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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09화 (327/489)

◈ 309화. 세상이 그들을 버렸을지라도 (5)

중2.

나는 그 흑역사를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이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철딱서니가 없었다는 거지. 그런 내가 악크샨에 매료됐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볼까.

치렁치렁거리는 악마 사냥꾼의 복장을 보자.

겉보기엔 굉장히 그럴싸하지만.

성능에선 쥐뿔도 내세울 게 없다.

무기는 어떻고?

한 손에는 은검.

다른 한 손에는 석궁.

다재다능할 것 같지만, 실상은 둘 다 평균 이하로 애매하다.

악마 사냥도 그렇다.

악마를 사냥한다니.

아르카나 대륙의 숨겨진 악을 파헤치는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기껏해야 NPC들에게 빙의한 악마를 구마의식으로 내쫓는 게 전부였으니.

빛 좋은 개살구, 그 자체였단 거지.

그쯤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이상과는 거리가 먼 시궁창 같은 악크샨의 현실에 실망을 해야 했는데. 그 시절의 나는 그걸 구분하지 못했으니까. 악마 사냥꾼이란 클래스를 꾸역꾸역 육성했었지.

지금도 그렇다.

나는 떠오른 퀘스트 목표를 바라봤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클래스 퀘스트.

흉조의 뱃속에 있는 악마 사냥꾼들.

그들이 나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터.

그걸 알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신들은 배신당했잖아?’

악크샨은 악마의 존재를 아르카나 대륙에게 경고했다.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는 걷잡을 수 없을 테니.

성전을 선포하고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몰살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게 뒤통수를 맞고, 사냥감인 악마에게 오히려 육체를 뜯어먹히고, 최후에는 흉조에게 삼켜져 아르카나 대륙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쌤통이라고 비웃어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잖아?’

그런 악크샨이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을 비웃어도.

악크샨을 비판할 이들은 존재하지 않겠지.

다들 염치라는 게 있다면 말이야.

그런데 그딴 아르카나 대륙이 뭐가 좋다고.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성공)

●두 번 다시는 집어삼켜지는 이들이 없도록. (성공)

●잊히는 이들이 없도록. (성공)

●대흉을 우리와 함께 남쪽 바다에 봉인하라. (진행 중)

흉조랑 같이 남쪽 바다에 수장되겠다는 건데?

나, 이호열.

개인적으로 신파극은 질색이다.

희생을 강조하는 히어로물 같은 건 질릴 때로 질려버린 때 묻은 사회인이란 말이다. 당연히 이딴 퀘스트 따위, 예전 같으면 뭔 놈의 퀘스트도 이렇게 중2병스럽냐고 투덜거렸을 거다.

하지만 악크샨에 관해 보다 깊게 알게 된 지금.

마냥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심 우려하고 있었거든.

흉조는 처치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라는 걸.

[최후의 모험가] 효과를 믿고, 목숨을 걸고 흉조에 달려든다고 해도 그때뿐이다. AAU도 말하지 않았던가? 흉조는 [창조]와 [삭제]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존재.

설령 쓰러트린다고 해도. 레이먼 션, 녀석이 코드를 조작하면 다시 움직이게 될지도 모르는 게 바로 흉조였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흉조를 누구도 예측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존재.

[천적관계]가 발동된 악크샨 악마 사냥꾼.

그들과 함께 남쪽 바닷속에 봉인시키는 건.

‘근데 그걸 왜 당신들이 자처하냐고?’

어지럽게 떠오르던 복구 메시지.

그 가운데 악크샨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 했다.

아직 양동 작전이 끝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그러려니 했었다. 흉조 사냥이 끝난 후, 악크샨에서 떨어질 콩고물을 생각하며 김칫국을 들이켜기도 했었다.

근데, 양동 작전의 피날레를 이런 식으로 계획하다니.

이 따위 작전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악크샨의 감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작자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그대들의 긍지인가.”

그래, 어린 시절의 내가 품었던 이상.

그 이상이 실현된 존재.

그랑펠이 이곳에 있다.

진심으로 내키지 않거늘, 말은 담담하게 이어진다.

“내가 알았다.”

……이것도 내가 자처한 업보냐?

나한테 이따위 양동 작전보다 더 나은 수가 있었다면.

진작 그 방법으로 밀어붙였을 거다.

하지만 선배가 괜히 선배님들이 아니다.

‘……천하의 악크샨이 떠올린 계획이다.’

그리고 이런 때에 생전 처음 듣는 칭찬이라니.

●잘했다. (성공)

이런 건 반칙이잖아, 당신들?

스릉─

그리고 내뱉어버린 지금.

나는 그 말을 지킬 수밖에 없다.

당신네의 긍지가 그런 거라면.

장단을 맞춰주는 게 나의 최선이다.

일루젼 브레이커를 치켜세운다.

“가세하겠습니다, 그랑펠 님.”

보다 짙어진 메어리의 보랏빛 마력.

그럼에도 흉조를 처치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역할은 그저.

흉조를 남쪽 바닷속으로 처박아 버리는 것뿐.

그 정도 몫은 해내야 하지 않겠냐, 그랑펠?

이윽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공중 부양, 허공을 걸어서 거대한 흉조를 향해 접근했다.

격식도 좋지만, 선배님들이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후배가 뒷짐을 지고 있을 수 있겠냐.

스슥─

정말로 간만에 걷는 걸 넘어서 내달린다.

그리고 일루젼 브레이커를 내지른다.

푹!

보다 예리해진 검강을 발산.

대흉의 육체에 일루젼 브레이커를 꽂아넣는다.

물 흐르는 듯한 [집념]의 운용.

[집념] 스탯을 모조리 [근력]으로 환산한다.

[집념이 근력으로 환산됩니다.]

[근력 : 570]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나의 한계치.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밑바닥이 훤히 뚫린 상태로 쌓아올릴 수밖에 없던 경지로는 흉조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걸. 그러나 설령 밑바닥이 뚫려서 줄줄 새어나갔다고 한들.

“지나치게 가볍군.”

내가 짊어진 짐은.

새어나간 물은 ‘고작’에 불과하게 할 정도로 무겁거든.

그에 반해서 대흉, 너는 덩치에 비해 가볍기 그지없구나.

나는 마치 악마를 대하듯 냉랭하게 읊조렸다.

“네가 삼킨 악크샨의 무게는 이토록 가볍지 않을 것이다.”

대흉에 꽂힌 상태에서도 빛을 발하는 일루젼 브레이커의 검날.

그게 거슬린 건가, 대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귀찮은 날파리를 떨쳐내듯 거대한 몸을 움직인다.

메어리가 경고해 온다.

“그랑펠 님!”

삭제의 권한. 녀석이 움직이는 동선에 놓여있던 모든 게 기계 덩어리 사이로 빨려 들어간다. 지금은 거리를 벌려야겠군. 그리고 생각해 보자.

‘녀석이, 레이먼 션이 원하는 건 뭐지?’

스슥─

티타임동안 비축해뒀던 마력으로 마법을 발현.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생각을 이어나간다.

냉혈과 다를 바 없는 평정심 덕분인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삭제했던 게 복구된 상황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삭제는 흉조의 권능이 아니다.

흉조를 조종하는 레이먼 션의 권능이지.

‘그 개수작의 목적은 알 수 없어.’

그러나 분명한 건 레이먼 션이 악크샨을 삭제한 데에는.

흉조에서 쏟아져나온 이들을 아르카나에서 지워버린 데에는.

분명 치졸한 이유가 있겠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고?

‘마왕 삭제만 봐도 알잖아.’

그리고 내 추측처럼 대흉이 거동하고 있었으니까.

구구구궁……!

모두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려도 상관없다는 듯.

아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뱉어낸 것들을 다시 집어삼켜야 한다는 듯.

거대한 몸을 이끌고 남쪽 바다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하게도.

“그 창조자에 그 피조물이군.”

내게 너를 얌전히 보내줄 생각은 없다.

다시금 물 흐르듯 전환하는 [집념].

[집념이 마력으로 환산됩니다.]

[마력 : 1,120]

다른 스탯은 몰라도 [마력] 하나만큼은 레벨 업을 통해서 비약초를 통해서 꾸준하게 향상해온 나다.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아서 부족한 거 아니냐고? 아니, 충분하다.

‘거창한 걸 발현할 게 아니거든.’

가늘고 지속적으로 마력을 쏟아붓는다. 마력 재생력을 최대치에 가깝게 유지해 주는 [첫 세계수의 축복]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발현.

그래, 서열 4위 가미긴을 지옥으로 끌어내렸던 [『기이』]를 발현할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마력 입자를 대기 중으로 흩뿌렸다. 간섭 과정에 [중력]을 더해 대흉을 남쪽 바다로 끌어내려야 했으니까.

물론, 그때와 상황은 다르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긍지는 모순적이게도 악마의 앞에서 가장 드높아진다.』

앞에 있는 건 악마도 아니고, 몬스터도 아니다.

가미긴을 처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지옥의 불』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하기엔 지나치게 처절했거든.

가미긴 이후로 내가 쳐온 발버둥은.

[『기이』]로도 역부족이라고?

성장한 게 레벨과 스탯 뿐이라고 간과하지 마라.

나는 아직 전력을 쏟아내지 않았으니까.

이윽고, 귓가에 들려오는 소음.

스스스─

대흉의 앞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실루엣이 엄습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메어리가 입을 연다.

“드, 드래곤……?”

[전설, ‘흑암룡 이호열’이 실체화합니다.]

흑암룡의 거대한 날개가 펄럭인다.

나의 뜻에 따라 대흉을 온몸으로 휘감는다.

날개로, 꼬리로, 대흉을 붙들고는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이 순간만큼은 감사할 수밖에 없겠군.

‘잔뜩 피어오른 내 거품들에게.’

완전히 다른 두 세계.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

두 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는 흑암룡 전설이다.

전설의 위력은 전설이 얼마나 널리, 진실되게 울려 퍼지고 있는지에 달려있으니 흑암룡이 대흉에 뒤지지 않는 덩치를 가지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충 인터넷에 떠도는 글만 계산하더라도…….’

과장 안 하고 하루에 수억 번은 가볍게 넘기지 않겠냐?

흑암룡의 가세.

흉조는 전처럼 거침없이 움직이지 못했다.

과연, 나의 전설이다.

흑암룡이 발목을 붙잡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겠지.

그러나 지금도 간과하지 마라.

일루젼 브레이커가 섭섭해하잖냐.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 허상을 벨 시간이로군!

에고 소드(Ego Sword).

나는 아직도 귀철의 제 성능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무려 전설급 아이템. 총합 300 언저리인 나의 [근력], [민첩] 수치에 귀철은 솔직하게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귀철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게 최선의 사용법.’

검성, 셰그윈에게 승리했을 때처럼 말이야.

그러나 그랑펠의 고귀한 긍지가 귀철에게 휘둘리는 일을 용납할 리가 있나. 그 때문에 귀철을 제 성능을 내지 못한 채로 사용해 온 나였다.

그러나.

“날뛰어도 좋다, 일루젼 브레이커.”

지금은 합법이라고?

이 순간.

일루젼 브레이커는 내 손을 떠나 대흉에 꽂혀 있었으니까.

콰드드드득!

쇠 갈리는 소음과 함께 일루젼 브레이커가 대흉의 몸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일루젼 브레이커, 이름값을 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든다.

-나와 접촉하고 살아있을 수 있는 건 오직 나의 마스터뿐이다. 허상 주제에 감히 마스터와 같은 눈높이에 서 있지 마라. 내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흑암룡과 귀철.

두 전설이 치열하게 얽혀 대흉을 끌어내린다.

역시나 끈질기구나, 대흉, 그리고 레이먼 션.

메어리가 눈을 부릅뜨고는 입을 연다.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지휘권을 넘길 정도로 메어리도 든든한 아군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도 간과하지 마라.

주인공이신 우리 선배님들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거든.

그래도 양반은 못 되신다들.

……카득─!

이내, 대흉의 육체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소음.

동시에 뒤틀리기 시작하는 녀석.

악크샨이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말했다.

대흉을 향해서가 아니다.

어딘가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레이먼 션을 향해서.

“아둔한 식견으로 감히 가늠하려 들지 마라.”

구구구궁……!!!

그와 동시에 가라앉기 시작하는 흉조.

흑암룡과 일루젼 브레이커, 메어리.

악크샨이 더욱더 박차를 가한다.

“인간의 숭고한 긍지를.”

……자기 입으로 숭고하다고 내뱉다니, 역시나 뻔뻔하다.

‘그나저나.’

일찌감치 승리를 선언한 셈이다.

이젠 정말로 전력을 쏟아부었다.

그래도 흉조를 가라앉힐 수 없다면.

‘상당히 난감한 일이겠군.’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쿠구구구궁……!!!

이 주둥이는 지키지 못할 말은 내뱉지 않는다는 걸.

점멸하는 시야.

[상태이상, ‘마력 탈진’이 발생합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마력 탈진’을 거절합니다.]

[상태이상, ‘마력 탈진’이 발생합니다.]…….

번갈아 가며 떠오르는 메시지 사이로.

●대흉을 우리와 함께 남쪽 바다에 봉인하라. (성공)

점멸하는 퀘스트가 스쳐 지나간다.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악크샨과의 관계도가 최대치로 상승합니다.]

[악크샨과의 우호도가 최대치로 상승합니다.]…….

나는 남쪽 바다를 바라봤다.

퀘스트가 끝난 것처럼 모든 게 끝난 듯.

고요하기 짝이 없다.

‘젠장.’

이내, 나는 입을 열었다.

“악크샨이여.”

이런 빌어먹을 결말이 악크샨의 긍지든.

그랑펠이 인정했든 상관없다.

이건 나, 이호열의 다짐이니까.

“그대들과 재회할 날을 고대하겠다.”

지키지 못할 말은 내뱉지 않는 주둥이로 하는 다짐.

그때였다.

‘……?’

문득, 남쪽 바다에서 빛이 솟구쳐 올랐다.

‘……심미?’

[上]에 다다른 [심미].

[심미]가 보여주는 한 줄기의 빛.

그 빛 줄기가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아르카나 대륙 전역으로 뻗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

그 빛의 정체를 깨닫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젠장, 머리가…….”

“……다들 기억해?”

과거와는 다르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온 그들이.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 악마들 분명. 그래, 악크샨이라고 비명을 질렀어!”

“맞아, 악크샨……!”

“악크샨, 그들이 우리를 구한 건가……?”

흉조의 뱃속에서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악크샨을.

그러니 악크샨은 잊히지 않는다.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 속에서 악크샨은 살아 숨 쉴 테니까.

아르카나 대륙에서 영원토록.

그렇다.

세간은 그러한 이야기를 『전설』이라 부른다.

[아르카나 대륙에 ‘신시대의 영웅, 악크샨 전설’이 울려 퍼집니다.]

.

.

.

[당신의 전설이 실체화합니다.]

……아니, 잠깐만.

이렇게 빨리 재회할 줄 알았으면.

눈물이 차올라도 꾹 참았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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