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화. 족쇄는 사양하마
용성락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리고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짐작하셨다시피 저는 천하통일 소속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 시야는 류오쥔춘, 녀석에게 공유되고 있습니다. 이 눈을 대가로 바친 계약의 효과입니다.”
그의 손가락이 안대를 가리킨다.
‘그냥 누구처럼 취향이 독특한 줄 알았는데.’
류오쥔춘이 원흉이었군.
뒤가 구린 짓만 하고 다니던 전적은 어디로 가지 않는 법이지. 아무리 그래도 자기 길드원 눈을 제물로 바쳐서 아르카나 대륙 상황을 살필 줄이야.
“솔선수범도, 긍지도 보이지 않는군.”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다.
용성락은 눈치가 빨라 보였다.
그러니까 전장에서도 그런 말을 뱉었던 거겠지.
물론, 풀네임을 언급할까 봐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걸 용성락이 알아차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묻지 않아도 솔직하게 먼저 털어놓는 시점에서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용성락이 말을 이어나간다.
“대륙 진입, 대의적인 목적은 아르카나 대륙으로 천하통일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만……. 류오쥔춘의 세뇌에서 벗어나고 보니 아니었습니다. 류오쥔춘은 그저 독식할 생각뿐이었습니다.”
부르르─
용성락이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세게 쥔다.
상사에게 쌓인 게 많은 건가, 사회인답군.
“그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닌 폭군이니 말입니다.”
폭군이라.
이어지는 구체적인 말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아무래도 류오쥔춘은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군주]에서 [폭군]이라는 클래스로 전직한 모양이었다.
“저는 농락당하면서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제 하찮은 목숨이 주군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목숨 따윈 몇 번이든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쉽게 말해 폭군은 군주보다 더한 남의 고혈만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클래스라는 것이었다.
류오쥔춘은 효과적으로 고혈을 빨기 위해 용성락을 비롯한 길드원들을 아르카나 대륙이라는 사지로 내던진 거고.
‘악마 들렸네, 진짜.’
기본적으로 인간에겐 한없이 자비로운 그랑펠이다.
왜, 조금 전 이그나이트 막시마를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냐?
그 과정이야 어쨌든 결국, 4가문은 용서를 받았으니까.
하지만 자비로운 그랑펠조차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이 있었으니.
일단, 그 첫 번째는 레이먼 션이었다.
물론.
‘그 자식은 나도 용서 못 하지.’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풀네임 하나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그런 레이먼 션 다음이 악마와 다를 바 없는 만행을 저지른 인간들이다. 무간에서 최후를 맞이한 악마 숭배자와 같은 녀석들 말이야.
나의 입이 냉랭한 말을 뱉어낸다.
“그대 덕분이군.”
그렇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건 악마와 다를 게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심지어 생판 남도 아니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를 속여서 제물로 바쳐?
“……덕분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용성락의 반문에 나는 답했다.
“사냥감이 하나 늘었으니, 그대 덕이 아니겠는가.”
축하한다, 류오쥔춘.
넌 지금 레이먼 션에 이어 두 번째 사냥감으로 공인을 받았다.
보자,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 네게 전해줘야 할까?
생각하던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니 고개를 들게.”
“……네?”
용성락은 흠칫하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호열 성전 연합군 총대장님에게 제가 알고 있는 천하통일의 전부를 드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게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걸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응?
아니, 누가 들으면 내가 사람 잡으려고 한 줄 알겠네.
내가 악마는 쥐잡듯이 잡아도.
멀쩡한 사람을 잡진 않는다니까 그러네?
빠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제가 이호열 총대장님과 독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놈이 알게 된다면……. 녀석은 제가 알고 있는 정보가 무의미해지게 손을 쓸 겁니다. 류오쥔춘은 비열한 만큼 치밀한 사내니까요.”
거기까지 듣고 나니까.
용성락이 아까부터 내 시선을 피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확실히 류오쥔춘 정도로 뒤가 구린 작자라면, 유출된 정보를 역이용해서 계략을 꾸밀지도 모르겠지.
그러나.
“그런가?”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
“그럼에도 그대는 꼿꼿해야 한다.”
“……!”
그랑펠의 긍지가 어디 그냥 긍지냐.
류오쥔춘, 그를 사냥감이라 여긴 이상.
악마 앞에서 꺾이기는커녕.
더욱 고고해지는 긍지가 도지게 되는 건 예상된 일.
이윽고, 나의 단호한 태도에 마지 못해서 고개를 드는 용성락.
나는 그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화를 나눌 땐 상대와 눈을 맞추는 게 격식인 법.”
“저, 저는 단지…….”
“또한 지켜보고 있다면 쓸데없는 수고를 던 셈 아니겠는가.”
“……수고라니요, 무슨 뜻이십니까?”
이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사냥감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 될 테니까.”
우리 서로 주제 파악은 똑바로 해야지?
나는 사냥꾼이지, 쫓기는 사냥감이 아니었으니까.
사냥감에 정보를 수집할 정도로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달칵─
나는 용성락을.
정확하게는 용성락의 동공 너머에 있을.
류오쥔춘을 바라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나도 다 경험해 봐서 아는데 말이야.’
마탑, 성전 연합군, AAU 유스라 지부, 악크샨…….
수많은 직책을 짊어지게 된 나였다.
덕분에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거 쉽지 않을걸?’
어떤 정보가 유출됐을 줄 알고 역으로 함정을 팔 건데?
말이 쉽지, 그거 보통 일이 아닐걸.
그래, 나는 경험을 이용해 류오쥔춘을 엿 먹일 생각이었다.
‘쨌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봐라.’
내가 용성락과 찻잔을 기울이면서 천하통일에 관한 기밀 정보를 엿듣고, 천하통일의 약점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리라고 실컷 착각해라. 개수작이든, 함정이든 파놓고 기다려 보란 의미다.
‘내가 어디 함정으로 가나 봐라.’
그 개고생은 헛고생이 될 테니까.
사냥감을 대하는 그랑펠의 방식이야 그동안 봐서 알고 있잖아?
정편돌파.
함정이고, 뭐고.
통째로 날려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니 내가 용성락과 나눌 화제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찻잔을 받아 든 용성락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연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는 침묵을 지키겠습니다. 이호열 총대장님께서 다시 필요로 하실 때까지. 천하통일의 기밀도, 오늘 제가 눈으로 지켜본 광경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거기엔 내 풀네임도 포함이겠지?
‘귀로 들은 것도 떠들지 않아야 할 텐데.’
용성락에게 확언을 받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쪼잔한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것도 항상의 자세였으니.
나는 그저 애꿎은 찻잔만 기울였다.
……오늘따라 녹차가 씁쓸하구만.
.
.
.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의 연속이다.
물론, 이놈의 철면피.
그러한 자리에서도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고 있으니 덕분에 아주 그냥 훤히 보인다.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이그나이트 막시마를 제외한 4가문의 가주들.
그리고 그들이 끌어내리려고 했던 황제의 얼굴이.
정적만 흐른다…….
대충 보아하니 서로가 서로를 불편해하는 눈치다. 4가문이야 반란에 실패한 역적들이니 할 말이 없다고 치더라도, 황제 또한 승리했다고 마냥 기세등등할 수 없겠지.
‘세릭로즈 황가와 4가문의 관계를 고려하면 당연한 반응이야.’
제3자로서.
그리고 불편한 정적을 참을 수 없는 사회인으로서.
나라도 뭐라 말이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거늘. 나불대기 좋아하는 주둥이라고 해도, 남의 눈치에 휘둘려서 움직이진 않는 비싼 주둥이였으니.
결국, 먼저 침묵을 깬 건 황제였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감사 인사인 줄만 알았다.
클라우디 가문의 사정이든 어쨌든.
나는 또 한 번 제국을 구원해 낸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황제의 얼굴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했다.
“흑암룡께서 모험가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도중에 저는 4가문의 가주들에게 전후사정을 전해 듣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짐을 짊어지고 계실 줄이야……. 미련한 저는 하나만 알지, 그 이상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세릭로즈 황가를 대표해 사죄드리겠나이다.”
……아니, 당신들 그걸 그새 말했어?!
가주들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거야 이해가 된다. 잠깐, 반기를 들었다고 해도 결국 4가문은 클라우디를 진심으로 섬겼던 이들이었으니까.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 해도 갑작스럽잖아?’
황제에게 어떤 말을 전한 건진 묻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됐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
4가문의 주인이 클라우디 가문이라는 것.
그거는 확실하게 말했겠지.
‘……잠깐만, 그럼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거냐?’
제국의 주인, 세릭로즈 황가가 4가문을 섬기고.
그 4가문은 클라우디 가문을 섬겼으면.
세릭로즈는 클라우디 가문의……?
머리를 굴리던 중 황제가 타이밍 좋게 말한다.
“흑암룡이시야말로 진정한 제국의 주인이시겠지요.”
내가 제국의 진정한 주이이이인?!
정말 미안하지만, 그런 거까지 떠맡을 생각은 없거든.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란 모양인가.
황제가 멈칫하더니 말을 고친다.
“아니, 더는 이명으로 호칭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라우디의 가주시야말로 제국을 넘어 대륙을 바로 세우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힘들다, 진심으로.
용성락도 모자라서 황제까지.
오늘 나한테 왜 그러냐 다들?
그러나 나의 내적 한탄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으니.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사고 쳐놓고 모른 척하네, 저 양반들.’
유그릭, 캔설, 아카몬드.
세 가주의 부담스러운 눈길을.
저 기대감 넘치는 눈빛들은 정말로 내가 제국을.
황제의 왕좌에 앉기를 바라는 눈빛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떠맡을 것 같냐?
‘지금만 해도 충분히 고통스럽다고.’
아까도 언급했지만.
마탑의 수석부터 시작해서 AAU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 부활한 악크샨의 지도자-유일한 악마 사냥꾼이니 말단 겸 지도자였다- 감투까지 짊어지게 된 나였다.
그런데 뭐, 황제?!
백번 양보해서 태평성대 시절의 제국이면……. 내가 너그럽게 고민이라도 해본다. 하지만 지금의 제국을 떠맡았다간 황금보다 귀중하다는 티타임을 즐길 여유도 없어질걸.
그러니 나는 답했다.
“유감스럽게도 그럴 일은 없을 걸세.”
“그런……!”
말꼬리를 흐리는 황제는 물론이요, 가주들까지 충격적인 표정을 짓는다. 나한테 뭘 기대한 거냐, 대체? 따져 묻고 싶었지만, 입방정이 곧장 말을 잇는다.
“나에게 왕좌나 왕관은 구속에 불과하다.”
“……!!!”
단 한 줄로 답했지만 담긴 뜻은 명확하다.
내가 클라우디의 가주이고.
모든 걸 관조하는 흑암룡이며.
그게 바로 대륙의 실질적인 주인인데.
뭣 하러 더 작은 그릇인 제국에 묶여있어야 하냔 의미였다.
“이런…….”
황제야 그랑펠식 화법에 익숙해질 법도 하니까.
곧장 알아듣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만.
4가문도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는 건가.
슥─
황제와 동시에 내게 고개를 숙인다.
“송구합니다,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불편한 회담은 내가 불편한 사과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어쨌거나 뒷수습은 대충 끝난 건가.’
사실 낯부끄러운 풀네임이 까발려진 상태에선.
뭘 해도 손해를 본 것 같은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별수 있겠냐.
또각─
이윽고 나는 황제의 테라스로 향했다.
황제가 아닌 비선 실세로 황궁을 마음대로 쏘다니고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드넓은 황궁에 내가 알고 있는 장소가 테라스밖에 없어서였다.
‘그리고.’
펄럭─
테라스에 들어서자 바람에 재킷이 나부낀다.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 사이로 안토니움이 보인다.
불과 방금까지 적합한 마력에 뒤덮여 있었을 안토니움의 전경이.
나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놈의 긍지라면 이렇게 책임감에 시달릴 게 뻔했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만류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냐고. 나의 빈정거림에도 주둥이는 황제와 가주들을 대하던 것과 다르게 침묵을 지켰다.
“…….”
황제의 말에 따르면 안토니움에 후폭풍이라 할만한 일은 없었다고 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흑화를 다시금 곱씹고 있자니 문득, 점멸하던 퀘스트에 생각이 닿았다.
보자, 그것도 무려 월드 퀘스트였지 않았나?
이름부터가 비범했던 게 더는 확인을 미뤄선 안 될 퀘스트겠지.
나는 곧장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월드 퀘스트 : 재림의 성녀]
그리고 흠칫했다.
……잠깐만, 여신교단의 성녀라고?
프레이자?
‘어째 눈에 익다 했더니…….’
그거 여신교단 성지 뮤온이 현실에 업데이트 됐을 때.
뮤온을 집어삼키려던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가 사칭하던 가명이잖아?
근데, 뭐야.
그 성녀가 실존인물이었어?
대격변도 모자라서.
흉조로 아르카나 대륙이 다시 한번 뒤집힌 상황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여신교단의 성녀가 어째서.
─성녀, 프레이자의 심판으로부터 생존하라. (진행 중)
날 심판하겠다는 건데……?!
이건 아무리 봐도 흑화로부터 비롯된 오해가 분명했다.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누구’께선 자신을 향한 사소한 오해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그야말로 칼 같은 긍지의 소유자이셨으니.
결국.
“여신이라. 증거가 부족했던 모양이군. 그렇다면 다시금 증명해 주마. 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믿음을. 그러니 그대 또한 증명하도록 하여라.”
잠잠하던 입방정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물론, 나의 검증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