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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22화 (321/489)

◈ 322화. 색다른 반전이군

비로소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고작 수년.

찰나에 불과한 시간에 모험가들이 아르카나 대륙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었던 이유를……! 그레모리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육체의 기억을, 정확하게는 플레이어의 지식을 곱씹었다.

‘이런 축복을 거머쥐고 있었다니.’

만약,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주어졌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모험가 놈들과 비슷한 수년의 시간만이 있었어도.

십좌의 마왕에 도전할 힘을 거머쥘 수 있었으리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빙의였거늘.

“후후.”

자신의 보는 눈마저도 틀리지 않았다.

단순히 미(美)를 좇아 껍데기를 골랐건만.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그레모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귀족 가문, 그 이상의 아가씨일 줄이야.”

신화 재벌 그룹이라.

단어의 의미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허나, 육체의 기억 속에서 일면이 보였다. 수많은 이들이 숭배를 받으며 호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지위라니. 몸을 숨기기에 이보다 쾌적한 환경도 없겠지.

‘이제 머뭇거릴 새는 없다.’

그레모리는 육체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빙의에 성공한 지금, 악크샨의 미치광이들이 자신을 추적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진 않았다. 권능의 노예들을 상대하는 데만도 애를 먹을 테니까. 그럼에도.

‘방심하지 않아.’

더나아가 이 땅은 저 미치광이들보다도 더한 존재.

최후의 악마 사냥꾼.

은발 사내의 고향이 아니던가?

보자, 그 정도의 사내라면 이 세계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할 테니까. 껍데기 주인의 기억에서도 그 사내에 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터.

그레모리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이호열.”

입에서 곧장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레모리는 껍데기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뭐지?’

첫 빙의라고 해도 무방하다.

너그럽게 칭찬했다고 한들, 인간의 육체에 불과하다.

느껴지는 감각들이 분명 달갑지 않아야 했거늘.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같았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겠지만.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레모리가 잠시 눈을 감았다.

‘내면을 살펴봐야겠어.’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이유를 깨달았다.

‘실로 기구한 삶이구나, 여인이여.’

악마에게 두 번이나 몸을 내어주다니.

‘진명, 백이설.’

백이설.

여인의 내면엔 악마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것도 러스트, 색마 녀석과 동류라 할 수 있는 족속의 냄새.

그레모리가 혀를 찼다.

‘서큐버스.’

천박하기로는 마계에서 한 손으로 꼽히는 악마족. 백이설의 육체가 마음에 들었던 그레모리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백이설의 내면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감사히 여겨도 좋아. 나는 서큐버스 따위와는 격이 다른 존재니까. 네 껍데기를 기껏해야 요마(妖魔) 따위가 아닌 진정한 여왕으로 거듭나게 해주마.’

그를 위한 첫걸음은 우선 백이설, 그녀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거겠지. 그 후엔 가장 먼저 방해가 될 게 뻔한 백이설의 혈육과 측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알아보면 귀찮아지지 않겠어?’

비록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썼을지라도.

그레모리에겐 인간을 흉내 내는 굴욕까지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방해되는 건 모조리 치워버리고, 충실한 권능의 노예들로만 주변을 채워야 한다.

그레모리가 다짐한 순간이었다.

‘……응?’

저벅.

“!”

멋대로 발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제 뜻대로 육체가 반응하는 줄 알았다.

주위를 둘러보기 전까지는.

‘……어째서?’

이 위태로운 계단 위에 백이설의 저택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지 않은가? 그레모리는 다급하게 백이설의 기억을 되돌아봤다. 정확하게는 플레이어로서의 상식을.

‘마탑의 입구엔 포탈이 존재한다. 모험가들은 마탑의 포탈을 통해 자유롭게 세계 곳곳을 누빈다. 마탑의 계단, 그 위엔 오직 마법사에게만 허락된 공간이…….’

저벅.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돌아봐도 계단을 오를 이유 따윈 없었다. 그 때문일까? 불필요한 관심이 집중된다. 마탑의 입구에서 서성대던 인간 놈들의 시선이 자신을 좇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 선배. 저, 저거 백이설 맞죠?”

“……어? 와씨, 진짜 백이설이잖아!”

“백이설이 마탑에는 웬일로…….”

“잠깐만, 이거 그때 그 사건의 연장전인가?!”

“이, 일단 카메라부터 들어!!”

백이설.

껍데기의 주인을 향했다.

빠득.

그레모리는 이를 갈았다.

‘혹시 마탑과 인연이 있는 건가?’

껍데기를 뒤집어쓴 사실을 들킬 일은 없겠지만……. 저 버러지놈들이 들고 있는 기계가 이 사태를 세계에 퍼트리리라. 악크샨과 마주한 상황에서 이러한 관심은 달갑지 않았다.

‘멋대로 움직이지 마라, 계집.’

그레모리는 내면에 쏘아붙이고는 육체의 통제권을 휘어잡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휘어잡으려고 했다.

멈칫하기 무섭게 다시금 움직이는 발걸음.

저벅.

“……!”

그레모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면 속으로 외쳤다.

마왕인 나를.

그것도 모자라 거악의 권능까지 집어삼킨 나를.

고작 인간 따위가 거스르고 있다는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슥.

계단을 오르던 그레모리를 가로막은 건 삐쩍 마른 한 사내.

그의 명성은 마계에서도.

마왕들 사이에서도 자자했기에 곧장 알아차렸다.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빙의한 사실이 발각된다면 곱게 넘어갈 수 없으리라.

그레모리는 진지하게 고뇌하게 빠졌다. 지금이라도 러스트의 권능을 발현해야 하나? 그렇다고 내가 이 사내의 정신력을 무너트릴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잠깐, 어째서 멀쩡한 거지?’

그레모리, 자신은 분명 폭주하는 색욕의 권능을 통제하지 못했었다. 날뛰는 권능 덕분에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간만에 뵙습니다. 백이설 씨.”

마르셀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껍데기를 대하듯 하고 있었다.

그의 아득한 정신력으로 권능을 상쇄했다고 하기에는.

‘아래층의 벌레들도 멀쩡했어…….’

그레모리는 짐짓 추측했다.

‘……설마, 내가 권능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인가?’

물론, 어림도 없는 추측이었지만.

저절로 입이 움직인다.

멋대로 고개가 숙여진다.

“간만에 뵙습니다, 마르셀로 수석님. 우선 마탑의 규율을 어겨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멋대로 상층에 출입한 점,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빌어먹을!

그레모리에게 저따위 말을 뱉을 생각 따윈 없었다. 굴욕을 떠나서 저따위 변명을 내뱉을 시간에 뒤를 돌아 마탑을 빠져나가는 게 최선의 수였을 테니까.

마르셀로가 고개를 저었다.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찾아오신 데엔 분명 이유가 있으실 테니까요. 올라오시죠. 아무래도 계단 위에선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군요.”

저벅.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저 사내의 뒤를 따르지 마라.

감히 나를 거스르려 들지 마라.

내면에 윽박질러도 육체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마탑의 최상층에 이르렀다.

누구도 보이지 않는 시점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찾아오신 이유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저와 백이설 양의 접점은 오직 하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성전 연합군과 관련된 일이시겠지요.”

뭣, 성전(聖戰) 연합군이라고?

그레모리는 경악했다. 완전히 다른 이 세계에서 성전이라는 이름 아래 연합군이 조직되었을 줄이야. 아르카나 대륙에 있을 땐 예상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레모리는 입술이 바짝 말라오는 듯했다.

‘이런 개같은.’

성전 연합군의 존재를 알게 된 지금. 마르셀로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의 상황은 더없이 선명히 그려졌다. 그레모리가 이젠 내면에 애원하다시피 외쳤다.

‘제발, 부디 닥쳐라.’

그러나 백이설의 입은 매정하게 움직였다.

“다름이 아니라 다시 악마에 빙의된 것 같아서요.”

……빙의를 인지하고 있었어?!

대체 어떻게?

상황을 파악한 그레모리는 필사적으로 내면에서 발버둥을 쳤다.

덕분일까, 뒤늦게나마 깨닫고 말았다.

‘잠깐…….’

백이설은 이번이 두 번째 빙의였다.

그 말인즉슨 백이설에게 처음 빙의했던 서큐버스가 더 이상 그녀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그레모리는 자신이 빙의하고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나는 가능성을 목격했다.’

복수가 머지 않았다.

시스템이야말로 권능, 그 이상의 권능이다.

십좌에 앉는 것도 꿈이 아니다…….

‘나만 그런 꿈을 꿨을까?’

서큐버스라고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그렇다는 건.

서큐버스가 자신의 의지로 이 육체를 포기할 일은 없었다는 것.

‘그랬어.’

그레모리가 드디어 정답에 도달했다.

‘……서큐버스는 사냥당한 거야!’

혼란한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빙의라. 그렇다면 이호열 수석님을 찾아오신 거겠군요.”

수석.

그리고 이호열.

어째서 백이설의 육체가 마탑으로 향했는지.

“네, 또 한 번 빚을 지게 생겼네요.”

어째서 여전히 묘한 기시감이 가시지 않았는지도.

그랬다.

미묘한 기시감은 서큐버스를 보고 느낀 게 아니었다.

악마의 유전자에 새겨진 천적을 향한 본능적인 꺼림.

그레모리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발버둥 쳐도 안 된다는 거야?’

천적관계를 절대로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냐. 이 땅을 밟은 순간부터 사냥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냐. 악마 사냥꾼에게 걸려든 이상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벗어날 수 없었단 뜻이냐……?

머지않아 그레모리의 귓가에는 종이 울렸다.

“마침 경께서도 기다리고 계셨던 모양이시군요.”

또각.

또각.

또각.

‘아, 안 돼…….’

지옥행 열차의 기적 소리가.

*

마탑의 최상층.

진입하는 순간.

익숙한 메시지가 나를 반긴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솔직하게 놀랐다.

“나름대로 신선한 재회로군.”

신화 길드의 마스터이자 성전 연합군의 일원 백이설.

그녀가 또다시 악마에게 빙의당했을 줄이야.

태연하게 인사를 나누면서도 나는 흠칫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마르셀로의 텔레파시에 따르면.

백이설은 제로 산맥에 진입했다가 악마에게 빙의를 당했다고 들었다. 그 길로 곧장 내가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마탑을 찾아온 모양이었고. 간결한 동선 덕분에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온다.

‘백이설에게 빙의한 건 혼혈의 악마다.’

정답이라는 듯 퀘스트 목표가 점멸한다.

-악마를 사냥하라. (반복)

●혈흔을 쫓아 혼혈의 악마를 추적하라. (성공)

●혼혈의 악마를 처치하라. (진행 중)

그게 내가 놀란 이유였다.

‘백이설 씨, 그쪽도 참…….’

시달리기로는 그랑펠에게 시달리는 내가 제일 고달픈 게 아닌가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악마에게 두 번씩이나 빙의를 당한 백이설 앞에선 투덜댈 순 없겠군.

게다가 이번엔 보통 악마가 아니잖아?

그런데 백이설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레모리. 제 기억에 따르면 서열 56위 마왕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권능을 언급했던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침묵했다.

그저 물끄러미 백이설의 동공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악마 사냥꾼의 눈은 속일 수 없는 법. 과연, 백이설의 눈은 확실히 검게 물들어있었다.

그러니까 더 의문이다.

‘대체 어떻게 멀쩡한 거야?’

악마는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산다. 때문에 빙의한 인간을 더욱더 파멸로 몰고 간다. 애초에 서큐버스에게 빙의됐던 백이설만 떠올려도…….

‘지금 하고는 완전 딴판이었지.’

왜, 시련이 사람을 강하게 한다고.

‘서큐버스에게 빙의됐던 경험이 득이 된 건가?’

잘은 몰라도 멘탈 하나만큼은 단단해졌을 것 같긴 하다. 사회면, 심지어는 연예기사에서도 백이설의 이야기로 끊이지 않던 때가 있었으니까.

나, 이호열.

여러 가지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거늘.

그랑펠이 누구인가?

“그대 역시 성장했군.”

“네?”

“비로소 긍지를 깨달은 것이겠지.”

고귀하신 긍지론의 창시자.

나의 말에 백이설은 작게 한숨을 뱉었다.

“후우,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걱정했어요. 재차 빙의를 당해 총대장님을 귀찮게 하는 건 아닐까 하고요. 하지만 말씀대로 긍지를 잊지 않은 덕분일까요? 서큐버스 때처럼 끔찍한 흑역사를……. 아니,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흑역사라, 내가 그 심정도 또 잘 알지.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야옹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뭐라는 거냥.”

“가만히 계십시오, 탑주님.”

“나는 여전히 긍지가 뭔지 모르겠구냥.”

하여튼, 저거!

잠이 덜 깼나.

말투는 왜 저래?

탑주라는 양반이 하필 최상층에서 낮잠을 자서 이런 낯부끄러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거냐. 어쨌든, 백이설의 활약을 무색하게 할 순 없는 일이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

망설이지 않고 [구마의식]을 준비한다.

혼혈의 악마.

아직까지도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순 없었다만, 마왕에 권능이 더해졌다면 보통 거물이 아니란 건 확실하다. 그런 존재를 사냥하기 위해 필요한 게 바로 제물, 악마의 아이템이다.

그것도 급이 맞는 아이템이 말이야.

‘나한테 마침 적당한 게 있지.’

마찬가지로 거물급 악마가 남긴 전리품.

[질투로 응어리진 고치]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그렇다.

칠죄종 질투가 남긴.

무려 전설급 아이템 되시겠다.

‘분명 귀철과 맞먹을 정도의 아이템이겠지?’

적잖이 기대가 됐건만.

이놈의 청렴결백 탓에 흑심을 내비칠 순 없으니.

나는 어느때보다도 근엄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백이설. 아니, 혼혈의 악마를 향해 선언했다.

“이 시간부로 처분을 시작하겠다.”

[‘질투로 응어리진 고치’가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혼혈의 악마, 그레모리를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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