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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29화 (329/489)

◈ 329화. 재해 레벨 : 클라우디 (2)

안토니움의 성벽 위.

평야를 바라보던 병사들이 탄식을 삼킨다. 결국에는 적들이 몰려오고 말았다. 결국에는 흑암룡, 그가 다시금 제국을 지키기 위해 홀로 출두하고야 말았다.

우두커니.

평야에 홀로선 호열을 향해 달려드는 적군.

아무리 흑암룡이라고 한들.

“정말 승산이 있는 겁니까, 장군?”

“…….”

지켜보는 이들은 우려를 감출 수 없었다.

머지않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타고 오르는 미약한 진동.

그와 동시에 호열을 중심으로 피어오르는 거대한 흙먼지.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젠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쉬 경,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겁니까?”

“재촉하지 말아보십시오. 나도 애쓰고 있습니다!”

애꿎은 마도구를 세게 쥐어보아도 시야는 바뀌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조금 더 세게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무는 것뿐.

마지막 순간, 모두가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두머리들이 움직였다.’

‘어떤 대화가 오갔길래, 곧장 적장들이 나선 거지?’

‘저들이 합공을 퍼부었다면…….’

흙먼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불길한 생각이 싹튼다.

호열이 쓰러진다면 그다음은 안토니움의 차례가 될 터.

흑암룡조차 막지 못한 적을 우리가 어찌 막아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이대로 흙먼지가 걷히지 않았으면 좋겠건만.

스스스─

커져가는 불안과 반대로 먼지는 바람에 씻겨나갔다.

집어삼키고 있던 전장의 풍경을 뱉어냈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전장에는 지켜보던 안토니움의 모두가.

황제조차도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무, 무릎을 꿇다니?”

안토니움조차 믿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

“어째서……?”

그 광경이 코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전장의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구도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누구도 곧장 사태파악할 수 없었으니까.

“……어째서 가주님들이?”

찬란한 은색의 머리칼.

얼음장처럼 흰 피부.

그 아래로는 갑옷도 아니요, 연회복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옷을 걸친 사내 앞에 머리를 조아린 채 무릎을 꿇고 계신단 말인가? 가주들을 믿어 의심치 않던 충신들일수록 그 충격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머리를 굴리던 이들이 결론을 내놓는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막시마 가문.

황금 정예병이었다.

스릉!

그들이 예리하게 제련된 황금의 검을 치켜든다.

이그나이트 막시마, 그는 대륙 모든 부를 거머쥔 막시마의 가주다. 그가 타인에게 굴복하여 자신의 의지로 무릎을 꿇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같잖은 속임수에서 가주님을 구하라!”

유그릭, 캔설, 아카몬드.

나머지 세 가문의 충심도 막시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설령 이름과 축복을 박탈당했다고 한들.

이러한 세력을 일궈낼 수 있었던 건 자신들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마치 4가문이 윽박지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쿠드드득─

그들의 주인은 몰라도, 4가문의 화신들에겐 후손의 과오를 용서할 뜻이 없었다. 갈라진 대지,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던 화신들이 클라우디 앞에 조아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흠칫하는 이들이 있었다.

“……잠깐.”

조각상의 외관이 낯설지 않다.

아니, 그걸 넘어서 낯이 익다.

가장 먼저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

유그릭 가문을 섬기는 태양과 달의 쌍둥이였다.

“유그릭……?”

──────

유그릭의 너그러운 자비는 상처 입은 이들은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설령 그것이 하늘에게 버림받아 상심한 태양과 달의 쌍둥이라고 할지라도…….

──────

조각상은 틀림없이 유그릭이었다.

오래전 숨을 거두어 영지 아래에 묻힌 유그릭. 그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이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자 쌍둥이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초상화에서 봤던 얼굴이야.”

“뭐라고?”

“선대, 그것도 시조님의 조각상이 확실해……!”

4가문의 모두가 조각상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빠진 가주를 구하겠다, 타오르던 충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사내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제를 망각했다면 상기시켜 주겠다.”

-“맞이하라.”

-“내가 그대들의 주인이다.”

그 허풍이 진실이라고 가정하자…….

“……!”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4가문의 가주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도, 4가문 시조들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것도…….

절레절레.

‘아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떨쳐내려 고개를 저어봐도 머릿속은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은 그들이 고뇌하는 와중에도 흘러가고 있었으니.

“…….”

전장에는 오직 미묘한 침묵만이 맴돌고 있었다.

이내,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향하고야 말았다.

이 정적을 깰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호열을.

*

절차에 따라 모든 걸 박탈당한 지금.

4가문의 가주들은 클라우디와의 군신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말 한마디면…….

이렇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단 거지.

봐봐, 내가 괜히 혼자 나선 게 아니거든.

‘하지만, 병사들은 내 하인이 아니니까.’

누군가는 묻겠지. 그냥 4가문의 가주들에게 병력을 멈추라고 명령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나, 이호열이었다면 서슴없이 그렇게 했을 거다.

‘사회생활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냐?’

하지만 우리 고귀하신 그랑펠님께서 하청에 하청을 용납할 리가 있으랴. 심지어 병사들이 4가문을 섬기리라 결심한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 긍지가 깃든 선택이 있었을 터. 자신의 긍지만큼 남의 긍지도 간과하지 않는 게 우리 그랑펠님이시다.

‘역시, 아군이 있으니까 든든하네.’

내가 이럴까 봐 조각상, 화신들의 도움을 흔쾌히 받아들인 거다. 거기에 더해 나보다도 가문의 어르신들이 꾸짖는 게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았거든.

‘나는 가주들만 신경 쓰면 된다.’

사실 이쪽만 신경 쓰기도 벅차다.

군신관계에 따라서 상태이상, [복종]으로 무릎을 꿇려두기는 했다만.

언뜻 봐도 표정들이 살벌한 게 장난이 아니었거든.

하지만 내가 바득바득 이를 가는 상대를 피하는 성격이냐. 오히려 정면으로 들이받아서 그 이빨을 모조리 부러트려도 이상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가 나란 말이다.

또각─

그러니 나는 지체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병사들을 지나쳐 무릎 꿇은 가주 중 하나를 향해 다가갔다. 우람한 덩치, 황금으로 치장한 갑옷, 결정적으로 휑하게 비어버린 투구의 정중앙.

외관만 봐도 정체가 짐작된다.

‘막시마로군.’

구체적으로 설정을 짰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만?

나는 조금 전 시스템 메시지에서 봤던 이름을 내뱉었다.

“이그나이트, 그대에게서 박탈한 성은 생략하지.”

지금도 봐봐.

이그나이트 막시마.

풀네임을 불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아주 그냥 첫마디부터 바가지를 박박 긁는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말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야 괘씸했거든.

야심까지 뭐라 탓할 생각은 없다만. 이런 타이밍에 황제 자리를 빼앗겠다고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건 진짜 긍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나는 가감 없이 심정을 표출했다.

“과거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추악함만 남았구나.”

“……!”

“세월을 탓할 생각은 마라. 그대의 변심은 오롯이 그대의 과오다. 그리고 나는 그대의 잘못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그대의 주인이지.”

마탑 토파즈 홀.

정기 학회에서 앞서 이뤄지는 사전 검증.

그때마다 쥐잡듯.

숙련 마법사들을 괴롭히던 나의 혓바닥이 독설을 내뿜는다.

“……!”

어깨가 들썩거리는 게 속으로 쌍욕을 하고 있구만.

내가 허락하지 않아 복종 상태의 이그나이트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반성은커녕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어쨌든 악마는 아니니까.’

인간이라면 언제든 개과천선할 수 있다고 믿는.

아직도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 찬.

순수한 그랑펠 때문에라도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변론할 기회를 주겠다.”

“……커헉.”

그러자 이그나이트가 가쁘게 심호흡했다.

이내, 고개를 꼿꼿하게 치켜들고.

나와 시선을 맞췄다.

*

-“……절대로 그와 엮여선 안 된다. 훗날 혹시라도 마주하게 된다면, 절대로 고개를 치켜들지 말거라.”

비로소 아버지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

육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말을 듣지 않는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리라.

스산한 바람에 하늘거리는 은빛 머리카락.

기품이 흘러나오는 행동.

만물을 내려다 살피는 시선까지.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라우디.

그 자체라 여겨지는 사내의 앞에서.

마지막으로 변론할 기회를 주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그나이트는 발끈했다.

과거의 망령이 같잖은 속임수로 『미다스의 보석』을 앗아간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진짜로 주인 행색까지 하려고 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시선을 마주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이그나이트는 분통을 터트렸다.

‘녀석들, 황금 정예병은 무얼 하고 있단 말이냐?’

젠장.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부하들을 신뢰한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러나 이그나이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세포가 보내는 경고를 무시했다.

그랑펠, 주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기어코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주인 행세를 하려 들겠다는 건가? 웃기지도 않다! 위대한 가문? 클라우디, 네놈들의 위상은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물론. 추잡한 뒷세계에서도 걸레처럼 나뒹군 지 오래다!”

도발이었다.

동시에 자신에게 내지르는 윽박이었다.

나는 절대로 클라우디에게 굴복한 게 아니다.

이그나이트가 힘을 쥐어짜 말을 잇는다.

“보아라! 4가문의 가주였던 우리를 제외하고, 전장의 누구도 클라우디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가문? 그러한 명성이 이리도 새까맣게 잊히는 게 그대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제국조차도, 황제조차도 네놈의 가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그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 건.

전장에서 유이한 플레이어, 용성락이었다.

……뭐지?

이호열.

그의 뒤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온다.

……저, 저게 뭐야?

잘못 본 것인가.

애꿎은 눈가를 비벼볼 정도로 ‘검은 무언가’가.

의문에 대한 답은 시스템 메시지가 내놓았다.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이 한없이 깊은 어둠에 휩싸입니다.]

“……!”

어둠이 안토니움을 뒤덮는다.

[제국이 한없이 깊은 어둠이 휩싸입니다.]

아니, 제국을 뒤덮는다.

그럼에도 퍼져나가는 어둠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지막으로 용성락의 눈앞이 점멸한다.

[아르카나 대륙이 한없이 깊은 어둠이 휩싸입니다.]

“……!!!”

*

질식할 정도로 짙은 적합한 마력.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내가 아닌.

“이그나이트 막시마.”

“……?”

“이제부터는 한 마디, 한 단어, 한 음절에 신중을 기해라.”

“……!”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대의 존재를 부정할 테니.”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목소리가.

“그 저열한 입으로 나의 누이를 모욕한 각오는 되었나.”

[상태이상, ‘흑화’가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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