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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40화 (340/489)
  • ◈ 340화. 당신이 없는 세계선 (3)

    흔들리는 검은 동공.

    사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린다.

    “……어떻게 지껄일 수 있는 거냐?”

    내가 지껄이기만 할 것 같냐.

    [천적관계]를 무시하지 마라.

    누누이 말했듯.

    아르카나에서 전투력이 대폭 상승한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크거든!

    전투력 상승이란 건 말 그대로 전투에 관련된 모든 수치가 상승한다는 의미. 생명력 재생력이 포함되어있는 건 당연하다. 거기에 [첫 세계수의 축복] 또한 난도질당한 육체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과거, ‘그날’의 상처투성이 그랑펠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 모든 걸 한마디로 함축하자면.

    결국.

    그랑펠은 무거운 긍지에 익사하지 않았다.

    나는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동공이 더욱 거칠게 흔들린다.

    천적이기에.

    그리고 천적으로서.

    수없이 많은 사냥감을 사냥해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잔뜩 공포에 질렸군.

    나의 추측을 증명하듯 메시지가 떠오른다.

    [□□□ 클라우디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주의 : 이해도가 너무 낮습니다.]

    아직도 과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건가.

    사내의 이름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사내는 더 이상 클라우디, 혈육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혈육을 끔찍하게도 사랑하는 그랑펠의 족쇄가 풀린 셈이었다.

    이쯤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냥은 실패하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녀석을 사냥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면.

    현재는 어떻게 바뀌게 되는 거지?

    나비효과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나비효과란 걸 직접 경험해 본 내가 아니겠냐. 사소한 착각, 입방정 한 번이 그야말로 전설이 되는 걸 몇 번이나 체감했거든.

    ‘글쎄다.’

    그러니 과거를 180도 뒤집어놓았을 때.

    현실이 어떻게 뒤바뀔지 예상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치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긍지 앞에 나비효과 따윈 사소하기 짝이 없다는 것.

    나는 공포에 질린 클라우디, 악마를 내버려둔 채 발을 옮겼다.

    조금 전 숨을 거둔.

    최후까지 가주의 안위를 생각하던 충직한 가신을 향해서.

    “그대의 긍지를 내가 알았다.”

    차마 감지 못한 그의 눈을 감겨주며 말했다.

    “그 숭고한 긍지를 내가 이어받으마.”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굳게 쥐고 있던 검.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석궁을 각각 손에 들었다.

    과거의 시점이기에 허리춤에 귀철은 없다.

    귀철이 비하면 누추하기 짝이 없는 무기를 사용하는 게 최선.

    하지만 충분하다.

    “……말도 안 돼.”

    공포에 질린 사냥감을 사냥하기에는.

    또각─

    또각─

    또각─

    이번에는 내가 사냥감을 향해 다가간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과 달리 사냥꾼의 입은 가볍게 나불대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긍지 높은 그랑펠 님께선 행동거지 하나를 헛되이 하지 않는다. 고작 사냥감에게 오후의 티타임과도 같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가치는 없었으니까.

    그것이 내가 사냥이 성공한다고 확신한 이유였다.

    근데.

    정말로.

    빌어먹게도.

    저주에 진입했을 때부터.

    끊임없이 점멸하던 시스템 메시지.

    그 메시지가 기어코 사고를 쳤다.

    [주의 : 이해도가 너무 낮습니다.]

    [과거가 불안정합니다.]

    [과거가 불안정합니다.]

    [과거가 불안정합니다.]…….

    젠장.

    과거가 나를 밀어내려 하는 느낌이 점차 강해진다.

    시야에 일렁거리던 노이즈가 시야를 완전히 뒤덮을 듯이 커져간다.

    마치 더 이상의 간섭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결국, 메시지가 떠오르고 만다.

    [저주, ‘어둠의 이해’가 해제됩니다.]

    이윽고 낯설지 않은 감각이 엄습했다.

    .

    .

    .

    마탑의 집무실.

    정신이 돌아온다.

    새삼스럽게 미친 짓을 했구나, 깨닫게 된다.

    ‘적정 레벨 문제가 아니었어.’

    저주.

    이거 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잖아.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삼키게 된다.

    만약, 바알 그 녀석이 휘둘렀던 검이 내게 닿았었더라면…….

    ‘내가 그랑펠의 과거에 간섭한 것처럼.’

    바알도 현실의 내게 간섭해 내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을 가능성도 충분했다는 뜻이잖아……? 심정 같아선 목숨을 건졌다고, 호들갑이라도 떨고 싶었거늘.

    한결같은 이놈의 입방정이 그럴 수 있을 리가 있겠냐.

    “두 녀석 모두 같잖은 재주를 부리는구나.”

    여기서 두 녀석?

    당연히 저주에서 놓친 바알과 클라우디 가문의 악마를 말하는 것이다. 둘 중 누가 됐든 나중에라도 조우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그땐 정말 끝장을 볼 수밖에 없을 것 같군.

    특히.

    ‘이름 모를 클라우디, 그쪽은.’

    비록 저주에서 튕겨 나왔지만.

    나름대로 본전은 건지지 않았나 싶다.

    왜, 내가 알지 못하는 그랑펠의 과거에 대해서.

    그래도 이젠 꽤 많은 걸 알게 됐잖아?

    특히 그날의 전말에 관해서도.

    그런데…….

    [어둠의 이해 (저주) : 적합한 마력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켜 준다. 단, 적합한 마력의 원천이 되는 과거와 직면해야만 한다. - 현재 적합한 마력 친화력 : 10%]

    고작 1할에 불과하다니요……!

    정말이지 진심으로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 같은 남자로구나, 그랑펠.

    저주의 위험성을 체감하게 된 지금. 다시 저주에, 그것도 그랑펠의 과거에 진입해야 한다는 소식을 달가워할 수 있을 리가 있겠냐. 하지만 이놈의 주둥이는 나의 심정과는 무관하게 지껄인다.

    “완전히 도망쳤다고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다시 진입할 수 있다는 건.

    다시 사냥할 수 있다는 것.

    아주 그냥 당장에라도 저주에 뛰어드실 기세시군.

    ‘어쩌겠냐, 이것도 전부 내 팔자인데.’

    그런 의미에선…….

    절차를 중요시하는 성격에 뜻하지 않게 감사하게 된다.

    악마가 살아있는 꼴을 지켜볼 수 없으면서도.

    고작 악마 때문에.

    절차와 일정이 틀어지는 것 또한 용납할 수 없는 모순.

    어쨌든 그 모순 덕분에.

    그나마 사람답게 숨을 돌리며 살아갈 수 있는 나였으니까.

    지금처럼 말이지.

    쿵.

    정신없는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일정.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챙겨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선발대 선출 심사 면접이 이루어질 마탑의 토파즈 홀이다.

    또각─

    그렇게 마탑의 계단을 오르는데…….

    “……어?”

    문득, 스쳐 가던 복도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총대장님……?”

    마탑에서 나의 직책은 수석이다.

    이호열 수석님, 이 수석님, 이 수석, 그리고 경까지.

    그런 나를 부르는 호칭은 크게 넷이었거늘.

    ‘날 총대장이라 불렀다는 건 외부인이라는 건데.’

    덕분에 꼿꼿한 고개를 굳이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마탑에 외부인은 그들뿐이었으니까.

    “몰라보게 상태가 호전됐군, 울프.”

    치유학파의 별실에서 요양 중이던 그림자 용병단.

    그나저나.

    상태가 좋아졌다고 해도 너무 좋아진 것 같은데?

    ‘아니, 좋아진 수준을 넘어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웬 전신무장?!

    한데 어째 의문을 품은 게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윽고, 울프의 뒤편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인기척들.

    “아니, 그러니까……!”

    “흐아암. 조금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어?”

    “하여튼 쓰러져있을 땐 조용하기라도 했지…….”

    “거, 노친네는 무리하지 말고 그냥 뒤에서어어어억?!”

    서로 잡담을 나누던 중.

    나를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림자 용병단원들.

    그중에서도 유달리 기겁하는 락키드가 보인다.

    나는 머지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울프가 정중히 물어왔으니까.

    “이제 완전히 복귀하신 건가요, 총대장님?”

    ……완전히 복귀했냐고?

    저주에 진입하는 바람에 잠깐 질풍노도의 감성에 휘둘리긴 했다만. 내가 무슨 가출 청소년처럼 마탑 밖으로 뛰쳐나간 것도 아니었거늘.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던 차.

    나는 이질감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까?’

    마탑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기억을 되돌아보니, 또각거리며 마탑의 계단을 오르던 도중. 마주친 게 그림자 용병단밖에 없었다. 선발대 선출 면접으로 평소보다 붐벼야 할 마탑이 오히려 텅텅 비어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흠칫해서 스마트폰을 확인, 경악했다.

    ……뭐냐, 뭘 했다고 벌써 6일이나 지났어?!

    *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남긴 용마대전(龍魔大戰)의 교훈은 명확했다. 설령 마탑조차도 불멸의 존재, 드래곤과는 맞설 수 없다는 것…….』

    삶이란, 참 얄궂기 짝이 없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는 쓴웃음을 흘렸다.

    “용마대전의 악연이 크리스탈 홀에 발을 들인 게 불과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말이죠. 한 치 앞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으면서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진리를 쫓겠다고 나불거렸었다니. 새삼스럽게 마탑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탑주님.”

    쿵.

    쿵.

    쿵.

    온순한 거인, 유그위드.

    쏴아아아─

    그녀가 발현한 가이아 골렘이 두 다리로 태평양을 가르며 나아간다. 그런 유그위드의 어깨 위엔 고양이, 탑주가 균형을 잡고 올라타 있었다.

    탑주가 답하지 않자 유그위드는 재차 물었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탑주님?”

    유그위드만큼은 알고 있었다.

    탑주께선 절대 게으른 존재가 아니시다.

    더욱이 자신의 직책을 망각하고 누군가에게 떠넘길 이는 더더욱 아니다. 그래, 지금의 탑주가 지나칠 정도로 하품을 내뱉고 시도 때도 없이 쓰러져서 잠을 청할 수밖에 없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탑주는 그제야 답했다.

    “그래도 참아온 보람이 있군, 유그위드.”

    삶에 미련은 없었다.

    단지 보고 싶었을 뿐.

    제시, 네가 어엿한 마법사로 성장한 모습을.

    그래서 욕심을 냈다.

    본의 아니게 이호열 수석과 마르셀로 꼬마 수석.

    유그위드, 자네에게 폐를 끼치면서까지 말이야.

    “선대 탑주들이 부러워하지 않겠나?”

    그러나 탑주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한부의 삶은 제시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라고 허락된 게 아니었다는 걸. 탑주의 삶은 오직 마탑을 위해 바쳐야만 하는 법일 테니까.

    탑주가 꼬리를 바짝 세웠다.

    “드래곤 브레스로 화장이라, 이보다 성대한 장례는 없을 테니.”

    인간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

    육신의 부상과 무관하게.

    주어진 수명이 다해서 눈을 감을 날이 온 것뿐이리라.

    슥─

    유그위드가 손을 들어 탑주의 등을 쓰다듬었다.

    “무엄하군, 유그위드.”

    “그동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봐, 유그위드. 자네는 내게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고 있군. 하기야 과거의 마탑도 버텨내지 못한 드래곤을 지금의 마탑이. 심지어 이런 꼴의 내가 막아낼 재간은 없을지도 모르겠지.”

    탑주는 제로 산맥을 내려다보았다.

    견습, 숙련 마법사들이 모험가 사이에 섞여 상공을 응시한다. 시선을 옮겨 골렘의 곁을 부유하는 마르셀로 수석과 선임 마법사들을 바라본다.

    마법부여학파 선임, 키코 아르민이 말한다.

    “빛나는 드래곤의 날개……. 저건 백색(百色)의 겉날개입니다. 마탑에서 오직 이호열 수석님만이 자유자재로 사용하셨던 그 백색의 겉날개가 확실해요!”

    뱅그릿과 벤쉬가 중얼거린다.

    “……이호열 수석님이 대여하신 마도구가 어째서 드래곤에게 있는 겁니까? 뱅그릿 선임, 혹시 알고 있어요?”

    “이 수석님께선 마탑의 수석이자 드래곤들에게도 흑암룡이라 추앙을 받으시잖아요. 틀림없이 저희는 알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거겠지요.”

    “이런.”

    전원 출탑.

    이호열 수석을 제외하고 마탑의 모든 마법사가 출탑했건만. 고작, 한 사람의 빈자리가 이렇게도 클 줄이야. 탑주가 새삼스럽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키코는 말을 잇고 있었다.

    “몇몇 분께서도 아시다시피 백색의 겉날개는 사용자에 따라서 그 위력이 명확하게 갈리게 됩니다. 성능을 온전히 이끌어낼 능력만 충분하다면, 단번에 일백 개의 마법을 쏟아낼 수 있죠……!”

    키코가 우려하는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저는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용마대전에 따르면 한 숨결의 브레스로 수백 개의 마법을 집어삼켰다던 게 드래곤인데……. 만약, 일백 개의 브레스를 백색의 겉날개로 단숨에 뿜어내기라도 한다면……!”

    탑주는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마탑이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질문에 관한 답은 감히 자신이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

    순전 저 드래곤의 출제 난이도에 달린 것이지.

    그리고 이내.

    유낙서스가 비행을 멈췄다.

    마탑을, 성전 연합군을, 세계를 향해 울부짖었다.

    만물의 왕으로서 선포하듯.

    드래곤 피어를 내질렀다.

    “……!!!”

    모두가 깨닫게 되었다.

    [만물의 왕이 포효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상태이상이 발생합니다.]

    [생명력과 마력 재생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전투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십수 마리의 드래곤이 흑암룡을 부르짖던 그날.

    저들이 내뱉던 건 드래곤 피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날,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오직 단 한 사람.

    이호열, 그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저런 걸 우리가 어떻게?”

    그가 없는 현실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아르카나 대륙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윽고, 유낙서스의 백색의 겉날개가 빛을 발한다.

    날개에서 홍염이 이글거렸다.

    드래곤 브레스가 세계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절망적인 메시지가 점멸했다.

    [주의 : 브레스에 닿는 순간, 즉사합니다.]

    “다, 다, 다들 피해!!!”

    그때였다.

    폴짝!

    한 마리의 고양이가 하늘로 솟구쳐오른 것은.

    고양이가 작은 몸으로 브레스를 받아낸다.

    그것이 바로 2차 용마대전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그와 동시에.

    훗날.

    “이런, 몸이 걸레짝인 건 피차일반이었군. 용용이?”

    용호상박이라 기록될 전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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