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화. 당신이 없는 세계선 (2)
각오했던 그 이상이다.
[주의 : 이해도가 너무 낮습니다.]
그랑펠의 깊고 어둡기 짝이 없는 과거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럽거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떠오른 주의 메시지 때문이겠지. 증거로 [저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진입했을 때와 느낌이 다르다.
‘무슨 이해도가 부족하단 거야?’
단순히 적합한 마력 친화력이 0퍼센트라서 부족하다는 건가……?
머리를 굴려봐도 한 줄의 메시지로는 의도를 파악하기 역부족.
바로 납득할 수가 없다.
하지만.
[첫 세계수의 축복이 ‘주의’를 거절합니다.]
[주의 : 이해도가 너무 낮습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주의’를 거절합니다.]…….
세계수의 내리사랑 덕분.
나는 억지로라도 눈을 뜰 수 있었다.
마치 주파수가 맞지 않는 채널을 튼 것처럼.
시야엔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잔뜩 끼어있다.
그것도 모자라 보이는 시점마저 낯설다.
‘……걸리적거리는데.’
특히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어색하군.
나는 곧장 눈치로 때려 맞췄다.
어둠의 이해, 효과에 따르면 과거와 직면해야 한다고 했겠다.
‘혹시 그랑펠의 과거 시점인 건가?’
나는 그랑펠의 설정을 떠올려봤다.
『길게 늘어진 은발 머리, 수려한 외모가 특징이며 평상시 언행에는 그 신분의 고귀함이 느껴지는 말투를 사용한다.』
아아, 이게 바로 그 길게 늘어진 은발 머리라는 거구만. 이런 걸 멋있다고 생각하다니. 그 시절의 내가 괜히 악마 사냥꾼의 치렁치렁한 복장을 좋아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드는군.
그런데.
[과거가 불안정합니다.]
아까부터 떠오르는.
과거가 불안정하다는 건 또 뭐냐.
역시나 추측해 보는 게 최선이겠지.
불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해 보자.
지직거리는 시야.
맞지 않는 주파수.
그래 이건 마치…….
그랑펠의 과거가.
나를 밀어내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다.
‘뭐, 흑화랑은 상황이 다르니까.’
그랑펠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고 해도.
그랑펠에게 내 목소리가 전해질지는 알 수 없다.
근데, 나는 어른으로서 이 한마디만큼은 꼭 해야겠다.
제발 또 혼자서 짊어질 생각은 하지 말아줄래?
‘어쩌면 내 지분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과오엔 책임을 져야 하는 법.
그게 바로 나, 이호열이 생각하는 어른의 긍지였으니까.
그런 나의 생각이 그랑펠에게 닿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항상의 자세 때문에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러나 확실한 건.
‘……뭐야, 저거?’
이해력이 부족하다.
메시지 그대로.
나는 어쩌면 그랑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게.
거칠게 요동치는 시야 속에서 나는 목격했으니까.
은발.
클라우디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의 뒷모습과.
나로서는.
뒷모습만으로는.
정체를 특정할 수 없는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증오한다, 그랑펠.”
위대한 가문, 클라우디의 멸문.
내가 적어넣은 설정에 관해서는 플레이어로 각성한 뒤 수도 없이 생각해 왔다. 특히 클라우디의 흔적을 하나둘 발견하게 되면서 그 의문은 더욱 커져갔다.
클라우디는 대체 어떻게 멸문한 거지?
행적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저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드래곤과 엘프를 비롯한 아르카나 대륙의 터줏대감들에게 클라우디의 위대함은 여전했다.
각자가 제국, 그 이상의 전력을 보유한 4가문조차도 클라우디의 이름 앞에선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렇기에 내가.
내 손으로 적어놓고도,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궁금했었다.
멸문할래야 할 수 없을 것 같은.
클라우디 가문의 멸문은 대체 어떻게 실현된 걸까, 하고는.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런 막장……!!’
그래.
막장 드라마에서 개연성을 해결하는 건 언제나 출생의 비밀, 혈육과 얽힌 이야기였지! 클라우디의 적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었다.
클라우디의 멸문은 내부,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내 생각에 화답하듯 사내가 말을 잇는다.
“어린 시절, 내 손을 붙잡고 나를 바라보던 네 눈빛이 떠오르는구나. 그때도 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오만한 눈빛으로 말이다.”
최강희 여사와 누나들이 함께 시청하던 막장 드라마를 어깨너머로 엿봤던 눈썰미를 발휘해 보자. 누군지는 몰라도 방금 대사로 하나는 알 수 있겠군.
‘일단, 그랑펠보다 연장자야.’
덕분에 증오에 담긴 사정까지 예상됐다.
“그랬다. 그건 바로 가주의 눈빛이었어. 나는 가질 수 없는.”
역시 그거였구나.
『그랑펠이 불과 7세의 나이에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저 사내는.
일곱 살짜리 꼬맹이에게 가주의 자리를 빼앗긴 걸.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정을 이해해 보려고 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얄미울 정도로 잘났거든, 그랑펠은.
격한 반응을 보면 가주 자리에 적잖이 진심이었나 보군.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어른이 꼬맹이한테 폭언은 너무하지 않냐?
저벅─
사내는 걸음을 옮기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빌어먹을 클라우디의 가주시여. 부디 클라우디 가문을 최후까지 지켜내시길 바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다시금 찾아뵐 날까지 말이지요.”
그 비아냥이 담긴 존대를 끝으로.
지지지지직─!
시야가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거가 불안정합니다.]
메시지와 동시에 풍경이 바뀌어간다.
이제야 시야가 미묘하게 다르던 이유를 알겠다.
아까와 달리 확연하게 높아진 시점.
방금까진 그랑펠이 완전히 자라지 않은 유년 시절의 기억이었구나.
‘그럼 지금부터는…….’
비교적 최근의 과거로 온 거겠군.
확실히 노이즈 말고는 시점에 이질감이 없다.
다만, 언뜻 보이는 배경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일 뿐이지.
클라우디의 영지.
“피, 피하셔야……. 합니다……. 가주님…….”
클라우디의 가신 중 하나였을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숨을 거뒀다.
시선을 옮기자 불타는 클라우디의 저택이 보인다.
피가 흩뿌려진 정원이 보인다.
분수대가 물 대신 피를 내뿜는다.
클라우디가 멸문하던 ‘그날’의 기억이었다.
깨닫는 순간.
‘!’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그제야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육체가 심하게 질척하고 무겁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난도질당한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젖은 탓이었다.
‘이거…….’
인간의 몸에서 피가 몇 퍼센트쯤 빠져나가야 사망하게 되는지, 한탄스럽게도 문과인 나는 정확한 수치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정도가 있지.
‘……위험한 거 아니야?’
옷을 적신 것도 모자라 일대를 흠뻑 적신 출혈량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쓰러져도, 기절해도, 숨을 거뒀어도 진작 거뒀어도 이상하지 않을 출혈량이다.
‘진짜 이때부터 가라앉으려고 환장했었구나.’
그랑펠은 그런 몸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긍지 때문인지, 격식 때문인지, 둘 다 아니라면.
눈앞의 사내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 봤던 그 사내가 분명했다.
이번에는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
그러나 얼굴을 자세히 살필 순 없었다.
지직거리던 노이즈는 여전했고, 피를 쏟아낸 탓일까.
감각이 흐릿해져 초점조차 제대로 맞출 수 없었으니까.
하필이면 보여줘도 이런 타이밍이라니.
‘조금만 더 앞에서 시작하면 어디가 덧나냐?’
어떤 정보든 조금이라도 더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이 상태에서 수집할 수 있는 정보라고는……. 저 사내가 아까 던졌던 복선을 회수하러 왔다는 것밖에 알지 못하게 생겼군. 아쉬움을 삼키던 찰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켜내지 못했구나, 그랑펠.”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딴 기만에 신경은 쓰지 않는다.
이건 흔히 있는 기회가 아니거든.
다시금 상기하는 그랑펠의 설정.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렇다.
무너진 클라우디의 영지에는 클라우디 가문을 전멸로 이끌고 간 악마가 존재한다.
물론, 거악 칠죄종이 멸문과 관련되었다는 익히 알고 있던 나였다. 그림자 용병단에게 그랑펠의 누이 암살을 의뢰한 게 놈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칠죄종만으로는 불가능해.’
탐욕과 질투.
거악 칠죄종 중 이미 두 녀석이나 사냥해 본 나다.
경험 덕분에 견적이 나온다.
내가 아는 클라우디는 설령 칠죄종이 전부 달려든다고 해도 휘청거릴 가문이 아니라는 걸. 클라우디의 멸문에는 칠죄종의 힘을 아득히 상회하는 악마가 얽혀있다는 걸.
그러나 이번에도 젠장이다.
‘코앞도 안 보이는데, 뭘 보겠다고……’
……이해하기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흑역사!
아까도 투덜거렸듯.
노이즈에 이젠 흐르는 핏물이 눈가를 가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보이는 건 오직 하나.
[과거가 불안정합니다.]
아까부터 점멸하는 메시지뿐이었다.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사내가 그랑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벅─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살의가 담긴 걸음걸이라고.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없겠지.
‘그랑펠은 여기서 죽지 않았어.’
그래, 죽지 않았으니까.
살아남아서 나를 지금까지 괴롭히고 있는 거 아니겠냐? 이 타이밍에서 충직한 가신이 나타나거나 클라우디를 섬기는 세력이 나타나서 그랑펠을 위기에서 구해낼 거다.
저벅.
저벅.
저벅.
……그래야만 하는데.
어째 사내가 계속해서 가까워져도.
기척 같은 건 없었다.
“보이느냐, 그랑펠. 이것이 네놈이 나의 가주 자리를 가로챈 결과다. 그 건방지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보아라. 클라우디의 최후를.”
빈사상태인 그랑펠의 목숨을 취하고도 남을 거리.
사내가 기만을 내뱉는 와중에도.
그랑펠을 구원할 구원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사내가 흥이 식은 듯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역시, 네놈과의 대화는 조금도 즐겁지 않다.”
스릉─
쇠 부딪히는 소리가 고막을 찌른다.
“이젠 소름마저 돋는구나. 어찌 모든 상황에서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는 거지? 똑바로 보아라, 그랑펠. 너를 제외한 클라우디의 모두가 죽었다. 네 놈의 오만 때문에 클라우디 가문이 멸문했단 말이다. 눈물로 속죄해도 모자란 상황이 아니더냐?”
푹─
사내가 책망하듯 내지른 검날이 그랑펠의 가슴팍을 관통한다.
만약, 저 검날이 목덜미를 향했다면……?
그랑펠은 그대로 즉사했으리라.
그쯤에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날의 클라우디의 영지에는.
누구도 클라우디를.
그랑펠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다는 건가, 알겠다.”
스릉─
한 손이 아닌 양손으로 쥐는 검.
검강을 다룰 정도로 검에 익숙해진 덕분일까.
자세만 봐도 다음 장면이 그림을 그리듯 선명하게 머릿속에 펼쳐진다. 저대로 힘껏 휘두른다면 그랑펠의 목과 머리는 분리되겠지. 흔히 말하는 참수처럼.
사내의 행동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스와악─!
이윽고 쇄도해 오는 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분명 그랑펠의 과거였다.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는 상황?
되돌아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드래곤들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그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 상황에 의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랑펠은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아니, 그보다.
‘이대로 그랑펠이 죽으면 나는?’
[저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서의 기억을 되돌아본다.
‘바알은 분명 내 입방정을 듣고 반응했었어.’
그리고 그 덕분인지 뭔지.
-“어째서 그 막대한 제물을 헛되이 하는 거냐, 바알!! 이날을 위해서 마계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알고 있는가? 마계는 고작 세오른 대륙에 만족할 수 없다. 계약을 이행하라. 그 검으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문을 열라는 말이다!!”
아르카나 대륙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상황도 가능한 거 아닌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목숨이 걸린 마당에.
단 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좋다.
누구 하나 그랑펠을 구하러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내가 있으니까.
정확하게는.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고독한 배경 뒤에 사족을 덧붙인 나, 이호열이.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가능하다, 호열아.
바알, 그 자식 덕분에 확인했잖아?
저주는 빌어먹게도 꼬여있어서.
과거에도 간섭할 수 있다는 걸.
과거를 바꾼다면 현실의 역사도 바뀔 수 있다는 걸.
그러니까.
나의.
아니.
우리의 시야가 점멸한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굳게 닫혔던 입이 움직인다.
“몇 번이고 말하게 하지 말거라.”
“……뭐?”
“감히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려 들지 말거라.”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너였구나, 클라우디를 멸망으로 몰고 간 악마가.
빙의의 상징.
나는 검게 물든 사내의 동공을 바라보며 냉랭히 말했다.
“나는 사냥감과 말을 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