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10화 (309/489)

◈ 310화. 종식해주겠다 (1)

마왕 삭제.

충격적인 정기 업데이트.

여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흔한 정기 업데이트로 치부하기에는 플레이어들의 변화가 심각했다.

서울역.

일대는 대기 중인 플레이어들로 인산인해다.

제로 산맥이라는 거대한 사냥터가 열리긴 했다만.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는 적정 레벨을 자랑하는 제로 산맥에 출입할 수 있는 건 고레벨 플레이어들뿐. 최근 들어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상승했다고 한들, 저레벨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압도적이었다.

이호열, 스칼, 제시, 남태민, 히사기 등등…….

높은 곳을 바라보며 의욕을 불살라야 할 이들이었거늘.

“에휴, 씨벌.”

누구 하나 웃음기를 머금은 이가 없다.

플레이어로서 찬란한 미래를 꿈꾼다고는 볼 수 없다는 얼굴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진짜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플레이어?”

어딘가 모르게 찝찝했으니까.

후욱─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내뱉는다.

“후우─ 대격변 이후에도 밸런스 패치가 가능했다니. 레이먼 션, 그 새끼는 악마족 몹 때문에 사람이, 플레이어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도 방관했던 거고.”

“진짜 쓰레기 새끼.”

“죽어라 레벨을 올려도 결국엔 쓸모없는 거 아니야? 개고생 해서 균열에서 살아 돌아오면 뭐하냐고. 레이먼 션, 그 새끼가 마음대로 밸런스 패치를 때리면 헛짓거리가 될 수도 있는데.”

신뢰가 무너지자 플레이어들의 마음이 꺾였다.

우려했던바 그대로.

그건 마왕의 위협이 사라진 것보다도 무서운 변화였다.

애초에 마왕이 삭제됐어도 악마의 위협은 사라진 게 아니었으니까.

현실에 숨어든 악마들.

그들에게 마왕의 삭제 소식은 오히려 희소식이었다.

그림자에 숨은 악마들은 웃었다.

‘뒈진 것도 모자라서 이런 부정적인 감정까지 흩뿌려주고 가실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살아계셨을 때 왕 노릇에 장단 좀 맞춰줄 걸 그랬나?’

플레이어 사이에 팽배한 상실감.

그 여파는 벌써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남철민은 AAU 측 정보를 전달받고는 흠칫했다.

“……뭔데, 이 수치는?”

하루 만에 균열 붕괴율이 급격하게 치솟았다.

자발적으로 균열을 공략하던 플레이어들이 고작 24시간.

균열 공략을 소홀히 했다고 수치가 이렇게 치솟을 줄이야.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벼본다.

“어디 잘못 계산한 거 아니야?”

남철민은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면서 정보를 수집, 계산했다.

그러나 바뀌는 건 없다.

AAU 측 자료엔 오류 따윈 없었다.

흘러나오는 탄식.

“그냥 체감하지 못했던 거라고……?”

말했다시피 플레이어들의 수준은 크게 진보했다.

제로 산맥의 랭커들뿐만 아니라 저레벨 플레이어들의 수준까지.

그 말인즉.

“애초에 균열 발생 빈도가 전보다 훨씬 증가해 있던 거야.”

플레이어들이 성장한 만큼.

그들이 목숨을 걸고 클리어한 균열의 수 또한 비례한다는 의미였다.

꿀꺽─

남철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AAU 측에선 해결책을 위해 자신에게 이런 자료를 보낸 것일 터.

“젠장.”

그러나 남철민은 고개를 떨궜다.

“당장 우리도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거대 연합.

그들도 성전 연합군 이전에 플레이어였다. 빌어먹을 정기 업데이트 탓에 꺾일 것 같은 마음을 긍지로 다잡고, 내색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만.

그것만으로도 힘겨운 게 사실이었다.

‘진짜 호열 씨가 안 계셨다면…….’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호열이 규합한 아르카나 대륙의 세력 덕분이었다. 애초에 과거엔 NPC라 불렸던 아르카나인들이다. 이제 와서 레이먼 션의 밸런스 패치 따위에 휘둘린다?

남철민의 머릿속의 울리는 마르셀로의 말.

-“겪어도 지나치게 많은 일을 겪었으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르카나인들의 정신력은 시련 속에서 견고해졌다.

“듬직합니다, 정말로요.”

마탑, 유스라, 프로스트, 뮤온.

플레이어가 혼란에 빠진 지금.

아르카나 세력은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플레이어를 대신해 균열을 공략할 채비를 끝마쳤다는 의미.

남철민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무 말고 숲을 봐야 해.”

급한 불을 끈다고 해도 일시적인 해결책이었다.

‘물론. 현시점에서 아르카나인들은 강하다.’

현재로서는 호열을 제외하고, 그들의 수준에 범접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없을 정도로. 그러나 플레이어는 빠르게 성장한다.

이번엔 동생, 남태민의 말이 떠오른다.

-“하르콘 스승님한테 재능을 인정받았다니까?”

시스템을 통해.

아르카나인들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남철민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레이먼 션, 그 자식이 설계한 세계라면.’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훗날 지금의 아르카나인들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적들이 등장할 게 분명하다고. 그 시점에서 그런 적에게 대응할 수 있는 건 성장한 플레이어뿐일 거라고.

그런데…….

“이런 의심의 씨앗을 심어놓을 줄이야.”

이로써 확실해졌다.

레이먼 션, 그는 인류의 적이다.

그것도 보통 적이 아닌.

인류를 기만하며 파멸로 내모는 악랄한 적이 분명하다.

남철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 차리자, 남철민.”

잡념을 털어내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제로 산맥에 대기 중인 거대 연합의 전력을 분산.

붕괴 조짐이 보이는 균열에 투입하고, 로테이션을 돌린다면……?

그나마 최선의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던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손목에서 요란한 진동이 느껴졌다.

“……!”

손목 위 스마트 워치.

오직 하나의 경우에만 진동하게 설정해 놨다.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

새로운 게시글이 업로드되는 순간에만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남철민.

지이이잉─

“…….”

목요일은 이미 지났다.

정기가 아닌 긴급 업데이트라는 뜻.

평상시 같았으면, 어떤 업데이트가 기다리고 있을까.

직업병 때문이라도 흥분해서는 홈페이지에 접속했겠지.

“후.”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접속하는 기분이다. 어떤 업데이트가 떠오르든, 레이먼 션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을 떨칠 수 없으니 내키지 않는 게 당연했다.

“멘탈 잡자, 철민아.”

그럼에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게 분석관이 지녀야 할 긍지니까.

남철민은 굳은 표정으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

긴급 업데이트

──────

예상처럼.

업로드된 긴급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했다.

이내, 남철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외마디.

“엥?”

그건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니, 생각지도 못한.

뜬금없는 업데이트 내역이었으니까.

──────

순혈의 마도 종족, 황혼의 후예가 등장합니다.

──────

“……갑자기 이건 또 뭔데?”

*

AAU.

지부장 긴급 소집.

웬일로 열렬한 토론이 오간다.

“그래서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박민재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아는 게 나와서 그런가.

드디어 일하는 기분이 좀 드는구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타이밍에서 뜬금없이 황혼의 후예가 튀어나오다니요! 개발 단계에서 폐기됐던 순혈의 마도 종족이라니요!”

런던 지부장, 베이커가 말을 보탠다.

“제가 알기로 황혼의 후예가 마계와 관련되어 있다는 설정은 없었을 텐데……. 어째서 마왕이 삭제된 직후,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을까요?”

박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황혼의 후예는 마왕을 비롯한 악마들과 조금의 연관도 없지요. 그들에게 부여됐던 설정이라고는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사용하지 못하는 ‘황혼의 마력’과 ‘황혼의 마법’을 다룬다는 것뿐이었으니 말입니다.”

황혼의 후예, 이름부터 그럴싸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히든 클래스와 연계된 종족이었으니까.

새록새록 코스모 재직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요, 마법사는 오픈 초창기 때부터 지나치게 인기가 많았죠. 가뜩이나 넘쳐나는 마법사 클래스에 히든 클래스가 존재한다는 소식만으로도 클래스 불균형을 초래했는데. 황혼의 후예? 그것도 신비로운 보랏빛 마법을 난무한다? 미래가 뻔히 예상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레이먼 션은 말했었다.

레이먼 션은 그러한 이유를 내세워 황혼의 후예 프로젝트를 폐기했다. 그 당시, 박민재를 비롯해서 아쉬움을 삼킨 개발자들의 수는 상당했다.

누군가 말한다.

“그 설정을 날린 덕분에 마법사 클래스가 붕 뜨게 됐죠.”

그중에서도 특히.

히든 클래스, [대마법사]가 말이다.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그녀는 인류에게 귀중한 특기 전력이었다. 비록 설정 단계에서 대격변이 터진 바람에 AAU는 제시에게 많은 정보와 도움을 제공할 순 없었지만…….

“황혼의 후예가 실현됐다면, 대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 최후반부에 황혼의 후예가 등장한다는 설정도 어느 정도는 남아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언제까지 총책임자 님에게 모든 걸 의존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제시 하인네스, 그녀가 이번 업데이트로 무언가를 얻어 성장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냉정하게 그들이 아군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AAU의 설정은 밑그림이 될 뿐.

그것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었는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다시금 침묵이 찾아올 수밖에.

베이커가 문득, 묻는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조용하십니다, 미스터 박?”

“하하, 그런가요.”

평상시 같았으면 답답한 상황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달려들었을 박민재다. 정기 업데이트도 모자라 긴급 업데이트라니. 레이먼 션에게 죽일 듯이 살기를 내뿜어댔을 테니.

그러나 박민재는 평온하게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누군가 은근히 묻는다.

“뭐, 뒤에 좋은 약속이라도 있으신가 보군요.”

박민재는 그제야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시간 좀 확인하느라.”

“에이, 데이트입니까?”

“……그렇다기엔 복장의 상태가 영.”

누가 봐도 변명처럼 보였지만, 진실이었다.

박민재는 지부장 회의에 참석하기 전부터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슬슬…….’

AAU 총책임자.

호열이 제출했던 사유서.

그 사유서에 명시된 기한이 임박했거든.

‘아니, 사실상 같은 시간이라 봐도 무방하다.’

호열이 명시한 기한.

그리고 긴급 업데이트가 떠오른 시각이 말이다.

그것이 박민재가 평온할 수 있는 이유였다.

게다가 호열은 단 한 번도 믿음에 배신한 적이 없지 않던가?

“응? 무슨 일인데요?”

이내, 지부장들에게 전해지는 속보.

그것은 마탑에서 전해진 소식.

흠칫하는 지부장들 사이에서.

오직 박민재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총책임자 님……!”

*

마탑의 최상층.

나는 마탑의 계단을 내려갔다.

또각─

구두 소리에 간간이 감탄사가 더해진다.

“이런 식으로 발전했구나.”

순혈의 마도 종족, 황혼의 후예.

‘잔뜩 금칠한 게.’

수식어와 이름이 어째 ‘누구’의 취향을 저격하는구만.

그러나 뒤로 제쳐놓자.

그것 말고도 생각해야 할 건 넘쳐나거든.

일단, 기본전제부터 깔고 가자고.

‘그러니까 클라우디는 거기에도 관련되어 있단 거지.’

위대한 가문의 오지랖 한번 대단하구나.

이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그 영향력이 뻗어져 있을 줄이야.

물론.

‘과거는 청산했으니 중요한 건 지금이지만.’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빚.

그딴 건 받기도 꺼려질뿐더러 흉조와 함께 청산하자고 했으니.

두말하지 않겠다.

왜, 그게 아니더라도 빚은 충분했거든. 나랑 악크샨 선배님들의 양동 작전 덕분에 메어리의 일족, 황혼의 후예가 아르카나 대륙에 복구되어 재등장했으니까.

“이래서야 제가 도움될지 모르겠습니다.”

메어리가 마탑을 둘러보며 말한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런 건 겸손이 아니라 기만이다, 메어리.

‘말도 안 되는 발현력이었어.’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오가는 포탈 발현은 나조차도 상당한 마력을 소모하게 된다. 게다가 이번에는 마력 탈진과 거부를 반복하던 상태. 그런 와중에도 잊지 않았던 그놈의 시간 약속.

‘혼자선 무리였겠지.’

그럼에도 마탑에 제시간에 돌아올 수 있던 건.

메어리가 포탈을 발현하던 내게 ‘힘’을 보태준 덕분이었다.

단순한 마력이 아니라 힘이라 표현한 이유는 간단하다.

고작 마력뿐 아니라 탐색, 간섭, 발현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메어리의 보랏빛 마력이 엄청난 도움을 줬거든. 타인의 마법과 완벽하게 조화하는 마법이라니.

‘내가 아는 마법적 지식에 그런 건 없다.’

낙하산이라 모르는 거 아니냐고?

내가 발표한 연구가 몇 갠 데.

이젠 어엿한 마탑의 수석이라니까, 나도?

어쨌든.

“스스로 한계를 둘 필요는 없네, 메어리.”

그런 「황혼의 마력과 마법」에서 가능성을 목격.

나는 메어리를 현실로 데리고 왔다.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마법사의 탑,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한 차원 진보한 마법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수석의 무게 (반복) ▲

─기이에 대한 접근 (성공)

─기이를 향한 진보 (진행 중)

●마탑의 근원을 파악하라. (성공)

●미지의 근원, 흉조를 추적하라. (실패)

●새로운 해결책을 개척하라. (진행 중)

흉조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 지금.

그랑펠의 고귀한 긍지께서 흉조의 힘을 빌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냐? 그러한 흉조를 대신할 힘을 황혼의 후예, 메어리에게서 엿봤거든.

그뿐만 아니다.

‘난리가 났겠지.’

내가 없는 동안 현실은.

대다수의 플레이어는 흉조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마왕 삭제라는 정기 업데이트를 겪었다. 다들 어떤 심정들일지 짐작이 된다.

그래, 메어리는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킬 카드였다.

밸런스 조절.

삭제.

레이먼 션의 개입.

그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릴 카드.

사실 나는 메어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예상했다.

왜, 그랑펠식 화법으로 기자들 앞에서 늘어놓는다고 하더라도.

AAU가 황혼의 후예에 관한 보충자료를 후속보도 할 테니까.

그러나 언제나 기상천외하시다, 우리 그랑펠 님……!

이윽고 도달한 마탑의 로비.

또각─

소리에 맞춰 터지는 플래시.

몰려든 기자 앞에서 나는 선언했다.

“그대들의 우려를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건 기우에 불과하다.”

레이먼 션의 바가지를 제대로 긁었단 거지.

“그럼에도 증거가 필요하다면 보여주겠다.”

펄럭─

어느새 어깨에 걸친 여명의 재킷이 요동친다.

거기에도 굴하지 않고 양팔을 벌리며 말을 끝마친다.

“균형을 위해서라면 나의 존재부터 부정해보거라.”

그랑펠식 화법을 번역하자면.

나를, 플레이어 이호열을 삭제해보란 뜻이다.

흉조가 악크샨 선배님들에게 붙들린 지금.

그게 가능할 리가 없겠지만!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