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화. 의도가 불순하군
“하아…….”
가쁜 숨을 고르며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애쓴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없다.
정확히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무리였다.
“대체……?”
육체의 근육, 살갗, 혈액, 한 방울 한 방울, 모든 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이질적이었다.
“하아, 하아…….”
그럼에도 힘겹게 발을 옮기려는데.
찰박.
“!”
끈적한 무언가가 걸음을 붙잡는다.
피였다.
식고 검고 끈적한 피가 발을.
아니, 전신을 불쾌하게 휘감고 있었다.
“뭐?”
혼탁한 머릿속에서 의문이 떠오른다.
……불쾌하다니.
나는 어째서 피를 불쾌하다고 여긴 거지?
‘이건 제물의 피야.’
어지러운 상황에도 잊지 않은 건 악마로서의 본능이었다. 힘의 원천이 되는 부정적인 감정. 무언가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에서 부정적인 감정은 극대화된다.
그러니 피에 흠뻑 젖은 지금을 달가워해야 했거늘.
“우욱!”
불쾌한 걸 넘어서 역겨워 헛구역질이 치솟을 정도였다.
혼란 속에서 혼혈의 악마는 비틀거렸다.
간신히 벽을 붙잡고 주위를 살폈다.
‘……고향이 아니야.’
사방이 철로 지어진 요새와도 같았다.
심지어 벽면 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기계가 달려있다.
모든 게 고향에선 본 적이 없던 것들이었다.
곱씹던 혼혈의 악마가 흠칫한다.
‘……고향?’
곧장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혼란한 머릿속에서 두 개의 단어가 떠돌아다닌다.
마계와 아르카나 대륙.
윽,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제물을 싫어하지.”
“……?”
여자의 목소리는 높고 끈적했다.
찰나에 감각을 집중시킬 만큼.
매혹적인 걸 넘어서 고혹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의아한 일이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여인이 아닌 사내였다.
“역겹거든. 인간의 피 따윈 거저 준다고 해도 사절이야.”
“……!”
철벽에 달라붙은 복잡한 기계, CCTV.
녹화 중인 화면에 떠오른 건 악마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법한 외관.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한 악마, 그대로였다.
그러나 혼혈의 악마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름다워.’
이 순간, 저 악마를 바라보는 모든 이는.
그 외관과 관계없이 매료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같은 악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악마가 말한다.
“이제는 너도 나와 마찬가지겠구나, 잡종의 여왕.”
잡종의 여왕.
“으윽!”
그 단어에 혼탁하던 기억이 요동친다.
잡종.
아르카나 대륙의 칠거악(七巨惡)들이 마계의 악마를 낮잡아 이르는 단어였다. 그리고 여왕이라는 건. 마왕 중 유일한 여왕인 자신을……. 혼혈의 악마가 과거를 기억해 냈다.
“그레모리……!”
서열 56위.
살구빛 머리카락.
화사한 피부.
인간마저 현혹하는 마왕.
‘그래, 나는 그레모리다.’
깨닫는 순간. 혼혈의 악마, 그레모리의 지난 과거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차렸다.
“러스트, 개자식!!”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나? 칭찬해 주지.”
“칭찬한다고? 이 몸, 그레모리를……?”
그레모리는 군림하는 여왕이다.
칭찬 따위 달갑기는커녕 굴욕으로 여겨야 했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모욕조차 연인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빌어먹을……!’
모든 건 녀석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레모리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흑암룡이다, 제국의 반격이다,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은 흉흉했다. 무엇보다 하늘의 마안(魔眼)조차 벌벌 떨던 모습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눈에 띄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그래서 심심풀이로 가지고 놀던 인간, 영주를 다시금 내세우기까지 했다.
눈물의 마왕성을 평범한 인간의 성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바라는 건 가늘고 긴 여왕의 삶이었지, 주제를 모르고 날뛰다 사냥당하는 삶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감히, 나를 속여?”
러스트(Lust).
거악.
칠죄종 색욕에 의해서.
빠득!
마음 같아서는 눈앞의 놈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할 수 있어.’
피를 불쾌하게 여긴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다만, 어쨌든 그 제물로 육체가 강해졌다는 건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날 죽이고 싶어? 그럴 수 있었다면 내가 널 균열로 끌어갔을 때 필사적으로 반항했겠지. 근데, 넌 그러지 못했잖아? 머리채를 붙잡히고도 좋아하던 그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
“닥쳐! 닥쳐라!”
“아니, 닥쳐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모멸적인 말을 듣고도 닥치고 있어야 한다고?
그레모리가 손톱을 세운 순간이었다.
러스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살렸거든, 여왕.”
“……뭐라고?”
“너랑 십좌 말고는 마왕이란 마왕은 다 뒈졌다는 뜻이지, 뭐긴 뭐야.”
십좌.
우둔한 아버지들과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마왕이 뒈졌다니?
믿을 수 없었다.
“……사실이야?”
“물론.”
“말도 안 돼.”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녀석이었다.
그 악마 사냥꾼은 네 번째 왕좌의 가미긴을 지옥으로 떨어트렸다.
그 가공할 만한 전투력과 잔혹함이라면…….
남은 마왕들을 모조리 사냥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레모리가 날카롭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다고? 헛소리.”
자신 또한 마왕이기에 잘 알고 있다.
마왕은 괜히 악마의 왕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그레모리가 말을 이었다.
“숨거나 빌어서라도 살아남았을 거야, 그들은.”
설령 악마 사냥꾼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왕 전원을 단시간 내에 사냥하는 건 설령 악크샨이 부활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러스트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정확해. 넌 하루도 기절하지 않았어.”
“역시 나를 기만……!”
“그러나 마왕들도 사냥당한 게 아니라 흉조에게 삼켜진 거거든.”
“……흉조? 삼켜져?”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스트에겐 친절하게 설명할 생각 따윈 없었다.
흉조를 빗겨나간 마왕, 그레모리.
이로써 확실해졌다.
“역시 틀에 갇혀서는 안 되는군, 클라우디.”
“틀에 갇혀선 안 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네 몸속에 나의 피가 돌고 있다는 말이다.”
“……뭐, 뭐라고?!”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 피를 보고 헛구역질을 하다니. 육체에 새겨진 잡종의 본능과는 명백히 다르잖아? 그 변화가 증거라면 증거겠지.”
러스트는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과연, 클라우디야.”
마계의 악마, 그레모리.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 러스트.
완전히 다른 두 악마의 피를 섞자 혼혈의 악마가 되었다.
균열에 몸을 던진, 도박수를 던진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꽤나 마음에 들어.”
이 땅은 아르카나 대륙보다도 겉과 속이 다른 세계였다.
겉으로는 그럴싸하지만.
그 속은 곪아 터져가고 있단 뜻이다.
무엇보다 모험가라는 양질의 제물을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장담할 수 있었다. 계획을 실행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장소는 없다고.
러스트가 널브러진 플레이어의 시체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레모리, 이제부터는 발악이라도 하는 게 이로울 거다.”
“발악? 내가? 왜?”
“지금쯤이면 클라우디가……. 아니, 잡종은 알아듣지 못하겠군. 그래,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가 너를 추적하고 있을 테니까. 내가 내어준 피와 목숨을 함부로 허비하지 말라는 뜻이다.”
“……!”
러스트는 그 길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다시 생각해 봐도 지나치군.’
클라우디 가문에 생존자가 존재했다니.
그리고 그 클라우디가 악크샨에 몸을 담아서.
악크샨에서도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니.
“운명의 장난도 정도가 있지.”
바르르.
러스트는 그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 러스트가 이러한 도박수를 던진 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로군.”
이대로라면 머지않아서 사냥당한다.
러스트는 깨달았으니까.
거악, 칠죄종 색욕으로서의 자존심 따윈 내던졌다.
그러자 활로가 보였다.
혼혈 의식이라면…….
정확하게는.
‘상위 마왕과 피를 섞을 수 있다면.’
클라우디와 악크샨을 동시에 짊어진 그와 대적할 힘을 거머쥘 가능성을. 물론, 실험체에 불과한 그레모리가 그 사실을 알 순 없었다.
그레모리가 러스트의 뒤통수에 소리쳤다.
“빌어먹을 새끼야. 여기가 어딘데 나더러 발버둥 치라는 거야! 아르카나 대륙이면 몰라도……. 모험가의 세계라니. 거지 같은 땅에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혼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어?”
“?”
“네가 갈망하던 힘 아니었나, 잡종. 나의 권능은.”
“!”
확장되는 그레모리의 동공.
잡종의 여왕이라 불려서 발끈한 게 아니었다.
러스트의 권능.
마왕인 자신조차 굴복시킬 정도로.
원초적인 본능을 강력하게 자극하는 것.
만약, 그 매혹의 권능을 거머쥐게 되었다면……?
그레모리가 피에 젖은 몸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을지도?”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았다.
*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나, 이호열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과한 복장과 칼각 잡기였다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젠 이런 짓도 익숙해지는구만.
펄럭─
마지막으로 여명의 재킷까지 어깨에 걸치고 몸을 돌렸다.
이른 새벽부터 여명의 이름값을 하러 가는 거냐고 묻는다면.
반박할 수 없겠군.
가뜩이나 바쁜 마당에.
본의 아니게 짐을 또 짊어지고 말았잖냐.
‘지켜봐야지. 대마법사 수행.’
제시와 메어리.
오늘부로 대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구체적인 퀘스트 목표는 제시에게 아직 듣지 않았는데. 메어리 그 장소로 제로 산맥을 고른 걸 보면 절대 호락호락한 퀘스트가 아니겠지.
‘다른 클래스도 아니고 대마법사니까.’
급이 다른 히든 클래스.
악마 사냥꾼의 클래스 퀘스트만 하더라도 후반부로 가면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물론, 그게 걱정돼서 오지랖이나 떨려고 두 사람과 동행하는 건 절대 아니다.
슥─
나는 집무실에서 빠져나와 마탑의 계단, 그 아래를 바라봤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마탑의 계단이다. 이른 새벽이니 사람도 없겠다, 최저층까지 시야를 가리는 게 없어서 곧장 포탈이 보였다.
최우선 목표는 저거.
바로 저 포탈이었다.
정확하게는 포탈의 개조겠지.
─기이를 향한 진보 (진행 중)
●마탑의 근원을 파악하라. (성공)
●미지의 근원, 흉조를 추적하라. (실패)
●새로운 해결책을 개척하라. (진행 중)
황혼의 마법에서 가능성을 목격했으니.
포탈의 간섭 과정에 황혼을 더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사실은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마지막 날.
마력 탈진과 회복을 반복하던 나는 메어리의 보조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메어리라면 마탑의 포탈을 쉽게 개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탐색, 간섭, 발현……. 그런 토대가 있었군요.”
그런데 짧게나마 대화를 나눠보니까 불가능하겠다, 싶었다.
쉽게 예시를 들자면 황혼은 원시의 마법이었다.
보다 원초적이고, 그렇기에 강렬하게 날뛰는 게 황혼의 마법과 마력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견적을 냈다.
‘메어리가 지금의 마법을 배우는 것보다야.’
차라리 내가 황혼의 마법을 습득하는 게 훨씬 빠를 것 같다고. 그래서 업무에 충실한 와중에도. 이렇게 어깨너머로라도 배우기 위해서 꼭두새벽부터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 않겠냐.
이른 새벽의 마탑은 고요했다.
마탑의 마법사들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잠은 자야 한다.
사람보다 초인에 가까우니까, 수면이 필요 없는 거 아니냐고?
‘그 질문엔 훌륭한 반례가 있지.’
허구한 날에 낮잠만 퍼질러 자는 고양이, 탑주가 말이야.
물론,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에 시달리는 나는 예외다. 수면 부족으로 피곤을 호소할 새도 없이 언제나 육체가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거든.
덕분에 나는 놓치지 않았다.
“……!”
끄그끄그극─!
고요한 새벽의 마탑.
불순하게 움직이는 기척을.
진짜 새벽부터 잠잠할 틈이 없구나.
탄식을 삼키는 것도 찰나였다.
수석으로서 마탑에서 벌어진 일을 외면할 수 없는 노릇.
“절차를 시작부터 방해한 각오는 되었다고 믿겠다.”
나는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기척이 느껴진 마탑의 최저층.
마탑 지하의 무간(無間)으로.
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