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화. 세상이 그들을 버렸을지라도 (3)
방대하기 짝이 없구나.
하긴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다.
왜, 내가 숙지하고 있는 클라우디의 설정만 해도.
‘드래곤을 쥐락펴락하는 정도니까…….’
그런데 나도 모르게 아르카나 대륙에 실현된 클라우디의 위상은 어느 정도일지 헤아릴 수 없다. 무엇보다 대륙이 인정하는 위대한 가문이잖아? 그런 가문에서도 역대급 가주인 그랑펠 님이시다.
‘잘났다, 정말.’
메어리가 클라우디 가문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만.
위대한 가주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니.
나는 태연하게도 지껄였다.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더군.”
클라우디의 초대.
그 수신인은 클라우디 가문을 알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의 모두. 메어리는 클라우디 가문을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 초대장을 받았을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는 좀.’
하여튼 이놈의 뒤끝은……!
부디 일부러 불참한 게 아니기를 빌겠다, 메어리.
나의 간절함 바람이 닿은 것인가.
메어리가 하늘색 동공이 다시금 잘게 떨렸다.
“이런……. 혹 제게도 초대를 권유해주신 것입니까?”
“클라우디의 초대에 예외는 없다.”
“송구합니다. 제게 초대장을 보내셨을 줄은…….”
메어리가 아르카나 대륙에 있다면 초대장을 받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이어지는 사정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됐다. 메어리가 정중하게 경위를 늘어놓는다.
“이건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슥─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등 뒤로 감추었던 오른손을 드러내면서 말이지.
그 손가락 사이엔 불이 붙은 연초가 들려있었다.
“……부끄럽게도 궐련이 아니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궐련을 구매하기 위한 시공간의 금화를 충당하기 위해. 시공간의 의뢰를 수행하러 잠깐, 마계에 다녀왔습니다.”
궐련 중독자의 고백은 잠깐 뒤로 미뤄두자.
“금화인가, 허상을 좇았군.”
부귀영화를 무쓸모라 여기는 청렴결백도 잠깐 집어넣자.
마계라니.
아무래도 메어리에게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나는 마계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오직 콘셉트만이 AAU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존재했던 마계가, AAU조차 알지 못하는 설정을 덧붙여 실현된 게 지금의 마계다. 게다가 마왕을 비롯한 악마들이 뱉은 이야기도 잊지 않고 있었거든.
‘마계의 잡종.’
거악 칠죄종.
그들은 72 마왕들을 그렇게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그냥 듣고 넘길 이야기가 아니군.
‘역시 실현된 거야.’
심지어 아르카나 대륙에서 마계를 오갈 수 있는 수단도 있다는 거겠지. 메어리의 경우엔 『시공간의 의뢰』였던 거고. 마계엔 흉조의 뱃속에 삼켜진 마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서열 상위 10위권의 마왕들이 존재할 터.
그쯤에서 그랑펠의 성질머리가 가만히 있을 리 있나.
“그에 관해선 후에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간결한 대화였거늘.
내겐 이렇게나 후폭풍이 걱정되는 대화도 없구나.
그랑펠이라면 상위 마왕이 아르카나 대륙에 나타나기 전.
마계로 쳐들어가고도 남을 인물이었으니까.
‘내가 제 명에 못 살게 생겼다, 진짜로.’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야기는 후에 나눠야 한다.
눈앞에 버젓이 흉조가 있었으니까.
흉조를 바라본다.
거대하지만 언제나처럼 고개는 빳빳하다.
절대 우러러보지 않는다.
스릉─
천천히 일루젼 브레이커를 치켜들 뿐.
메어리가 곁에서 말한다.
“……만류할 수 없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입술을 잘근 깨문다.
내가 또 눈치는 빠르잖냐.
그걸 보니까 메어리가 어떤 입장인지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클라우디 가문에 크나큰 빚을 진 모양이군.’
나, 이호열.
빌려준 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돌려받는 집요함의 소유자.
거기에다가 그랑펠이 강조하는 주고받음의 중요성까지.
그럼에도.
‘무슨 빚이 있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흑역사를 들추게 될 테니까.
그러나 중요한 건.
떠올랐던 메시지처럼 메어리에게 빚을 청산할 의지가 있다는 것.
그래, 그거면 충분히 주고받았다고 계산하고 넘어가자고.
“내게 사과할 것 없다.”
“……네?”
“과거는 흉조와 함께 청산하면 되는 일이다.”
“……!”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메어리가 흉조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여명의 세트 효과. 최대치에 이른 사기의 효과 덕분인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극적이구만.
그러나 오히려 좋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어리의 손끝에서 일렁이는 보랏빛 마력. 다시 봐도 낯선 마법이다. 그랑펠의 재능으로도 몇 번은 더 지켜봐야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스릉─
그러나 다르기에 좋다는 거다.
일루젼 브레이커의 검격에 메어리의 낯선 마법이 더해진다면 그것 또한 일종의 기이가 아니겠냐? 그러니 나는 지체하지 않고 일루젼 브레이커를 휘둘렀다.
슥─
조준 따윈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은 저 거대한 흉조를 뚫어낼 수 있는 파괴력.
너도 이름값을 하는 거냐.
묘하게 말투가 달라진 귀철.
그 음성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간다. 허상이여. 진상을 버텨낼 수 있겠나.
어째 그 진상(眞像)이.
다른 진상처럼 들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러나 그따위 미련은 이내, 말끔하게 사라졌다.
스오오오─
나의 검격에 더해지는 메어리의 보랏빛 마법.
뻗어 나간 일격이 흉조에게 닿는다.
쿠콰콰콰쾅!
나와 메어리의 몸이 뒤로 밀려날 정도의 파괴력이었거늘.
메어리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어째서 먹혀들지 않는 거야?”
흉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메어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알아차렸다.
메시지가 떠올랐거든.
[공격이 거부되었습니다.]
처음엔 저 녀석도 [첫 세계수의 축복] 같은 걸 가지고 있나, 싶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상대는 세계수처럼 고귀하신 존재가 아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나.”
그랑펠식 화법으로 설명하자면…….
레이먼 션의 조악하고 하찮은 피조물.
프로토타입에 불과했다.
‘버프 같은 게 아니야.’
그런 게 가능했다면 레이먼 션의 졸렬한 성격에, 굳이 흉조에 귀찮은 조건을 덕지덕지 붙여놨을 리가 없다. 그 말을 증명하듯 퀘스트 목표가 점멸한다.
─흉조를 사냥하라. (진행 중)
●대륙에 흩어진 소흉을 제압하라. (진행 중)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선행 패턴이 존재한다.’
교훈을 얻어서 본체를 먼저 노리려고 하는 내게 엿을 던져주는 패턴이 아닐 수 없구나. 혼자였다면 영락없이 농락당했겠어. 하지만 말하지 않았냐,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건 악크샨식 양동 작전이거든.
나는 평온하게 읊조렸다.
“아직도 필요한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슥.
흉조에서 메어리의 손가락으로.
정확하게는 궐련을 향하는 나의 시선.
“앗…….”
메어리가 흠칫하더니 나를 바라본다.
이 또한 금연을 강요하는 꼰대 정신이냐, 그랑펠.
언제나 뒷수습은 나의 몫이다.
최대한 뻔뻔하게 말을 잇는다.
“그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둥실─
별안간 허공에 떠오르는 찻잔.
“……?”
메어리가 궐련의 불을 끄고, 찻잔을 받아 들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쳐다봐도 해줄 말은 없다.
그랑펠의 고귀한 긍지께서. 악크샨 선배님들이 선행 패턴이 끝마치실 때까지 마력의 안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었으니까.
달칵─
난데없는 티타임이지만 자연스럽지 못할 이유가 있으랴.
떠오르는 버프 메시지를 바라보며.
나는 지껄였다.
“바닷가에서 즐기는 차도 나쁘지 않군.”
*
하이엘.
디엔드.
아이언 캐슬 호.
호열의 명에 따라 셋은 나뉘어 대륙을 살폈다. 정확하게는 몸부림치는 소흉(小凶)들을. 아이언 캐슬 호에서 재출격, 비행정을 조정하던 거너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런!”
작은 흉조의 위협에 노출된 안토니움의 병사들을 포착했으니까. 안토니움, 성전 연합군의 아군, 그들을 지키기 위해 비행정의 조종대를 잡은 순간이었다.
꾸물꾸물!
“……아이언 캐슬 호 듣고 있나?”
흉조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흉조의 육체에서 솟구치는 인간의 팔뚝을 목격했다.
그것은 거너가 목격한 흉조에게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었다.
“역시 인간까지 함께 삼킨 건가?”
“살아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저, 저놈을 찢고 나오는 게 말이 된다고?”
“저놈 뱃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동요하지 않은 것은 하이엘과 디엔드뿐이었다.
“주군의 오랜 친우들이시군요.”
호열을 주군으로 모시며 악크샨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하이엘이었다. 더욱이 정령왕에 비견되는 {고유 정령}의 직감이란, 악마 사냥꾼 특유의 기세를 알아차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과연.”
어둠의 정령, 디엔드에 와 닿는 적합한 마력.
그것은 악크샨에 얽힌 과거가 얼마나 어두운지 직감하게 했다. 디엔드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없이 깊은 어둠, 주군의 동료에 걸맞은 밝기라고 악크샨을 인정했다.
체인워커는 중얼거렸다.
“……정말 손 놓고 있어도 된다는 건가, 호열 경?”
흉조라고 했던가.
대륙 곳곳에서 녀석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꼬리를 내빼려다가 실패한 모양인지, 모습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떨리는 체인워커의 주먹.
‘아이언 캐슬 호가 울고 있네.’
고순도 마력석에서 추출한 마력을 드워프 기술력의 정수로 증폭시켜 발사하는 아이언 캐슬 호의 마력포. 제아무리 마왕성을 단숨에 삼킨 녀석이라고 해도, 마력포의 위력을 버텨낼 재간은 없을 터.
“진정 계획이란 말인가……?”
정말로 흉조의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이들을 믿는다는 것인가?
체인워커가 고뇌에 빠진 순간이었다.
출격한 비행정에게서 새로운 소식이 전해져 왔다.
“……놈의 육체에서 검을 쥔 손이 솟구쳐 나왔다고?”
참고로 모든 드워프는 대장장이다.
때문에 그것이 광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광물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니까.
“……은검(銀劍)이라?”
격하게 떨리는 체인워커의 동공.
저 뱃속에서 날뛰는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체인워커가 소리쳤다.
스스로를 다그쳤다.
“빌어먹을, 체인워커! 이번에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들이었다.
악크샨이었다.
흉조의 뱃속에서 날뛰고 있는 게.
호열 경이 말한 신뢰하는 아군이라는 게.
성전에서 자신들이 외면하고만 악크샨이었다.
체인워커는 대륙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틀림이 없어. 확실히 자네들이야……!!”
어떤 안배인지는 몰라도.
이런 무모한 작전을 수행하는 건 아르카나 대륙에서 악크샨.
자네들밖에 없지 않은가?
체인워커는 비행정에게 소식을 전했다.
“모두 들어라. 맹약을 나눈 전우, 악크샨이 돌아왔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호열 경의 안배에 따라 녀석의 육체 속에서 날뛰고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찰나의 침묵.
그리고 전해져 오는.
압도적인 음량의 통신들.
“뭐, 뭐라고?!”
“악크샨. 저 뱃속에 인간이 정말 그들이라는 겐가……?”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은가, 체인워커!”
체인워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호열은 말했다.
안배이니 우려할 것이 없다고.
최후의 생존자답게 악크샨다운 말이었다.
악크샨.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대가를 원하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오롯이 모든 짐을 홀로 짊어졌을 뿐.
그러나 체인워커는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악크샨의 최후를.
더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수도 없이 다짐했다.
자신들에게 나설 필요가 없다고 한들.
다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싶었다.
체인워커가 말을 이었다.
“그대들을 모두가 숙련된 드워프의 전사들이다. 그대들의 판단에 따라 악크샨, 맹약의 전우들을 지원하도록.”
투다다다다!
그와 동시에 일제히 울리는 소음.
비행정이 가속하는 소리.
체인워커가 선언했다.
“우리에게 성전의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가 왔다!”
흉조를 향해 달려드는 비행정.
“빌어먹을, 끄떡도 안 하는데?”
외부에서 공격을 퍼부어 봤자 생채기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저 뱃가죽 너머에 악크샨이 있는 한.
“물러서지 마라. 피해를 주지 못해도 좋다. 시간을 끄는 거다. 녀석이 악크샨을 방해하지 못하게 시선을 끄는 거다. 설령 추락하는 일이 있더라도 비행을 멈추지 마라!”
그러나 드워프들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으로 수십 년에 이르는 시간.
흉조의 뱃속에서 양동 작전의 때를 기다리며.
집념을 불사르며.
단 한 순간도 단련을 멈추지 않은 악마 사냥꾼들의 능력을.
그리고.
콰지지지지지지직!
그들이 마왕과 조우하며 발동된 [천적관계]의 위력을.
그렇다, 호열의 말대로였다.
작전에 돌입한 악크샨에게 지원 따윈 필요치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조종사.
거너조차 말을 더듬는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체, 체인워커 듣고 있는가?”
“듣고 있네, 거너. 상황은 어떤가?”
“자네, 내게 은의 성질을 말해보겠나?”
갑자기 은의 성질이라니.
“그야 충격에 약하고, 무뎌지기 쉽고, 흔하디흔한 광물인 철광석보다도 활용도가 떨어지는 광물이 아니던가? 특수한 목적이 아니고서야 쓰일 수가 없는 게 은이지 않은가?”
“……그래, 그랬지.”
“대체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겐가, 거너?”
“체인워커, 그 은으로 만들어진 얇디얇은 검이……!”
거너가 경악을 머금고는 말을 잇는다.
“우리의 마력포도 먹혀들지 않던 저 커다란 녀석을……! 절반으로 잘라버렸네! 믿어지는가? 마왕성을 집어삼킨 녀석이 일도양단이 났다는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