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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15화 (314/489)

◈ 315화. 그 또한 나라면? (2)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탓에 헛것을 보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시스템 메시지는 뇌리에 떠오른다. 설령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시스템 메시지만큼은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믿기지 않아 중얼거려 본다.

“진짜라고?”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다.]

멸망을 향해가는 아르카나 대륙.

진입 메시지를 장식하던 그 절망적인 수식어가 사라졌다. 그러나 천하통일 길드원들이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다. 진입 자체가 처음이니, 과거에 어떤 메시지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절망으로 떨어지던 아르카나 대륙을 구원한 건 한 명의 사내였습니다. 그는 아르카나 대륙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희망을 가져왔다는 사내의 정체를.

지레 짐작해서 경악한 것인가?

아직은 아니다.

메시지만으로 추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경악의 이유는 이어서 떠오르는 메시지들에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은 이제부터 그 전설을 노래합니다. 아르카나 대륙 전역에 불던 찬바람이 멎고, 얼어붙은 땅이 녹아내려 생명력으로 전율합니다. : 경험치 획득량이 50퍼센트 증가합니다.]

“마, 말도 안 돼……!!”

그렇다.

천하통일 길드원들이 아르카나 대륙을 밟자마자 경악한 이유는 말도 안 되는 버프 때문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경험치 획득량 50퍼센트 상승이라니. 그것만으로도 현실의 플레이어들은 상상도 못 할 버프였거늘.

그 역시 시작에 불과했다.

[우주의 정령이 역전된 엔트로피에 크게 기뻐합니다. 그들의 장난기가 아르카나 대륙의 인과율을 크게 뒤틀어 놓았습니다만, 누구도 그들을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 아이템 드롭율이 50퍼센트 증가합니다.]

[순혈의 마도 종족, 황혼의 후예들이 아르카나 대륙에 보랏빛 마력을 흩뿌립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마력 농도가 짙어집니다. 대마도 시대의 서막이 열립니다. : 마법 발현력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

[홀연히 자취를 감췄던 무(武)의 스승, 웨펀 마스터가 돌아왔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무기가 그를 숭배하며 그를 뛰어넘기 위해 예기를 머금습니다. : 모든 무기의 숙련도 습득이 30퍼센트 증가합니다.]

[행방불명된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가 아르카나 대륙에 복귀했습니다. 극적인 생존에 은둔생활을 청산하고자 한 낭만 탐험가의 지식이 아르카나 대륙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가 대륙을 떠돌며 지식을 설파합니다.]

…….

하나하나가 아르카나의 질서를 뒤바꿀 수 있는 버프였다.

그 메시지들이 경쟁하듯 쉴 새 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천하통일에서도 실력자로 꼽혔기에 아르카나 대륙에 발을 디딜 수 있던 플레이어들이다. 해박한 플레이어로서의 지식이 이 버프 메시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결론을 내린다.

일곱 모두가 같은 생각을 품었다.

‘이건 환골탈태의 기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버프와 함께 아르카나 대륙에서 임무를 수행. 현실로 복귀할 때쯤이면……. 자신들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질 정도로 성장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회를 제게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주군!”

물론, 그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버프에 감탄하기도 잠깐, 머리가 회전한다.

메시지에선 분명 ‘그 사내’라고 했었다.

‘대체 어떤 사내길래.’

아르카나 대륙 전역에 이런 버프를 몰고 올 수 있단 말인가?

그에 관한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던가.

전설이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더욱더 부풀어 가는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사내의 전설은 아르카나 대륙에 퍼져있는 게 당연했다.

메시지로 출력되기에 차고 넘칠 정도로.

마지막 메시지가 점멸한다.

[이 모든 것이 흑암룡의 안배였다.]

“……?!!”

흑암룡.

그 단어에 천하통일, 길드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간다.

그 이름은 아르카나 대륙과 완전히 다른 세계, 현실에서도 쉴 새 없이. 누군가의 말대로 하루에도 수억 번씩 울려 퍼지는 이름이었으니까.

“이, 이호열……?”

그래, 호열의 이명(異名)이었으니까.

충격 속에서 메시지를 찬찬히 뜯어 읽는다.

한 사내, 흑암룡, 안배…….

숙련된 플레이어의 지식이 결론을 내놓는다.

“이 모든 게 이호열, 녀석이 이끌어낸 변화라고……?”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간혹 플레이어의 업적에 따라 버프가 발동되는 때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기껏해야 사냥터나 마을처럼 한정된 지역에 발동된 버프가 아니라 아르카나 대륙 전역에 유효. 게다가 효과 하나하나가 질서를, 밸런스를 뒤바꿀 정도의 효과였다는 말이다.

플레이어의 지식이 말한다.

“……대체 어떤 업적을?”

그 해박한 고인물의 지식으로도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혼란한 머릿속에서도 잊지 않은 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충성심이 경고했다.

“주군, 녀석은 안 됩니다…….”

이호열, 그는 차원이 다르다.

달라도 몇 차원이나 다르다!

이 모든 게 이호열의 영향 때문이라면 아르카나 대륙은 이미 그의 손아귀 안이나 다름없다는 말. 천국처럼 보였던 아르카나 대륙이 적진 한복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천하통일의 길드원들이 결단을 내린다.

“지금은 물러서야 합니다, 주군.”

그러나 그들 또한.

자신의 주군과 마찬가지로 간과하고 있었다.

류오쥔춘에게 공유되는 것은 오직 시야뿐.

“……듣지 못하시는 건가?”

주군은 자신의 목소리도.

떠오른 메시지도 듣지 못한다는 걸.

그리고.

“……그보다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 거야?”

접속기에 로그아웃 기능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

유스라 왕국.

나는 원탁 위에 늘어진 체스 말을 움직였다.

나의 맞은편에는 국왕, 하쿠나가 앉아있다.

타인의 시선에선 한가롭게 체스를 두며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듣는 나는 억울하다. 그랑펠이 어디 쉽게 휴식을 취하는 위인이냐.

이것도 업무의 연장선이라는 거지.

게다가.

‘체스 말은 또 왜 건든 건데?’

나는 체스를 둘 줄 모른다.

오목이나 장기는 둘 줄 알아도 체스는 아는 게 없다.

하물며 말 이름이나 기능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게 폰이라고 하는 거였나? 왕관은 왕이니까 킹이고?’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체스 말을 움직인다.

“남은 세력은 크게 셋이다.”

업무의 연장선이라는 건 적당한 변명이 아니었다. 나는 성전 연합군 총대장으로서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와 아군과 적의 전력을 되돌아보는 중이었거든.

아군의 세력이야 매일같이 일과에 충실한 덕분에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뇌리에 새겨져 있으니. 지금은 적, 악마의 전력을 읊어볼 상황이었다.

탁.

손가락이 움직이며 체스 말을 내려놓는다.

“상위 마왕.”

서열 상위 10위의 마왕을 일컫는 단어.

거기서 서열 4위.

가미긴은 나와 악크샨 선배님들이 지옥으로 끌어내렸으니 제외.

그럼 정확하게 아홉이 남았겠군.

탁.

“거악, 칠죄종.”

탁.

“그리고 태초의 악.”

연달아 내려놓는 두 개의 체스 말.

“칠죄종 중 남은 건 다섯이겠지요.”

“그렇네.”

하쿠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쿠나에게 빙의했던 탐욕은 그 싹부터 잘라 지옥에 처넣었고.

질투는 그림자 용병단의 희생으로 사냥할 수 있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겠네.’

그러나 악마는 성장형 몬스터다.

부정적인 감정을 통해 강해지는 귀찮은 녀석들.

하급 악마 임프가 어떤 계기로, 어디까지 강해질지 알 수 없는 게 무서운 점이다.

그 증거가 마침 클래스 퀘스트로 나타나 있다.

-악마를 사냥하라. (반복)

●혈흔을 쫓아 혼혈의 악마를 추적하라. (진행 중)

[악크샨 재건]이라는 거창한 클래스 퀘스트의 목표인 걸 보면 보통 녀석은 아니겠지. 그러나 혼혈의 악마에 관한 정보가 전무하다는 게 악마가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지 말해준다.

‘거기에.’

악마가 전부가 아니지.

애초에 악마의 힘, 그 원천이 되는 건 누군가의 부정적인 감정이다. 악마 못지않게 악랄한 세력들이야, 현실에도 아르카나 대륙에도 넘쳐난다.

물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현실에서 성선설, 성악설을 따지자면 철학적인 이야기지만.

적어도 아르카나 대륙엔 명확한 답이 있었거든.

왜, 선악과 말이야.

‘그 세계수도 그러려니 했잖아?’

선과 악이 공존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그건 천하의 그랑펠도 인정한 바다.

물론, 악은 선에게 굴복할 테니까 상관없다는 뜻이었지만.

어쨌든.

‘웬만하면 거기까지 오지랖은 뻗지 말자, 제발.’

남은 악마만 하더라도 하나같이 거물들 아니냐?

나는 악마만 신경 쓰기도 바쁘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하쿠나를 비롯해서 믿을 수 있는 듬직한 아군이 생겼다는 거겠지.

하쿠나가 체스 말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내가 연달아 세 번을 움직여서 그런가?

진지하게 체스에 임하고 있던 건가, 싶었거늘. 그런 건 아니었나 보군. 이내, 하쿠나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결연히 빛나는 그의 동공이 보였다.

“악마에게 몸을 빼앗겼던 저이기에 악마와 담대히 맞서리라 자신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부디 제 존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은인이시여. 이곳이 되었든, 아르카나 대륙이 되었든 저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은 격변 중이다.

하이엘을 통해서 들었는데, 흉조에서 쏟아져나온 이들이 황폐한 아르카나 대륙에 새 생명력을 불러오고 있다고 들었거든.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로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모두가 악크샨의 존재를 알고 있지 않으냐고?

맞다.

하지만 악크샨은 악크샨이고, 그들은 그들이지.

‘뭐, 악크샨이 신도 아니고 말이야.’

그들 사이의 갈등이 악크샨의 이름만으로 해결되리라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말했다시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다.

갈등에서 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은 악마의 힘이 된다.

그러니 뒤에서 적절히 조율할 필요가 있겠지.

그런 다짐을 하니까 또 오르는 단어가 있구만…….

‘결국, 흑암룡이 맞는 말이 됐잖아?’

아르카나 대륙을 배후에서 조율하던 거대한 흑암룡, 클라우디!

역시나 주둥이가 문제다.

내뱉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실현이 되어버리잖냐?

‘입조심 하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정말.’

그런 의미에서 하쿠나, 우리 유스라 국왕님께서도 조심하셔야겠는데? 직장에서도 그렇고,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 할 말이 무슨 일이든 시켜달라는 거거든.

‘나도 웬수한테 된통 당해봐서 잘 알지.’

나는 진심으로 하쿠나에게 말해주었다.

“감당하지 못할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네, 하쿠나.”

물론, 그게 그랑펠식 화법이라 따뜻한 조언처럼 들리지 않았다만. 다행인 건 하쿠나 정도면 이미 그랑펠식 화법을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시달렸을 테니.

하쿠나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은인이시여.”

.

.

.

호열이 자리를 뜨고, 홀로 남은 하쿠나는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움직인 말은 셋으로 전부 폰(Pawn)이었다. 하쿠나가 세 개의 폰에 붙여진 이름을 되짚는다.

“상위 마왕, 거악, 그리고 태초의 악.”

칠죄종 탐욕.

그 흉악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하쿠나였다.

그렇기에 저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일개 병정에 불과하다는 것이겠지요.”

허나, 호열은 그 셋을 전부 하나같은 폰으로 예를 들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그들을 너무 얕잡아보는 게 아니냐고.

아니, 말씀의 뜻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악마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성장한다…….”

체스의 규칙에서 폰 또한 승급한다.

폰이 뜻하는 건 설령 악마가 하찮은 졸개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변화무쌍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절대 방심하지 않겠다는 비유의 표현이시리라.

동시에.

“그럼에도 폰은 왕이 될 수 없다.”

격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시려는 뜻이실 터.

하쿠나는 눈앞의 체스판을 머릿속에 깊게 새겨넣었다.

호열의 말은 조금이라도 흘려들었다간.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었으니까.

*

“……허억!”

가쁘게 움찔거리는 심장.

낯선 풍경과 감각.

혼혈의 악마는 눈을 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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