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36화 (336/489)

◈ 336화. 위대하게 써라 (3)

20인의 선발대.

공정하고 엄격한 절차에 따라서.

만천하에 알려진 선발 과정.

그에 관한 소식은 플레이어들은 물론.

“뱅그릿 선임, 들었습니까? 그 소식!”

현실에 떨어진 아르카니인들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탑의 부유 정원.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이 이목을 집중시킨다.

“……무슨 일인데, 저러시지?”

선임 마법사란 높은 직책 탓.

그 실체를 알지 못하는 숙련, 견습, 플레이어들이 불처럼 화려한 벤쉬의 외관에 이끌려 웅성거린다. 덕분에 민망해지는 건 그와 마주 앉은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 톰이었다.

속삭이듯 낮게 울리는 목소리.

“당연히 들었습니다. 선발대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지요. 이런 말을 해서는 뭣하지만, 솔직히 근질근질하지 않았습니까? 애매하게 마력 맛을 봐서 그런가, 이 심장의 열기가……!”

보나 마나 이야기가 길어지게 생겼다.

뱅그릿은 일단 숨부터 골랐다.

“후우.”

벤쉬 선임도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된 게 한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고 입을 놀리시는 걸까?

뱅그릿이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아주 약간은 공감이 되네요. 차라리 아예 출탑이 금지되었을 때면 모를까. 방어적인 마법 발현의 허가는, 확실히 바닷물을 조금씩 찍어 먹는 기분이랄까요.”

마법사, 그중에서도 마탑의 선임 자리에 올라설 정도의 마법사라면 마법에 대한 갈망은 표현할 수 없다.

비유대로 애매한 마법 발현은 애써 잊은 성질머리를 돋우게 하는 역할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정도라는 게 있다.

‘근데 당신은 도가 지나치다니까요?!’

벤쉬는 정도가 지나쳤다.

세상에.

자기가 재미 좀 보겠다고.

“이번에야말로 손에 쥘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도구.

그것도 결전용 마도구에 손을 뻗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뱅그릿은 벤쉬의 사적인 부분은 잘 알지 못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벤쉬 선임님. 그……. 실례가 아니라면 윌리엄 가문의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 추측에 벤쉬 선임님께선 막둥이, 그것도 팔남(八男)쯤 되시는 게 아니신지…….”

“갑자기 뜬금없이 가족 관계는 왜 묻습니까? 그리고 나더러 팔남에 막내라니요. 이 벤쉬 윌리엄은 윌리엄 가문의 장남입니다만.”

“……예?”

벤쉬 선임님이 장남이라고?

심히 미래가 걱정되는구나, 윌리엄 가문……!

평민 출신인 뱅그릿은 태어나 처음으로 귀족 가문의 미래를 우려해 봤다. 그러나 곧 고개를 털어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지.

그런 복잡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벤쉬는 부유 정원을 한 차례 스윽,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그보다 중요한 건 내 가정사가 아닙니다, 뱅그릿 선임. 스무 명의 선발대, 그거 아무리 봐도 이 수석님께서 우릴 위해 준비하신 안배이지 않겠습니까!”

“네? 안배라뇨?”

“아니, 일단 목소리부터 낮춰봐요.”

데시벨을 줄인 것도 모자라.

서로 머리가 맞닿을 정도로 몸을 웅크린 두 선임.

그 모습이 오히려 시선을 끌었거늘.

당사자들은 알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왜 하필 스무 명이겠습니까?”

“그야 선발대니까. 많은 인원이 필요하진…….”

“아무리 선발대라도 그렇지요. 이 수석님의 말씀으로는 아르카나 대륙은 여전히 혼잡하답니다. 아군이란 건 많으면 많을수록 손해 볼 게 없는데. 어째서 정확하게 스물이겠느냐는 말입니다. 내 말은!”

“흐음, 거기엔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에헤이.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벤쉬는 쯧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슥, 고개를 들고.

다시 눈치를 살피고 입을 속삭였다.

“정확하게 일치하잖습니까? 선임 마법사의 숫자와!”

나, 벤쉬 윌리엄.

이호열 수석님과의 사이가 돈독하다고 할 순 없었으나.

마탑의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이 수석님과 많은 필담-하루가 멀다 하고 반려된 출탑 신청서와 접속기 사용 허가 요청서 덕분이었다-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 수석님은 직설적이면서도 그 속내를 절대 내비치지 않으시는 분이시지요. 이 벤쉬 윌리엄에게 연달아 불합격을 주시는 이유 또한. 제가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단 걸 뱅그릿 선임도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뱅그릿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엾은 벤쉬 선임.

이미 망가질 정도로 망가졌구나.

끝내 방어기제가 드러나고 만 거구나.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까지 끄덕여줬다.

“스물이라는 수에도 그러한 속내가 담겨져 있는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누구보다 든든할 마탑의 선임 마법사를 선발대로 뽑아서……!”

뱅그릿은 그제야 벤쉬가 은밀히 속삭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발대는 이미 선임 마법사진으로 확정. 그저 다른 이들이 낙담하지 않게 형식상 심사를 진행하는 것이라고 벤쉬 선임은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추측도 참 벤쉬 선임다웠다.

“저……. 벤쉬 선임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네, 말해보세요!”

“선임 마법사 전원이 선발대에 뽑히게 된다는 건 수석님, 그러니까 마르셀로 수석께서 스무 명의 선발대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데요?”

“……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르셀로 수석!

마르셀로 수석의 위대함이야 이론마법학을 통해서 매일같이 실감하던 벤쉬였다. 뱅그릿의 말을 부정할 순 없었으니, 벤쉬는 멋쩍게 말을 바꾸었다.

“그렇군요. 안타깝지만 한 명은 빠질 수밖에…….”

“그리고 유그위드 원로님께서 가만히 계실까요?”

“유, 유그위드님?”

“거기에 탑주님도 빼놓으면 섭섭하시겠죠. 마법적인 성취로만 따지자면 저희 선임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아득한 위치에 계신 분들이니까요.”

“…….”

하나, 둘, 셋.

손가락을 접던 벤쉬가 혹시나 해서 묻는다.

“그럼 세 분만 빠지면……?”

“거기에 순혈의 마도 종족, 황혼의 후예 메어리 님을 잊어선 안 되죠. 저희는 볼 수조차 없는 경지의 마법을 구사하시니까요. 추가로 대마법사라 불리는 모험가, 제시 하인네스까지…….”

“그, 그럼 다섯?”

어째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벤쉬의 손발엔 점점 식은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뱅그릿은 멈추지 않았다.

“제국과의 교류를 생각하면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하르콘 경도 빠질 수 없겠고. 아, 모험가들도 빼놓을 수 없지 않을까요? 왜, 우리의 관점으론 볼 수 없는 것도 모험가의 시선에선 달리 보일지도 모르니까요.”

“허어.”

덕분에 벤쉬의 얼굴은 갈수록 일그러졌으니.

점차 잊고 있던 불안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나의 자리는 없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

벌떡!

결국, 벤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미안합니다, 뱅그릿 선임. 급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네? 갑자기요?”

“하여튼, 그렇게 됐습니다!”

뱅그릿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부턴 모두가 경쟁자다.

나, 벤쉬 윌리엄.

스무 손가락에 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리라.

벤쉬는 그대로 부유 정원을 박차고 집무실로 향했다.

척─

그러고는 깃털펜을 들어 양피지에 적어나갔다.

“친애하는 우리 마탑의 자랑 이호열 수석님께…….”

어째 이번에도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듯했지만.

*

제로 산맥의 최상층 인근.

나는 제시와 메어리를 바라봤다.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의 시차에 감사하게 되면서도 소름이 돋는다.

결국, 이번에도 그놈의 절차는 착실하게 지켰구만?

‘내가 생각해도 대단하다, 참 대단해.’

자화자찬이 아니니까.

어깨에 힘 좀 빼고 싶었건만.

언제나처럼 꼿꼿하게 세운 목.

덕분에 한눈에 제시와 메어리가 들어온다.

[서릿니 호그 : Lv.700]

한 마리도 아니고 무리.

600레벨이 되지 않는 제시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몬스터였다. [대마법사]의 고유 스킬을 내세운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저 차이를 극복할 순 없겠지.

그러나 제시는 성장하고 있었다.

스스─

미약하지만 제시의 몸에서 보랏빛.

황혼의 마력 입자가 흩날린다.

고작해야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 정도.

메어리는 물론, 나와 비교해도 옅디옅다.

‘……장난 아닌데?’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낯 뜨거운 설정 같은 게 없이도, 꼼수를 부리지 않아도, 황혼의 마력을 다룰 수 있다니. 역시 적통이 괜히 적통이 아니구나 싶었거든. 물론, 주둥이는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그대도 착실히 나아가고 있군.”

이 자리에선 기껏해야 번역가, 참관인인 주제에.

제발 뭐라도 된 것처럼 평가하지 마라, 그랑펠.

‘아무튼.’

황혼의 마력이 더해진다면 제시, 혼자라고 해도 700레벨 몬스터 대여섯 마리는 상대할 수 있을 거다. 과연, 나의 견적은 어긋나지 않았다.

화르륵─!

황혼의 마력 입자가 기폭제 역할을 한 걸까.

더욱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화염.

저게 왕도를 걷는 히든 클래스의 위력이란 말이지.

아직 서클을 개방하지도 않았는데, 저 정도 파괴력이라니.

저게 왕귀캐지, 다른 게 왕귀캐냐.

보고 있자니 악마 사냥꾼이 왕귀캐라고 지껄였던 입방정을 무르고 싶어진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순풍을 타고 무섭게 성장하는 제시를 보고 있자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내 방식대로 강해져야 한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선. 여태껏 그래 왔듯 써먹을 수 있는 건 뭐가 됐든 절박하게 써먹어야 한단 뜻이다.

슥─

그런 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어깨에 고정한 여명의 재킷. 정확하게는 가슴팍에 얌전히 붙어있는 [중립의 기생 생물 엔비(Envy)]였다.

흑화.

대륙을 집어삼킬 듯 흘러나왔던 적합한 마력.

나의 명령에 그 어둠을 잔뜩 흡수했던 엔비.

나는 엔비의 상태를 확인했다.

[현재 엔비의 포만도 - 100%]

[엔비가 흡수한 ‘적합한 마력’을 소화합니다.]

[소화 중 - 새로운 고유 효과 생성까지 99.1/100%]

보자.

대충 계산하면 오늘 대마법사 수업이 끝날 때쯤엔 소화도 끝날 것 같았다. 소화가 끝나면 흡수한 대상에 따라 엔비가 고유 효과를 각성하게 된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흑마법과 관련된 고유 효과려나.’

뭐가 됐든 기대해볼 만했다.

그랑펠의 과거에서 흘러나오는 적합한 마력이 한없이 어둡든 어쨌든, 엔비도 전설급 아이템이라고. 이번에야말로 등급 값을 해주길 기대해봐도 되겠지.

‘이제 얌전히 기다리면 되는 건가.’

물론, 흘러가는 시간을 1초도 헛되이 보내지 않는 철저함.

그런 내가 꺼내 든 건 스마트폰이었다.

그 명분은 기이 탐구에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함이었지만…….

‘속으로 내심 궁금하던 참이었거든.’

스물의 선발대.

구체적인 숫자에 플레이어를 비롯한 대중의 반응은 범상치 않았다. 뭣보다 나와 레이먼 션. 그리고 천하통일의 대립구도에 어째 나보다도 신이 난 것 같았다.

-아니;; 진짜 머임? 접속기 원래 10개 아니었음?

-발견된 게 이호열이 하나 천통이 일곱이지 않았나?

-내가 말했제?ㅋㅋㅋㅋ 접속기가 답이 아니라고

-모르면 그냥 외쳐 호멘ㄷㄷㄷㄷ

접속기가 레이먼 션의 기만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된 플레이어들이었다. 거기에 나의 이번 선발대 선언이 결정타를 때린 셈이었으니.

그동안 억눌렸던 불만이 터져 나올 법도 했다.

-천통 이 새끼들 쌤통이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ㄹㅇ 슬슬 업보 터지는 듯?

-동굴 공략도 실패한 거 같다면서?ㅋㅋㅋㅋ

그에 뒤지지 않는 만행을 저지른 천하통일을 향한 반응도 날이 서있었다.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글들은 너무 빠르게 갱신되어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과연, 호락호락하지 않군. 기이여.”

언제나처럼.

거창하게 변명하던 순간이었다.

나는 흠칫했다.

-당연한 거 아님? 이호열한테 참교육 당하는 건

-ㄹㅇㅋㅋ

-아니 거기서 끝이 아님

-??? 뭐가 끝이 아닌데

-호열님만큼 찰지게 천통 패는 플레이어가 나타났음

오호라.

사실이면 나도 혹하는 소식인데.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좋은 관계로 지내면 나쁠 게 없잖아?

그러나 이어지는 코멘트에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너희 플레이어, 로미오라고 들어봤음?

……잠깐만.

지, 지, 지지지금.

로미오라고 했냐?!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하필이면 그중에서도 제일 부끄러운 치부가.

거기서 튀어나오는 건데?!!

.

.

.

아르카나 대륙 전기 경매장.

익명성 보장을 위해서.

판매자와 구매자.

서로에겐 각자의 아이디 일부만이 공유된다.

그렇다.

사태의 원인은 익명으로 가려지지 않는 아이디의 존재감.

정확하게는 아이디의 글자 수에 있었다.

탐험가 연맹 소속.

넷튜버 플레이어.

박휘강은 믿기지 않아서 눈을 비볐다.

[상급 활력의 엘릭서]

[낙찰 금액 : 709,999,999원]

[판매자 : 휘]

“이, 이걸 즉시 구매로 샀다고?!”

대체 누구야…….

아니, 누구세요?

어떤 귀인분께서 이런 가격에 구매를!!

박휘강은 곧장 구매자의 아이디를 확인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라고 해도 강렬한 그 이름이 떠올라 있었으니까.

[구매자 : 로미오]

“로미오……? 작명 센스 실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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