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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17화 (316/489)
  • ◈ 317화. 그럼에도 가소롭구나 (1)

    너무 조심성 없이 움직이는 거 아니냐고?

    오히려 내가 돌려주고 싶은 질문이다.

    적막한 마탑에 냉랭하게 울리는 혼잣말.

    “명백한 도전이군.”

    다른 곳도 아니고 마탑에서 개수작을 부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이군. 게다가 무간이라니.

    ‘진짜 명을 재촉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그러나 이내,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만.’

    무간은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오감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 심지어는 마법도 발현할 수 없다. 그런 무간에서 흘러나오는 기척을 나는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그저 감각이 예리해져서 그렇다고 치부하기엔……. 나는 악마 사낭꾼이다. 악마를 쫓을 때야 천적답게 오감이 확장되지만 그 외의 경우에선 젬병이라는 의미다.

    더불어 무간에 진입할 수 있는 건 마탑의 최상위 간부들뿐이다. 개방 권한이 수석 이상에게만 허가되어있어 선임들조차 진입할 수 없단 말이다.

    또각.

    이윽고 나는 무간의 입구에서 결론을 내렸다.

    ‘내부에 변화가 생긴 거야.’

    누군가 진입한 게 아니다.

    무간에 갇혀있던 두 원로 마법사.

    아니, 악마 숭배자들에게 변화가 생긴 거다.

    “수석으로서 명한다. 무간의 문을 개방하라.”

    쿠구궁.

    심상치 않은 낌새를 포착했다만, 나는 오히려 더 거침없이 말했다. 뭐가 어찌 된 일이든 여긴 마탑이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달려올 마법사들이 넘쳐난다는 거지.

    ‘심지어 무간이잖아?’

    흔들리지 않는 항상심이 특히나 빛을 발하는 환경.

    다른 이들은 고작 몇 분도 견디지 못하는 무간에서 녹차를 마시고, 독서까지 해봤던 나였다. 걱정되기보다는 오히려 반가워해야 할 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걸음을 내디뎠다. 무간이 구두의 또각 소리조차 집어삼키기도 잠깐. 나는 곧장 불순한 기척의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군.”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강대한 정신력을 가진다. 그래도 원로 마법사답게 무간에서 오랜 시간을 견뎠지만,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는 거겠지.

    만약, 얌전하게 숨을 거뒀다면.

    악마에게 자비가 없는 그랑펠이라면 몰라도.

    나, 이호열은 명복을 빌어줄 수도 있었다.

    미운 정도 있겠다, 죽은 사람 명복 하나를 못 빌어주겠냐?

    하지만 끝까지 악의가 가득한 게 괜한 생각이었군.

    무간의 흑벽.

    손가락을 붓으로, 피를 먹으로 삼아 쓴 글이 있었다.

    아니, 글이라고 하기엔…….

    ‘알아볼 수가 없네.’

    무간에서 말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이가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그건 글도 그림도 아닌 무언가였다. 하지만 그 유서 아닌 유서에 담긴 뜻은 곧장 파악할 수 있었다.

    눈치가 빨라서가 아니다.

    악마 사냥꾼의 직감이었다.

    [저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발견했습니다.]

    간만에 보는 메시지였다.

    왜,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할 때나 봤던 메시지였거든.

    악크샨의 단골 퀘스트 중 하나가 바로.

    악마의 저주를 파괴하는 거였으니까.

    ‘파괴라고 하니까 거창해 보이지.’

    그 실상은 잡일 퀘스트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악마의 저주라고 해봤자 낙서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마을이나 도시 외벽에 그려진 낙서를 지우는 잡퀘랑 다를 바가 없는 취급을 받았지.

    ‘악크샨이 괜히 플레이어한테 외면을 받은 게 아니라니까?’

    그러나.

    나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그 의도가 더없이 불순하군.”

    그때와 지금의 악마는 차원이 다르다.

    저주도 마찬가지겠지. 심지어 이건 한때 원로 마법사였던 거물이 죽어가며 남긴 저주였다. 저주에도 무게감이 있다면 어마어마하게 묵직한 저주일 게 분명했다.

    ‘겉보기에도 그렇게 생겼지.’

    흑벽을 가득 채운 혈서.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끔찍하다. 그러나 내가, 그랑펠이 누구인가? 강심장을 넘어서 심장이 뛰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악마 앞에서는 일말의 동요조차 않는 천적, 그 자체.

    나는 건조한 감상을 내놓았다.

    “허나, 창작에는 소질이 없군.”

    한때 원로 마법사였던 악마 숭배자에 대한 평가였다.

    악마의 저주 따위.

    그랑펠에겐 그저 꼴 보기 싫은 낙서에 불과할 테니까.

    ‘근데, 나는 아니거든.’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괜히 찝찝하고, 혹시라도 부정을 타랴 [행운] 스탯에 4가 들어가지 않게 포인트를 배분하고, 문지방은 되도록 밟지 않는 미신의 신봉자.

    그게 나, 이호열이란 말이다.

    ‘없애자.’

    심정 같아서는.

    마법으로 뜨거운 물을 끼얹어서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간에선 마법 발현이 불가능하다.

    ‘……손으로 박박 문대서 지워야 하나. 그 시절처럼?’

    꼭두새벽부터 애써 가다듬은 옷매무새가 무색해지겠구나.

    악마 사냥꾼은 끝까지 악마 사냥꾼이구나.

    내가 탄식을 삼키던 찰나였다.

    눈앞이 점멸했다.

    [저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진입하시겠습니까?]

    아하, 그렇게 된 거구나?

    [저주에 진입하기 위해선 ‘천적관계’가 필요합니다.]

    [저주에 진입하기 위해선 ‘구마의식’이 필요합니다.]

    [스킬, ‘천적관계’의 숙련도가 충분합니다.]

    [스킬, ‘구마의식’의 숙련도가 충분합니다.]

    나는 곧장 태세를 전환했다.

    “가소롭기 그지없다.”

    그래, 사냥감인 악마도 성장했는데.

    천적인 악마 사냥꾼도 발전해야 밸런스가 맞지 않겠어?

    이쯤 되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

    ‘……진짜 왕귀캐라서 그랬던 건가?’

    초반에는 별 볼 일 없지만, 후반부에는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캐릭터를 왕의 귀환에 빗대어 흔히 왕귀캐, 왕귀 클래스라고 부르곤 한다.

    사실 대부분의 왕귀 클래스는 떡잎부터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가까이에는 용기사, 스칼이 있겠구만.

    ‘드래곤을 타지 못해도 그렇게 강한데.’

    스칼이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 진짜 용기사가 된다면 어떤 능력을 뽐낼 수 있을지는 세상 모두가 짐작하고, 기대하는 바였다. 그런 의미에서 악마 사냥꾼이 왕귀캐라면 모두가 비웃겠지.

    그러나 유일한 악마 사냥꾼인 나는 체감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스킬도 마찬가지.’

    수치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스킬, [천적관계]와 [구마의식]은 그동안 명백히 성장했다. 뭣보다 무간에서 풍겨오는 악마의 낌새를 알아차린 게 그 증거 아니겠어?

    ‘성장한 덕분에 저주도 바로 볼 수 있는 거야.’

    깨닫는 순간.

    나는 악마 숭배자가 남긴 저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찝찝한 저주를 남겨두지 않고 싶은 마음에 더해 순수하게 궁금해졌거든. 악마 숭배자 주제에 죽음의 순간, 의미심장하게 남겨둔 저주엔 과연 어떤 목적이 담겨있을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

    그것도 모자라 거창한 이름까지 붙인 이유를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그랑펠의 성질머리에도.

    악마의 뜻 따윈.

    “그렇다면 내가 거슬러 주겠다.”

    최후의 최후까지.

    부정하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이번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저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진입합니다.]

    .

    .

    .

    광활한 시야.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균열이나 던전처럼 전투는 없는 건가?’

    혹시라도 저주 속에서 몬스터가 나타나는 건 아닌가, 예상했는데.

    적정 레벨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 수 있듯.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다만.

    “사람 살려!!”

    “저, 저 괴물들은 대체 뭐야!”

    “마계의 문이 열렸어!”

    “후퇴!! 다들 도망쳐라아아아아!!”

    발아래로 보이는 풍경은 참혹한 전장이 분명했다.

    아니, 저걸 전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악마들이 도시를 짓밟는다.

    처음엔 아르카나 대륙의 도시인가, 싶었거늘.

    아르카나 대륙이라고 하기엔 낯설었다. 언뜻 보이는 조각상과 건물 양식, 심지어는 주민들의 생김새도 아르카나 대륙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그때 의문을 해결하는 메시지가 반짝였다.

    [파멸을 향해가는 ‘세오른 대륙’에 진입하셨습니다.]

    세오른 대륙이라…….

    낯설다 했더니.

    아르카나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었나?

    언제나 중요한 건 출제자의 의도다.

    나는 악마 숭배자의 처지에서 생각했다.

    죽음의 순간, 그는 저주로 무엇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그렇군.”

    다시금 떠올려본다.

    원로 마법사, 카림제바를 포함한 3인의 악마 숭배자들의 목적을.

    그들은 현실에 『상위 마왕』을 현현시키려고 했었다.

    반짝─

    정답임을 알리듯.

    하늘 위에 마안(魔眼)이 일제히 정렬한다.

    정렬하는 모양새가 낯이 익다.

    프로스트에서 목격했던 데카라비아의 소환진과 유사하다.

    다만, 광활한 상공에 마법진을 그리는 스케일을 보았을 때.

    무엇을 소환하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상위 마왕이겠지.

    카림제바는 세계 곳곳에 균열로 마법진을 그려 상위 마왕, 가미긴을 소환하려고 했었다. 근데 이건 그때보다 규모가 크잖아? 저 마안들은 대륙과 행성을 넘어서 우주를 부유하는 존재일 테니까.

    덕분에 상위 마왕 중에서도 정체를 특정할 수 있었다.

    “바알.”

    서열 1위 마왕, 바알(Bael).

    그래, 악마 숭배자가 최후에 남긴 저주의 목적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했겠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상위 마왕의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무의미한 짓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

    나는 객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럴만하다고.

    하늘이 암전된다.

    퍽.

    퍽….

    퍽…….

    둔탁한 소음과 함께.

    유일하게 하늘을 빛내던 마안이 하나씩 터져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악마 사냥꾼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런 걸 제물로 잡아먹다니.

    얼마나 무지막지한 놈이란 거야, 대체……?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 저주 덕분에 나는 상위 마왕의 전력을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바알의 얼굴은 볼 수 있을 테니까.

    ‘……뭐야?’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하늘의 마안이 모두 터져나가자 말 그대로 하늘이 갈라졌다. 갈라진 하늘 속에서 세오른 대륙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고작 하나의 팔뚝이었다.

    스릉─

    정확하게는 검을 쥔 손아귀였다.

    나는 그 순간.

    흠칫했다.

    ……수십 개의 마안을 제물로 바쳤다.

    설마, 그 막대한 제물로도.

    고작 바알의 팔뚝 하나를 불러내는데 그쳤단 거냐?

    그리고 멈칫거림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 손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세오른 대륙이 그대로 분쇄되어 깊은 무저갱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으니까.

    그 역시도 악마 사냥꾼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악마의 능력을, 마왕의 권능을 사용한 게 아니다.

    바알은 순수한 육체의 무력만으로 세오른 대륙을.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킨 것이었다.

    나, 이호열.

    이번에는 플레이어라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건 견적조차 나오지 않는 적이라는 걸.

    가미긴과 대적해 봤던 경험 덕분에 상위 마왕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는 짐작했었다.

    지옥의 악크샨 악마 사냥꾼.

    악마 앞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강할 그들이 전력으로 달라붙었음에도. 지옥의 불길이 아니었다면, 가미긴을 지옥으로 끌어내릴 순 없었을 테니까.

    바알은 그런 가미긴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였다.

    ‘이래서 저주라는 건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마음이 꺾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바알, 녀석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도달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존재 같았다.

    그러나 나의 절망과 무관하게도.

    내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가 없었다.

    심박은 평온하고, 머리는 차가웠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긍지는 모순적이게도 악마의 앞에서 가장 드높아진다.』

    덕분인가.

    “감히 누구를 훈계하려 드는 거지?”

    나는 태연하게 읊조렸다.

    “보여주지 않아도 전부 알고 있다.”

    그건 허세가 아니었다.

    “바알, 너를 사냥할 방법까지도.”

    그때였다.

    쿠구구구!

    바알이 검의 날을 세웠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나를 향해서.

    “열등한 족속에게 이해는 바라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영광으로 여겨라. 내가 친히 깨닫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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