벽이 우릴 갈라놓은 것 같아.”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또 하나의 깨달음이 엄습한다.
그래, 광활한 제로 산맥엔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서서히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드리우는 그림자.
“!”
[문 글레이브 베어 : Lv.800]
“이런 씹……?!”
제로 산맥에 지옥도가 펼쳐진 순간이었다.
“오호라.”
유낙서스를 응시하던 탑주의 육체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건 마력이 아니었다.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탑주,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힘.
탑주가 앞발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게 회광반조라는 건가? 썩 나쁘지 않군.”
.
.
.
그러나 현실에 극적인 회광반조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나 아르카나 세계관에서 어떠한 현상이 발생했다면 분명 어떠한 원인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봐, 용용이 네 상대는 나다.”
당연하게도.
이 순간.
탑주에게 나타난 기이한 현상에도 이유는 존재했다.
드래곤 브레스를 받아낸 작디작은 짐승.
만물의 왕, 드래곤을 감히 용용이라고 부르는 고양이.
그러한 상황에서 자리를 비운 이호열.
또 하나의 착각이 세상에 퍼져 나간다.
-……저 고양이 아무리 봐도 이호열이랑 관련 있음
-넷튜버가 그러는데 저거 마탑에 상주하는 고양이라던데?!
-ㄹㅇ? 근데 호멘이 펫 같은 거 키우실 분인가?
-잠깐만, 악크샨 늑대도 있잖아!
-그리고 꼭 펫이 한 마리라는 법도 없고……?
퍼져 나간 착각은 찰나의 순간.
수십억 인구에게 수백억 번씩 회자되어 가며.
전설이 되어간다.
그러한 전설의 위력은 진위와는 관련이 없는 법.
-저 고양이가 이호열 펫이면…….
-진심 해볼만 한 거 아닌가?
-모든 드래곤이 경외하는 흑암룡의 펫인데?!
용호상박(龍虎相搏).
거품을 두른 고양이가 범이 되어.
만물의 왕에게 발톱을 드러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