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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28화 (326/489)
  • ◈ 328화. 재해 레벨 : 클라우디 (1)

    용성락이 천하통일에서 두각을 드러낸 건 대격변 이후였다.

    류오쥔춘의 세뇌 때문이든, 아니든, 스스로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용성락은 아르카나 대륙에 버려져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하지만 신념으로 빛났던 용성락의 동공엔 절망이 깃들었다. 그렇다. 용성락, 그가 자신만큼이나 신뢰하던 시스템 메시지가 선고를 내렸으니까.

    ‘마, 말도 안 돼.’

    이호열, 그는 감히 가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가 출현합니다.]

    긴 풀네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보이는 건 오직 클라우디.

    그 한 단어.

    그 단어가 눈앞의 사내가 이호열임을 확인시켜 준다.

    용성락에게 질문이 던져진다.

    “저 사내가 클라우디를 자처하는 모험가인가요?”

    레텔의 물음에 용성락은 신경이 곤두섰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거냐……?’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용성락은 지금과 같은 전쟁 퀘스트를 몇 번이고 경험했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낮았던 레벨 탓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냥은 몰라도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란 걸.

    일반적인 사냥이 아닌 보스 레이드도 마찬가지다.

    설령 솔로 레이드에 성공했다고 한들.

    결국, 몬스터에겐 특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패턴만 파훼한다면 보스몹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뜻.

    그러나 전쟁은 다르다.

    플레이어가 서로 뒤엉켜 싸우는 전장에 정해진 패턴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간혹 두각을 드러내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체계적인 전술에 곧장 제압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나만 해도 그런 역할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클래스, 봉쇄자.

    용성락은 자신의 양 팔뚝에 감긴 사슬을 바라봤다. 사슬을 통해 적에게 디버프를 걸고, 적과 자신을 연결해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게 봉쇄자의 전투방식이었다.

    제 아무리 이호열이라고 해도.

    전장에서 자신의 클래스까지 신경 쓸 순 없을 터.

    여차하면 기여도 포인트를 획득하기 위해 눈치를 보다가 이호열에게 사슬이라도 걸쳐볼까. 진담이 반쯤 섞인 농담을 머릿속에 되뇌었던 용성락이었다.

    그런데, 출현 메시지라니.

    뒤늦게나마 미친 생각이었단 걸 깨닫게 됐다.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

    “듣고 있나요, 모험가?”

    이런 상황에서 이름이나 묻고 있다니.

    정말로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냐?

    용성락은 입안에서 빠득 이를 갈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모험가, 이호열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는.

    “클라우디, 그중에서도 그랑펠을 자칭하는 작자는 누구일까 생각했더니. 나름대로 치밀하게 흉내를 낸 모양이야. 빛나는 은발과 뿜어져 나오는 후광은 내 상상 속의 클라우디 그 이상인걸.”

    감히 이호열을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럴 때가 아니다.’

    용성락은 결론을 내렸다.

    전장에서 출현 메시지가 출력될 정도의 전력 차.

    해박한 플레이어의 지식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카몬드는 물론이요, 4가문엔 일말의 승산도 없다고.

    지금껏 용성락을 살아남게 해준 머리가 답을 내놓는다.

    ‘지금이라도 갈라서야 해.’

    눈치를 보다가 도망치든가.

    불가능하다면 이호열에게 머리를 처박고 빌든가.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용성락은 간과하고 있었다.

    “모두 준비하도록 하세요.”

    ●아카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하라. (성공)

    “?!”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시스템 메시지는 절대적.

    자신은 이미 레텔 아카몬드의 손등에 입을 맞췄고.

    그 행동으로 충성을 맹세했다는 사실을.

    철렁─

    용성락이 머뭇거리며 사슬의 매듭을 푼다.

    ‘젠장!’

    할 수만 있다면 출현 메시지를 레텔의 면상 앞에 띄워 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능할 리 없다.

    결국, 용성락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말았다.

    동서남북.

    4가문의 가주들이 개전(開戰)을 알렸다.

    “진격하라.”

    “과거의 망령을 찢어발겨라.”

    “짓밟아라. 제국은 우리의 것이다.”

    허나, 그들 모두가 간과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들은 명령을 ‘내릴’ 위치가 아니란 것을.

    4가문, 가주들의 음성에 공백이 스며든다.

    “나, 이그나이트 □□□……?!”

    “□□□의 이름으로……!!”

    “□□의 전사들이여……?”

    “□□□□. □□□□? □□□□……!!”

    레텔이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캑캑거린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아카몬드’.

    가문의 이름, 자신의 성만큼은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마력 반응은 느껴지지 않사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농간이랍니까?”

    가신과 병사들이 웅성거린다.

    “……동요하지 마세요.”

    그때까지도 레텔은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클라우디를 사칭하는 녀석답게 희한한 수작을 부린다고 여겼다.

    이래서 모험가라는 족속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진군하도록 해요.”

    그러나 그 또한 오판이었다.

    기대를 배반한 하인들에게.

    그들의 주인은 자비를 거둔지 오래전이었으니까.

    전장의 중심.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선 호열을 향해.

    사방의 병사가 돌진했다.

    두구두구두구두─!

    “!!!”

    그와 동시에 대지가 진동한다.

    병력의 기세가 대지를 뒤흔들 정도여서인가?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다.

    두드득콰드득두드득─!

    “……따, 땅이 움직인다!!”

    대지가 요동친다.

    그대로 무너지거나.

    그대로 솟아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무슨 수작을……!”

    진군하던 병사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일한 적을 향한다.

    그러나 사내에겐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예측했다는 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

    표정에도 일말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 평정심이 진격하던 병사들에겐 오히려 동요를.

    ‘……녀석의 수작이 분명하다.’

    ‘마법인가? 말도 안 돼. 탐색, 간섭 과정은 포착되지 않았는데?’

    ‘애초에 팔짱을 낀 채로 마법을 발현하는 건 불가능해!’

    플레이어인 용성락에겐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서, 설마?’

    보스급 몬스터가 필드를 변형시키듯.

    이호열도 전장을 주무르고 있는 건가?

    일개 플레이어가 그런 걸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아니, 그럴 순 없어.’

    용성락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이호열이 아닌 레텔, 정확하게는 4가문을 향해서.

    “부디 앞서서 길을 열어주십시오, 가주들이시여! 우리는 당신들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고기 방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신만만한 태도의 이유를 증명해라.

    진정으로 군주가 되길 원한다면.

    아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뒷짐만 지고 있지 말라는 말이다.

    “이호열……. 아니,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가 제국을 지키기 위해 홀로 나선 것처럼 당신들께서도 꺾이지 않는 위세를 증명해 주시옵소서!!”

    술렁술렁.

    용성락의 외침에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그 말인즉.

    병사들이 용성락의 외침에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혼자 뒈질 것 같아?’

    가깝게는 레텔의 시선이.

    멀리서는 나머지 세 가주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을 터.

    그러나 용성락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죽는다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 간절함이 닿은 걸까.

    용성락의 발버둥은 응답을 받았다.

    정적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

    그건 현실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이호열의 음성이었다.

    “용기 있는 자여.”

    “……?”

    마주치는 시선.

    “내가 그대의 얼굴을 기억했다.”

    “……!”

    짧은 대화.

    너그러운 말투로는 보아서는 분명 경고가 아니었거늘. 어째서인가, 용성락의 살갗엔 출현 메시지를 목격했을 때보다 더한 소름이 돋아났다…….

    *

    4가문.

    클라우디의 규율 아래, 이름과 축복을 박탈당한 지금.

    이름조차 내뱉을 수 없어 컥컥거리면서도.

    으리으리한 전력엔 누수가 없어보인다.

    ‘와씨.’

    꺾이지 않는 이놈의 긍지.

    4가문의 주인으로서 사태에 책임을 지겠노라.

    내뱉은 말을 실현하기 위해 4가문 앞에 홀로 서 있는 나였거늘.

    ‘다들 장난 아닌데?’

    이건 [천적관계]가 발동돼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을 전력 차다.

    뭣보다 물량엔 장사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나한테도 믿는 구석이 있거든.’

    나는 격동하는 지반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설마 이번에도 그놈의 건축 마법을 우려먹는 거냐고 지레짐작하겠지. 솔직하게 그동안 하도 날로 먹어서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아니라고.’

    그렇다.

    이 순간, 대지를 뒤흔들고 있는 건 내가 아니다.

    클라우디의 영지를 지키던 4가문의 상징.

    1대들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들이지.

    그 조각상이 어째서 지하에 묻혀있는가, 묻는다면.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가주님.

    그들이 가문의 변심을 차마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디엔드를 통해 못난 후손들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겠냐고, 정중하게 부탁해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죽하면 그런 부탁을 했겠냐 싶어서 수락했고,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그 포탈의 목표 좌표가 바로 발아래.

    안토니움 평야 지하였다.

    그냥 세워두면 어그로가 장난이 아닐 것 같았거든.

    그리고 지금이었다.

    콰드드득─!

    모든 걸 확인했을 조각상들.

    그들의 감정이 발밑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윽고, 결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디 저희의 손으로 가문 역사에 마침표를 찍을 기회를 내려주십시오. 클라우디께서 하사하신 보잘것없는 가문이 마지막 긍지를 지킬 기회를 주십시오.

    [막시마의 화신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유그릭의 화신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캔설의 화신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아카몬드의 화신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쓰읍.

    나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면에 속삭였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 호열아.’

    가장 좋은 건 손 안 대고 코 푸는 거 아니겠냐?

    뭣보다 조각상, 화신들이 잘못한 게 아니니까. 그 후손들이 잘못했다고 선조들의 부탁까지 연좌제로 묵살하는 건 좀 그렇지 않겠어?

    ‘암만 그래도 보험은, 아군은 필요하니까.’

    내가 날로 먹을 가능성까지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진격해오던 병사들 사이.

    어째 낯설지 않은 행색의 사내가 외쳤다.

    “부디 앞서서 길을 열어주십시오, 가주들이시여!”

    뭐, 거기까진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호열……. 아니,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가 제국을 지키기 위해 홀로 나선 것처럼 당신들께서도 꺾이지 않는 기세를 증명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뭐, 뭐라고?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오오오?!

    그쪽은 또 누군데.

    내 이름도 모자라 낯부끄러운 풀네임까지 알고 있는 건데!!

    다행히도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

    곧장 사내가 플레이어란 걸 알아차렸거든.

    내가 알지 못하는 플레이어면 보나 마나 천하통일 소속이겠지.

    나를 제외하고 접속기를 보유한 건 그 녀석들뿐이니까.

    물론,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다.

    ‘천하통일이고 뭐고…….’

    어떻게 그랑펠의 풀네임을 알고 있는 거냐니깐?!

    심정 같아서는 당장 저 주둥이를 틀어막고, 마법으로 기억부터 삭제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랑펠의 긍지가 그런 행동을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게다가.

    ‘쟤네는 또 왜 저래?’

    사내의 절규에 응답한 건가?

    4가문의 가주들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겁도 없이, 내 발밑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당당하게 말이야.

    ‘……어쨌든, 수고를 덜긴 했네.’

    만약, 가주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나는 병사들과의 전투에서 마력이든, 시간이든, 뭐든 낭비하고 말았을 터. 이거, 고마우면서도 찝찝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허나, 속내를 내색할 수 없으니 나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용기 있는 자여. 내가 그대의 얼굴을 기억했다.”

    우리 둘은 나중에 찬찬히 이야기 좀 나누자고, 응?

    내 풀네임을 알게 된 경위부터.

    아르카나 대륙에서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었는지 말이야.

    하지만 그 전에.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흉을 처분할 시간이다.

    나는 시선을 옮겼다.

    내게 다가오는 4가문의 가주들을 향해서.

    클라우디 가문의 설정이 어디 보통 설정이냐?

    당연히 한 명, 한 명이 상당한 실력자일 수밖에 없겠지.

    클라우디에겐 차고 넘치던 콩고물에 불과한 축복이었다고 한들. 오랜 세월 동안 4가문은 누구에게도 위협을 받지 않고 그 세력을 키워왔을 테니까. 후계자들이 저 정도의 능력을 갖추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너희도 알고 있잖아?

    내가, 그랑펠이 절차에 따라서.

    친절하게 양피지에 적어서 보내주지 않았냐.

    압수.

    4가문이 가졌던 모든 것.

    그 전부가 내게.

    클라우디의 이름으로 박탈당해 돌아왔단 사실을.

    그러니.

    쿠구구구구구─

    굉음.

    대지가 갈라지고.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는 4가문의 화신들.

    “!!!!”

    나는 타이밍에 맞춰 입을 열었다.

    “주제를 망각했다면 상기시켜 주겠다.”

    정확하게는.

    “맞이하라.”

    클라우디의 가주로서 선언했다.

    “내가 그대들의 주인이다.”

    “……!!!!”

    그러자 침묵 속에서.

    연거푸.

    소리가 들려왔다.

    털썩.

    [레텔 □□□□에게 ‘복종’이 발생합니다.]

    한 번의 털썩.

    [클렌즈 □□□에게 ‘복종’이 발생합니다.]

    또 한 번의 털썩.

    [스마이트 □□에게 ‘복종’이 발생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그나이트 □□□에게 ‘복종’이 발생합니다.]

    털썩.

    4가문.

    가주 전원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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