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화. 그럼에도 가소롭구나 (2)
스릉!
세오른 대륙을 일격에 멸망시킨 바알의 검.
헤아릴 수 없는 파괴력이 담긴 검격이 나를 향해 뻗어오던 순간이었다.
그그그극─?!
기괴한 소리와 동시에 바알의 팔뚝이 삐걱거린다.
세오른을 짓밟고 올라온 마계의 악마들이 그 광경을 보고 소리친다.
“저게 무슨 상황이지?”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서……?”
“바알이시여!”
악마라면 지나칠 수 없는 그랑펠이라고 한들.
저 악마들을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그야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은 개입할 수 없는 과거였으니까.
과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
악마 사냥꾼인 내가.
내 손으로 지옥으로 보낸 마왕들이 지상에 보였거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바알에게 다시금 흠칫하고 말았다.
과거와 현재.
바알은 시간선을 초월해서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것도 모자라 검까지 휘둘렀다.
과연, 칼질 한 번으로 한 세계관을 침몰시키는 존재답다.
하지만.
이미 이놈의 주둥이로 내뱉었잖아?
“열등한 족속에게 이해는 바라지 않았다.”
가까워지는 바알의 검 앞에서.
세오른 대륙을 일격에 박살 낸 파괴력 앞에서.
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영광으로 여겨라. 내가 친히 깨닫게 해주마.”
물론, 이건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마찬가지로 내뱉은 말.
바알을 사냥할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냐고?
아니, 그럴 리가 있겠냐.
나는 그저 믿을 뿐이다.
내가 플레이어로서 쌓아온 경험을……!
‘전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 바알이 얼마나 강했던.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던.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메시지에 적정 레벨이 떠오르지 않았던 이상.
‘너, 나 못 때리잖아?’
바알, 너는 내 털끝 하나도.
잘 가다듬은 옷자락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치사하다고? 어쩌라고.’
말했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고.
이게 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뻔뻔한 이유다.
끄그그그극!
바알의 팔뚝에서 근육의 파열음이 울린다.
나와 달리 지상 위 악마들의 표정은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마왕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악마 사냥꾼의 청각을 타고 선명하게 들려온다.
“어째서 그 막대한 제물을 헛되이 하는 거냐, 바알!! 이날을 위해서 마계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알고 있는가? 마계는 고작 세오른 대륙에 만족할 수 없다. 계약을 이행하라. 그 검으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문을 열라는 말이다!!”
아, 죽상이던 이유가 있었구나? 듣자하니, 계약에 따르면 바알은 세오른 대륙에 이어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보다시피.
저주를 통해 과거를 지켜보던 나를 감지한 탓.
아르카나 대륙을 향해야 할 검을 내게 휘두른 것이었다.
“우둔하기 짝이 없구나.”
“저게 어찌 왕들의 왕이란 말인가……?”
“……모든 게 틀어졌다. 하늘이 닫힌다.”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바아아아아아알!!”
끄그그그극…….
마왕들의 절규가 현실이 되어간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휘둘러지던 검이 멈춘다. 검을 붙잡은 손아귀가 느슨해진다. 바알의 팔뚝이 기괴하게 꺾이고 우그러지더니 곧 갈라졌던 하늘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쿠궁……!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계가 ‘세오른 대륙’과 하나가 됩니다.]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하나가 됐다라.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봤지?
그래, 이 또한 기이였다.
악마 숭배자, 카림제바는 말했었다.
-“악마는 그저 수단에 불과할 뿐. 그대라면 알고 있지 않은가? 아르카나 대륙에 필요한 건 진정한 진리라는 것을!”
덕분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때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랐는데.
기이를 다루던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군, 카림제바.
그렇다.
바알, 녀석이야말로 기이의 영역.
그 정점에 있는 존재가 확실했다.
아니지 원래부터 존재했던 십좌의 마왕이라는 걸 생각하면……. 나처럼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게 아니라 기이에서 태어났다고 표현해야 하는 게 맞겠구나.
하지만 그게 바로.
내가 너를 사냥할 수 있다고 확신한 이유다, 바알.
발버둥이든 뭐든.
나는 기이의 영역에서 착실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정점이 있다면 도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고귀하신 그랑펠 님이셨으니까.
게다가.
‘어쨌든 지금도 급은 같다는 거잖아?’
누군가는 심하게 뻔뻔한 거 아니냐고 비웃겠지.
그러나.
내가 뻔뻔한 게 뭐, 하루 이틀이냐?
나는 닫힌 하늘을 향해 읊조렸다.
“꼬리를 내뺐나. 주제 파악은 할 줄 아는군.”
기이의 영역, 정점에 있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악마인 이상.
내게는.
그랑펠에게는 바알이라도 하급 악마 임프와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꼬리를 내뺐냐는 건 좀 그러네.’
나야말로 주제 파악을 하던 찰나였다.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악마 숭배자, 그의 의도대로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진정한 진리.
과거를 통해 바알의 힘을 내게 보여줬으니.
저주가 효력을 다한 것이었다.
.
.
.
[저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정화했습니다.]
[악크샨과의 관계도가 상승했습니다.]
[악크샨에서의 영향력이 상승했습니다.]
악크샨의 반복 퀘스트답게 관계도와 영향력이 상승했다.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나의 시선이 저주로 칠갑이 되어있던 무간의 벽으로 향했다.
‘그래도 옷 구길 일은 없겠네.’
정화에 성공한 덕분에 저주는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악마 숭배자의 시체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생명력이 다해 무간의 규율에 따라 무간에게 잡아먹힌 것이리라.
나는 말했다.
“최후까지 형편없었다.”
결국, 나는 악마 숭배자가 남긴 최후의 발악마저 부정하고 돌아온 셈이겠군. 왜, 바알의 힘을 목격한 내 마음이 꺾이길 바랐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대도. 왕들의 왕을 자처하는 악마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랑펠에게 괜한 자신감만 심어준 셈이 됐거든.
그나저나.
……몇 시지, 지금?
무간에서야 시간조차 멋대로 흐르지만, 나는 저주에 진입했었다. 체감상 긴 시간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일정, 절차에 거슬릴 만한 사건이었다.
그런 내가 뱉을 말이야 뻔하지.
“귀한 시간을 낭비했군.”
나는 싸늘히 말하고 무간을 빠져나왔다.
쿵─
무간의 문이 닫히고 나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면서 나의 입방정을 되돌아봤다. 그걸 전부 실현하려면 얼마나 발버둥을 쳐야 하려나, 생각하는데…….
돌아보니 마냥 허세는 아니었잖아?
-“고작 세오른 대륙에 만족할 수 없다. 계약을 이행하라. 그 검으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문을 열라는 말이다!!”
세오른 대륙이 멸망한 시점은 과거였다.
만약, 내가 저주에 진입하지 않아서.
바알이 계약대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면……?
아르카나 대륙의 역사는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내 입방정이 그걸 막은 셈인 건가?’
물론, 확신할 순 없다. 바알이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만 봐도 시간선이란 게 지금의 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개념 같았으니까.
‘이제라도 과학 공부 좀 해야 하나.’
쩝, 이럴 땐 문과인 게 원망스럽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바알, 녀석이 마냥 범접할 수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덕분인가, 나의 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또각.
예상대로 시간은 흘러 햇살이 마탑을 비추고 있었다. 마탑은 일찍부터 인파로 붐볐다. 그런 로비에 구두 소리가 울리니, 본의 아니게 시선이 집중되고야 말았다.
결국,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호열이다!”
“뭐, 뭐야. 마탑에 지하도 있었어?!”
“아침부터 무슨 사건이 터진 건가?”
“당장 속보부터 띄워 봐!”
하지만 타인의 시선과 평가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나였으니.
나는 곧장 포탈로 나아갔다.
서두르자, 오늘 저녁엔 아르카나 대륙에도 들러봐야 하니까.
*
[제로 산맥]
[적정 레벨 :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음]
[붕괴도 : 100%]
플레이어들이 제로 산맥을 올려다본다.
“캬, 옛날엔 언제 저걸 오르나 싶었는데.”
“대격변 이후엔 까맣게 잊고 있었죠, 사실.”
“어쨌거나 꽤 출세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벅차는 제로 산맥 첫 진입.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는 제로 산맥이었지만, 랭커들을 필두로 제로 산맥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의 수는 증가 중이었다. 덕분에 출몰하는 몬스터에 관한 팁과 정보가 하나둘씩 퍼지고 있었다.
활을 어깨에 멘 궁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400레벨부터는 웬만한 균열보다 효율이 높다니까요.”
“그래도 다들 저와 같은 400레벨이실 줄이야.”
“전 사실 400레벨만 보고 달려왔거든요.”
네 명의 플레이어는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검과 방패, 지팡이, 활.
각자가 장비를 치켜들고 제로 산맥을 올랐다.
“아차, 잠깐만요! 제가 실은 아는 탐험가님에게 지도 한 장을 받았거든요! 언젠가 제로 산맥에 진입하면 분명 쓸모가 있을 거라고…….”
지팡이를 든 마법사의 말에 모두가 반색했다.
“탐험가의 지도라고요?! 그거 평범한 지도가 아니잖아요? 저도 넷튜브 영상에서나 봤는데……. 그게 내비게이션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진짜예요?”
“지팡이는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편하게 지도 찾아보세요.”
“앗, 감사합니다. 덕분에 찾았어요!”
[연맹 탐험가의 지도 : 제로 산맥 저지대]
[등급 : 레어]
[제한 : 없음]
[완성도 : 3.2%]
[설명 : 연맹 소속 탐험가가 작성한 지도. 탐험가의 발자취가 당신의 길잡이가 되리라.]
정보창은 언뜻 보기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저지대를 기록한 것뿐이면서 고작 3.2퍼센트라니.
대충 봤을 땐 이런 걸 어디에 사용하나 싶겠지.
하지만 광활한 제로 산맥에서 3.2퍼센트는 절대 적지 않다.
[탐험가의 발길이 일대를 비춥니다.]
메시지와 동시에 일대에 떠오른 발자국 문양.
“그러니까 이 발자국이 이정표 역할을 한다는 거죠?”
“네! 자세히 보면……. 이렇게 정보도 떠올라요!”
“이 귀한 걸 구해오실 줄이야.”
“저희가 더 분발하겠습니다, 마법사님!”
“에이, 별말씀을요.”
새로운 공략들이 갱신되고 있는 제로 산맥 저지대라고 해도 처음엔 걱정이 앞서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탐험가의 지도가 일대를 밝혀준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심적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부스럭!
문득, 먼 숲 쪽에서 들려오는 기척.
플레이어들은 당황하지 않고, 주변에 새겨진 발자국을 확인했다.
작고 귀여운 발자국으로 보건대…….
“산맥 참새가 아닐까 싶은데요?”
산맥 참새 : Lv.430.
달달 외우다시피 했기에.
구체적인 정보가 바로 떠오른다.
“이 작은 게 430레벨이라니, 안 믿기네요.”
“토끼에 고전하던 랭커들 생각하면 방심은 금물이죠.”
“떼로 몰려오면 곤란하니까 한 마리씩 유인하죠!”
랭커에는 한참 미치지 못해도 400레벨이면 고레벨, 엄연한 베테랑으로 취급된다. 특히나 대격변 이후에 고레벨에 도달한 플레이어들에겐 목숨을 건 사투에서 얻은 실전감각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알아차렸다.
부들부들.
심상치 않은 몸의 변화를.
“……저기 저만 긴장되는 걸까요?”
430레벨은 만만치 않은 레벨이지만, 동시에 협공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육체가 지나칠 정도로 말을 듣지 않았다.
꼴깍─!
플레이어,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수풀 속의 무언가.
산맥 참새라고 하기엔 와 닿는 압력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법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도가 있잖아. 휘강 선배가 준 지도.’
지금 일대에서 위협이 될만한 몬스터는 출몰하지 않는다.
저건 참새야, 산맥 참새라고.
그러나 각오를 다지는 와중에 깨닫고 말았다.
“……근데, 참새가 움직이는 소리가 저렇게 큰가요?”
그때였다.
부스스!
숲 속에서 접근하던 무언가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경악할 새도 없이 그들의 눈앞이 점멸했다.
출현 메시지였다.
[일대에 ‘문 글레이브 베어’가 출현합니다.]
“……!”
마찬가지로 떠오르는 정보.
문 글레이브 베어 : Lv.700.
랭커들조차 달라붙어서 사냥해야 하는 몬스터가 어째서 산맥 저지대에 출현한 것인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의문은 가질 수 없었다.
‘젠장!’
승산은 없다.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700레벨 몬스터 상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다들 도망……!”
찰나의 순간.
망설이는 바람에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이미 늦었다, 한 방은 버텨내야 한다.
다짐하고 방패를 치켜든 순간이었다.
“……?”
그제야 보였다.
문 글레이브 베어의 눈동자가.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동공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아니 완전히 매료된 듯.
플레이어들에겐 관심도 주지 않고 육중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잠깐, 방향이잇?!”
그러나 300레벨의 격차는 동선이 겹치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수준. 근력과 민첩이 뒷받침되는 이들은 회피할 수 있었지만, 스킬을 준비하던 마법사에겐 무리한 요구였다.
“으, 으으!”
가까워지는 마법사와 문 글레이브 베어.
“……읏?!”
하지만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 어라?”
찰나의 순간.
쿠드드득─
문 글레이브 베어와 마법사 사이에 솟아오른 암벽.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그대들 넷이 전부인가.”
“……어, 어?!!”
자신과 마주하고.
경악하는 플레이어들에게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열은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미신 따위 믿지 않는다.”
뜻 모를 소리를 당당하게도.
.
.
.
어째서 할 일이 많아질수록 방해도 많아지는가?
이쯤 되면 과학이다.
비단, ‘문 글레이브 베어’뿐만이 아니다.
위에서 아래로.
제로 산맥이 역류하고 있었다. 고지대에 출몰하는 고레벨 몬스터들이 저지대로 몰려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럼에도 나는 미신 따위 믿지 않는다.”
좋다, 그랑펠.
미신 신봉자인 나도 이번만큼은 양보하겠다.
단순하게 네 명의 플레이어.
죽을 사(死)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산맥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나는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감각을 곤두세웠다.
왜, 내가 배운 게 있는데 말이야.
구린 일의 원흉은 웬만하면 악마 때문이더라고.
그러자 눈앞이 점멸했다.
봐봐, 내 말이 맞잖아?
기승전악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