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3화. 그대들도 되찾을 때로군 (2)
틱!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책상 위에 놓인 고깔모자를 툭 하고 건드린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뱅그르르 회전하는 고깔모자는 일찌감치 물리적 법칙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놀랄 이는 없다.
“흐음.”
고깔모자를 심드렁하게 가지고 노는 건 다름 아닌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그녀였으니까. 고깔모자는 제시의 상징이자 분신과도 같았다.
제시는 히든 클래스, 대마법사로 유명세를 탄 이후로 고깔모자를 벗은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심지어는 샤이닝 시절의 동료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수줍음이 많아서?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그것도 아니라면 반대로.
고깔모자를 트레이드마크로 각인시키기 위해서?
제시에게는 갖가지 추측이 뒤따랐다.
그러나 대중의 기대에는 유감스럽게도.
제시는 그런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제시가 돌아가는 고깔모자를 보며 중얼거린다.
“어때요, 어지럽죠? 슬슬 협조하는 게 어떠세요?”
마법사.
범인(凡人)과는 동떨어진 감정과 능력의 소유자들. 오죽하면 마법사들이 모인 마탑에서도,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걸 알면서도 마법사의 인성에 관한 농담이 널리 퍼져있을까?
그 마법사 중에서도.
대마법사의 그릇을 인정받은 제시였다.
제시가 자격을 드러내듯 말꼬리를 올린다.
“다들 연세를 생각하면 무리하셔선 안 될걸요?”
고깔모자 속 선대 대마법사들.
제시는 그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협박 중이었다. 고깔모자 속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던 대마법사, 아니, 탑주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탑주의 의식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고깔모자에 변화가 일어나는 건 예상했다. 그 탓에 대마법사 클래스 퀘스트의 진행이 갑자기 뚝 끊길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흐음.”
제시는 며칠째 고깔모자를 협박 중이었다. 거기엔 괘씸죄도 포함이었다. 왜, 자신을 고작 대마법사의 그릇으로 이용하려고만 했던 못된 꿍꿍이와 취급이 생각할수록 열이 났거든.
“이래도?”
그러나 여전히 묵묵부답.
살며시.
틱!
“이래도요?”
제시는 다시금 고깔모자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손가락에서 전달된 마력으로 더욱 세차게 회전하는 고깔모자.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것 같았다.
“나중에 후회하셔도 몰라요. 잘 생각해 보세요.”
고깔모자에서 모니터로 옮겨가는 제시의 시선.
-전문가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 싸움 승산이 있겠습니까?
-글쎄요. 애초에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
벽면을 가득 채운 화면에선 속보가 방영되고 있었다. 레이먼 션과 이호열 대립 구도 심화……. 헤드라인을 지켜보던 제시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왜, 레이먼 션이 먼저야?”
플레이어의 특권. 언어의 장벽에 구애받지 않는 제시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국가적인 룰, 가나다순을 설명 없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VBC? 인터뷰 안 해야겠네.”
방송국의 누군가의 간담이 서늘해질 혼잣말도 잠깐.
다음 속보가 전해진다.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아 일백 개의 균열을 클리어했다는 호열의 소식이었다.
“…….”
제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호열의 마법적 경지를 폭주하던 탑주의 육체와 마주했을 때 체감했던 제시였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놀라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다음 속보를 전하는 앵커의 목소리에 제시는 흠칫했다. 한동안 출입하지 않았던 마탑에 관한 소식.
-조금 전 마탑에서 들어온 속보입니다. 순혈의 마도 종족, 황혼의 후예가 마탑에 그 정체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자세한 소식은 마탑에 나가 있는…….
“!”
제시도 긴급 업데이트를 통해 접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도 종족에 흥미가 있기는 했지만, 당장은 고깔모자 속 대마법사들의 입을 열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니까. 그 생각엔 방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황혼의 후예, 메어리입니다.”
자신을 황혼의 후예라 소개한 여자.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정확하게는 호열의 선전포고 당시.
뒤편에서 멀찌감치 서 있던 여자.
그녀가 메어리였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제 쓰임새를 찾기 위해 아르카나 대륙에서 여러분, 모험가들의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제 가치는 오늘부터 차차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르카나 대륙.
순혈의 마도 종족, 황혼의 후예.
쓰임새를 위해 이 땅에 발을 들이다…….
“……!”
생각을 이어나가던 제시는 문득, 스마트폰을 찾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마력흔을 남겨둔 게 이럴 땐 도움이 됐다.
착─
마력을 발산.
곧장 제시의 손아귀로 달라붙는 스마트폰.
확인하자 수많은 알림이 쌓여있다.
-보고 싶어~~~♥
-언제 만나줄 거야?
-나 진짜 서운해 :(
절반이 넘는 지분을 자랑하는 카밀라의 추파를 넘기자 AAU, 북아메리카 서부 지부장 짐 조슈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가 보였다. 제시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찔거린다.
“……대마법사 클래스 퀘스트와 관련이 있다?”
개발 단계에서 폐기된 기획안.
때문에 기초 설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황혼의 후예가 실존하는 게 확인된 이상.
──────
제시 하인네스 양에게 무한한 성장의 기회가…….
──────
이하 생략.
제시는 곧장 푹신한 소파에서 일어났다.
‘무한한 발전이라, 바라던 바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하던 참이었거든.’
거대 연합.
그들이 호열과 함께 제로 산맥의 십만 동굴 공략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접했던 날.
제시는 뒤처진 느낌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호열은 자신에게 먼저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탑주의 육체에 나란히 맞서던 그날.
호열은 자신에게 상당한 배려를 해줬었으니까.
그에 보답하지 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벽에 부딪힌 것 같아서.’
그 벽을 깨기 위해.
제시는 혼자서 균열을 공략해 보기도 했다.
[스킬]과는 완전히 다른 『마법』을 발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기도 하고, 덕분에 실전에서 써먹기는 무리지만 일상에서 마법을 발현하는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다.
툭─
그를 증명하듯.
회전하던 고깔모자가 제시의 손짓에 정지한다.
공중에 둥둥 떠올라서는 제시의 머리 위로 안착한다.
제시는 다시금 화면을 바라봤다.
“……황혼의 후예, 메어리.”
대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와 관련된 존재.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지금.
제시는 망설이지 않고 마탑으로 향했다.
그런 행동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다만, 제시 하인네스.
그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면.
“……!!”
플레이어는 물론,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모두의 이목을 집중하게 할 정도로.
제시는 평소와 다르게 무표정했다.
“저거 제시 하인네스 맞지?”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표정이 심각해?”
“혹시 뭔가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잖아. 순혈의 마도 종족이랑 얽힌 퀘스트 같은 게 있을지도…….”
그런 심기는 당사자에게도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탈 홀.
다른 갈래로 발전.
정수에 다다른 마탑을 보며 감탄을 삼키던 메어리가 멈칫했다.
‘나를 알고 있는 모험가가 있었나?’
아르카나 대륙에서 메어리가 머물렀다고 할 수 있는 장소는 시공간의 사교장과 적막한 남쪽 바다뿐. 그곳에 모험가가 출입한 적은 없었다.
‘나……. 예민해졌나?’
신경이 날카로워질 거리야 차고 넘쳤다.
과거, 아르카나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마계에 처음 진입했을 때도 어긋난 감각 때문에 꽤나 고생을 했었으니까. 거기에다가 이놈의 육체가 멀쩡하기를 바라는 것도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다.
흉조의 속삭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일같이 태우던 궐련이 이제는 빚쟁이가 되어, 가불해 줬던 정신력을 원금에 이자까지 쳐서 받아갈 차례가 되었으니까.
메어리는 읊조렸다.
‘괜히 신경을 빼앗길 때가 아니야.’
클라우디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겐 가치가 있다고.’
황혼의 마력과 마법이 아르카나 대륙과 모험가들의 세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메어리는 기뻤다. 비로소 자신이 클라우디에게 빚을 갚을 방법을 찾게 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썩어버린 육신이 버텨주는 데까지.’
아니, 클라우디께서 황혼의 가치를 발견하시는 날까지.
메어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버텨내리라 다짐했다.
물론,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각오하지 않았던가?
메어리는 곧 황혼의 마법을 준비했다. 메어리에게서 황혼의 마력이 솟구쳤다. 메어리의 시야엔 이미 보랏빛이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지켜보는 이들의 시야는 달랐다.
“뭔가 시작한 모양인데요……?”
“봐요, 뱅그릿 선임. 당신 순수마력학 선임이잖아요? 나한테는 보이지 않아도 당신은 봐야 할 거 아닙니까! 넘실거릴 게 분명한 마력을!”
“그렇게 닦달하셔도 안 보이는 건 안 보이는 거라고요, 벤쉬 선임님……!”
메어리가 예고했으니 그저.
황혼의 마법을 발현 중이라고 짐작할 뿐.
청중의 식견으로는 황혼의 마법도, 마력도 목격하지 못했다.
“이런.”
선임 전원.
심지어는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초월자가 아니라면, 정확하게는 서클을 형성할 정도의 발현력을 지닌 이가 아니라면 『황혼』을 목격하는 것조차 어려울 테니까. 차원이 다른 마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우디께서는 대단하셨다.
‘마법에 검술. 그리고 나는 모르는 경지까지.’
말 그대로 다재다능한 면을 보여주셨으니까.
그러나 이 순간, 메어리가 놀라야 할 대상은 클라우디가 아니었다.
크리스탈 홀.
호열도 탑주도 자리를 비운 지금.
황혼의 마법과 마력을 목격할 수 있는 존재할 수 없었거늘.
누군가 중얼거렸으니까.
“……마력이 보라색?”
누구보다 먼저 반응한 건 메어리였다.
“……!”
특출난 발현력을 지닌 마법사가 있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황혼의 마력이 보랏빛을 띤다는 걸 간파한 이는 메어리에게 그나마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으니까.
그렇다.
조금 전, 유심하게 지켜봤던 플레이어.
제시 하인네스였다.
‘뭐지?’
서클을 형성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마력의 흐름이다.
그런데 어떻게 황혼의 마력을 목격할 수 있는 거지?
생각하던 메어리가 흠칫했다.
생각할 가능성은 두 개였다.
하나는 저 소녀-메어리의 나이를 생각하면 인간은 모두가 소년, 소녀였다-가 황혼의 핏줄일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아르카나인이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의 모험가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가능성은 다른 하나뿐이었다.
메어라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대마법사의 그릇.”
*
바쁘다, 바빠.
일백 개의 균열을 클리어하고 유스라 왕국에 들렀다. 현실에 복귀하고 마탑엔 얼굴도장을 찍었지만, 유스라 왕국에는 그러지 못했거든.
‘하여튼, 사유서가 문제라니까?’
마탑에선 수석.
유스라에선 총책임자.
위치도 있겠다, 그냥 융통성 있게 일 처리를 하면 좀 좋아? 물론, 투덜거려도 그랑펠의 원칙주의엔 직급에 따른 특별 대우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니.
나는 해가 지고 나서야 마탑으로 복귀했다.
“늦었군, 이 수석.”
마탑의 최상층.
나를 맞아준 건 바닥에 널브러진 털 뭉치였다.
고양이, 탑주가 뒷발로 머리를 긁으며 말한다.
“흔치 않은 일인데?”
나는 허공에 흩날리는 고양이 털을 보고 냉랭히 답했다.
“내가 늦은 게 아니다.”
“그럼?”
“태양이 내게서 달아났을 뿐이다.”
……개소리를 참 진지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 그치?
탑주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혓바닥으로 앞발을 핥는다.
“여전히 한결같아서 좋군.”
이럴 땐 탑주가 심드렁한 성격이라서 다행이다. 왜, 내가 어떤 개소리를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잖아? 그래도 민망한 건 민망한 거니까…….
“이 시간부로 수석의 자리에 복귀하겠다.”
어쨌거나 상사인 탑주에게 복귀를 알렸으니 서둘러 집무실로 돌아가자. 다짐하고 발길을 재촉하던 찰나였다. 탑주가 등을 돌린 내게 덧붙였다.
“밖에서 그대의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네. 이 수석.”
……뭐, 손님이 있어?
잠깐만, 그러면 태양이 달아났다느니 뭐니 지껄였던 개소리를 들었다는 건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는데, 탑주가 하품을 하며 말을 잇는다.
“내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내게서 달아나 버렸지만.”
저저……!!
저거, 지금 내가 한 말을 비꼬는 거 맞지?
이래서 내가 고양이를 싫어한다.
날리는 털도 털이지만, 겉과 속이 다르잖아?
“알아들었다.”
물론, 겉으로 내색할 수 없으니.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최상층에서 빠져나왔다.
마탑에 손님이라고 해봤자 마법사밖에 더 있겠느냐마는.
‘일단, 마르셀로는 아니겠지.’
마르셀로가 굳이 최상층에 나를 찾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치유학파 별실에서 치료 중인 그림자 용병단이려나?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머무는 동안 눈에 띄게 회복한 건가. 시차를 생각하면 벨리에 선임이 무리를 했나, 싶었거늘.
아니었다.
‘아.’
집무실 앞.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메어리였다.
……이런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현실이 낯설 수밖에 없는 메어리였다. 딱히 머무를 장소가 없을 텐데 내가 생각이 짧았다. 앞으로 부려먹을……. 아니, 고생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내가 대접에 소홀했구나.
실책을 깨닫는 와중.
메어리 옆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익숙한 모자가.
물론, 나는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사전 약속은 생략하겠다.”
그 말에 나를 바라보는 메어리와 고깔모자, 제시 하인네스.
그래, 그들이 입을 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의 예절 교육이 이런 화를 불러올 줄은 꿈에도……!
두 사람이 동시에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돌아오셨습니까, 그랑펠 님.”
“간만에 뵙습니다, 이호열 수석님!”
“……이호열?”
“……그랑펠?”
“??”
기어코 사달이 나고야 말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