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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12화 (311/489)

◈ 312화. 그대들도 되찾을 때로군 (1)

신시대의 영웅, 악크샨 전설.

메시지가 떠올랐을 땐 뒤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억울했다. 아니, 당신들이 전설이 되는 것까진 좋아. 근데 실체화가 되면 남쪽 바다를 보면서 눈물을 머금은 나는 뭐가 되는 건데?!

하다못해 시차라도 두고 전설이 됐으면 내가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아무리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이 현실보다 4배나 빠르다고 해도 그렇지.

전설이 되는 것도 양동 작전 일부라고 느껴질 정도로.

너무 빠르게 복귀하셨다는 거다.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

물론, 전설로서 실체화된 선배님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진짜 선배님들은 흉조의 뱃속에서, 또 지옥에서 집념을 불사르고 계신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과 재회하겠다는 다짐도 고쳐먹겠다는 게 아니다.

그저…….

‘여전히 제멋대로네, 이 양반들.’

실체화된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이 진짜 다를 바 없다는 게 문제였지.

신경 써야 할 선배님들이 배로 늘어난 기분이랄까.

지금만 봐도 그렇지 않냐?

나는 악크샨 전설을 실체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벅저벅.

하여튼 악마라면 물불을 구분하지 않고 달려드는 악크샨의 성질머리……! 악마 냄새가 풍기는 혈흔을 보고는 실체화해서는 제 발로 튀어나오신 걸 봐라.

미간까지 잔뜩 구기시고는 말한다.

“쓰레기 냄새.”

지옥의 선배님들과 달리 규율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실체화된 선배님들은 얼마든지 입을 열 수 있다.

물론, 천하의 악크샨이 누구던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대륙 전기 시절.

친절해야 하는 NPC 시절에도 플레이어에게 빈말로 칭찬 한 마디 하지 않던 차가운 감성의 소유자들. 그 때문에 최후의 악마 사냥꾼인 나를 보고도 악크샨 선배님들은 기뻐하거나 감동하는 기색 따윈 없었다.

첫 조우에서 그들이 내뱉던 말.

-“그대로군, 최후의 악마 사냥꾼.”

……그대로라니.

철이 안 들었다는 건가, 싶었는데.

하기야 발끈할 것도 없었다.

중2병, 흑역사 시절 모습 그대로잖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랑펠도 악크샨 못지않게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니 우리들 사이에 많은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우려하지 않았다.”

-“마찬가지.”

-“악크샨을 부탁하지.”

-“우려할 것 없다.”

-“훗, 좋군.”

……너네 뭐 하냐?

‘내가 다 낯이 뜨거워졌었지, 진심.’

내 취향이 진짜 저랬다고?

과거를 의심케 하는 광경이었지.

어쨌거나 이제는 지나간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턴 전설로 부활한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로서.

떠맡은 일에 충실하기도 바빴으니까.

눈앞이 반짝인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 재건]

사라진 악크샨, 그들은 신시대의 전설이 되어 부활했다.

그러나 아르카나 대륙에 필요한 건 이야기로 떠도는 게 아닌 살아있는 전설이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과거의 전설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악크샨을 재건하라.

그렇다.

결국, 또 짐을 짊어지고 말았다는 거지.

사실 이제는 신세를 한탄하기도 좀 그렇지?

‘애초에 이렇게 생긴 걸 어쩌겠냐, 내가.’

이번엔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관점이 달라졌다.

왜, 악크샨 재건이라는.

귀찮은 퀘스트에 숨겨진 가치를 간파했다는 거지.

‘악마는 언젠가 부활한다.’

서열 10위.

상위 마왕을 제외한 모든 마왕의 삭제.

나는 현실로 복귀한 직후에도 기이를 향한 탐구(인터넷 서핑)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각종 커뮤니티에선 그 패치를 희소식이라 평가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세상이 속아도 나는 속지 않는다.

그야 목격했잖아?

마왕 쟁탈전의 과정을.

애초에 마왕이란 건 타고나는 게 아니다. 쟁탈전에서 공백의 왕좌를 차지하는 이들이 새로운 마왕이 되어 보다 큰 능력을 거머쥘 뿐. 그러니까 시스템적으로 말하자면.

‘보스 몬스터로 승급.’

[마왕의 왕좌]라는 아이템을 통해서 격의 상승을 이루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마왕 삭제 패치는 말장난이자 레이먼 션의 기만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마왕들을 지옥에 처넣으려면.

결국 악마 사냥꾼의 손으로 사냥하는 방법밖엔 없다는 것이다.

사실 마왕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해야 한다면 해내겠지, 이 성격에.’

악마 앞에서 더욱 드높아지는 긍지.

그랑펠이라면 궂은일을 마다할 리가 없겠지만, 그에 걸리는 시간이 문제였다. 떠맡은 짐들을 생각하면 나 혼자선 엄두가 나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악크샨의 부활은 반가운 일이었다. 재건 과정에서 내가 고생을 하긴 하겠다만, 미래를 내다보자.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해둔다는 말도 있잖아?

사실 재건 과정도 딱히 낯설지 않았다.

퀘스트 목표를 향하는 시선.

-악마를 사냥하라. (반복)

그래, 플레이어들을 질리게 만들었던 이놈의 반복 퀘스트……!

오래간만에 봐도 치가 떨리는구나.

내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기도 잠깐.

우리 악크샨 선배님께서 말씀하신다.

“추적의 시간이다.”

그러고는 곧장 악크샨식 소통으로 전달해 주신다.

-악마를 사냥하라. (반복)

●혈흔을 쫓아 혼혈의 악마를 추적하라. (진행 중)

혼혈의 악마라.

이름이 붙은 걸로 봐서는 최소 진명의 악마.

네임드 몬스터인데.

일단, 낯선 악마로군.

그러나 천하의 악크샨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일 일도 없을뿐더러 그랑펠의 긍지가 무지를 내색할 리도 없었으니.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겠구만.

‘균열 일백 개 공략도 끝나가는 마당에 추적해야겠지.’

그나저나 혈흔을 쫓는다라…….

나는 혈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의문에 빠졌다.

‘뭘 쫓으라는 건데?’

말했다시피 피는 말라붙어 고여 있는 게 전부였다.

어디로도 이어지지도 않았다.

악크샨의 수호령, 템페스트를 불러낸다면야.

어렵지 않게 추적할 수 있으려나.

‘그걸 불러내라는 건가?’

설마, 그 이름을 외치라는 건가……?

템페스트 오버 더 호라이즌을 호출하라는 게 맞나.

내가 고뇌하던 찰나에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입을 열었다.

“눈으로 좇는 게 아니다.”

나를 향한 게 아닌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그 혼잣말이 내게도 도움이 됐다.

그랑펠이 누구냐.

보는 것만으로도 따라 하는 특출난 재능의 소유자.

설명이 더해지면 뭐든 어렵지 않게 따라 할 수 있다는 거지.

“오감을 초월한 의식에서 바라보는 것.”

의식이라.

악마와 관련된 의식이라면.

역시 하나뿐이다.

악마 사냥꾼이 내가 예측한 그 단어를 내뱉는다.

“마치 구마의식 속에서 악마를 바라보듯이.”

악마 사냥꾼의 단출한 고유 스킬 중 하나, [구마의식].

빙의한 악마를 사냥할 때나 써먹는 스킬인 줄 알았거늘.

이런 활용법도 있었을 줄이야.

역시 선배님들이시다.

감탄도 잠깐, 나는 [구마의식]을 발동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

그러자 선명하게 보였다.

의식 속에서.

바닥에 쏟아진 혈흔을 중심으로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었는지를. 균열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균열에 출입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관련되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냉랭히 읊조렸다.

“추악하군.”

PK.

과거엔 PK(Player Kill)로 불렸으나 지금 와서는 살인과 다를 바 없는 만행이 이곳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그 참상에서 기억해야 할 건 명확했다.

의식을 파고드는 절규.

-“넌 역시 그, 그냥 초신성이 아니었어……!!”

살인자는 초신성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

-“영광으로 여겨라. 너는 역사적인 제물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런 놈이 역사적인 제물이라 부를 정도로.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

그 계획이 혼혈의 악마와 관련되어 있다는 거겠지.

구마의식 해제.

잔상이 흩어져가자 악마 사냥꾼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면 그렇지. 날 위해 설명을 해준 건가 싶었는데. 그 또한 나처럼 구마의식을 발동했던 모양인지 말을 잇는다.

“간만이라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그대에게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르겠군. 나뿐만 아니라 악크샨의 모두가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었어.’

전설은 전설이 얼마나 널리 울려 퍼지느냐에 따라 강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현시점에서 악크샨 전설은 본체보다 강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악크샨 취급이 어땠는데.’

아르카나 대륙에서 잊힌 이들을 통해서 전설이 된 악크샨이었거늘.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악크샨 선배님들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그들의 집념은 누가 상상한다고 한들, 그 이상일 테니까.

그러니 나는 답했다.

“말하지 않았나, 우려할 것 없다고.”

솔직한 말로 나, 이호열은 자신이 없다.

악크샨의 집념이며 희생정신이며 뒤쫓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전설이 된 악크샨 선배님들과 악크샨을 재건하는 것? 마찬가지로 과거의 악크샨보다 나은 결과를 내리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악크샨은 되찾을 것이다.”

“되찾는다라……?”

여기, 그랑펠이 있잖냐.

클라우디 가문의 최연소 가주.

위대한 가문에서도 역대급으로 꼽히는 재능.

그 재능에는 쫄딱 망한 클라우디 가문을 다시 세우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클라우디의 영지에서, 저택에서, 연회에서 체감했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마땅히 거머쥐어야 할 명예를.”

“명예인가…….”

이렇게 거만하게 지껄일 수 있다는 거지.

‘이럴 땐 악크샨식 소통이 좋군.’

거만한 말을 선배로서 지적할 법도 하건만.

악마 사냥꾼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마디 말을 남긴 채 전설로 흩어졌다.

“그럼 다음 흔적을 기다리고 있겠다.”

든든하면서도 피곤한 말이 아닐 수 없구나.

그러나 투덜거릴 새는 없다.

악마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악마 혐오자, 그랑펠이 악마의 계략을 알아차린 지금. 여유 같은 걸 부릴 수 있겠냐.

스릉─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절반씩 섞인 풍경.

무너진 현실의 배경 속에서.

나는 콘크리트 속 철근을 검으로 발현했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경멸하는 이유다.”

검강을 발산하며 균열 공략에 속도를 냈다.

“늘 깨닫지 못하기에 훈육에 보람이 없지 않느냐.”

몬스터와의 시답잖은 잡담조차 생략한 지금.

나의 공략 속도엔 더욱 불이 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문득, 다음 균열에 진입한 나는 생각했다.

‘이걸로 두 개 남았나?’

보자.

98개 균열 클리어라…….

지금쯤이면 슬슬 세상이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

마탑.

에메랄드 홀.

마탑에 존재하는 마법 서적이 복사본으로 존재하는 장소.

그 방대한 공간에 옹기종기 모인 플레이어들이 은밀하게 속삭인다.

휘둥그레 눈을 뜨고서는.

“……1시간 만에 균열을 100개나 클리어?!”

“그, 그럼 분당 1분도 안 걸린 거잖아?”

“미쳤어, 이호열……. 아니, 진짜 이 수석님!”

정확하게는 59분 40초.

호열이 일백(日百) 개의 균열을 공략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압권이었다. 호열의 일백 균열 공략 선언이 떨어진 직후, 발 빠르게 균열에 진입해 있던 넷튜버 플레이어들을 통해 중계된 광경은.

“그냥 차원이 다른데?”

“아무리 그래도 보스몹인데 나가떨어지다니.”

“……근데 방금 뭐라 그러신 거야? 몬스터한테 되게 진지한 목소리로 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 하씨, 찍을 거면 좀 가까이서 찍지!”

호열에게 있어서 균열 공략?

비유가 아니라 길을 거니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일백 개의 균열을 일렬로 늘여 세워 걷는다고 하더라도 1시간은 훌쩍 넘길 거리일 테니까.

플레이어들이 결론을 내린다.

“이걸로 확실하게 능력을 증명하신 거지? 레이먼 션, 그 자식이 응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말이야. 이젠 녀석이 증명할 차례가 됐고……!”

그렇다.

호열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낸 지금.

이제 다시 레이먼 션의 차례가 왔다.

꼴깍─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다음 정기 업데이트까지 일주일도 안 남았지?”

“근데 꼭 정기일 필요가 있나?”

“지난번 패치도 그렇고, 레이먼 션이 의도한 패치는 정기 업데이트로 진행됐다는 분석이 있어. 어쨌든 확실한 건 다음 정기 업데이트 때는 확실히 결론이 난다는 거지.”

호열과 레이먼 션.

스케일이 다른 승부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든 나게 되리라.

평상시 같았으면 애타게 다음 주 목요일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마탑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야, 시간 됐다.”

이윽고, 에메랄드 홀에서 일제히 기립하는 플레이어.

그들을 비롯한 마법사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크리스탈 홀로 모두 같았다.

웅성웅성─

“황혼의 후예라니. 이름부터 거창하지 않냐?”

순혈의 마도 종족이라 불리는 황혼의 후예.

자신이 황혼의 후예임을 자처한 마법사가 크리스탈 홀에서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강단에 설 시간이 임박했으니까. 지나칠 수 없는 떡밥이다.

플레이어들이 크리스탈 홀에 입장하던 순간이었다.

“……?”

그 시선들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아니, 비단 플레이어뿐만 아니다.

마탑 마법사들의 시선까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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