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04화 (304/489)

◈ 304화. 거스르다 (2)

대한민국의 수장, 정한택.

“쓰읍.”

그는 쓴 입맛을 다셨다.

대격변 이후, 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은 상식이 되었다.

국가를 이끌어갈 대통령에게는 보다 해박한 상식이 요구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공부로 알게 되는 것과 직접 부딪히며 체득하게 되는 것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정한택이 보고서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든다.

심각한 얼굴의 참모들 사이.

비교적 전문가인 국가안보실장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정기 업데이트라는 게……. 원래는 매주 목요일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이벤트 같은 거였잖습니까, 국가안보실장?”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한데, 제로 산맥이 나타난 이후론 뜸해졌고요?”

“정확하십니다, 대통령님.”

“그런데 간만의 업데이트에 문제가 생겼다……?”

업데이트된 패치 내역.

“흐음…….”

그를 향한 세계의 반응을 정한택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호열 플레이어를 선두로, 세계 각국의 플레이어들의 수준은 이전보다 훨씬 드높아지지 않았던가?

정한택이 말을 잇는다.

“우리 거대 연합을 포함. 플레이어들은 제로 산맥을 적극 활용하며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통계적으로도 봅시다. 균열 공략 실패로 인한 붕괴 사례 또한 급감했다고. 바로 어제 내게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정한택은 다시금 패치 내역을 들여다봤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아무리 봐도 희소식 같군요.”

정한택의 혼잣말에 몇몇 참모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법합니다. 대통령님.”

국가안보실장은 속으로 숨을 고른다.

일단, 쉽지 않을 이야기가 될 것 같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정한택, 대통령께선 열린 자세로 설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다는 거겠지.

말을 잇는다.

“잠시 대격변 이전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대통령님.”

“그럽시다.”

“아시다시피 대격변 이전. 아르카나를 관리하는 건 AAU의 전신, 코스모였습니다. 아르카나를 조율하는 게 그들의 업무였지요. 하지만 대격변 이후 그들은 그러한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정한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게임을 넘어서 또 다른 세계로 실현된 아르카나가 아니었던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코스모의 직원들에게 현실을 조율할 능력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수년에 걸친 국제 재판에서 코스모 직원들의 무고함은 밝혀졌죠. 물론, CEO인 레이먼 션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말 그대로.

지구를 샅샅이 뒤졌다.

그럼에도 레이먼 션의 신병은 확보하지 못했으니까.

“이번 건은 명백하게 거스른 겁니다.”

“……갑자기 거슬러요? 뭘 말입니까, 국가안보실장?”

“이제는 유일한 아르카나의 관리자라고 할 수 있는 레이먼 션. 그와 플레이어 사이에서 이어져 오던 신뢰가. 레이먼 션이 발표한 이번 업데이트로 흔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신뢰의 근간이 흔들려요?”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국가들 사이에서도.

레이먼 션을 향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레이먼 션을 옹호하는 쪽의 의견은 간단했다.

그가 현실을 파멸로 몰고 가기 원했다면 막대한 균열 클리어 보상금을 지급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플레이어들에게 업데이트 내역을 공유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냐고.

“음.”

정한택의 입장은 중립이었다.

그래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정한택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진다.

“이런 업데이트 하나로 말입니까? 균열 클리어 보상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거악 때와는 다르게 업데이트 내역 또한 제대로 공유하지 않았습니까?”

국가안보실장의 대답은 간결했다.

“플레이어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들은 믿고 있었을 겁니다. 설령 아르카나의 CEO라고 했던 레이먼 션이라고 해도, 아르카나엔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

그 말에 정한택은 불현듯 깨달았다.

관자놀이를 지그시 짚고는, 타임.

양해를 구하고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그 심정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군요.”

균열, 아르카나의 침식에 맞서서 플레이어들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르카나 대륙이 레이먼 션의 의도대로 조율할 수 있었던 세계였다면?

“입맛이 제대로 달아나는 상황이겠어요.”

“업데이트 내역이 인류에게 호재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레이먼 션이 아르카나 대륙을 직접적으로 조율할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증명된 이상…….”

“그래서 거슬렀다는 거군요. 금기가 됐든, 심기가 됐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지금.

‘생각해라, 정한택.’

정한택은 국가의 미래에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AAU 협약에 따라 섣불리 나설 순 없겠지. 다른 국가의 지도자들처럼 자신처럼 골머리를 썩이고 있으리라.

‘그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형편이 좀 낫겠군.

정한택은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럴 수밖에.

‘설마, 여기까지 예측했을 줄이야.’

평가가 엇갈리던 레이먼 션.

‘이호열 플레이어.’

그에게 한결같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존재가 바로 호열이었으니까. 물론, 호열에게 의존해 손 놓고 있을 생각 따윈 없었다.

정한택은 신속하게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플레이어들이 혼란에 빠진 지금. 제 버릇 남 못 주는 미꾸라지들이 설치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뿐입니다. 잡초는 뽑아내고, 노란 싹수는 잘라내는 것 말입니다.”

.

.

.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간만에 뵙습니다, 하르콘 경.”

“오호, 그 눈빛들이 한층 결연해졌군.”

“티가 나나요? 나름대로 넘나들었거든요. 생사의 전장을.”

“그런가? 그리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그대들의 검기가 얼마나 짙어졌는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지는군.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그러할 새가 없겠지만.”

성큼성큼.

안부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하르콘과 거대 연합의 세 길드 마스터들. 끄트머리에서 힘겹게 걸음을 맞추던 레오니가 입을 연다.

“소식은 들으셨어요?”

“물론이네. 진심으로 예상치 못한 상황이군.”

“그 자식, 진짜 생판 안 하던 짓을 하고는.”

남태민은 상황이 못마땅했다.

“뭐, 밸런스 패치?”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에도 밸런스 패치는 흔하지 않았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르카나 상에서 밸런스를 해칠 요소가 발견됐다고 한들.

코스모는 그것조차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사건이라고 판단.

‘새로운 퀘스트를 통해 요소를 제거하도록 유도해서 밸런스를 맞춘다든가. 그게 여의치 않다면 NPC들이 직접 나서서 제거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기억 속에서 잊혔을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치우든가.’

플레이어의 몰입감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밸런스를 조절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NPC로서 그 역할 수행했을 당사자, 하르콘이 곁에 있었다.

그래,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현실에.

남태민이 탁! 주먹으로 손바닥을 친다.

“……잠깐! 이거 혹시 아르카나 대륙에 밸런스를 조절할 인물들이 없어서 그러는 건가? 스승님 같은 분들이 다 여기 계시니까. 그래서 레이먼 션, 그 자식이 강제적으로 개입한 거 아냐?”

“남태민 군.”

싸늘하게 말을 건네온 건 히사기였다.

치켜 뜨여지는 뱀눈.

히사기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밸런스를 조절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까지 왔을까요? 애초에 업데이트의 방향부터 플레이어를 위한 배려 따윈 없이 언제나 제멋대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 의미로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진다.

“아르카나 대륙엔 총대장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씨, 이거 앞에선 뭔 말도 못 하겠네.”

“긍지를 다잡으셔야겠습니다, 남태민 군.”

둘 사이에 오가는 신경전.

“너넨 똑같은 것들끼리 맨날 뭐 하냐, 진짜?”

레오니가 쯧 혀를 차는 순간.

황금 궁전의 원탁에 네 사람이 다다랐다.

성전 연합군 회의, 그 장소엔 이미 많은 인원이 모여있었다.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가 좌중을 둘러보다가 입을 연다.

“다들 모인 것 같군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겠다.

호열은 마탑과 유스라 왕국에 사유서를 제출하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니. 자리에 참석한 마르셀로는 문득, 호열의 사유서를 떠올렸다.

‘개인사.’

감히 호열 경의 개인사를 추측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이러한 중대사실을.

실시간으로 접하지 못할 호열이 우려가 됐을 뿐.

기이의 탐구.

호열이 건네주었던 스마트폰으로 확인한 긴급한 소식.

업데이트 내역은 아르카나 대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테니까.

‘경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모험가들의 세계.

현실에서의 걱정거리만큼은 덜어 드리고 싶었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적어도 이 자리의 모두는 그를 위해 회의에 참석한 것일 테니까.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를 완벽하게 넘나들 정도로.

기이에 통달한 호열이 자리를 비운 상황.

‘경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대신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 자리엔 모험가.

그리고 자신과 같은 아르카나인들이 존재한다.

마르셀로가 작게 웃었다.

‘그럼에도 경의 뜻대로 협력해 보겠습니다.’

마르셀로의 다짐과 동시에 시작된 회의.

양피지가 마법으로 떠오른다.

그 위에는 정기 업데이트 내역이 새겨져 있었다.

──────

아르카나 대륙 전기 : 정기 업데이트 (밸런스 패치 포함)

※주요 밸런스 조정 대상

●악마족 보스 몬스터, 마왕.

서열 상위 10위 마왕을 제외한 모든 마왕이 삭제됩니다. 불필요한 마왕의 존재가 악영향을 끼칠 수 있어 내린 판단이니, 플레이어 여러분의 너른 양해를 바랍니다.

.

.

.

──────

*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는 해안가에서 남쪽 바다를 바라봤다.

풍향, 내음, 그리고 조용한 귓가로 보았을 때…….

푸우─

연기와 함께 탄식을 내뱉는다.

“오늘은 어찌어찌 잠잠하게 넘어갈 모양이야?”

하루이틀사흘…….

단 하루도 조잘거리지 않는 날이 없었던 흉조가 근 며칠 잠잠했다. 녀석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녀석을 지켜봐 온 마녀에게도 흔치 않은 며칠이었다.

“덕분에 궐련 살 금화는 좀 벌었네.”

『시공간의 의뢰』를 통해 수급한 금화.

초월자 중에서도 상층에 출입할 수 있는 초월자는 극소수다.

마녀는 그 자격을 갖췄으니, 대다수 초월자가 시공간의 금화에 쪼들리는 것과 다르게 궐련으로 금화를 흥청망청 써버려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콜록콜록.”

독한 궐련에 썩어들어가는 몸은 문제였지만.

“……이 짓도 더는 못 해먹겠네.”

다시 바다를 향하는 시선.

자신과 흉조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들은 하나같이 물어왔었다.

-“그토록 꼴도 보기 싫은 흉조라면서? 딱히 막을 방법도 존재하지 않으면서 다 죽어가는 몸으로, 허구한 날 바다만 쳐다보고 있는 이유가 뭔데?”

마녀는 대답했다.

“……저게 말을 걸잖아.”

자신이라도 저주를 들어주지 않으면 흉조, 녀석이 다시 날뛸 것만 같았거든. 대륙을 향해 아가리를 벌릴 것 같았거든. 그래서 마녀는 빌어먹을 바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친년이 따로 없겠어.”

흉조는 마녀의 정신마저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마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

변화는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아르카나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떠오른 몇 안 되는 글줄에서 시작되었으니. 그 전조를 알아차릴 수 없는 게 당연했다.

“……!”

스멀스멀─

수평선 너머에서 치솟는 거대한 그림자.

마녀는 그제야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어, 어째서……?”

흉조가 대륙에 현현했다는 사실을.

*

정말로 할 일이 끊이질 않는구나.

어찌어찌 클라우디의 저택은 복원을 끝내니, 이젠 쑥대밭이 된 영지가 문제였다. 하지만 영지를 어떻게 복구해야 하는지는 나중에 생각하자고.

“오후의 티타임만큼이나 빠르게 흘러가는구나.”

현실 시각으로 또 하루가 지났으니, 깃털펜을 들어야 한다.

갑자기 웬 깃털펜이냐고 묻는다면.

뭘 새삼스럽게 묻고 그러냐.

‘올려야지. 문안 상소문.’

그랑펠의 효심에 시달리면서도 문득 감탄하게 된다.

대체 어떻게 매일매일 수천 자의 편지를 써댈 수 있는 걸까?

물론, 효자의 긍지라고 답할 게 뻔하니 굳이 묻지는 않겠다.

스슥─

나는 깃털펜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부탁하마.”

현실에서야 간단히 마법을 발현하면 편지가 날개를 달고, 알아서 본가로 날아갔건만. 여긴 아르카나 대륙이니까 추가적인 간섭 과정이 필요하겠지.

“소식을 전하고, 가지고 오거라.”

고오오오─

이내, 차원을 찢고 전송되는 편지.

‘대단한 효심이야, 정말.’

고작 아침 인사로 이만한 마력을 소모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다. 시차가 존재하니, 답장이 도착하기까진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

‘그동안 둘러봐야겠다.’

클라우디의 저택을.

반전 마법으로 복구했으니, 클라우디 저택 설정 중 몇 개는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4가문의 석상이 되살아난 것처럼 써먹을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아쉬울수록 박박 긁어모아야 한다.’

근엄한 가주의 표정으로 다짐하던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답장이 예상보다 빠른데?

내 문안 상소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나긴 답장을 보내오시던 부모님이다. 아무리 시차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게 빠르지 않나. 설마 미리 써두신 건가, 생각하기도 잠깐.

나는 편지를 펼쳤다.

그런 나의 입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긍지라곤 찾아볼 수 없군.”

동봉된 건 정기 업데이트 내역을 출력한 A4 용지.

그래, 거긴 아직 목요일이었구나.

간만에 새로운 정기 업데이트가 떠오른 모양이지.

하필이면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을 때.

이거, 하마터면 영문도 모르고 놓칠 뻔했어?

그런 의미에서.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번엔 지극한 효심 덕을 봤구나.

보자고.

‘마왕 삭제라니.’

무엇을 위한 밸런스 조정 패치인지는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내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라는 거다.

사실 그걸 넘어서 나, 이호열을 저격하는 수준이겠군.

‘마왕이 드롭하는 경험치랑 전리품이 몇 갠데.’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시겠다?

과연, 그랑펠이 괜히 긍지가 없다는 게 아니구나.

그런데, 레이먼 션.

너는 실수해도 크게 실수한 거다.

‘흉조가 움직인다.’

마왕 삭제.

그러니까 마왕을 흉조의 먹이로 주겠다는 거잖아.

정말로.

‘간과하고 있구나?’

그 흉조의 뱃속에 누가 들어있는지를.

나는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번거로운 과정은 생략하지.”

나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퀘스트 목표가 점멸한다.

스스스─

번거로운 퀘스트 목표가 지워지고 새로운 목표가 갱신된다.

“악크샨이여.”

●흉조를 사냥하라. (진행 중)

거스를 수 없는 천적관계.

악마 사냥꾼이 악마와 마주하는 순간.

발동되는 스킬, [천적관계]의 위력을……!

“사냥 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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