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24화 (323/489)
  • ◈ 324화. 마땅한 흐름이다 (2)

    악마 사냥꾼 철칙.

    ‘보자, 백 번째쯤엔 끼워 넣을 수 있으려나.’

    악크샨 선배님들이나 그랑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리라. 하지만 물욕에 충실한 나, 이호열은 잊지 않고 있다. 무언가에 빙의한 악마를 처치했을 땐 전리품이 드롭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속으로 절규를 뱉었다.

    [1/7]

    무려 칠죄종이 드롭한 아이템.

    일곱 개가 하나가 되는 세트 아이템.

    일단, 좋았다.

    세트를 완성했을 때의 효과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육망성 브로치와 여명 세트를 통해 세트 효과의 위력을 알고 있었으니 나름 기대를 했단 말이다.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거 모아봤자 6개가 끝이잖아?’

    칠죄종 탐욕 자리가 비잖아!

    녀석이 갓 태어난 거악이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하쿠나에게 빙의된 상태로 지옥에 떨어졌던 게 문제인 거지. 과거에도 어렵게 거악을 잡았더니 전리품 하나가 없다고 신세 한탄을 했었는데.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완성된 세트 아이템과 그렇지 못한 세트 아이템의 효과도 마찬가지로 여명 세트를 통해 확인했던바. 입맛이 쓰다. 하지만 떨쳐내는 수밖에 없다.

    ‘슬퍼한다고 바뀌는 건 없다, 호열아.’

    게다가 아예 못 써먹는 아이템도 아니잖아?

    육망성 브로치만 하더라도 여섯 개 중 두 개를 모았을 뿐이었거늘.

    적지 않은 세트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육망성 브로치 2/6]

    [세트 아이템 효과가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 중인 세트 효과 : 2/6]

    [1. 모든 기본 스탯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2. 보스 몬스터 공격 시, 모든 피해량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정보창을 보고 있자니 그나마 위안이 되는군. 덕분에 나는 남은 미련마저 떨치고 시선을 옮겼다. 악마의 아이템. 고치에서 튀어나온 새로운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중립의 기생 생물 엔비(Envy) 1/7]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엔비는 선, 중립, 악,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하며 각 형태에 따라 사용자에게 다른 효과를 부여합니다. 현재 상태 : 중립 - 사용자에게 ‘흡수’ 스킬을 제공합니다.]

    [설명 :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생물이다.]

    크기가 워낙 작아서 뭔가 싶었는데.

    살아있는 거였어?

    고치에서 튀어나온 아이템값을 하는구나.

    그나저나…….

    나는 가만히 아이템을 바라봤다. 언제나 한결같은 그랑펠의 태도라면 시선도 언제나와 같아야 했거늘. 아마도 지금 내 시선은 더없이 차갑지 않을까 싶다.

    ‘그야 성격에 달가워할 아이템이 아니니까.’

    고양이만 하더라도 털이 날리는 것 때문에 꺼리는 그랑펠이다.

    그런데 이름부터 뭐?

    기생 생물?!

    전설급 아이템이고 뭐고, 드높은 심미안을 고려하면.

    접촉부터 꺼려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과 악, 중립으로 존재할 수 있다…….’

    동시에 그랑펠의 성질머리를 자극하는 효과가 아닐 수 없군.

    그랑펠이 누구인가?

    좋게 말하면 인간 예찬론자요, 나쁘게 말하면 머릿속이 꽃으로 가득 찬 꽃밭 대가리. 추가로 그런 자신의 정신세계를 기어코 실현해내는 집요함의 소유자.

    그런 그랑펠에 시달리는 나는 입을 열었다.

    “악마다운 유품을 남겼군.”

    지옥에 떨어진 칠죄종 질투를 향해 쏘아붙였다.

    “마지막까지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나.”

    선과 악.

    두 상태의 효과는 중립 상태인 현재로선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딱 봐도 예상이 되지 않냐?

    특히 악으로 상태가 바뀌었을 때.

    아이템은 뒷맛이 구린 효과를 발현하겠지.

    “그렇다면 네 마지막 유산마저 부정해 주마.”

    그랬다.

    그랑펠의 고귀하신 긍지께서는 이런 농간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거였다. 나는 작게 웅크린 엔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생긴 건 꼭 작게 뭉쳐진 눈송이 같아서 나름대로 귀엽네.

    ‘진짜 내 팔자야.’

    사실 나, 이호열이었다면 이딴 아이템은 찝찝해서라도 모른 척했겠지. 하지만 그랑펠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아니시겠냐?

    ‘선까지는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중립은 유지할 수 있겠지.’

    그러니 행동에 망설임은 없다.

    사용자에 따라 변화하는 아이템이라 그런가.

    즉시 메시지가 떠오른다.

    [심미의 효과로 ‘중립의 기생 생물 엔비(Envy)’의 외형이 변화합니다.]

    심미를 발현하지도 않았는데, 외형이 변한다라.

    확실히 전설급 아이템답게 변화무쌍하다.

    엔비의 모습은 어느샌가 투명하게 반짝이는 보석처럼 변해있었다.

    지켜보던 두 사람과 고양이 한 마리가 말한다.

    “……상당히 특이한 아이템이네요.”

    “과연, 그러한 마도구를 다룰 수 있는 건 경밖에 없겠지요.”

    “보석으로 변하다니. 그 녀석 눈치는 빠르구냥.”

    마치 원래부터 장식으로 세공된 보석처럼.

    나는 여명의 재킷에 조화롭게 어울린 엔비를 바라봤다. 선과 악, 상태가 바뀜에 따라 보석의 색깔도 달라지려나. 물론, 그랑펠이 서슬 푸르게 두 눈을 뜨고 있는 이상.

    “영광으로 여겨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스킬, ‘흡수’를 습득하셨습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으니까.

    세트 효과의 아쉬움은 잊어버리고, 확인할 건 확인하자고. 무려 전설급 아이템을 통해 얻은 스킬. 그래도 귀철과 맞먹는 성능을 바라는 건 양심이 없겠지?

    ‘평타는 쳐주면 좋겠는데.’

    일말의 기대를 품고.

    나는 효과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느덧 저문 해.

    게다가 장소도 마침 마탑의 최상층.

    일정에 따라서.

    나는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포탈을 발현한 것이었다.

    백이설은 요동치는 마력에 흠칫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탑 상공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이것 때문이었군요!”

    하긴 플레이어 중에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는 하지. 굳이 입단속을 시킬 필요는 없었다. 백이설이 어디 가서 가볍게 입을 놀리는 성격은 아니니까.

    나는 본론만 말했다.

    “늦지 않게 복귀하지.”

    마르셀로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백이설도 놀란 기색을 감추고 얼른 허리를 숙였다. 탑주는 뭐, 혓바닥으로 털이나 핥고 있었다. 그리고 나, 이호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내.

    새벽부터 저주에, 바알에 시달려.

    오후에는 그레모리에게 시달려.

    예상에 없던 사건들로 지체된 시간.

    절차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긴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게 이유 전부는 아니다.

    ‘……어쩐지 덩치가 커도 지나치게 크더라.’

    습득한 스킬, [흡수]의 효과.

    그게 당장 확인하지 않고는 궁금해서 못 배길 정도로.

    사기적인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거든!

    *

    인류에겐 잊고 있던 위기감이 되살아났다.

    -아니 진짜 심각한 상황이었잖아

    -ㄹㅇ 갑자기 소름 돋았음;;

    -난 걍 퀘스트인 줄 알았다니깐??

    아르카나의 상식을 빗겨나간 게 원인이었다.

    고레벨 몬스터가 저레벨 구역을 침범한다?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몬스터 한두 마리 정도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아니;; 걍 출현 메시지 보고 피하면 되는 거 아님??

    그러나.

    -뭐래 나 거기 있었는데 말이 되는 소릴 하셈 ㅅㅂ

    -왜

    -생각해봐 출현 메시지 하나만 눈앞에 떠올라도 갑자기 똥줄이 타면서 등골에 식은땀이 맺히는데 출현 메시지가 끊이질 않았다니까??? 그런 상황에서 어디로 튈 건데?

    과장이 아니었다.

    제로 산맥에서 활동하는 길드들은 물론이요. 그 최정상에 드래곤이 서식하는 이상. 제로 산맥은 업데이트 이후, 한 순간도 전 세계의 주목과 감시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24시간.

    제로 산맥 위를 비행하는 드론과 헬리콥터.

    덕분에 수많은 각도에서 촬영되었던 제로 산맥의 전경.

    녹화 화면을 지켜보던 앵커가 혀를 내두른다.

    “시청자 여러분도 보이십니까? 정말로 몬스터가 홍수처럼 특정 지역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측정하기에는 무려 300킬로미터 반경……. 그러니까 서울에서 부산 지역에 있던 몬스터가 전부 상태이상에 빠졌던 겁니다!”

    생생한 영상 덕분에 인류는 더욱 실감하게 됐다.

    -악마족 진짜 한계가 없구나 ㄷㄷ

    -몹까지 홀려? 내 정신력만 챙긴다고 끝이 아니었네

    -그나저나 제로 산맥 ㄹㅇ로 폐쇄될 뻔한 거 아님?

    악마족 몬스터의 위험성을.

    -성전 연합군한테 호들갑 떨지 말란 놈들 다 어디 감?

    -졸렬하게 튄 게 딱 봐도 악마 숭배자 아니냐?ㅋㅋ

    -ㄹㅇ 방심하면 안 된다니까

    -그놈들 다 천하통일 알바들일걸? IP 까보면 앎ㅋㅋ

    쓸데없이 위기감을 조성한다.

    대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세력을 키운다.

    그 행동이 오히려 악마의 힘을 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냐…….

    덕분에 성전 연합군을 향하던 크고 작은 비판들은 쥐 죽은 듯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런 성전 연합군 이상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악크샨이었다.

    -ㅁㅊ 간지 보소

    -말로만 들었는데 속을 만하네ㅋㅋㅋㅋㅋㅋ

    -ㄹㅇㅋㅋ 복장 봐라 악마 혼자 다 잡게 생겼음

    -혼자 액션 영화 찍나 와이어 액션 오지네ㅋㅋㅋ

    악마로 추정되는 살굿빛 머리카락의 여인.

    그녀를 포위하는 일곱의 악마 사냥꾼들.

    그 전투는 상태이상에 빠졌던 플레이어들의 바디 카메라를 통해 고스란히 녹화되었다. 악크샨을 알고 있던 플레이어나 그렇지 못하던 플레이어나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알던 악마 사냥꾼은 맨날 퀘스트만 돌았는데

    -아니 나는 직접 키워봤었다니까? 악마 사냥은 개뿔이 체력 단련 퀘스트만 시켜서 때려치웠지!! 근데 이럴 줄 알았으면 존버할 걸ㅠㅠㅠㅠㅠㅠ

    -천적관계 스킬빨이라고 해도 장난 아니네ㄷㄷ

    -저 정도면 왕귀캐 아닌가?

    마지막으로.

    악마 사냥꾼들이 플레이어에게 검을 휘둘렀던 게 사실은 구마의식의 과정이었다. 숨겨진 진실이 악크샨에게 구원을 받은 플레이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악크샨을 향한 관심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실시간 인기 동영상 순위]

    1. 악크샨 전투 영상

    2. 악마 사냥꾼 무기

    3. 제로 산맥 플레이어 실황

    4. 사라진 악마 사냥꾼 행방…….

    악크샨.

    과소평가된 그들의 전설이 비로소.

    누구의 호언장담대로 명예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악크샨과 함께 울려 퍼지는 이름이 있었다.

    -근데 망했던 악크샨이 어떻게 돌아온 거임??

    -ㄹㅇ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자너

    -썰 돌았던 거 못 봄? 이호열이 악크샨 지도자였음ㅋㅋ

    악크샨을 다시 세상에 끄집어낸 사내의 이름이.

    -설마 전부 큰 그림이었나……?

    -그럼 악크샨이 멸망한 것도 삭제된 것도 아니라 그냥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임? 악마족이 설칠 것도 예상하고 뒤통수를 노리고 있던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호열이면 그러고도 남지

    -외쳐 호멘

    또 하나의 전설.

    절차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세계인 아르카나 대륙에 발을 들인 당사자로서는. 당분간 알 수 없는 새로운 전설이 몸집을 부풀려갔다…….

    *

    아르카나 대륙.

    나는 포탈 너머로 향하며 생각했다.

    간만이지만, 그래도 크게 놀랄 건 없지 않을까.

    아르카나 대륙의 소식은 하이엘을 통해서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흉조에서 쏟아져나온 존재 자체가 사라졌던 수많은 세력들.

    당연하게도 처음부터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작은 나라에도 산 하나 넘어 지역 갈등이 있고, 십 년 차이면 세대 갈등이 생기는데. 고대 왕국이랑 악크샨만 비교해도 몇 년이냐?’

    각기 다른 시대와 이유로 삭제되어 흉조에게 삼켜졌던 세력들이다. 언어 장벽에 생김새 차이까지 따지면 사실 사이가 좋은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냐.

    거기에 오지랖을 부릴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잖아.’

    플레이어들이 알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이 바로 그런 세계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기대감은커녕.

    담담하게 아르카나 대륙을 밟았다.

    그래서일까?

    쉴 새 없이 점멸하는 시야.

    [경험치 획득량이 50퍼센트 증가합니다.]

    [아이템 드롭율이 50퍼센트 증가합니다.]

    [마법 발현력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

    [모든 무기의 숙련도 습득이 30퍼센트 증가합니다.]

    [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가 대륙을 떠돌며 지식을 설파합니다.]…….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고 기절할 뻔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버프야?!

    버프만 달랑 떠오른 게 아니라 구체적인 배경이 붙어있었지만.

    하도 많아서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뿐만 아니다.

    하나하나가 말도 안 되는 효과잖아!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버프를 활용하고 싶었다.

    누구보다 파놓은 살 구멍이 많은 내가 아니던가?

    덕분에 누구보다 버프의 효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속내를 실천할 수 없었다.

    ‘!’

    마지막으로 떠오른 메시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몇 번이나 목격했던 월드 메시지가 눈길을 사로잡았으니까.

    [대륙의 패권을 위한 전쟁이 시작됩니다.]

    확실히 그 시절, 아르카나 대륙 같아서 정겹군.

    ‘그래, 허구한 날 땅따먹기였지.’

    말했다시피.

    나는 서로들 치고받고 싸우는 데에 개입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게 본래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이었으니까.

    근데, 이건 경우가 다르지.

    [황금의 막시마가 제국을 향해 전쟁을 선포합니다.]

    [숲의 유그릭이 제국을 향해 전쟁을 선포합니다.]

    [용맹의 캔설이 제국을 향해 전쟁을 선포합니다.]

    [전율의 아카몬드가 제국을 향해 전쟁을 선포합니다.]

    막시마, 유그릭, 캔설, 아카몬드.

    내가 어떻게 저 이름을 잊을 수 있겠냐.

    4가문.

    잊고 싶어도 있을 수 없는 내 흑역사의 산증인들을.

    이내, 나의 입술이 차디찬 말을 뱉어냈다.

    “자유와 방종은 엄연히 다른 법이거늘.”

    이건 엄연하게도.

    클라우디 가문 가주로서의 선언이었다.

    절대로.

    “느슨해진 목줄을 다잡을 필요가 있겠군.”

    내 흑역사가 날뛰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고……!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