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38화 (338/489)

◈ 338화. 당신이 없는 세계선 (1)

평소와 다르다.

처음 낌새를 포착한 건 벤쉬 윌리엄이었다.

벤쉬의 집무실.

창문으로 저무는 석양.

“……음?”

벤쉬는 양피지를 들춰 보았다.

한 장, 두 장, 석 장…….

그러나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이 수석님에게서의 회신은 없었다.

이 수석님과 누구보다 많은 필담을 나눠보았던 벤쉬이기에.

저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상하다……?”

불합격 통보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돌아왔다.

석양이 저물 때쯤의 정각.

어째서 항상 일정한 때에 답장이 오는 건지 정확한 이유까진 알 수 없었으나-호열이 벤쉬에게 불합격을 통보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벤쉬는 순간 혹하고 말았다.

“……설마, 이번에야말로 제 진심을 알아주신 겁니까?”

그러나 벤쉬에게도 양심.

아니, 직감이라는 게 있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직감이 말해주는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긍정적인 뜻의 침묵이 아닌 것 같다고.

한동안 빈 양피지를 들여다보던 벤쉬가 깃털펜을 들었다.

스스슥─

『마탑의 규율』

그렇게 적어넣자 마탑 간부진의 현황이 실시간으로 떠오른다.

벤쉬가 확인하고 싶은 건.

다름 아닌 호열의 휴직계 제출 여부였다.

“보자.”

휴직계를 제출하신 게 아니고서야.

언제나 칼 같으신 이 수석께서 답장을 보내오시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내, 이 수석님의 이름을 찾은 벤쉬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라?”

.

.

.

부유 정원.

마르셀로는 벤쉬 윌리엄 선임과 마주했다.

“충분히 하실 수 있는 걱정이십니다.”

“역시, 마르셀로 수석님이라면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허나, 걱정이 의심이 되어선 안 되겠지요.”

마탑의 규율은 엄격하다.

설령 수석이라고 해도 규율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무엇보다 누구도 아닌 이 수석님께서 규율을 어기시고 자리를 비우신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마르셀로는 말을 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이 수석님께서는 오늘부로 선발대 선출 심사가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절차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곧 복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로부터 수 시간이 흐른 후.

부유 정원에서 헤어졌던 마르셀로와 벤쉬.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재회하게 되었다.

이호열 수석, 그의 집무실 앞에서.

인기척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벤쉬가 고개를 든다.

“아, 마르셀로 수석님.”

“먼저 와 계셨군요, 벤쉬 윌리엄 선임.”

“그, 아무래도 무언가 찝찝해서 말입니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만남은 갖지 않는다.

격식에 어긋나는 무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벤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이호열 수석의 집무실 문을 두들긴 참이었다. 예절 교육을 받아도 좋으니, 그저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오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여전히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네요.”

묵묵부답.

집무실 안에선 목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르셀로는 기억을 되짚었다.

‘보름이다.’

이호열 수석께서 가장 길게 자리를 비우신 기간은.

그때와 비교하면 자신들은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그때와 지금 상황은 명백하게 달랐다.

‘……경께서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으셨다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호열에겐 말도 안 되는 소리.

툭.

이윽고, 결심한 마르셀로가 집무실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호열을 믿고 있기에 잠자코 기다렸다면.

마찬가지로 지금도 호열을 신뢰하기에 내린 결단이었다.

벤쉬가 흠칫해선 말했다.

“마르셀로 수석님, 이건 격식에 심히 어긋나는……!”

내뱉는 말과 다르게.

벤쉬는 문을 여는 마르셀로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이내, 시야에 들어온 집무실.

마르셀로와 벤쉬, 둘은 천천히 살풍경스런 집무실을 살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서류들.

테이블 위에 정렬된 찻잔들.

모든 게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벤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제가 괜한 소란을 떤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이 수석님이 누군가에게 신변을 위협받으실 분이 아니신데. 그것도 마탑 내부에서 말이죠!”

마르셀로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답했다.

“서류가 정리된 순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 정리된 순서요?”

“수석님께선 사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선발대 심사를 위한 서류들을 차례로 정리해두신 모양입니다. 여기엔 벤쉬 윌리엄 선임과 관련된 서류도 포함되어 있더군요.”

“정말이십니까?”

두둥실─

벤쉬는 허공에 떠오른 서류를 살폈다.

“……!”

사실이었다.

벤쉬, 자신이 집필한 화염마법학 관련 서적 목록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적어대서일까. 이젠 자신조차도 기억이 흐릿한 출탑 신청서의 서론이 빼곡하게 이호열 수석님의 필체로 기재되어있었다.

벤쉬가 감동한 기색이 역력해선 말한다.

“과연, 모든 불합격엔 깊은 뜻이 있던 거였군요.”

곡해한 게 분명했거늘.

마르셀로는 굳이 입 밖으로 말을 내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서류들이야말로 이 수석님께 절차를 어기실 의도가 없었다는 증거와도 같습니다. 설령, 자의로 자리를 비우셨다고 한들. 이토록 길게 자리를 비우실 생각은 없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타의로?

도리도리.

이번에도 곡해하려던 벤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최악에 최악을 상정해도 납득 불가다.

그렇다면 고려할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예기치 못하게 일이 틀어지셨다……?”

마르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께서 자리를 비우신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께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마탑으로 복귀하시지 못하고 계신 게 분명하다.

‘제가 경에게 도움이 될 거란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정이라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렇기에 마르셀로는 마법을 발현했다.

솟구치는 마력에 벤쉬가 말을 더듬었다.

“마, 마르셀로 수석님. 마탑에서의 마법 발현은……!”

“절차에 따라서. 제출해야겠지요, 사유서.”

사유서 제출을 각오하셨다는 건.

‘낌새를 포착하셨단 뜻인가……?’

벤쉬는 마른침을 삼키고 발현되는 마법을 지켜보았다.

마르셀로의 마력이 집무실 위에 슬며시 가라앉더니.

이윽고, 집무실에 새겨졌던 마력흔이 떠올랐다.

경께서 여전히 마탑 내부에 계시진 않을 테니.

포탈을 통해 어디론가 이동하셨으리라 추측했다.

한데…….

아니었다.

떠오른 마력흔에선 포탈의 간섭 과정이.

아니, 마력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고오오─

마르셀로는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어두워진 낯빛.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그랬다.

“……지금은 마티스 선임의 도움이 절실한 때로군요.”

포착된 건 오직 ‘적합한 마력’뿐이었다.

*

흑마법의 정리자.

흑마도학의 창시자.

동시에 마탑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불리는 이론마법학과 비견될만한 마법적 성취를 이뤄낸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그는 이 순간,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크리스탈 홀.

마티스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들었다.

말을 잇는 마르셀로를 바라봤다.

“이호열 수석의 집무실에서 포착된 마력흔은 평범한 마력흔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흑마법을 발현하는 데에만 감응하는 ‘적합한 마력’이었습니다.”

마르셀로의 말에 머릿속에 집무실이 펼쳐진다.

며칠 전부터 불과 방금까지도.

말 그대로 뚫어지라 살피던 이 수석님의 집무실이.

마르셀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호열의 집무실에서 포착된 건.

그저 방대한 적합한 마력뿐이었으니.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건 나뿐이거늘.’

마티스는 자신의 흑마법적 지식을 되돌아봤다.

허나, 포탈을 대체할 수 있는 흑마법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더욱이 그런 흑마법을 발현하신 이유 또한 찾지 못하였다.

‘이래서 어찌 흑마도학의 창시자를 자처할 수 있단 말이냐?’

마르셀로의 시선이 마티스를 향했다.

“흑마도학, 마티스 딘 카를 선임의 말을 인용하면. 설령 포탈을 대체할 수 있는 흑마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굳이 발현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티스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적합한 마력은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발현자의 과거와 배경에서 비롯되는 적합한 마력.

그렇다.

사실 마티스는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이호열 수석.

그가 자취를 감춘 데에는.

그의 방대하기 짝이 없는 적합한 마력이.

감히 헤아리기 두려울 정도로.

깊고 어두운 과거와 배경이 영향을 끼친 게 분명하다고.

원로, 유그위드가 물어왔다.

“혹시 짐작되는 바가 있나요, 마티스 선임?”

허나, 마티스는 고개를 저었다.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의심하는 순간, 매몰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은 없어야만 한다.’

방대하기 짝이 없는 적합한 마력.

그 원천이 되는 과거와 배경이 역류한 것이라면.

설령 이 수석님이라고 해도 극복하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마티스가 그동안 흑화를 우려한 이유도 그와 같았다. 이호열 수석님이시라면 흑화(黑化)조차 극복하시리라는 믿음이 아니었다. 애초에 흑화에 빠지시는 일이 없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흑마도학의 창시자이기에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발버둥조차 무의미해질지 모르는, 헤아릴 수 없는 과거와 배경의 깊이를…….

마티스가 상념에 빠진 순간이었다.

부르르─

한 차례 몸을 떤 고양이, 탑주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 마탑이 해야 할 일은 정해진 셈이군.”

마탑이 해야 할 일.

오래전부터 마탑의 행보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반문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게 있긴 한 거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진리가 아니라면 무관심으로 대응하던 마탑이었으니까.

그러나 마탑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던가?

다름 아닌 이 수석.

호열이 몰고 왔던 새로운 바람이.

“저는…….”

그 바람결에 실려 마탑으로 돌아왔던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이 입을 연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소극적인 성격 따윈 입을 여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호열 수석님께서 악마 숭배자의 손아귀에 빠진 저를 구원해주셨던 것처럼……. 이번에야말로 저희가, 마탑이 이호열 수석님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탑주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간만에 정답이군, 뱅그릿 선임.”

*

고작 닷새.

허나, 존재의 부재는 어느 때보다도 컸다.

호열의 행방불명 소식은 성전 연합군에게도 전해졌다.

마탑이 마탑에서부터 호열의 행적을 거슬러 올라갔던 만큼.

그들도 그들의 자리에서 호열의 흔적을 쫓았다.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의 별실.

품격의 화원.

“흠.”

엘프, 엘시도어는 테이블에 엎드려 턱을 괸 채로 화원을 바라봤다. 내가 누구냐. 자연에서 태어난 정령보다도 자연과 돈독한 게 바로 엘프인 자신이었다.

“흠잡을 곳은 없어. 굳이 살피러 오지 않아도 말이지.”

엘시도어는 껄렁하게 다리를 떨었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엘프에게 닷새?

정직하게 계산해도 인간의 찰나에 불과하리라.

그러나 체감하기에는 달랐다.

엘시도어가 투덜거렸다.

“암만 그래도 내 긍지가 어떤지는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엘시도어는 여전히 긍지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긍지라는 걸 되찾으면 어머니의 축복을 되돌려 주겠다고, 건방진 은발 녀석이 말했으니까. 긍지를 되찾기 위해 화원을 가꿀 뿐이었다.

엘시도어가 이번에는 빈정거렸다.

“아니지,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운 쪽이 더 긍지가 없는 거 아닌가.”

고작 한 사람이 모습을 비추지 않았을 뿐인데.

황금 궁전의 분위기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가뜩이나 편치 않은 궁전이 더욱 편치 않아졌달까.

“하여튼, 이래서 인간은.”

엘시도어는 화원을 가꾸면서도 군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는 자라나는 비약초, 영약에까지 말을 걸었다.

“너희도 돌아오면 한소리 해라. 서운했다고.”

그러나 엘시도어의 투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열이 자취를 감춘 지 엿새째 되는 날.

엘시도어의 몸이 움찔거렸다.

“……!”

정확하게는.

물보다 진한 피가 끓어올랐다.

엘시도어의 시선이 다급하게 상공을 향한다.

엘시도어가 입을 열었다.

“……도마뱀?”

세계수로 이어진 핏줄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는.

도마뱀, 드래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

.

.

──────

[긴급 업데이트]

신규 보스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악과를 삼킨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 : Lv.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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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이 행방불명된 지금.

긴급 업데이트의 내역은 인류에게 절망과도 같았다.

그러나 패색이 짙다고 한들.

물러나지 않는 것이 긍지며.

동시에 채워야만 하는 호열의 공백이었다.

성전 연합군.

총대장 호열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이 외친다.

“오늘 우리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설령 공백을 피로 채워넣는 한이 있더라도.

*

오크 옥션 지배인, 울리취.

키치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던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나, 나는 믿을 수 없네. 키치.”

“뭘 믿을 수 없어? 멀쩡히 살아계신다니까, 네가 말하는 그분?”

“아니, 내 두 눈으로 직접 본다고 해도 믿을 수 없네.’

울리취는 도저히 맨정신으론 말을 이을 수 없다.

꿀꺽꿀꺽─

독한 술을 말끔히 비워내고 간신히 말을 잇는다.

“……엿봤단 말일세.”

“엿보다니, 뭘?”

“판도라의 다락방에서 미래를 예견하는 대현자 라이즈.”

“아, 그 영감?”

“난 그 다락방의 창틈으로 그분의 최후를 목격했단 말일세……!!”

“……!”

.

.

.

무언가 잘못되었다.

깨닫게 된 건 시스템 메시지 덕분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저주, ‘어둠의 이해’에 진입합니다.]

[주의 : 이해도가 너무 낮습니다.]

[과거가 불안정합니다.]

이해도가 낮다.

과거가 불안정하다.

그 메시지의 뜻을 깨닫게 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나의 흑역사에 대해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았거든.

눈앞에 치렁거리듯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

그 사이로 나와 같은 머리카락색을 가진.

사내의 뒷모습이 보인다.

사내는 얼굴을 비추지 않은 채 그리 말했다.

“나는 너를 증오한다, 그랑펠.”

이런 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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