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08화 (308/489)
  • ◈ 308화. 세상이 그들을 버렸을지라도 (4)

    전(前) 그림자 용병단 단장.

    “응?”

    키치는 늘어져 내린 흑발을 쓸어올렸다. 정말로 간만에 밟게 된 아르카나 대륙. 더불어 그림자 용병단을 제 발로 뛰쳐나온 처지.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적당한 주점에 처박혀 진탕 취해서는 폐인이 되고 싶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세상이 키치를 도와주지 않았다. 아르카나 대륙, 그 어디에도 주점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이래서 안 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닌데…….”

    그래서 마왕성을 수소문했다.

    클라우디와 얽힌 그림자 용병단의 과오도 청산할 겸, 마왕이라면 당연히 독한 술을 끼고 살 테니 그것도 슬쩍 할 겸, 겸사겸사 발견한 마왕성에 진입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아니, 아니지.”

    도리도리─

    긍지롭지 못한 잡념은 떨쳐버린다. 그러고는 펼쳐진 상황을 차분히 바라본다. 뎅겅. 마왕의 오른팔을 자처하던 악마 군단장의 모가지를 날려버린 순간이었다.

    쿠구궁!

    땅이 진동하더니, 마왕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씨.”

    심지어는 창고에서 슬쩍했던 포도주도 함께……! 목적을 상실한 시점에서 키치의 비수는 마왕성을 집어삼킨 흉조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난적이었다.

    키치의 비수가 파고들지 못하는 적은 흔치 않았으니까.

    게다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상태이상까지.

    “후.”

    단장 자리처럼 남에게 주지 못한 성질머리가 들끓었지만, 키치는 감정을 억눌렀다. 기껏 잔뜩 폼을 잡고 자취를 감추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정체도 모르는 상대와 싸우다 비명횡사라니.

    그런 최후는 영 달갑지 않았거든.

    그러나.

    “아니, 진짜 뭔데?”

    콰지지지직!

    자신조차 베지 못했던 흉조가 절반으로 갈라진 시점에서.

    키치는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우두커니 멈춰 서서 그 믿지 못할 광경을 지켜보고야 말았다.

    “저걸 저딴 칼로 베어냈다고……?!”

    가냘픈 은검에 소흉이 쓰러지는 모습을.

    갈라진 녀석의 틈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형체들을.

    알다시피 키치는 아르카나 대륙 정보에 능통하다.

    “……잠깐.”

    그림자 용병단은 아르카나 뒷세계의 터줏대감이다. 그들에게 대륙에서 잊힌 것에 관한 정보와 그를 수소문해 달라는 의뢰는 흔하다는 것이다.

    그림자 용병단의 전 단장, 키치의 눈이 움찔거린다.

    “수인(獸人)족?”

    인간과 짐승을 정확히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외관. 저건 의뢰 장부에서 봤던 수인족이 확실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췄다던 수인족 말이다.

    비단 수인족뿐만 아니다.

    “저 문양도 어디서 봤는데……?”

    돈.

    특히 금화와 관련된 건 잊지 않는 기억력.

    키치의 기억 속에서.

    “맞아!”

    오래전 멸망했다던 고대 왕국의 금화가 스쳐 지나간다.

    되짚어보아도 확실하다.

    쏟아져나온 이들 중 몇몇이 두르고 있는 갑옷의 문양.

    그건 이름 모를 고대 왕국의 것이 확실했다.

    키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거, 뭘 삼키고 뱉어내고 있는 거야……?”

    .

    .

    .

    같은 시각.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이엘의 눈매가 움찔거린다.

    “……!”

    주군, 호열이 말했기에.

    하이엘은 흉조가 절반으로 나뉘어 쓰러진 순간에도 놀라지 않았다. 허나, 그런 흉조에서 정령들이 쏟아져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정령들이.

    “그대들은……?”

    아득히 먼 과거.

    정령계에서 자취를 감춘 『우주의 정령』이라는 것까지 깨닫게 되었다. 하이엘은 다급히 쏟아져 내리는 이들을 위한 줄기를 뻗어 올렸다.

    디엔드를 비롯한 다른 쪽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언 캐슬 호.

    체인워커에게 속속 전해지는 소식.

    “쏟아지고 있어! 놈의 갈라진 몸뚱이에서 그동안 녀석이 삼켰던 것들이 역류하고 있는 것 같네! 인간, 짐승, 이종족……. 하여튼 셀 수 없이 많다고!!”

    체인워커는 차분히 물었다.

    “그들이 살아있는가?”

    “젠장, 모르겠네. 숨을 거둔 건지, 기절한 건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네. 적어도 악크샨, 그들만큼은 확실하게 살아있다고!”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소식을 전해 듣지 않았던가?

    악크샨의 상징과도 같은 은검(銀劍).

    그게 괴물의 몸뚱이를 절단을 내어버렸다고.

    연이어 소식이 전해져 온다.

    “한시름 놓은 것 같습니다, 체인워커 님. 쏟아져 나온 이들 중에서 마왕을 비롯한 악마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쓰러진 이들에게 위협이 될 요소도 식별되지 않습니다!”

    긴장이 풀린다.

    체인워커는 그제야 헛웃음을 뱉었다.

    “정말,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단 말인가?”

    악크샨이여.

    흉조라는 괴물에게 삼켜지고도.

    이날만을 위해 은검의 날을 갈아왔다는 말인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군.”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체인워커는 떨궜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이언 캐슬 호, 고도를 하강하라.”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악크샨을, 우리의 친우를 맞이할 시간이 왔다.”

    악크샨만 챙기겠다는 게 아니다.

    움직이는 하늘성, 아이언 캐슬이 아닌가?

    흉조에서 쏟아져 나온 이들의 수가 아르카나 대륙 전역에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말 그대로, 아르카나 대륙을 가득 채울 인원이 아니고서야…….

    ‘못해도 안토니움 인구 절반 정도는 수용할 수 있다.’

    철컥!

    치익!

    철컥!

    드워프들이 움직이자 톱니바퀴들이 분주하게 맞물려간다.

    이윽고, 변형되어가는 아이언 캐슬 호의 구조.

    공간이 무서운 속도로 확장되어 간다.

    물론, 그럼에도 머릿수는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겠지.

    체인워커가 묻는다.

    “거너, 녀석에게서 쏟아져나온 이들의 숫자가 어떻게 되는가? 전부 헤아릴 수 없다면, 자네가 보고 있는 이들만이라도 좋네.”

    그 수에 마왕성 수를 곱하면 대략적인 숫자가 나올 테니.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에 체인워커는 기겁하고 말았다.

    믿기지 않아 다시 묻는다.

    “……뭐, 뭐라고?”

    “이거, 못해도 수만은 될 것 같네.”

    “수, 수, 수만?!”

    놈의 몸집이 거대하긴 했다만, 수만 명을 집어삼킬 정도는 아니었거늘. 그러나 놀랄 새는 없었다. 체인워커가 정신을 차리고 말한다.

    “빌어먹을. 그렇게 많은 이들은 아이언 캐슬 호에도 수용할 수 없네. 정신을 잃은 이들을 이런 꼴이 된 아르카나 대륙에 내던져 놓을 수도 없는 일인데……!”

    제국에 도움을 요청한다고 한들.

    그들이 대륙 곳곳으로 향하는 데에만 하더라도 수십 일은 족히 걸릴 터였다. 심지어 마왕성이 사라졌다고 한들, 마왕과 관련되지 않은 악마들은 여전히 대륙에 똬리를 틀고 있으니까.

    월스와일이 곁에서 말을 보탠다.

    “점점 날이 어두워지고 있네, 체인워커.”

    엎친 데 덮친 격.

    해가 저물면 하늘엔 마안(魔眼)이 떠오른다.

    쓰러진 이들이 그대로 악마의 먹잇감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방법을 떠올려라, 방법을……!’

    체인워커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때, 우려를 기우로 바꾸는 소식이 도착했다.

    다급한 목소리.

    “자, 잠깐만요!”

    “또 무슨 일인가?”

    “거너 씨, 체인워커 님! 저, 정신을 잃었던 이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습니다! 하나둘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있어요!”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면 한시름을 덜었다.

    체인워커가 한층 맑아진 머리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로 신경 써야 할 건…….”

    저 흉조밖에 남지 않은 것인가?

    반으로 갈라져서 진작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거늘.

    체인워커는 그제야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렸다.

    “……거너, 한 가지만 묻겠네.”

    “얼마든지!”

    “녀석의 몸뚱이에서 쏟아져나온 이들 가운데.”

    “이들 가운데?”

    “……악크샨의 사냥꾼, 우리의 형제들이 있는가?”

    정작 흉조를 베어버린 악마 사냥꾼들이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을 악크샨이다.

    때문에 진작 모습을 드러냈어야 할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꿈틀!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흉조가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아이언 캐슬 호에 다급한 통신들이 들려온다.

    “아직 그들이 빠져 나오지 못했는데……?”

    “노, 놈이 다시 땅을 파고 있습니다. 체인워커 님!”

    “어째서 가만히 있는 겐가, 악크샨이여!”

    하지만 체인워커는 동요하지 않았다.

    악크샨,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이제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체인워커가 허망하게 읊조린다.

    “아직도 짊어져야 할 짐이 남았단 말인가?”

    악크샨.

    정말로 가혹하기 짝이 없군, 자네들은.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은가?

    “……빌어먹을.”

    아르카나에 버려진 이들을 삼켰던 녀석이.

    이제는 버려져 잊혀버린 자들을 쏟아내고 있다.

    버려지고 잊힌 이들이.

    처참하게 짓밟힌 아르카나 대륙에.

    한 줄기 희망이 되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단 말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이번에도 악크샨은 없었다.

    “……내게 그대들을 말릴 자격은 없겠지.”

    체인워커는 입안에 차오르는 씁쓸함을 애써 외면했다.

    “그것이 악크샨, 자네들이니까.”

    *

    달칵─

    흉조를 앞에 둔 마당에 내게 아르카나 대륙 전역을 탐색할 마력의 여유는 없다. 마력 재생력을 상승시켜 주는 비약초차를 들이켰다고 해도 달라지는 효과는 미비하니까.

    ‘천적관계에 비하면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좋으나 싫으나 정말로 믿고 기다리는 것밖엔 할 수 없겠군. 맞은편에서 찻잔을 쥐고 있던 메어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대접에 감사드립니다, 그랑펠 님.”

    “연회에 참석했다면 더 좋은 차를 내주었을 것이다.”

    ……너, 그거 맞냐?

    이런 상황에 녹차를 내어주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있다니.

    게다가 진작 끝난 연회를 언급하면 내 뒤끝이 장난이 아닌 것처럼 보이잖냐!

    역시나, 메어리가 송구한 표정을 짓는다.

    “다음엔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불러주신다면요.”

    그러고는 더욱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주제넘은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을 기다리고 계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분명, 절차의 일부라고 말씀하셨는데. 제 좁은 식견으로는 그 절차를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나야 뻔뻔스럽게 아는 체하고 있다만, 나도 방금에서야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악크샨 선배님들의 양동 작전에 대해 알게 된 것뿐이거든.

    나는 태연히 말했다.

    “그대는 기다리면 된다.”

    “기다린다…….”

    “다시 만나게 될 재회의 순간을.”

    “……재회라니요?”

    역시나 자기중심적인 그랑펠식 화법이다.

    나야 악크샨 선배님들과 재회라고 할 수 있겠지만.

    메어리가 선배님들과 마주한다고 그게 재회겠냐?

    달칵─

    일단, 할 말이 없을 땐 찻잔을 기울인다.

    동시에 또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던 참이었다.

    ‘!’

    눈앞이 점멸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깨달았다.

    그래, 그랬었지.

    그랑펠의 허세에 수습은 필요하지 않았다는 걸.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한 줄씩 메시지가 떠오른다.

    [작은 해안 마을, 나르비크가 복구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나르비크의 해풍이 불어옵니다.]

    복구 메시지는 또 처음이군.

    알지 못했다면 뭔가 했겠지.

    그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들이 해낼 줄 알고 있었다.”

    기어코 성공하셨구나, 우리 선배님들.

    복구, 삭제의 반대말.

    퀘스트 목표처럼 마왕성을 삼킨 소흉을 제압.

    악크샨처럼 흉조에 집어삼켜진 이들을 구해낸 것이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다.

    쉴 새 없이 번쩍거리는 시야.

    메시지가 연달아 떠오른다.

    [고대 왕국, 지슈라가 복구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사막의 폭풍이 몰려옵니다.]

    [화합의 숲, 만라시아가 복구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평화의 싹이 피어오릅니다.]

    [순혈의 마도 일족, 황혼의 후예가 복구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잊혔던 마력이 흘러넘칩니다.]…….

    “……!”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메어리.

    그녀의 안색이 급격히 변한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별안간 마력을 끌어올린다.

    “!!”

    그 특유의 보랏빛 마법을 발현한다. 담배의 효과는 진작 가셨을 텐데, 그 마력의 기세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맹렬하다. 나보다 스스로가 알아차렸겠지.

    메어리가 중얼거린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고는 불현듯 나를 바라본다.

    “그랑펠 님, 혹시 재회라는 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떠오른 복구 메시지가 워낙 많아서 뭐라고 확신은 못 하겠다만.

    분명 떠오른 메시지 중에 메어리와 관련된 메시지가 있던 거겠지.

    ‘그런 사연이 있어서 메어리는 흉조에 맞서고 있던 거겠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아내지 못한 건가.

    메어리가 울먹거리며 말한다.

    “이 은혜를 저는 대체 어떻게……?”

    아니, 감사 인사가 향할 곳은 내가 아니다.

    내가 한 거라곤 찻잔을 기울인 것밖에 없는데.

    다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이 하신 일이시지.

    메시지 사이로 함께 점멸하는 퀘스트 목표.

    ─흉조를 사냥하라. (진행 중)

    ●대륙에 흩어진 소흉을 제압하라. (성공)

    그러나 이제부터 나의 몫이다.

    본체에 소흉이 합쳐져 대흉이라.

    확실히 아까보다 훨씬 더 커진 것 같구나.

    물론, 상관없다.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사실 진작부터 목숨을 내던질 생각이었거든, 나는.

    왜, [최후의 모험가] 효과를 잊으면 섭섭하지!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그러니 본격적으로 귀철을…….

    아니, 일루젼 브레이커를 치켜든 순간이었다.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새롭게 갱신된 퀘스트 목표.

    그건 내가 예상하던 퀘스트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떠오른 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악크샨의 칭찬.

    ●잘했다. (성공)

    ……설마, 이런 게 악크샨식 화법이냐?

    그나저나.

    진심으로.

    ●그리고 마지막이다. (성공)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성공)

    ●두 번 다시는 집어삼켜지는 이들이 없도록. (성공)

    ●잊히는 이들이 없도록. (성공)

    ●대흉을 우리와 함께 남쪽 바다에 봉인하라. (진행 중)

    이건 글러 먹은 감성이잖아, 당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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