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세상이 그들을 버렸을지라도 (2)
디엔드의 전언에 나는 답했다.
“그리될 줄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현실보다 시간의 흐름이 빠른 아르카나 대륙이어서 그런가. 정기 업데이트 반영이 굉장히 빠르군. 보자, 대륙 곳곳에서 감시하던 마왕성이 흔적도 없이 궤멸했다라…….
“열등한 족속에게 썩 어울리는 최후다.”
하여튼 악마에 관해서는 자비가 없다니까, 이놈의 주둥이는.
그러나 진심은 아니다.
그야 악마 사냥꾼의 상식으로서 알고 있잖아?
“물론, 소용없는 짓이거늘.”
악마족 몬스터가 괜히 아르카나 대륙에 넘쳐나는 게 아니다. 악마 사냥꾼의 손으로, 지옥에 보내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되살아나는 놈들이거든. 걔네들.
‘삭제라면 다르다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레이먼 션.
“과연, 편협하기 그지없는 식견이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개발자를 자처하는 너조차도.
아르카나에 관해서는 전부를 알고 있지 못하잖냐?
예를 들어볼까.
나의 흑역사. 클라우디 가문과 그랑펠은 말할 것 없다. 게다가 너는 삭제되었다고 믿고 있을 게 분명한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도 마찬가지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식 양동 작전]
설령 아르카나 대륙이 악크샨을 저버렸을지라도 악크샨은 꺾이지 않았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크샨의 집념을 이어받아 악크샨 최후의 작전을 완수하라.
─흉조를 사냥하라. (진행 중)
삭제되기는커녕.
집념을 불사르며 흉조의 뱃속에서 작전에 돌입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이래 봬도 우리 선배님들의 집요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거든.
‘직접 시달려봤으니까 믿을 수밖에 없다.’
고유 스탯, [집념].
나보다도 높은 집념과 활용력을 가졌을 우리 선배님들이시라면 분명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하실 터.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믿고 나의 몫을 해내면 되는 일이다.
그랑펠식 화법으로 선언한다.
“악크샨의 신뢰를 얕보지 마라.”
그래서 나의 몫이 무엇이느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경험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아르카나 대륙, 곳곳에서 포착된 흉조.
이 패턴과 유사한 녀석을 최근에 상대했잖아?
태초의 악.
시슬리, 세계수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도주한 녀석.
녀석과 녀석의 부산물들 말이다.
태초 악 부산물에 가로막혀 나는 본체를 추적하는 데 실패했었다.
천하의 그랑펠이 악마를 놓친 치욕의 날(그랑펠의 엄격한 기준에는 치욕이었다.)을 잊을 수 있으랴. 악마를 놓쳤다는 데에서 어마어마한 교훈을 얻었다는 의미다.
나는 읊조렸다.
“나는 그대들을 믿는다.”
아르카나 대륙 곳곳에서 포착된 흉조는 본체가 아닐 거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고?
역시나 경험, 치열하게 발버둥 쳐둔 덕분이지.
-“흉조는 남쪽 바다 심해에…….”
AAU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로서 말이야.
“그러니 그대들도 나를 믿어라.”
좋다, 목표 좌표는 남쪽 바다.
노리는 것은 흉조의 본체.
사실 마음 같아서는…….
‘손님들 고삐를 돌려놓고 싶구만.’
연회가 끝나고, 클라우디 영지에서 떠난 이들을 불러세우고 싶었다. 그들이라면 흉조 앞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 같았으니까.
“연회의 무료함을 떨칠 때로군.”
그러나 클라우디의 체면이 그런 짓을 허락할 리 있으랴.
게다가 그들이 없어도 악크샨 선배님들이 있었다.
좋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보자.
‘천적관계가 아쉽긴 하다만.’
마왕들이 마왕성과 함께 흉조의 뱃속으로 삼켜진 이상.
[천적관계]가 발동될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러나 그 부재가 아쉬운 만큼.
우리 선배님들이 대신해서 채워주시지 않겠냐?
그러니까.
고오오오─
나는 망설임 없이 발현된 포탈로 발을 내디뎠다.
뭐, 정말로 여의치 않으면.
아이언 캐슬 호라도 호출해서 나의 몫을 해내야겠지.
그런데.
이윽고 드러내는 남쪽 바다.
해안가에서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구냐,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마력을 발산하고 있는 저 귀인께서는……? 그러나 그랑펠이 어디 남의 눈치를 보는 작자이던가.
곧바로 본론을 향하는 시선.
“저것이 흉조인가.”
……흉조, 너는 또 뭐냐?
드워프들이 어째서 흉조를 ‘무언가’라 표현했는지.
어째서 묘사조차 할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개념부터가 다르니까.’
아르카나 대륙의 이들이 흉조라는 존재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마치 플레이어들이 마법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래, 흉조는 현실에나 있을 법한 존재였다.
동시에 내게는 더없이 익숙한 형태였다.
“그 조악한 피조물과 다를 바 없구나.”
프로토타입.
레이먼 션의 [CODE] 균열에서 목격했던 기계형 몬스터.
다른 게 있다면 크기였다. 실로 압도적이다. 악크샨과 마왕성을 비롯하여 삼켜서 삭제해왔다는 게 과언이 아니다. 시야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몸집이다.
그러나 그딴 게 다 무슨 상관이겠어?
흉조, 네가 프로토타입인 이상.
레이먼 션의 창조물인 이상.
너에겐 거스를 수 없는 천적이 하나 생긴 거거든.
지이잉─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고동.
그렇다.
귀철이 자신의 차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만, 참아봐라 귀철.
아니, 프로토타입 앞에선 귀철이 아닌가.
“절차를 기다려라, 일루젼 브레이커.”
……그래, 그 괴상한 이름이었지!
쨌든, 아직 너를 휘두를 때가 아니다.
말했다시피 눈앞엔 흉조만 있는 게 아니니까. 흉조에 맞서서 빗자루에 올라탄 채 비행한다. 게다가 마탑의 공동 수석인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마법을 발현 중인 자가 있잖아?
스오오오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누군지는 몰라도 뜻은 일치하는 듯싶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 실력?
마법이라면 일단, 냉정한 관점에서 독설을 뱉어내는 그랑펠의 입방정이 잠자코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보통의 마법사가 아니다.
‘마력량은 물론, 발현의 수준도 비범해.’
장담할 수 있었다.
저건 서클을 해방한, 최소 초월자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어라?’
그 뒤통수가 왠지 모르게 익숙해 보이기 시작했다.
……알겠다, 이럴 땐 또 그랑펠의 뒤끝이 도움되는군.
왜, 시공간의 사교장에 처음 진입했던 순간. 내게 집중하지 않던 유일한 초월자. 구석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그 뒤통수. 아무래도 그 뒤통수가 이 뒤통수였던 것 같았으니까.
‘초월자라.’
검성, 셰그윈과 철완의 우르스를 봤을 때…….
초월자들의 성깔이야 마주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선 불필요하게 적을 늘릴 필요가 없겠지.
‘되도록 좋게좋게 넘어가자.’
흉조와 맞서고 있는 걸 보니 긁어 부스럼만 만들지 않으면 되겠지.
그런 의미를 담아서 나는 발을 내디뎠다.
전투에 열중해서인가.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 그녀에게 굳이 말을 건넨다.
“간만이로군.”
하여튼!
사고방식이 자기중심적이라니까?
나는 저 뒤통수를 알고 있지만.
뒤통수가 나를 알고 있으리란 법은 없잖아?
그러나 이 철면피가 사소한 사정을 신경 쓰랴.
마법을 발현하던 도중, 여유가 생긴 것인가.
고개를 돌리는 뒤통수.
얼굴이 마주친다.
역시나 초면이다.
어쨌든, 좋게좋게 통성명부터 하는 게 좋겠지.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
하늘빛 동공.
여인의 눈이 거칠게 흔들린다.
어째 뿜어내던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해질 정도로 격하게.
‘아니, 잠깐만.’
저기, 뭐 때문에 놀라신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우선 그 마법부터 제대로 발현해 보시죠?!
총구도 갑자기 돌리면 식겁하게 되는데.
저런 마법은 말할 것도 없다……!
방향이 잘못 튀어서 불똥처럼 내게로 날아들면 심히 곤란하거든?
무슨 마법인지도 모르니까, 반전 마법을 발현할 수도 없다고!
그런 심정을 그랑펠식 화법으로 전한다.
“표적은 흉조가 아니었는가.”
“……!”
“잊지 말도록. 모든 일엔 절차가 있다는 것을.”
마법의 절차.
탐색, 간섭, 발현도 다 좋다만.
상대를 똑바로 봐야 하지 않겠어?
나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가.
초월자가 흉조를 향해 마법을 발현한다.
슈오오오오─!
보랏빛 광선이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가 흉조에 적중한다.
알지 못하는 마법이지만.
‘박력으로 봐선…….’
메테오 스트라이크보다 윗 단계 같은데?
이른바 초고위 마법이라는 거지.
강렬한 보랏빛.
덕분에 눈앞이 번쩍였다가 시야가 돌아온다.
그나저나 예상대로군.
‘당연히 끄떡도 안 하겠지.’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프로토타입]이다.
어쨌거나, 녀석도 [『기이』]라는 거지.
기이는 기이로 상대할 수밖에 없는 법.
‘해봐야지.’
나도 최근 나름대로 노력이란 걸 했거든.
검술, 마법, 집념.
서로 다른 개념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기이의 조합을 물 흐르듯 하나로 다루기 위해서. 균열, 십만 동굴, 거악까지. 말 그대로 밤잠을 설쳐가며 발버둥 쳤다는 의미다.
둥둥둥─
손을 뻗어서 손잡이를 잡는다.
귀철의 고동이 전해져 온다.
날뛰는 귀철을 이번에는 말릴 필요는 없다.
초월자의 반열에 올라선 긍지의 검로 발산.
제 1길.
[허상을 베는 검 : 일루젼 브레이커(Illusion Breaker)]
[효과 : ‘프로토타입’과 전투 시, 파괴력이 대폭 상승한다.]
스오오오─
검기가 응축되어 검강으로.
검강이 변형하여 귀철의 형태가 순식간에 변해간다. 그 외형으로는 기계와 다를 바 없는 프로토타입이다. 일루젼 브레이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리하다면 베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인.
서슬 푸르게 빛을 발하는 검날이 신뢰를 더해준다.
……아차.
그리고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슬슬 끼워야지. 옷소매.’
전투에 앞서.
슥─
어깨에 걸쳐뒀던 재킷을 뻔뻔하게도 착용한다. 가만히 보고 있는 초월자가 뭐라 생각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여명 시리즈의 세트 효과.
그중에서도 두 번째 효과다.
[여명을 기다리는 자 5/5]
[세트 아이템 효과가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 중인 세트 효과 : 5/5]
[1. 지휘관일 때 아군의 사기가 ‘최대치’가 됩니다.]
[2. 모든 공격에 추가 피해에 부여됩니다. 추가 피해의 속성은 ‘빛’ 속성을 띠며 공격 대상이 ‘빛’ 속성일 경우에도 같은 피해를 줍니다.]…….
모든 공격에 추가 피해 부여.
그건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흔치 않은 효과다. 그러나 나는 그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직접, 간접적으로도 확인했었다. 아스큐라 백작, 녀석이 드롭한 [흡혈귀 백작의 오브] 덕분이었지.
‘천하의 마탑에서 대여 요청을 해올 정도였거든.’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
연구를 마치고, 대여했던 오브를 건네며 그녀는 말했다.
-“주제넘은 발언일 수도 있는데요……! 마법뿐만 아니라 다재다능하신 이 수석님에게 가장 적합한 마도구 효과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범용성이 정말로 대단해서요……!”
그렇다.
모든 공격에 적용된다는 게 핵심이다.
검술, 마법, 정령, 사격 등등…….
살 구멍을 오만 개는 파둔 나와 상당한 궁합을 자랑한다는 거지.
추가 피해 효과라는 건 그 피해량이 얼마가 됐든.
‘사실상 보너스잖아?’
세상에 보너스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나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물고 물리는 속성의 약점도 없다.
‘크흠.’
수치심을 무릅쓰고 뻔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 이호열의 정신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역시.”
문득, 초월자가 입을 연다.
속절없이 흔들리던 그녀의 동공이 제자리를 찾는다.
이윽고 말을 잇는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당신이셨군요……?”
여기서 그놈의 빌어먹을 풀네임이 나온다고?!
젠장, 반짝이 의상을 걸친 모습으로.
풀네임을 불리니까 이거, 정신적 충격이 두 배로구나.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머리를 굴린다.
‘……사교장인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고인물 커뮤니티가 실현된 게 시공간의 사교장이었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아이디가 드러나는 건 염두에 두고 있던바. 문제는 어떻게 나인 줄 확신했느냐는 것이다.
설마……?
‘내가 그 이름에 어울리게 생겼나?’
……나 정말 그딴 이름값을 하게 생긴 거야?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나의 내적 호들갑은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으니.
과연,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가리라.
그녀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고개를 숙이면서.
“남쪽 바다의 마녀, 메어리가 클라우디의 가주를 뵙습니다.”
남쪽 바다의 마녀, 메어리라니.
거, 누군지는 몰라도.
나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걸 알고 있구나.
‘……모른 체하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나를, 그랑펠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데?
흉조 앞에서 협력할 마음이 있긴 한 거냐?
본론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눈앞이 점멸했다.
[남쪽 바다의 마녀, 메어리의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나와 메어리, 서로가 반응했다.
“……그랑펠 님? 어째서 제 몸이 빛나기 시작하는 것일까요?”
메어리는 긍지의 전염에 당황을.
‘설마, 이번에도 클라우디의 후광이냐?’
나는 나의 광범위한 흑역사 발현에 경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