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화. 그 또한 나라면? (1)
집무실엔 적막이 흐른다.
평소와 다르게 머릿수가 둘이나 늘었거늘.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누가 보면 묘한 신경전이 흐르는 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
차라리 나도 그런 거면 좋겠다…….
달칵─
접대용 찻잔을 꺼내고, 물을 달구는 마력 화로를 보며 탄식을 삼킨다. 빌어먹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잖아. 애써 마음을 다잡아본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오갈 수 있게 된 시점. 그리고 클라우디, 나의 흑역사를 오롯이 인정하기로 다짐한 순간부터.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근데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움직이는 육체에 감사한다.
물론, 티백 녹차를 자랑스럽게 대접하는 건 조금 그렇긴 한데…….
지금은 녹차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제시와 메어리.
끝까지 격식을 지키려는 건가, 말은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얼굴은 의문이 가득해 보인다. 결국, 나의 해명 아닌 해명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 발자국 더 뻔뻔해져서 모른 척하고 넘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와 오만은 한 발자국보다 더한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러니까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적막을 깼다.
“그대들의 용건을 듣겠다.”
사실 여기서도 시치미를 떼기엔 늦지 않았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나를 기다린 데엔 이유가 있을 터.
간단하게 용건에 답만 해도 되는 거잖아?
그러나 말했듯.
어영부영 넘어가는 건 잘나신 긍지가 용납할 수 없는 행위겠지.
덕분에 나는 말을 덧붙이고야 말았다.
“허나, 의문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겠지.”
“……!”
잠자코 있던 두 사람의 눈이 나를 향한다.
“이호열과 그랑펠.”
현실에서 내 입으로 저 두 이름을 늘어놓는 건 처음이 아닌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엄습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을 끝마쳤다.
“그 역시 나다.”
간결하기 그지없는 설명.
일단, 메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메어리 쪽은 크게 놀랄 게 없겠지. 이호열, 내 이름이 흔치 않기는 해도 기겁할 정도로 이상하진 않잖아? 할아버지가 크게 기뻐하며 지어주신 이름인데.
게다가.
‘약간 이상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겠지.’
메어리와 클라우디의 관계를 고려하면 당연하다. 사실 후광이 아니어도. 나는 황혼의 후예를 복구하며 메어리에게 은인 같은 입장이 되어버렸거든.
문제는 제시 쪽이었다.
제시의 성격이야 내가 또 잘 알고 있다. 마법을 비롯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 덕분에 고생 좀 했었거든.
역시나 질문이 쏟아진다.
“혹시, 그랑펠이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이름이신 건가요?”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의 아이디니까.
따지고 보면 예리한 질문이었다. 물론, 풀네임을 묻지 않았기에 나도 절대 먼저 말하진 않을 거다. 혹시라도 입방정이 앞서나갈라, 나는 얼른 답했다.
“그렇다.”
제시는 이어서 물어왔다.
“그렇다면 그랑펠이란 이름은 아르카나 대륙 모두에게 알려진 이름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몇몇 이들에게만 알려진 이름인가요?”
질문의 의도가 뭐지?
‘널리 알려지긴 낯뜨거운 이름이란 건가?’
제시의 표정이라도 살펴서 속내를 짐작하고 싶었는데.
고깔모자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답하는 수밖에.
“이젠 모두가 알게 되었다.”
사실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겨보려고 했는데…….
사정상 물 건너간 일이 됐다.
왜, 흑암룡 이호열 전설이 아르카나 대륙에 떠돌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목청 큰 드래곤들이 외쳐댔을 테니. 풀네임은 몰라도 그랑펠까지는 다들 알지 않을까, 싶군.
답변이랄 게 있었나 싶었거늘.
제시에겐 충분한 모양이었다.
그제야 말투에서 익숙한 느낌표가 느껴진다.
“그렇군요!”
고깔모자 아래.
보는 것만으로 피곤이 몰려오는 동공이 드러난다.
제시가 말을 이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나 흑암룡과 비슷한 거네요!”
달카악─
……나도 모르게 찻잔을 잘게 떨고 말았다.
과연, 인류의 특기 전력.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정확하게 핵심을 꿰뚫어봤다.
그래, 별반 다를 게 없긴 하지.
사실상 동의어로 봐도 무방할걸?
그러나 나의 경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잘 어울리시네요, 그랑펠이란 이름도요!”
……어울려?
무슨 의미?
숨기는 게 많아서 그런가, 자꾸만 피해망상이 드는구만.
‘이 정도면 수습이 됐나.’
그래도 잘 버텼다, 호열아.
‘보자.’
드높은 긍지로 해명했으니, 이젠 내가 들을 차례였다. 나, 이호열. 수치심에 두 사람에게 괜한 억하심정이 생겼지만, 심술을 부릴 순 없었다.
긍지가 용납하지 않는 걸 떠나서.
‘확실히.’
두 사람이 면담을 요청해 올 만한 상황 같았거든.
황혼의 후예와 대마법사.
AAU의 보고서는 옳았다. 그 둘 사이에 새로운 클래스 퀘스트라는 연결고리가 생성된 모양이었으니까. 메어리는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빛을 잃은 제 총기로는 클래스 퀘스트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이 소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총명의 문제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의 지식을 얼마나 습득하기 힘든 건지는 플레이어, 아르카나인들을 봐서 잘 알고 있었거든. 그러니 내가 흠칫한 부분은 소녀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저는 소녀가 아닌데요?”
제시도 메어리를 바라본다.
“이런, 실례가 됐나요? 이름을 듣지 못해서요.”
“아.”
나란히 서 있으면서 통성명도 하지 않은 건가. 메어리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제시는 그제야 넙죽 고개를 숙이며 메어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제시 하인네스입니다. 클래스는 대마법사고요.”
“대마법사…….”
의미심장하게 곱씹는 게 메어리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클래스 퀘스트의 진척이 생겼으니, 제시도 마다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놈의 오지랖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진정으로 확신하는가, 메어리?”
메어리는 굽히지 않고 답했다.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려하시는 바가 있다면 새겨듣겠습니다.”
거창한 걱정은 아니다.
방금도 말했듯 완전히 다른 세계의 무언가를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르카나 대륙의 그랑펠에게 시달리는 현실의 이호열, 덕분에 날로 먹고 있는 내가 이례적인 경우겠지.
“능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쌓아올린 토대부터 다르기에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뿐. 그런 상대에게 진정으로 가르침을 주고,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시도 마찬가지다.
‘순전히 대마법사 클래스 덕에 목격한 거겠지.’
손님 앞에서도 생략하지 않는 업무.
나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양피지를 살폈다. 거기엔 메어리의 증명에 관한 선임들과 마르셀로의 평가가 적혀있었다.
──────
송구하게도, 저를 비롯한 선임들은 무엇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
역량 부족으로 인한 평가 불가.
천하의 마르셀로조차 목격할 수 없던 게 황혼의 마법과 마력이었다. 이제야 간신히 『마법』에 첫발을 내디딘 제시가 황혼을 이해하리란 건 터무니 없는 기대였다.
메어리가 답한다.
“제시 하인네스 양의 발현력을 고려하면 그랑펠 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또한 클래스 퀘스트처럼 저로서는 알지 못하는 요소가 저와 제시 하인네스 양 사이를 가로막는다면…….”
메어리는 말꼬리를 흐렸고 제시도 할 말이 없는 모양인지 잠자코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기를 죽이려고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겠군.”
내가, 그랑펠이 누군데?
발버둥을 치는 한이 있어도.
문제가 생겼다면 어떻게든 끝을 보는 성격의 소유자.
나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내가 그 수행에 함께하겠다.”
미리 말하겠다.
따지자면 이것도 오지랖이기는 한데, 엄밀히 이유가 있는 오지랖이었다. 성전 연합군 총대장의 관점에서 특기 전력인 제시를 성장시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그리고.
‘사실 나도 관심이 있거든.’
황혼의 마력과 마법이라는 거.
그 효과를 직접 경험했던 나다. 그렇다고 황혼의 후예도 황혼의 후예와 관련된 대마법사도 아닌 내가 황혼을 다룰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
‘겸사겸사 도전해서 손해 볼 건 없잖아?’
함께하겠다, 선언한 이상.
거절을 당해도 어떻게든 밀어붙일 나였다만.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은 꺼리는 눈치가 아니었다.
“괜한 폐를 끼치는 건 아닐지…….”
“죄송하면서도 든든하네요, 이호열 수석님!”
그럼 됐지, 뭐.
나는 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옮겨 찻잔을 바라봤다.
내색할 수 없기에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어깨너머로 훔쳐 배울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이것이 정말 긍지 넘치는 행동이 맞나……?
의문이 들었건만.
결국엔 내 얼굴에 침 뱉기였으니.
“그럼, 들지.”
이럴 땐 그냥 녹차나 들이켜는 게 상책이었다…….
*
목요일이 되었다.
세상은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오늘이 바로 레이먼 션과 호열.
두 사람 사이에 승자가 가려지는 날이었으니까.
살얼음판 위에서 호열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마탑 수석의 역할을 수행.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의 업무도 잊지 않았다.
“……어떻게 저러실 수 있지?”
“긴장 같은 거 안 하시는 거 알고 있었지만…….”
“나였으면 오늘 휴가 썼을 거야, 진짜.”
세상이 호열의 행보를 보고 수군거리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정기 업데이트의 시간이 임박했다.
그리고.
“……어라?”
아무 일도 없었다.
서울역.
플레이어들이 시끌벅적하게 날뛴다.
“내가 말했지! 레이먼 션, 그거 순 허풍쟁이라니까?”
“뭐래, 방금까지 담배만 뻑뻑 피우던 게 누군데?”
“그건……. 그래! 균열 금단 현상 때문에 그런 거고!”
더 이상의 밸런스 패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증명하겠다.
그 선언처럼 증명해 낸 호열이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균열 한 바퀴 돌든가.”
“콜! 나야 좋지!”
“거기에 전리품 몰빵 내기 어때?”
“그것도 콜!”
지난 일주일.
억눌렸던 응어리가 풀어졌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AAU에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균열 현황.
기록하던 이들이 헛웃음 뱉는다.
“진짜 다들 이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현재 생성 확인된 균열 중 몇몇을 제외하면……. 죄다 플레이어들이 진입한 상태입니다. 퍼센트로 따지면 무려 95퍼센트에 육박합니다, 지부장님!”
고작 일주일.
“허허.”
변덕스러운 걸 넘어서 괴팍하기까지 한 플레이어들의 마음을 이렇게 극적으로 돌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유스라 총책임자님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런던 지부장, 베이커가 싱긋 웃었다.
“런던의 기적을 넘어 신시대의 기적을 쓰셨군요.”
대격변 이후의 신시대.
균열에 목숨이 오가는 현실에서 아르카나와 플레이어, 그리고 대중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 플레이어들에게 희소식은 곧, 세계의 희소식이기도 했다.
[정기 업데이트 無……. 새로운 동력이 되나?]
[이로써 증명된 허구의 존재, 레이먼 션.]
[집중취재 : 이호열은 오늘도 변치 않았다.]
그러나 축제 분위기를 즐길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중국.
천하통일.
그리고 류오쥔춘이었다.
“…….”
류오쥔춘은 말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수중에 넣은 접속기가 오늘부로 7기. 그를 토대로 확실하게 앞서나갈 수 있는 추진력을 얻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터무니없군.”
이호열은 노는 물이 달랐다.
류오쥔춘의 눈이 접속기를 향한다.
저걸 손에 넣기 위해서.
레이먼 션의 장단에 놀아나며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호열은 어떠한가?
자신을 농락한 레이먼 션을 보란 듯이 짓밟아 버렸다.
류오쥔춘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것인가.
똑똑─
때마침 문이 열린다.
“성공했습니다, 주군!”
류오쥔춘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주군을 뵙습니다!!”
그가 향한 곳엔 프로토타입 접속기 일곱 개와 같은 수의 천하통일 길드원이 있었다. 눈여겨볼 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서로를 알아볼 표식인가.
그런 거라면 어째서 안대인가?
그에 관한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슥─
한껏 차오른 성배가 류오쥔춘 앞에 놓인다.
류오쥔춘은 성배를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액체로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봤다.
[‘혹독한 계약의 성배’ 효과가 발동됩니다.]
[계약자의 시야를 공유합니다.]
[현재 계약자 : 7명]
“……!”
그러자 수면 위에 미묘하게 다른 일곱의 시야가 떠올랐다.
데구르르─
그쯤에서 평범한 이는 성배 속에서 굴러다니는 게 무엇인가.
의문을 가질 법도 했지만 류오쥔춘은 평범하지 않았다.
“나의 눈이 된 것을 영광으로 여겨라.”
“존명!”
그의 머릿속엔 성배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을 바라볼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에서 습득하는 경험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내게는 보일 것이다.’
류오쥔춘은 장담할 수 있었다.
군주가 자신이 뜻을 펼치기에 적합한 땅은.
이따위 현실이 아닌 아르카나 대륙이라고.
이 순간 접속기에 몸을 눕힌 이들은 류오쥔춘의 장담을 실현하기 위한 제물이었다. 윙윙거리던 접속기가 잠잠해지고, 류오쥔춘의 성배에 하나둘 시야가 내비치기 시작했다.
류오쥔춘은 주먹을 쥐었다.
‘나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겠다, 이호열.’
네가 현실의 마탑과 유스라 왕국.
성전 따위에 허튼 시간을 낭비할 때.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목도하리라.
‘개의치 않겠다, 이호열.’
설령 네놈이 먼저 아르카나 대륙을 내다보았다고 하더라도, 내겐 네놈에게 없는 시야가 있다. 대륙 단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군주의 눈]이 있단 말이다.
이윽고, 완전히 떠오르는 일곱 개의 시야.
류오쥔춘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간다.
역시, 그랬다.
“하하하.”
춘추전국시대.
군주.
아니, 폭군의 무대가 바로 저곳에 있었다.
“저 대륙이 무엇이 황폐하냔 말이냐?”
류오쥔춘은 비웃었다.
“모두를 속였구나, 이호열.”
.
.
.
류오쥔춘의 실수는 간과한 것이었다.
“……!”
설령 시야를 공유할 수 있을지언정.
계약자에게 출력되는 메시지까지 엿볼 순 없다는 걸.
천하통일 길드원들에게 메시지가 떠오른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이호열, 이호열은 위험합니다. 주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무수한 메시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