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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33화 (333/489)
  • ◈ 333화. 어째서

    까앜─

    키치가 눈을 흘긴다.

    “뭘 잘했다고 목청을 높여?”

    그림자 용병단의 영물, 그림자 까마귀 향해서.

    “벌써 몇 번째 허탕인 줄 알아, 새대가리?”

    그림자 까마귀의 기억을 쫓아 이곳까지 도달했다. 오죽 믿을 게 없어서 새대가리에 의존해 움직이는 건지……. 자타공인 뒷세계의 지배자 체면이 말이 아니야.

    “후우.”

    그러나 이 방법밖에 없었다.

    현시점 대륙에서 ‘그날’의 전말에 관해 알고 있는 건.

    저 까마귀 놈밖에 없을 테니까.

    “빨리 먹어, 시간 없으니까.”

    영물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투명하게 비춘다.

    악크샨 늑대가 어떤 적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악크샨의 기백을 그대로 지녔다면, 그림자 까마귀는 거래에 있어서만큼은 그림자 용병단원들보다 철저했다.

    스르르─

    키치가 검은 긴 생머리를 한편으로 넘기자 그림자 까마귀가 키치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부리로 키치의 뒷목을 쪼아대기 시작했다.

    “……씁.”

    이 더러운 기분은 익숙해지질 않아.

    까마귀부터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영물이기에 상처는 남지 않는다. 그 대신 거래의 대가로 생명력을 받아갈 뿐. 키치가 머리를 털어 원상 복귀시킨다.

    “너, 이번에도 꽝이기만 해봐.”

    새대가리를 믿은 게 잘못이려나, 그게 아니면 뒷세계가 아르카나 대륙이 뒤집힌 와중에도 초심을 잃지 않은 탓이려나. 벌써 며칠째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런 ㅆ…….”

    결국,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쥐어뜯기도 잠깐, 키치는 까마귀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저 새대가리가 날 놀려먹고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키치, 자신도 자각은 있었다.

    “뭐, 내가 아니꼬워서?”

    어쩌면 나는 역대 그림자 용병단 단장 중에서 가장 그림자 용병단답지 않은 단장이 아닐까 하고는……. 그런 자신을 그림자 용병단의 영물인 그림자 까마귀가 달가워하는 게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지.

    키치의 입꼬리를 비뚤어지게 올라갔다.

    “그런 거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스릉!

    까앜─?

    키치가 비수를 꺼내 들자 까마귀가 흠칫해서는 발을 구른다.

    허나, 키치의 단검이 향한 건 그림자 까마귀 쪽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덜미, 정확하게는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었다.

    싹둑─

    키치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자신의 검은 생머리를 주저 없이 단발 기장으로 잘라냈다.

    머리카락 뭉치를 그림자 까마귀 앞에 툭하고 내던졌다.

    “생명력이라고 해봤자 하루면 재생되는 하찮은 거니까. 상대에게 소중하지 않은 건 대가로 받아봤자 제대로 된 거래가 될 수 없다는 거잖아, 넌? 아니꼽게 보일지 몰라도 단장이거든. 덕분에 그림자 용병단의 뒤틀린 심보도 잘 알고.”

    그림자 용병단은 고약하기 짝이 없다.

    왜, 과거의 의뢰 장부만 들춰봐도 답이 나온다. 악의밖에 남지 않는 짓을 참 많이도 했더라고……. 키치는 까마귀가 원하는 대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머리카락을 잘라서 내놓은 셈이었다.

    “몇 년을 기른 건데…….”

    키치의 눈매에 살기가 깃든다.

    “한 가닥도 흘리지 말고 처먹어. 그리고 똑바로 말해.”

    까앜─!

    “옥션의 돼지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콕콕콕─

    그림자 까마귀는 머리카락을 전부 삼키고 나서야 활기차게 날아올랐다. 키치는 생각했다. 영악한 새대가리, 저 깃털을 몽땅 뽑아서 튀겨버리든지 해야지.

    그래도 다행인 건.

    ‘그보다 넌 뭐 하는 거야, 울프.’

    자신의 단장 자리를 이어받았을 울프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림자 까마귀를 호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그림자 까마귀는 여전히 키치를 단장이라 여기고 따르고 있었다.

    키치는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려다 허전함에 손을 머뭇거렸다.

    ‘비싸니까, 저 새대가리 몸값은.’

    평단원이었다면 머리카락 더한 걸 대가로.

    단원조차 되지 못하는 탈주자란 걸 알았다면…….

    어쩌면 대가로 수십 년의 수명을 대가로 받아갔을지도 몰랐겠지.

    키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의미에서 너그럽게 봐줄게.’

    이미 잘라낸 머리카락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그걸 찾는다면 말이야.’

    다만, 며칠째 찾아 헤매고 있는.

    ‘다른 머리카락’에 대한 미련은 여전했지만.

    키치, 스스로도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남말 할 때가 아니라 뭐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오크 옥션.

    이름 그대로 오크족이 운영하는 경매장이다. 뒷세계의 지배자이기에. 뒷세계에서 오크가 어떤 존재인지는 누구보다 키치가 잘 알고 있었다.

    오크의 완력은 평범한 인간 수십 배를 상회하며 생명력은 밀밭의 잡초보다도 끈질기다. 오죽했으면 팔뚝이 잘려도 몇 주가 지나면 새 팔뚝이 솟아있을까.

    또한 경매장을 운영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세간에 퍼진 소문과 달리 지능도 인간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모든 종의 우월성을 잊게 할 정도로 추악한 외모라는 크나큰 단점이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지만 앞서 말했듯 오크는 영리했다.

    굳이 아르카나 대륙 양지에 섞여들려고 하지 않았으며 음지, 뒷세계에서 자신들의 강점을 내세워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그러니까 겁도 없이 사들였겠지.”

    키치는 거래 장부의 내역을 확인했다.

    찾고 있는 ‘다른 머리카락’은 공개적인 경매를 통해 누군가에게 팔린 게 아니었다. 경매가 시작되기 직전, 주최자였던 오크 옥션 측이 시작가의 자그마치 일천(一千) 배의 가치로 직매입.

    그게 바로 키치가 오크 옥션을 찾아 나선 이유였다.

    “안 어울리게 깊숙이도 숨었네, 얘네들은.”

    수수료 장사를 하는 오크들에게 금액은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

    애초에 뒷세계에 떠도는 금화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떳떳한 금화보다 더러운 금화가 더욱 많은 게 아르카나 대륙이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닐 테지.

    이렇게 꼭꼭 숨은 것도 이해가 간다.

    ‘굳이 나설 이유가 없다는 거야.’

    오크들은 이미 부유하고, 부를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충분했다. 더욱이 아르카나 대륙을 지키기 위해 나설 명분조차 없었으니. 지하도시를 세워 처박힌 것도 현명한 판단이었다.

    한 가지만 빼고.

    “근데, 그 머리카락을 건드린 건 실수야.”

    까앜─

    광산은 외관상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광산 어귀를 지키고 있는 건 녹색 피부의 오크만 아니었다면.

    키치는 곧바로 다가가려다가 멈칫했다.

    이런, 당장은 소란을 자제할 필요가 있겠는데……?

    저벅저벅.

    꽤나 외진 지역에선 들리기 힘든 인기척이었다. 키치는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놀랐다. 저런 사람이 왜 이런 동네를 혼자 싸돌아다니고 있어……?

    베일로 덮은 얼굴.

    길게 늘어진 하얀 의복.

    저건 누가 봐도 성직자의 모습이었다.

    얼굴을 가린 걸 보면 교단의 자매님이 확실한데…….

    겁이 없는 건가, 신앙심이 지나치게 독실하신 건가.

    이런 아르카나 대륙을 혼자 떠돌다니.

    키치는 곧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내가 신경 쓸 처지는 아니지.’

    키치가 손에 쥔 비수를 치켜세웠다.

    “가냘프고, 연약하고, 잘 취하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나부터가 흉악하고 우락부락한 오크들이 가득한 광산에 혼자서 진입해야 하니까.”

    그림자 용병단원이 들었다면 코웃음도 치지 않을 농담.

    키치의 발언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물론, 키치에게도 설득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터벅터벅.

    잠입 따윈 없다.

    대놓고 광산을 향해 접근하는 키치였으니까.

    “!!”

    경계를 서던 오크들은 곧장 반응했다.

    철컥!

    무기를 치켜들었다가 키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라서 물었다.

    “혹……. 그림자 용병단 키치 단장님 아니십니까?”

    극진한 존댓말로.

    아르카나 대륙 뒷세계를 장악한 오크들이라고 한들.

    그림자 용병단은 뒷세계라는 무대를 넘어서 양지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그림자 용병단의 단장 키치가 다짜고짜 비수를 뽑고, 자신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고운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죄, 죄송합니다. 그 외관이 이전과 눈에 띄게 달라지셔서 곧바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거듭 사과드리겠습니다!”

    “그거, 내가 못 보던 사이 늙었다는 소리?”

    “아, 아닙니다! 단지 머리카락이 짧아지셔서……!”

    “땡. 그것도 오답.”

    “……!!”

    기분이 좋지 않으시구나.

    더는 말을 섞어봤자 좋을 게 없겠구나.

    용건부터 전하자꾸나.

    오크들이 빠릿빠릿하게 무기를 내리고 입을 열었다.

    “혹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바로 상부에 전하겠습니다!”

    “울리취에게 찾는 물건이 있다고 전해.”

    “현재 옥션은 영업 중지 상태지만……. 키치님의 요청이라면 울리취 님께서도 분명 양해해 주시겠지요. 곧바로 이야기를 전하고 오겠습니다.”

    “아, 한마디 덧붙여줄래?”

    “물론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금화는 한 푼도 못 줄 것 같다고.”

    “……혹시 돈이 부족하신 것인지?”

    “아니, 그놈의 긍지 때문이야.”

    ……긍지가 뭔데요?

    키치의 말에 오크의 낯빛은 더욱 푸르게 물드는 듯했다.

    오크,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에 믿는 게 금화밖에 없는 존재들이었거늘.

    물건을 찾아왔다면서도 금화를 한 푼도 내어줄 수 없다니.

    그제야 키치가 다짜고짜 무기를 치켜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울리취 쪼잔한 영감탱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오크 병사가 질끈 눈을 감았다.

    ‘젠장, 피바람이 불겠구나.’

    *

    여신교단.

    여신 재림 지파 소속.

    성녀, 프레이자.

    프레이자는 어둠의 근원을 향해 발을 멈추지 않았다.

    제국의 풍경은 낯설었다.

    아무래도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이리라.

    그러나 프레이자의 공허한 눈은 어떤 것에도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저 아르카나 대륙을 뒤덮었던 어둠을,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여신의 이름으로 정화하기 위해 걸음을 내디딜 뿐.

    “…….”

    이윽고 그나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이었다.

    프레이자는 그쯤에서 두 손을 모아서 기도를 올렸다.

    “여신의 인도로 이곳까지 도달하였습니다.”

    프레이자는 작게 심호흡했다.

    어둠은 안토니움에서 시작된 것 같았으니.

    안토니움은 분명, 멀쩡하지 않으리라.

    어둠에서 흘러나오던 감정은 일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더욱 밀접한 거리에서 더욱 짙은 슬픔에 노출되었을 안토니움의 백성들은 지금쯤…….

    프레이자가 말을 이었다.

    “여신이여, 가엾은 이들을 보살펴 주소서.”

    프레이자는 여신교단을 상징하는 팔각형 문양이 새겨진 펜던트를 굳게 쥐었다. 안토니움에 가까워지는 순간, 어디서 어둠의 근원이 자신이 습격할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언제든 심판할 수 있게 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문을 열어라!”

    안토니움의 성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경비병의 목소리였다.

    슬픔이나 피폐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이런, 여신교단 자매님이 아니십니까? 뮤온조차 온전치 못한 지금 혼자서 대륙을 돌아다니시다니요? 어찌 됐든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프레이자는 경비병의 안내로 안토니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직면했다.

    예상과는 너무 달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인 안토니움의 풍경과.

    “촌에서 오셔서 그런가, 세상 물정을 모르시네요.”

    “글쎄요, 촌이라면 촌이겠지요? 혹 부족하다면…….”

    “아뇨, 아뇨! 부족한 게 아니라 세상에 세 사람 음식값으로 금화를 내미시는 분들이 어디에 있으신가요! 분명 대륙 서쪽……. 그 어디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막시마의 영지입니다.”

    “그래요, 막시마! 어딘진 몰라도 그 동네 장사꾼들이 참 부럽네요. 한 달이 뭐야? 이틀만 거기서 장사해도 저희 같은 서민들은 평생 먹고 놀 수 있을 정도로 벌겠어요.”

    활기를 넘어서 왁자지껄하다.

    안토니움의 주민이 아닌 외부인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보인다.

    과거, 프레이자가 기억하던 안토니움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어쨌든, 금화를 거슬러 줄 잔돈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으니까. 일단, 그냥 가셔요. 그래도 은화 정도는 거슬러 드릴 수 있으니까. 금화가 은화로 거슬러졌을 때 그때 오시든가요.”

    “그건 외상이 아닙니까? 폐를 끼칠 순…….”

    “뭐가 그럴 순 없어요! 금화도 모자라서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다니시는 기사님들이 고작 음식값을 떼어먹는다고 하면 우리 집 개도 웃을걸요?”

    낯설 정도로 온화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 깔렸었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프레이자에겐 이유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으니까.

    제 발로 다가오기 시작했으니까.

    그 어둠의 근원이.

    꾸욱─

    프레이자는 의문 속에서 펜던트를 쥐었다.

    이윽고, 어둠과 마주했다.

    그 형태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베일로 눈을 가린 탓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어둠의 근원이 모습을 드러냈을 터인데.

    오히려 백성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프레이자가 읊조렸다.

    “여신이시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심판에 앞서 저를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기도를 올렸다.

    이내, 펜던트가 여신의 철퇴로 변하고.

    언젠가 필히 대륙을 깊은 슬픔에 빠트릴 저 어둠의 근원을.

    여신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했거늘.

    어째서……?

    펜던트는 그대로였다.

    여신의 힘이 깃들지 않았다.

    여신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었다.

    프레이자는 떨리는 눈으로 베일 너머 어둠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아니, 어둠 그 자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사내를.

    .

    .

    .

    유감스럽게도.

    당신네 여신님께선.

    그쪽보다 날 더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종교, 여신교와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 또한 없다.”

    -“하찮은 악마 따위가 증거가 될 순 없으니까.”

    무교라는 사실을 거창하게 밝히고.

    궤변으로 여신교단 성기사단을 이끌었던 뮤온 업데이트.

    그런 나의 행보를 요약한.

    하이라이트 영상의 넷튜브 조회수가 무려 21억 4천만.

    ‘수지타산이 맞나 싶기는 한데…….’

    어쨌든, 그 수치심이 이렇게 보답받기 시작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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