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37화 (337/489)
  • ◈ 337화. 그 또한…….

    플레이어, 로미오.

    그에 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르카나 경매장을 말 그대로 폭풍처럼 휩쓸어버린 로미오라는 이름 석 자였으니까.

    탐험가 연맹.

    플레이어, 아르카나인 할 것 없이 모여든 탐험가들.

    그들의 중심엔 박휘강이 있었다.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라니까요?”

    대격변 이전도, 이후에도 아르카나에서 포션은 계륵 취급을 받았다.

    포션을 대체하고도 남을 정도로 힐러들의 숫자가 충분하기도 했고, 포션은 성능에 비해 입수하기 어렵고 그 탓에 비싸기 때문이었다.

    “암만 그래도 싹쓸이한 것만으로 특별하기까지?”

    “에이. 비약이 심한 거 아니에요, 휘강 씨?”

    “진짜……! 다들 확인도 안 해보셨어요?”

    “뭘요?”

    “왜, 탐험가라면 기본적으로 남는 포션 같은 거 한두 병은 매물로 경매장에 올려두셨을 거 아니에요? 그거 분명 팔렸을 테니까 확인해 보시라고요.”

    박휘강에 말에 플레이어들은 경매장에 접속했다.

    땅을 파서 동전 하나도 나오지 않는 시대라고 한들. 균열마다 포션 한 병 정도는 건질 수 있는 스킬이 있는 탐험가들이었으니까. 물론, 능력만큼이나 군소리도 많다.

    “아니, 휘강 씨 말이니까 확인은 해보는데. 정말 그 로미오라는 인간이 포션을 사갔을 거라고요? 글쎄요, 아닐걸요. 뭣보다 천하통일 그 새끼들이 얄미워서 시작 가격을…….”

    천하통일 길드원을 제외하면 세상에 천하통일을 달갑게 생각하는 플레이어들은 없으리라.

    어차피 천하통일만 구매할 게 뻔한 포션이었으니, 사내는 엿이라도 먹일 겸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매물로 등록해뒀었다.

    그런데.

    “어, 어라?”

    “팔렸어?!”

    “그쵸? 제 말이 맞죠? 구매자 확인해 보세요!”

    “……로, 로미오 맞는데요?!”

    “나도 로미오야!”

    박휘강은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신선한 떡밥에 민감한 넷튜버 플레이어.

    건수를 잡은 박휘강은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인 상태였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큰손 로미오의 구매는 포션에 한정된 게 아니란 걸! 서로가 돕고 사는 탐험가 연맹의 의리. 박휘강이 유스라 왕국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수집한 정보를 늘어놓았다.

    “왜, 유스라의 대장장이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해요. 로미오라는 플레이어가 화살이며 저레벨 장비며 경매장에 올린 걸 전부 쓸어가 버렸다고요!”

    “뭣?”

    거기까지 듣고 나니 정말 평범한 플레이어는 아닌 듯했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

    “그냥 단순하게 사재기꾼 아닐까요? 사실 흔한 수법이잖아요? 일단 전부 사들여서 독점한 다음에 나중에 더욱더 비싼 값으로 팔아치우는…….”

    도리도리.

    박휘강을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젓는다.

    “거, 말이 되는 소리를. 수학 안 배웠어?”

    “그랬다간 이윤은커녕 지갑만 거덜 날걸요? 경매장에 찍힌 거래가를 보면 아시잖아요. 전부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사간 거. 포션이나 장비들이 다신 구할 수 없는 품목들도 아니고요.”

    “뭐, 착각할 만도 해. 도통 납득이 안 되잖아?”

    그렇다.

    로미오가 보여준 하루의 행적만으로는.

    도대체가 속셈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거슬러 올라가 볼 수밖에 없겠죠. 일단, 로미오가 누구인지부터! 하다못해 신상이라도 알게 된다면, 목적을 추측할 수 있지 않겠어요?”

    “로미오라……. 들어본 사람 있어?”

    몇몇이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한다.

    아르카나에서 누구보다 정보와 소문에 민감한 탐험가들이거늘.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로미오란 이름에 대해선 떠오르는 바가 없다.

    게다가.

    “사실 저딴 이름이라면 까먹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

    무엇보다 공감되는 반응이군.

    박휘강이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였다.

    누군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요.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의 플레이어가 저런 엄청난 돈이 어디서 났길래……. 이런 스케일로. 말 그대로 경매장을 쓸어버릴 수 있던 걸까요?”

    “……!!!”

    플레이어에게 유명세는 곧 실력이며 돈으로 직결된다.

    그것이 플레이어의 상식이기에.

    박휘강은 혹시나 싶어서 운을 뗐다.

    “그 은둔 고수 같은 건 아닐까요? 왜, 랭킹 시스템을 비활성화한 랭커일지도 모르잖아요. 비교하면 신성모독이겠지만, 호열 님처럼…….”

    “에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말이 안 되죠, 휘강 씨! 저런 돈을 벌기 위해선 적어도 최상급 균열엔 밥 먹듯 얼굴을 드러냈어야 하는데요? 근데 없었잖아요? 어떤 길드에도 로미오라는 플레이어는.”

    “하긴 그건 또 그렇네요.”

    결국,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경매장을 휩쓴 로미오.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탐험가 연맹은 물론.

    커뮤니티까지 뜨겁게 달군 끝에.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이 밝혀졌다.

    -경매장 익명 시스템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냐?

    -또 뭔 음모론인데

    -아니;; 아이디 일부만 공개되잖아 경매장에선

    -ㅇㅇ

    -근데 로미오만 왜 풀네임임???

    -……뭐냐 듣고 보니까 진짜 그러네???

    -경매장 특권 같은 거 아님?ㄷㄷㄷㄷㄷ

    로미오.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어도.

    익명 시스템을 뛰어넘을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플레이어라는 것.

    그렇다, 지금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미오.

    그 세 글자가 고작.

    이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라고는.

    범인의 상식으로는…….

    *

    셔츠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다.

    어째 오늘만큼은 한계에 이르는 체력 단련이 반갑기만 하다.

    이러다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기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그런 충동이 든 덕분이리라…….

    팔굽혀펴기를 멈춘 채.

    숨을 들이마신다.

    날숨에 입방정을 뱉어낸다.

    “다들 그 상상력은 칭찬해 주마.”

    또 한 번 원망스럽구나, 레이먼 션……!

    익명 시스템을 만들 거면 완전 익명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굳이 아이디 일부가 노출되게 만든 이유가 뭔데? 물론, 평범한 플레이어들에게야 완전 익명이나 다름없겠지.

    ‘기껏해야 서너 글자. 많아야 대여섯 자니까.’

    거기서 한 글자가 공개된다고 한들.

    상대가 누군지 특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러나 나의 풀네임,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는 무려 열 하고도 다섯 자. 그렇다, 모든 건 지나치게 긴 이놈의 이름 때문이었다.

    “로미오, 그 또한 나이거늘.”

    제발 혼잣말이라도 끔찍한 소리 하지 말자, 우리 쫌!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나의 풀네임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 이름에 담긴 무게를 알고 있는 이들이기에. 그 이름을 쉽사리 내뱉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다.

    ‘근데 현실은 이야기가 다르다고.’

    뭣보다 지금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잖냐?

    지가 로미오면 줄리엣은 어딨느냐는 것부터.

    유람선 타러 갈 준비하는 거냐는 농담까지.

    극히 몇 글자에 불과한 이름에만도 쏠리는 관심이 장난이 아니다.

    물론, 그조차도 긍지 필터로 걸러 듣는 그랑펠이 있었지만…….

    “이름의 무게를 헤아릴 수 없는 건 이해하마.”

    정말로 조금도 안심이 되질 않는다.

    나의 업보가, 흑역사가.

    현실에서도 나를 압박해 오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머리라도 박아서 기절하길 바랐건만.

    근력도 집념도 물이 오를 대로 올라서일까.

    이젠 그것조차 쉽지 않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흑암룡]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776]

    [능력치]

    근력 : 182 / 민첩 : 178 / 마력 : 677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6

    [보유 포인트 : 4]

    능력치의 총합을 따지면 드디어 일천(一千)을 돌파했다. 물론, 악마 사냥꾼답게 난잡한 능력치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경악을 뱉어낼 꼬락서니긴 했다만.

    ‘클래스 탓을 할 때는 지났지.’

    어쨌거나 이것도 내가 결정한 성장방향이었으니까.

    나중에 후회는 해도 신세타령을 해선 안 되겠지.

    내 얼굴에 침 뱉기밖에 더 되겠냐.

    물론, 그랑펠의 긍지는 나보다도 훨씬 드높았다.

    “고작 일천이라. 나를 가늠하겠다면 아직 멀었군.”

    일천에도 만족하지 않다니, 여러 의미로 대단하셔.

    이내, 나는 잔여 포인트를 살폈다.

    어째서 애매하게 4포인트를 남긴 거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행운]이 필요할 때였으니까.

    [흡수(Item Skill) : 기생 생물 엔비가 대상을 흡수합니다. 흡수한 대상에 따라 엔비가 새로운 고유 효과를 가지게 됩니다. 엔비의 허기에 따라 저장할 수 있는 고유 효과의 숫자가 달라집니다. 현재 엔비의 포만도- 100% / 저장한 고유 효과 : 어둠의 이해]

    엔비가 소화를 끝냈거든.

    이젠 10년이 훌쩍 넘는 공백을 탓할 수도 없겠지.

    플레이어로 각성한 뒤 활동하며 그 이상의 경험을 쌓은 나였으니까. 덕분인가, 적중했다. 적합한 마력을 삼킨 엔비가 흑마법과 관련된 고유 효과를 각성하리란 예측이 말이야.

    그렇게 생성된 고유 효과가 바로.

    내가 미신 아닌 미신.

    행운 스탯에 손을 벌리게 된 이유였다.

    [어둠의 이해 (저주) : 적합한 마력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켜 준다. 단, 적합한 마력의 원천이 되는 과거와 직면해야만 한다. - 현재 적합한 마력 친화력 : 0%]

    패시브 스킬도 일반 스킬도 아니다.

    괄호 안에 적혀있는 바로는 [저주].

    얼마 전에 뜻하지 않게 경험하게 된 저주와 같았다.

    마탑의 지하, 무간.

    전 원로 마법사였던 악마 숭배자.

    그가 유언으로 남겼던 벽면의 저주와 말이야.

    [저주,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저주에 진입했던 나는 서열 1위 마왕, 바알과 놈에게 멸망한 세오른 대륙의 최후를 목격했었다. 과연, 저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기력한 기분이 몸을 휘감았었지.

    특히나 바알의 가공할만한 능력은.

    그랑펠의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마음이 꺾여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니까.

    ‘간만에 행운에 기대보려는 거 아니겠어.’

    정말 행운에 그런 효과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행운 스탯에 포인트를 투자할 때마다 좋은 결과가 따랐던 나였다. 그 사소한 징크스에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거든.

    적합한 마력의 근원.

    즉, 그랑펠의 과거.

    클라우디 가문의 잔혹사와 마주하는 건.

    물론 우려가 된다는 건 순전히 나, 이호열이었다.

    정작 몸뚱이는 이런 와중에도.

    태평하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인정하마, 그대 또한 녹차가 맞군.”

    단련으로 달아오른 몸을.

    냉녹차로 식힐 정도로 여유가 넘친다는 뜻이었다.

    수도 없이 경험했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그랑펠이라면.

    설령 자신의 과거에서 비롯된 저주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직면하고 파훼하겠지.

    항상의 자세로 말이야.

    과거와 직면할 자신이 없는 건 나뿐이었다. 어쩌면 나의 과오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르는 클라우디 가문의 잔혹사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하지만 다짐하지 않았냐, 호열아.

    ‘전부 책임지겠다고.’

    과거에 관한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중2병.

    질풍노도의 시기를 극복해 낸 어른의 긍지라고.

    나는 남은 포인트를 전부 행운에 투자했다.

    [행운 : 16]

    [보유 포인트 : 0]

    700레벨 대에서 4레벨의 가치를 생각하면…….

    쓰읍, 입맛이 씁쓸한 기분이었다만.

    그래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자.

    ‘마티스한테 말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정령, 마법, 심지어는 전설 등급 장비를 착용하기까지.

    친화력은 아르카나에서 빠트릴 수 없는 능력치였다.

    그런데 내 적합한 마력 친화력이 제로였다니.

    ‘0퍼센트로 그런 흑마법을 발현했다고 하면.’

    적합한 마력 친화도가 흑마법에 어느 정도의 상승효과를 가져다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무(無)와 유(有)가 다른 만큼. 단 1퍼센트라도 상승한다면 유의미한 차이가 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와서 내뺄 순 없다. 짊어진 짐에 깔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선 나, 스스로도 지금보다 더욱 성장해야 했으니까.

    ‘되도록 빠르게 끝내자.’

    미뤄서 좋을 건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절차와 일정부터 살폈다.

    내일부터 스무 명의 선발대를 선출해야 하는 건가. 당연한 말이지만, 확정된 자리는 하나도 없다. 그랑펠의 변덕이 어디로 튈지는 나도 짐작할 수 없거든.

    ‘얼마나 걸리려나.’

    시간조차도 멋대로 흐르는 무간이다.

    그 탓에 무간에서 겪은 저주는 크게 참고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견적이 나오지 않는군.

    뭐, 그렇다고 마냥 걱정할 것도 없었다.

    “그대들이라면 충분히 해내겠지.”

    엄격한 절차에 따라서. 나의 부재 시 나의 역할을 대신할 이들이 마탑에도, AAU 유스라 지부에도, 심지어는 성전 연합군에도 존재했으니까.

    ‘결국, 나만 잘하면 문제가 없겠네.’

    그러니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겠지.

    이윽고, 엔비에게서 일렁이는 적합한 마력.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저주, ‘어둠의 이해’에 진입합니다.]

    .

    .

    .

    저벅─

    마르셀로가 평소보다 야윈 얼굴로 강단에 선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의 얼굴엔 웃음기가 없다. 언제나 늘어져 있던 탑주조차 바로 앉아 자리를 지킨다.

    “…….”

    뱅그릿과 벤쉬.

    평소엔 수다스럽기 짝이 없는 두 선임조차 입을 열지 않는다. 마티스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어둡다. 오직 마탑의 간부진만이 자리한 크리스탈 홀에서 마르셀로가 입을 연다.

    “이 자리에서 마탑은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바입니다.”

    말꼬리가 흐려진다.

    “이호열 수석님의 행방불명을…….”

    이호열 수석.

    그가 자취를 감춘 지.

    정확하게 닷새가 지난 시점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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