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마땅한 흐름이다 (1)
구마의식.
의식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혼혈의 악마, 녀석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인간에 가까운 외관. 악마치고는 밝은 머리카락색이 인상적이군. 그런데…….
아직 뭘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표정이 왜 저래?
“아, 아…….”
초점이 풀린 동공.
제대로 된 말조차 내뱉지 못하는 입.
저런 몰골을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는데.
마탑의 지하 무간에 갇혔던 악마 숭배자들이 딱 저런 상태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세상만사 모든 걸 자포자기한 얼굴이란 거지. 만약, 무고한 인간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면 괜한 노파심에 말이라도 붙여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악마다.
그것도 보통 악마가 아닌, 권능이란 걸 거머쥔 서열 56위 마왕 그레모리였다. 방심하지 말자, 호열아. 물론, 마음을 굳게 먹는 것과 별개로 내 행동은 평상시와 다를 것 없이 느긋했다.
‘어련하시겠어.’
고작 팔 하나, 칼질 한 번으로.
세오른 대륙을 파멸로 몰고 갔던 서열 1위 마왕 바알.
그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던 우리 대단하신 그랑펠님 아니시겠냐?
당연하게도 자비란 없다.
“고개를 들어라.”
“아……?”
“이 시간부로 내가 묻는 말에 답해라.”
대답할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이건 친절한 훈육이 아니니까.
엄격한 처벌이란 뜻이다.
“혼혈의 악마여. 그 주제넘은 이름의 뜻을 밝혀라.”
이거, 말하고도 살짝 찔리는군. 그야 주제넘는 이명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싶었거든……! 잡생각도 잠깐, 그레모리가 우물쭈물 입을 움직인다.
“괴, 괴물 같은 놈.”
구마의식.
악마 사냥꾼과 악마의 정신력 싸움.
의식에서 우위를 점하면 상대를 완벽하게 압도할 수 있다.
구마의식의 승패에 따라 악마 사냥꾼이 악마로 타락할 수도, 악마가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한데, 그레모리는 내게 압도당한 상태에서 그런 말을 내뱉었다.
굉장히 억울했나 봐.
“어째서, 네게는 닿을 수조차 없단 말이냐?”
까득─
그레모리가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올린다.
손을 뻗는다면 충분히 내게 닿을 정도의 거리다.
덜덜덜.
그러나 그레모리는 해내지 못했다.
말은 뱉어도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는 거겠지.
빠득거리는 소리가 내게 들릴 정도로.
이를 갈면서 말을 잇는다.
“빌어머으으으을!”
듣는 순간, 악마의 비명이구나 싶을 정도로 기괴하다.
저런 소리를 내뱉은 게.
백이설의 입이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제에엔장!!”
살구빛 머리칼 아래로 드러나는 그레모리의 얼굴은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스스로도 끝이라는 걸 깨달은 건가. 유언 대신 울분이라도 토해내겠단 거겠지. 완벽하게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도 악을 썼다.
“내 계획은 완벽했다. 분명 네놈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겠지. 그러니 지금도 나를 추궁한 게 아니냐? 혼혈의 뜻이 무엇인지를……! 그래, 원한다면 말해주마. 나는 그레모리, 마왕으로서 거악 칠죄종 색욕의 권능을 집어삼킨 혼혈의 악마다!”
……와씨, 그래서 혼혈이었어?
‘보통이 아닐 거라 짐작은 했는데.’
제로 산맥에서도 [천적관계]의 감지 반경에 걸려들지 않았고, 심지어는 실체화된 악크샨 전설이 펼친 포위망을 뚫고 도주했다. 과연, 클래스 퀘스트 후반에 등장하는 이름값을 한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건 예상을 뛰어넘었어.’
권능이 칠죄종 색욕의 힘을 말하는 거였다니.
동시에 납득이 되었다.
그래, 그 정도는 되니까 난동도 규격 외로 부릴 수 있었던 거겠지.
물론, 거창함이 무색하게도.
그레모리는 완전히 삶을 포기한 듯 싶었지만.
“그런데 어째서냐……? 어째서 나는 이런 힘을 가지고 단 한 순간도 네가 닿을 수 없었던 거지? 빌어먹을 천적관계 때문이냐?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이 몸이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데……!!”
감정을 알겠다.
‘쉽게 말해 현타가 왔구나.’
마왕과 거악의 관계를 생각하면.
자존심을 버리고, 칠죄종의 권능을 받아들인 것부터가 큰 결심이었겠지. 하지만 결심이 무색하게 실체화된 악크샨 전설에게 쫓기질 않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빙의한 인간이 긍지를 앞세워 빙의를 거부하질 않나. 최후엔 마탑이란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와 나를 마주치질 않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니까 삶을 포기할 만하네.
하지만.
‘착각은 금물이다.’
나는 스킬, [천적관계]의 효과를 떠올렸다.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에서 저런 표현은 엄청난 효과를 보증한다. 하지만 그게 곧 무적을 뜻하는 건 또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억울해야할 일이 아니란 거다, 그레모리.
‘내 앞에서 발버둥이라고 했냐?’
그렇다.
네가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모르겠다만. 나, 이호열의 처절한 발버둥과 비교하면 네 억울함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따져볼까?
내가 악크샨 전설을 획득한 과정을 봐라.
겁대가리를 상실해서는 레이먼 션과 정면으로 대립. 결국엔 흉조를 봉인하고, 아르카나 대륙에서 잊힌 이들을 복구한 덕분에 쟁취할 수 있었던 성과였다.
백이설의 긍지는 또 어떻고?
‘내가 그때 얼마나 시달렸는 줄 알아?’
당사자인 백이설만큼은 아니겠지만. 덩달아 엮여서는 팔자에도 없는 연예 신문 1면을 장식하질 않나. 그걸 건수로 잡혀 웬수들한테 쓸데없는 놀림을 받질 않나……!
그런데, 뭐?
“억울하다. 억울해서 참을 수 없다……!”
그 입에서 억울하단 소리가 나와?!
이번엔 그랑펠의 냉랭함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나는 차디찬 목소리로 답했다.
“유언은 거기까지인가.”
그러자 더욱더 날이 선 말이 되돌아온다.
“……지옥에서 너를 저주하겠다, 이호열.”
옛날이야 악마의 저주에 흠칫했겠지.
근데 이젠 아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지옥에서 그럴 정신이 있겠냐.’
지옥엔 진짜 악크샨 선배님들이 계시거든.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겠다, 이호열.”
또 평생 기다려 봐라.
내가 지옥에 떨어지나.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그레모리가 실성한 기색이 역력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성전 연합군이라, 의미 없는 짓을 하더구나. 하지만 어울려주지. 선전포고다. 나는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앞으로는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악마가 너를, 네놈의 고향을, 아르카나 대륙마저 파멸로 몰고 갈 테니까!”
뒤가 없어서 그런가, 솔직하네.
그럼에도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아서인가.
그레모리는 친절하게 예시까지 내놓았다.
“색욕, 러스트. 그 죽일 놈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이래서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는 말이 있나 보다.
더불어 이래서 악마가 그랑펠에게 하찮은 취급을 받는구나 싶군.
긍지는 물론이요.
“네놈과 러스트. 누가 됐든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의리도 없잖아, 이것들은?
물론, 나야 감사하다. 그레모리가 저주를 퍼부은 덕분에 적지 않은 단서를 얻었거든. 보자, 혼혈의 악마 다음 사냥감은 『칠죄종 색욕』이라는 거겠지?
‘다만, 그냥 거악이 아니겠지.’
탐욕에 질투마저 지옥에 떨어진 지금.
나와 정면으로 맞붙어선 승산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악들이었다. 그러니까 플레이어를 제물로 바치는 수고를 들여 마왕과 자신의 피를 섞은 거겠지.
그리고.
‘결과를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테고.’
그레모리가 색욕의 기대에 부응했는지, 아닌지는 알 바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레모리가 악마답게 색욕의 존재를 발설했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꼭꼭 숨어도 그레모리의 몸속에 흐르는 색욕의 권능을 통해 놈의 냄새를 기억했다는 게 중요하다.
‘설령 다른 피를 섞는다고 해도 놓치지 않아.’
때문에 나의 표정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하.”
죽음을 각오한 지금.
마지막 발악으로 저주를 쏟아낸 그레모리였을 터. 하지만 동요는커녕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내게 그레모리는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할 말은 여전히 같았다.
“유언은 거기까지인가.”
“……빌어먹을 새끼가아아아아!!”
그레모리가 마지막으로 손을 뻗는다.
그러나 절차를 위해서.
새벽부터 칼각을 잡아 마력으로 어깨에 고정해 둔 여명의 재킷이다. 열등한 족속의 손길이라면 옷자락을 스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게 바로 그랑펠이었으니.
나는 말을 이었다.
“이제 그 입을 다물어라.”
“……!”
그와 동시에 산개하는 보랏빛 마력.
그레모리의 몸이 곧바로 굳는다.
구마의식의 주도권을 쥔 건 나였으니까.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숨조차 쉴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나저나.’
무엇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이놈의 성격은 집요하기 짝이 없다.
무엇이 됐든.
익숙해질 때까지 무한 반복한다는 의미다.
‘평생 시달릴 팔자구나, 나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황혼의 저주’를 거절합니다.]
나는 개의치 않고 황혼의 마력에 간섭했다.
아까는 순수마력학을 써먹었다면…….
이번엔 익숙한 탐색 대상인 광물이다.
스스스─
황혼의 마력.
그 보랏빛 마력 입자를 광물의 구조를 모방하여 배열한다.
그러자 흩날리던 황혼의 마력이 형태를 바꾸어갔다. 서로 응집되고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이거, 이제야 AAU의 보고서가 이해가 되는군.
‘이런 스킬을 봤다간 전부 마법사만 키웠겠네.’
과거의 나조차도 억울해했을 거다.
폼생폼사로 악마 사냥꾼을 골랐더니.
악마 사냥꾼보다 더 멋진 클래스가 등장했다고.
스스스─
단순히 멋을 넘어서.
화려함의 극치에 다다랐다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었다.
물론, 황혼의 마력에 익숙하지 않은 나였다.
그 바람에 발현 반경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거늘.
‘뭐든 상대적인 거니까.’
구마의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레모리 시선에선.
이 작은 보랏빛 산들바람이 거센 폭풍처럼 보이지 않을까?
황혼의 마법을 응시하던 그레모리.
녀석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마법이야. 그와 반대로 너는 정말로 자비가 없구나.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지고한 아름다움마저 내게서……. 결국, 내 모든 걸 앗아가겠다는 것이냐?”
그런 불쌍한 소리를 해도.
악마에겐 피도 눈물도 감정도 없는.
그랑펠이 해줄 말이야 뻔하다.
“너는 단 한 순간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 말에 그레모리는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로 매정하기 짝이 없는 사내야.”
이윽고, 황혼의 마법이 그레모리를 뒤덮었다.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메시지.
이런 대폭 상승은 칠죄종 질투 이후로 처음이다.
슬그머니 상태창을 확인해 본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흑암룡]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776]
[능력치]
근력 : 170 / 민첩 : 175 / 마력 : 660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5
[보유 포인트 : 21]
21레벨 상승.
제로 산맥에서 1레벨이 상승했었으니까. 그레모리를 처치한 것만으로 20레벨이 상승했다. 그레모리의 서열 56위인 걸 고려하면…….
‘10레벨 상승도 간당간당했을 것 같은데.’
확실히 혼혈의 악마가 된 순간부터 배 이상은 까다로운 존재로 탈바꿈했다는 게 경험치에서부터 드러나 있었다.
-악마를 사냥하라. (반복)
●혈흔을 쫓아 혼혈의 악마를 추적하라. (성공)
●혼혈의 악마를 처치하라. (성공)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악크샨과의 관계도가 상승합니다.]
[악크샨에서의 영향력이 상승합니다.]
지긋지긋한 악크샨의 반복 퀘스트도 성공.
검게 물들었던 백이설의 동공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백이설이 먼저 입을 연다.
“……우와.”
첫마디는 감탄이었다.
정확하게는 백이설만 감탄을 뱉은 게 아니었다.
별안간 마탑 최상층에 울리는 박수 소리.
“정말 대단한 발현이셨습니다, 경!”
이게 웬일이래?
그랑펠만큼이나 감정이 없는 마르셀로가 격앙된 얼굴로 손뼉을 치고 있다. 옆에 있는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꼬리를 일자로 바짝 세운 탑주가 말을 보탠다.
“황혼의 마법을 구사하다니. 어이가 없군, 이 수석.”
“역시 제 착각이 아니었군요. 저런 마법……. 아니, 마력조차도 본 적이 없었기에 혹여나 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크리스탈 홀에 발현된 황혼의 마법을 목격하지 못했었는데…….”
“실례지만, 저도 목격했어요. 보라색 마법이요.”
“……!!”
서클을 개방하거나 최소 그에 준하는 마법 발현력을 가지고 있어야 목격할 수 있는 황혼의 마력과 마법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제시처럼 클래스가 대마법사던가.
‘탑주나 마르셀로는 또 몰라도 백이설은.’
확실히 목격할 수 없어야 했거늘.
다들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봐도 나도 이유는 모른다고?
다만 추측할 뿐이지.
‘……설마 억지로 발현해서 그런 건가?’
추측이 맞다면 절대 자랑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거늘.
이 뻔뻔함은 사소한 흠집 하나 인정하는 일이 없었으니.
나는 지껄이고야 말았다.
“그랬었지. 허나, 이제는 아니다.”
“……그 말씀은?”
“내가 황혼을 세상에 드러낼 테니까.”
……그래, 성질머리에 배운 건 계속 써먹을 테니까.
하여튼, 틀린 말은 안 하는 게 더 열 받는다.
쨌든, 세 사람도 감탄했으니까.
나도 이제 한숨은 그만 삼키고 감탄 좀 뱉어보자.
‘드디어 확인할 시간이다.’
구마의식 끝.
나는 속으로 군침을 삼키고 정화된 제물을 바라봤다.
이내, 눈앞에 떠올랐다.
거악, 질투가 남긴 전설급 아이템의 정보가!
[세트 효과 : 1/7]
그런데 이거 시작부터 심상치 않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