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19화 (318/489)
  • ◈ 319화. 한 끗 차이 (1)

    ●혈흔을 쫓아 혼혈의 악마를 추적하라. (진행 중)

    퀘스트 목표가 점멸한다.

    제로 산맥의 몬스터가 역류하게 된 원흉이 너였구나.

    클래스 퀘스트 후반부에 등장한 녀석답게 비범한 능력이다.

    그런데 의문이군.

    ‘천적관계.’

    악마 사냥꾼에게 [천적관계]는 떼어놓을 수 없는 밥줄 스킬이다. 처음과 끝을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덕분에 그 활용에도 점차 능숙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발동하지 않았어.’

    혼혈의 악마 정도 되는 거물급 악마라면, 나는 제로 산맥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녀석의 기척을 느꼈을 거다. 아니, [천적관계]가 한발 빠르게 발동됐겠지.

    그런데 퀘스트 목표가 반짝거린 시점에서도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겠군. 혼혈의 악마는 지금껏 조우한 악마와 명백히 다르다는 것.

    나는 입을 열었다.

    “하찮은 수작인가.”

    악마를 향한 싸늘한 매도.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행동이었거늘.

    문제는 주위에 듣는 귀가 있다는 것이었다.

    플레이어들이 흠칫해서는 일단 고개부터 숙여온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방해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저희 넷 모두 400레벨을 달성해서 이쯤이면 무리 없이 사냥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제로 산맥에 발을 들였는데……. 하찮다고 말씀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주제 파악 제대로 하겠습니다!”

    아니.

    대체 내 이미지가 어떻길래.

    플레이어들이 이렇게 쩔쩔매는 거냐?

    말했다시피 모든 건 전부 악마 때문이라니까!

    나는 너그럽게 답했다.

    “그대들을 탓하는 게 아니다.”

    우리 고상하신 그랑펠 님의 긍지는 복잡하기 그지없다. 악마를 업신여기면서도, 악마를 두고 볼 수 없고, 그렇다고 악마 때문에 절차가 어긋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감성이다, 정말.’

    과거에는 필사적으로 외면했을 거다.

    남들의 시선이 호의적이든 어쨌든.

    나는 차오르는 자괴감을 참을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나에겐 이 말도 안 되는 낯뜨거운 긍지를 실현할 능력이 생겨버렸으니까. 그게 내뱉은 말은 실현하고야 마는 그랑펠의 설정 덕분인지, 나의 발버둥 덕분인지는 알 수 없다만.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대’들의 시간이다.”

    “……네?”

    “그대들이 아닌 ‘그대’들을 말하는 것이다.”

    “……네, 네?”

    나의 말에 플레이어들이 서로를 쳐다본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교환하는 게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 그 역시도 플레이어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놈의 화법이 문제지.’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뒤를 보아라.”

    “……?”

    그리고 저분들이 한결같은 탓이지.

    이 순간.

    발목을 붙잡은 혼혈의 악마를 두고 볼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고작 악마 때문에 절차가 틀어지는 걸 용납할 수 없는 나와 그랑펠이 내놓는 해답.

    그건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뒤를요?”

    나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플레이어들.

    “!!!”

    이내, 그들이 화들짝 놀라 외친다.

    “저, 저 복장은……!”

    “아시는 분들이세요? 제가 상대적으로 뉴비라서…….”

    “아, 악크샨이에요! 뉴, 뉴스에서 떠들썩하던 악마 사냥꾼들!!”

    [전설, ‘신시대의 영웅, 악크샨’이 실체화합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악마 사냥꾼이 플레이어를 사로잡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폼생폼사.

    그 외형에서 흘러나오는 멋.

    왜, 지금도 기가 막힌다.

    적당히 달라붙는 먹색 전투복.

    치렁거리는 검은 망토.

    화룡점정으로 얼굴을 절반 넘게 덮어버리는 검은색 복면까지.

    그에 더해 시대가 달라졌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야 악마 사냥꾼이 빛 좋은 개살구였지. 악마족 몬스터가 등장한 이후에 취급은 옛날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좋아졌거든.

    ‘나밖에 없어서 티가 안 났을 뿐이지.’

    악크샨 전설로 실체화된 악마 사냥꾼은 정확하게 일곱이었다.

    서로가 적당히 거리를 벌린 채 배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자태에 넋이 나가 있던 플레이어들이 정신을 차린다.

    “역시……. 호열 님께서는…….”

    그렇다, 추측하는 것처럼 나의 클래스는 악마 사냥꾼이다.

    누누이 말했지만.

    나는 클래스를 숨기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고?

    ‘최근 비밀의 필요성을 느끼긴 했다만.’

    왜, 아껴둔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까놓고 말하면 피곤한 성격…….

    좋게 말하면 긍지가 가슴 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굳이 먼저 말하지는 않아도.

    ‘숨기려고 거짓말을 할 순 없다는 거지.’

    어쨌든, 각오했던 바였다.

    사실 뉴스에서 내 클래스를 추측할 때마다 흠칫했다.

    흑마법사부터 시작해서, 한없이 깊은 어둠, 흑암룡이 사실은 히든 클래스가 아니냐는 의견까지. 기이 탐구 도중 얼굴을 붉힐 뻔했던 게 한두 번이 아녔단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법.

    “악크샨의 지도자셨군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악크샨 지도자라고?

    내가?

    왜?

    어쩌다가?!

    ‘또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플레이어들은 [전설] 시스템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전설의 효과로 실체화한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을 진짜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

    입장을 바꿔 보면…….

    ‘단지 내 명령에 응답한 것처럼 보일 거야.’

    항렬을 따지고 보면 악크샨의 막내나 다름없는 나였거늘.

    그런 나더러 악크샨의 지도자라니.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구나.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이 숙덕거리기 시작한다.

    자신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다.

    “확실히 납득이 되네요.”

    “호열 님의 명성이라면…….”

    “그렇다면 악크샨이 대륙에서 모습을 감췄던 것도 큰 그림……!”

    하여튼 악크샨의 기형적인 구조가 문제다. 악마만 사냥할 수 있다면, 세간을 향한 자신들의 평가 따윈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우리 선배님들께서 자초한 사태다.

    ‘그보다 당신들은 말할 수 있잖아?’

    침묵은 곧 긍정이라는 말은 아는지 모르는지.

    악마 사냥꾼들은 플레이어들의 말을 뻔히 듣고서도 묵묵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나도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덧붙일 위인은 아니었다.

    결국, 내게 허락된 선택지는 하나였다.

    ‘나도 이젠 모르겠다.’

    체념.

    그래.

    긍지를 실현하기 위해선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법이지. 혼혈의 악마는 악크샨 선배님들에게 맡기고, 나는 절차를 지키기 위해 제시와 메어리부터 찾아가자.

    “악크샨이 움직였다는 건…….”

    “이게 악마의 짓이라는 거겠죠?!”

    “대형 뉴스잖아요, 이거……!!”

    그 과정에서 또 얼마나 거품이 부풀게 될지 모르겠다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자고로 전설은 부풀면 부풀수록 강해지는 법 아니겠냐?

    나는 읊조렸다.

    “비로소 전설의 시작인가.”

    여튼, 이놈의 입방정은 한마디를 쉬질 않는구나.

    근엄한 표정으로 비장하게 지껄인 헛소리.

    플레이어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저, 전설의 시작!”

    대단한 광경이라도 목격한 듯한 플레이어들을 보면서.

    나는 탄식을 삼켰다.

    내가 참 죄가 많다, 그치……?

    *

    혼혈의 악마.

    낯선 피가 흐르는 육체서 샘솟는 황홀함.

    권능.

    “후후.”

    그레모리는 권능이 주는 경험에 심취했다.

    러스트, 그 개자식을 언젠가는 반드시 찢어발기겠다.

    품었던 다짐이 무색해질 정도로.

    낯서리라고 여겼던 모험가들의 세계였다.

    그러나 조우하는 이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모습에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으며 흔쾌히 자신의 모든 걸 내어줄 정도였다.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심지어는 목적지였던 제로 산맥까지 안내를 받았다.

    그레모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러스트, 네놈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 권능이야말로 나를 위한 거야!’

    그레모리는 확신했다.

    이 순간, 자신은 러스트 그 색마보다도 능숙하게 권능을 사용하고 있다고. 그건 자신감이었다. 악마는 물론이요, 인간, 심지어는 엘프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우월한 외모. 거기에 권능이 더해진 덕분에 샘솟는 자신감 말이다.

    믿을 수 없다면 증거를 보아라.

    “……와아.”

    멍청한 인간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지 않느냐?

    그레모리는 제로 산맥을 바라봤다.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모습 그대로 광활하다.

    ‘이곳이라면 녀석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거야.’

    제아무리 천적이라고 해도 제로 산맥은 광활하기 짝이 없다.

    특히나 십만 동굴에 몸을 숨긴다면.

    혼자서는 수십 년을 뒤져도 나를 찾아낼 수 없을 터.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

    자신은 새롭게 얻은 권능으로 권세를 불려 갈 테니까.

    그레모리는 미소를 삼켰다.

    자신에게 잡아먹히는 천적, 악마 사냥꾼을 상상해 봤다.

    ‘그 오만한 녀석이 무릎 꿇고 자비를 갈구하는 모습이라…….’

    러스트에게 농락당하고 상한 기분마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레모리는 간과했다. 거악의 권능이란 그리 쉽게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심지어 완전히 다른 자신의 피에 섞인 권능은 더욱더 미쳐 날뛸 수밖에 없단 사실을.

    곧 러스트조차도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그레모리를 엄습했다.

    “……뭐야?”

    수족처럼 앞서 나가 길을 열던 모험가 무리가 자리에 멈춰 선다.

    스릉!

    갑자기 무기를 꺼내 들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선언한다.

    “여왕이시여.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지랄이야?

    그레모리는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다.

    권능의 여부에 상관없이 이곳은 최후의 악마 사냥꾼, 그의 고향이었다. 러스트의 말에 따르면 녀석은 자신을 사냥하기 위해 바짝 약이 오른 상태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이 쓰레기들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레모리가 앞으로 나섰다.

    제로 산맥이 위험한 장소라는 건 마계에 있을 때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특히나 저 꼭대기 위엔 드래곤이 산다는 소문이 있다.

    ‘미친 도마뱀들.’

    상위 마왕에 미치진 못하겠지만, 드래곤 또한 완전히 다른 세계를 드나들 수 있는 존재였다. 마계에서 그런 드래곤들의 흉포함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던 그레모리였다.

    “……절대 안 돼.”

    악마 사냥꾼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드래곤의 시선까지 끄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레모리는 자신을 에워싼 플레이어를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위험합니다, 여왕님!”

    “물러나라.”

    “하지만……!”

    “꺼지라고 했어.”

    명줄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왕 놀음에 심취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최대한 조용하게 움직여 적당한 동굴을 찾고, 동굴에 은신해 권능을 이용해 착실하게 세력을 불려 나가야 했다. 그레모리가 목적을 위해 홀로 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

    오싸악─!

    피부에 와 닿는 무수한 기척.

    직감할 수 있었다.

    그건 권능에 이끌린 수많은 이들의 움직임이라고.

    그러나 소름이 돋아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뭐야?”

    권능에 매료됐다는 건 하찮은 수족이 되었다는 뜻이다.

    수족 앞에서 소름이 돋는 주인은 없으니까.

    그랬다.

    그레모리를 흠칫하게 한 건 서서히 목을 죄어오는 압박감이었다.

    “!”

    동서남북.

    아니, 그보다 잘게 쪼개진 방향.

    육체의 떠도는 두 혈액 덕분인가.

    그레모리가 보다 정확한 숫자를 파악한다.

    ‘……일곱 방향!’

    기척은 정확하게 일곱 방향에서 자신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그레모리는 차분하게 떠올렸다.

    마왕인 자신에게 이 정도의 압박감을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뿐.

    ‘악마 사냥꾼.’

    그러나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었다.

    하나였던 놈이 일곱으로 쪼개질 순 없다는 의미다.

    그레모리는 이를 악물었다.

    ‘뭐가 됐든 녀석은, 악마 사냥꾼이 아니란 소리잖아?’

    ……설마 드래곤인가?

    그래도 그 사내보다는 낫다.

    충분히 해볼 만했다.

    ‘어차피 도망치면 모든 게 끝이야.’

    그레모리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위기를 정면돌파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레모리가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푸슉─!

    불현듯.

    시야의 사각에서 날아드는 화살들.

    허나 전부 터무니없이 빗나가 흙바닥에 꽂히고 말았다.

    “역시.”

    그레모리는 조소를 머금었다.

    “내 권능에 취해 제대로 조준조차 하지 못하는구나.”

    “…….”

    “후후. 대답조차 할 수 없는 것이냐?”

    “…….”

    그러나 명백한 착각이었다.

    철컥─

    바닥에 꽂힌 화살에서 울리는 소음.

    “?”

    스와아아악─!

    “……!”

    화살이 반짝거린다.

    아니, 정확하게는 화살에 연결된 가느다란 실이 빛을 반사한다.

    그러고는 그레모리의 시선이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속.

    촤르륵!

    서로 엉켜 들어 그레모리의 행동반경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그레모리의 살갗에 다시금 소름이 돋아난다.

    ‘……이건?’

    은사(銀絲)다.

    은로 만들어진 실이다……!

    뒤늦게 반짝거리는 실의 정체를 알아차렸으니까.

    그레모리가 설마하며 입을 연다.

    “……너희는?”

    “…….”

    그러나 돌아오는 건 이번에도 침묵이었다.

    그래, ‘누군가’가 지겹도록 말하지 않았는가?

    사냥감과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는다.

    “네, 네놈들이 어떻게……!!”

    그것이 바로 악크샨의 제1철칙이라고.

    슥─

    일곱의 악마 사냥꾼이 은제 실을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스와아아아악!

    은제 실을 로프로 삼아 활강하듯 그레모리에게 쇄도한다.

    ‘……안 돼!’

    천적관계.

    ‘보이지 않아. 너무 빨라. 어디냐. 어디서 다가오는 것이냐?’

    사냥감의 눈으로는 좇을 수 없는 사냥꾼의 가속.

    ‘이대로는……!’

    조여드는 포위망.

    “나, 나를 보호해라……!!”

    사냥감의 발악.

    서늘하게 빛나는 은제 단검.

    그리고.

    ……뎅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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