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화. 거스르다 (1)
대현자 라이즈.
그는 초대장을 받아들고는 오래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확실했다.
“……클라우디 최후의 가주.”
마주한 적은 없지만, 그 얼굴은 익히 알고 있다.
『판도라의 다락방』.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현자의 은신처.
다락방에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그랑펠의 얼굴은 자주 등장하고는 했으니. 끼익─ 라이즈는 먼지 쌓인 은신처를 찾았다. 기억이 아득할 정도로 오래간만이었다.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난 거라면 좋겠군.”
다락방의 먼지가 보여준 미래에서 클라우디는 전멸했다. 그것은 숙명으로, 위대한 클라우디라고 할지라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클라우디의 가주, 그랑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스윽─
팔을 휘적거리자 다락방에 쌓인 먼지가 피어오른다.
‘여전히 빌어먹을 풍경이로군.’
끔찍한 미래를 엿보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발버둥 친다고 한들, 숙명은 거스를 수 없다. 무력감이 싫어 다시는 판도라의 다락방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거늘.
라이즈가 애써 합리화한다.
“나는 과거가 궁금할 뿐이다.”
미래는 더 이상 내다보고 싶지 않다.
단지 흐린 기억을 되짚어보고 싶었을 뿐.
과거 자신이 목격했던 미래에서 클라우디의 가주, 그랑펠이 사망했는가를 재차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윽고, 라이즈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틀림없거늘.”
짓밟힌 고귀함.
역시나 그때와 같았다.
이 시점에서 그랑펠은 처참하게 죽었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가 가지고 태어난 숙명이었으니까.
그런데.
다시금 손아귀의 초대장을 향하는 시선.
“감히 그랑펠을 자처하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대현자라는 칭호는 얄궂기 그지없다. 대마법사처럼 안하무인으로 무력을 뽐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검왕(劍王)처럼 대륙을 호령할 수도 없다.
그저 남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뿐.
그 방대한 지식만으로는 무언가를 쟁취할 수도.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없다. 그저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남들보다 먼저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대현자의 능력 전부였으니까.
때문에.
“심히 불쾌하군.”
라이즈는 심기가 불편했다.
클라우디 최후의 가주를 사칭한 이가 누군지는 알 수 없어도.
애써 외면했던 자신의 무기력함을 상기하게 하였으니.
툭.
라이즈는 스태프를 지팡이처럼 짚었다.
그러곤 마력을 끌어올려 포탈을 발현했다.
‘클라우디의 이름은 절대 가볍지 않다.’
목표 좌표는 클라우디의 영지.
역시나 아득히 먼 과거에 방문한 적이 있기에. 포탈을 발현하는 것쯤이야, 그닥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마력의 빛 무리가 흩어지고 라이즈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런. 제가 받은 것은 분명 클라우디 가문의 최연소 가주, 그랑펠 경의 초대장이었거늘…….”
그러고는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를 자처하는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당신께서는 누구십니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품격.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의 머리칼.
숙명을 거스른 존재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
이거 흠칫할 수밖에 없구만.
‘……우리 그랑펠이랑 구면이신가?’
겉보기로 보아하니 연세가 지긋하신 것 같은데…….
과거의 그랑펠과 마주한 적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여기선 내가 뭐라고 해야 되냐?’
이렇게 애매한 상황이 또 없다.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기엔 나부터가 설명할 수 없는걸?
한낱 중2병 환자의 설정이 어째서 아르카나 대륙에 실현되었는지 말이야. 역시나 곤란할 상황일 때마다 빛을 발하는 건 이놈의 철면피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설령 이유는 알지 못해도.
그 흑역사를 짊어지겠다 다짐했으니.
당당하게 내뱉는다.
“클라우디의 초대장을 들고 있음에도 나의 이름을 묻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믿겠다. 그 이유를 들어줄 테니 내뱉어도 좋다.”
아니, 오히려 추궁하고 있구만.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겠지.
상대가 누구든 물러나지 않는 긍지다.
더욱이 홈그라운드.
가문의 저택에서 허리는 더욱더 꼿꼿해질 수밖에 없는바.
나의 말에 노인이 잠시 숨을 고른다.
“후우.”
그러고는 다시금 나를 바라본다.
스윽─
이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다.
“이 늙은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했기에 크나큰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클라우디의 가주시여.”
말했다시피 무엇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성격.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겠다…….
마음에 담아두던 찰나, 노인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이제는 대현자라 불릴 자격이 없는 노인네, 라이즈가 처음으로 클라우디 가문의 새로운 가주이신 그랑펠 경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대현자, 라이즈.
일단 그 수식어부터가 범상치 않은 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중요 인물이 확실하군. 그나저나 처음 마주하는 거라니 다행이네.
‘아는 사이였어 봐.’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짧아지셨군요.”
길게 늘어진 그랑펠의 머리카락을 알고 있는 걸 보니까…….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도.
그랑펠이 어떻게 생긴지는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 또한 무어라 할 것 없이 잘 어울리십니다.”
다짜고짜 누구냐고 묻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했건만.
그 이후엔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이야기가 오갔다. 덕분에 어째서 라이즈가 다짜고짜 무례한 질문을 건넸는지도 알게 되었다.
“경께서 살아계셨을 줄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대현자라는 칭호가 괜한 게 아니었구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니.
어떻게 써먹을 수 없을까, 머리를 굴리던 와중.
라이즈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지. 이젠 보잘것없는 예지 능력조차 자신할 수 없겠군요. 그랑펠 경께서 숙명을 극복하시고 이렇게 멀쩡히 살아계시니 말입니다.”
글쎄다……?
‘그건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는데.’
나, 이호열이 끄적이던 설정과 대륙에 실현된 클라우디 가문.
사실, 이제는 무엇이 우선순위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단계까지 와버렸다. 그에 관해선 고심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그래도.’
내심 한 가지는 바라고 있거든. 내가 적어 내려간 설정이 클라우디를 멸문으로 몰고 간 게 아니었으면 하고는. 만약에 나 때문이라면 그랑펠에게 면목이 없잖냐.
‘뒷감당하는 것도 골치 아플 테니까.’
더군다나 나, 이호열.
어른의 긍지를 운운하며 책임지겠다고 선언한 이상.
대충 넘어갈 순 없을 게 뻔하다.
그나저나…….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내가 연회를 열어 클라우디의 초대장을 보낸 이유는 명확하다.
흉조라는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걸림돌과 마주한 지금.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나의 세력을, 그러니까 성전 연합군을 확보할 필요가 있어서였으니까. 그러니 좋은 분위기를 깰 수밖에 없다는 거지.
나는 기어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을 초대한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 다들 인지하고 있었을 거다.
악마족이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
아젠트레스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겐 별일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러나 균열의 위협은 누구에게도 예외는 아니거든.
“마탑, 프로스트, 고대 왕국, 제로 산맥까지.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라진 이들이 이 순간, 어디에 있는지 그대들은 짐작하고 있는가?”
“……?”
“나는 그 위협에 대해 알고 있다.”
“……!!!”
그렇다.
나는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을.
거물들의 족쇄를 풀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를 위한 계기?
긍지를 깨닫게 해서 거물들을 움직이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니 이번엔 나를 믿어라, 그랑펠. 자고로 인간은 자기 목숨이 위협받을 때 빠릿하게 움직이는 법이거든.
그러니 나는 시작부터 핵심을 찔렀다.
모인 이들을.
차례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로 산맥 다음으로 모습을 감추는 게 듄 일족의 영토가 될지도. 다이아몬드 상단의 영지가 될지도. 대현자라는 아르카나 대륙의 스승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다니까?
이래 봬도 마탑의 수석.
정기 학회 사전 검증이다, 반전 마법 강연이다, 뭐다.
독설을 내뱉던 게 이럴 땐 또 도움이 되는구나…….
“그것을 오롯이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묻는 것이다.”
.
.
.
클라우디의 연회가 끝났다.
대현자 라이즈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모습을 드러내시자마자 행동에 돌입하시다니.
“과연, 클라우디의 가주다우시군요.”
라이즈는 자리에 모였던 이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참으로 개성이 강한 이들입니다.”
나이를 먹고 늘어난 건 인간군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라이즈의 관점에서 클라우디의 초대에 응한 이들에게 흑심을 품은 자들은 없었다.
하지만.
“섞여드는 데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하나하나가 대륙을 요동치게 하는 강자들이니까.
서로 인정하는 데까진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리라.
그러나 라이즈는 우려하지 않았다.
“물론, 당신께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클라우디 최후의 가주.
그랑펠과 나눈 대화는 즐거웠다.
모험가, 『판도라의 다락방』으로도 미래를 내다볼 수 없던 라이즈에겐 규격 외의 존재들. 그랑펠 경께서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춘 세력들을 규합하고 계셨을 줄이야.
“덕분에 노인네의 머릿속이 맑아졌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알고 있는 것이 지나치게 방대하기에 머릿속에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라이즈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화제에 관해 대화를 나눌 때가 좋았다. 그때만큼은 복잡한 생각을 잠시 내려두고 몰입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탓일까.
“……그렇기에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숨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라이즈의 입이 힘겹게 움직인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랑펠 경.”
나이를 먹어서 감수성이 풍부해진 탓인가.
고귀한 모습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귀환한 클라우디의 가주.
그랑펠의 모습이 라이즈의 눈에는 비련하게만 비추어졌으니까.
“그저 늙은이의 노파심일 수도 있겠지요.”
경께서는 이미 숙명조차도 극복하셨으니 말입니다.
허나, 라이즈는 그랑펠이 자신과 같은 고통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르카나 대륙도 모자라, 드래곤조차 벅차다고 혀를 내두르는 모험가들의 세계에서도 막대한 짐을 짊어지고 계시지 않는가?
그러니.
“더는 짐을 안겨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라이즈는 클라우디의 영지를 바라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부디 그대도 그리 생각하길 바라네. 프라이드(Pride)여.”
*
시간은 상대적이다.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누군가’는 꽤나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엑스칼리버에 여신에 거악에 ㅁㅊㅋㅋㅋㅋ
-근데 그게 고작 하루 만에 벌어진 성과임ㅋㅋㅋㅋㅋ
-천하통일 그것들도 빼먹으면 섭하지ㅋㅋㅋㅋ
그렇다.
착각이 전설이 되어가는 과정은.
이 순간에도 순탄하게 진행 중이었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그 과정엔 큰 지장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벌써 목요일이네;;;;
-내일만 버티면 주말이다아아아아
-플레이어가 주말도 챙겨? 세상 좋아졌다~~~
-ㄹㅇ 내가 뉴비일 땐 균열 놓칠까 봐 주말에도 풀사냥 뛰었는데
-진짜 나 때는 제로 산맥 같은 것도 없어서…….
목요일.
원래라면 정기 업데이트가 공지되는 날이다.
하지만 제로 산맥이라는 초대형 콘텐츠가 업데이트된 이후로 정기 업데이트 내역은 한동안 끊겨버렸다. 그럼에도 불만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제로 산맥만 물고 뜯어도 십 년은 걸릴듯??
-동굴만 해도 십만 개가 넘는데ㅋㅋㅋㅋ
-ㄹㅇ 그렇다고 균열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띠링─
“어라? 선배, 홈페이지에 뭐 떴나 본데요?”
덕분에 플레이어는, 세계는 알림에도 흥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
레이먼 션이 업로드했을 게 분명한 정기 업데이트 내역.
그건 그 제목부터 현실.
그리고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를 뒤흔들기에 충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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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나 대륙 전기 : 정기 업데이트 (밸런스 패치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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