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화. 애초에 떠나지 않았다 (2)
클라우디의 저택.
광활한 내부가 손님들로 채워져 간다. 몇 명이나 찾아오려나 싶었는데 우선은 기대 이상이다. 머릿수로 봐도 개개인의 수준으로 봐도 그렇다.
“얼굴을 맞대는 건 간만이로군.”
“그런가?”
“확실히 이전보다 성숙해졌구나, 아젠트레스.”
폴리모프.
대지룡의 거대한 몸집으로 저택에 출입할 순 없다. 쿠드하낙스는 뿔 달린 용인(龍人)의 모습으로 저택에서 엘프, 아젠트레스와 대화를 나눴다.
드래곤과 엘프의 담화.
규격 외의 두 존재가 내뿜는 기세.
웬만한 이들이라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텐데.
“역시 클라우디의 연회입니다, 조수. 시작하기 전부터 좋은 구경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거기 심각하게 거친 붉은 눈 양반?”
“그렇군. 그대만 제자리에 있으면 좋을 텐데.”
“제자리요?”
“지금이라도 테이블 위로 올라가는 게 어떤가.”
“하하, 또 야만적인 농담을.”
비교적 태연하게 대화들을 나누고 있었거든.
어느덧 약속된 시각.
찾아오기 쉽지 않은 클라우디의 영지였거늘.
그랑펠의 칼 같은 시간 약속에 예외는 없었으니.
띵─
종이 울려 시선을 집중시킨다.
몇몇 이들이 흠칫 놀라선 서로 묻는다.
“허공에서 저절로 울리는 종이라면 마도구겠죠?”
아니, 마도구가 아니다.
내가 고용한…….
정확하게는 하이엘이 고용한 정령들이 클라우디 저택에는 가득했거든. 자고로 저택에는 고용인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에 인력이 어디에 있겠냐?
‘고맙다, 하이엘.’
{고유 정령}, 하이엘.
그것도 모자라 세계수의 축복 덕분에 하이엘은 정령의 위계질서에서 벗어난 존재가 됐다. 정령의 위계질서는 잘 모르는 나였지만, 당사자인 하이엘이 친절히 비유해 설명해 줬었지.
-“인간계의 계급으로는 대공에 가깝겠지요.”
정령계에서 대공이면 정령왕은 아니지만, 그 바로 아래 계급이라고 보면 되려나? 출세했구나, 하이엘. 아니, 어떤 면에서는 정령왕보다 나을지도 몰라.
‘정령왕은 자신과 같은 속성 정령밖에 통솔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고유 정령}인 하이엘은 보다시피.
모든 속성의 정령을 통솔할 수 있었다.
그런 정령들의 모습이 대가리 꽃밭…….
아니, 순수하던 시절의 감성을 잃지 않은 나의 시야에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띵띵─
바람의 하위 정령 실피드가 종을 흔든다.
화륵─
화염의 중위 정령 이프리트가 촛대에 불을 붙인다.
그 밖에도 다 속성의 정령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연회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 전부 마도구일까요?”
능력을 떠나서 자연 상태의 정령을 목격할 수 있는 건 선택받은 이들뿐이었으니까. 대다수에겐 저절로 종이 울리고, 불이 켜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클라우디의 초대에 응한 그대들에게 전한다.”
말을 내뱉는 와중에도 바짝바짝 입이 말라온다.
그럴 수밖에!
이제부터 나는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로서 주둥이를 놀려야 했으니까. 그래, 여기까지 온 마당에 별수 있겠냐 호열아.
……젠장,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입을 연다.
“나,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가 그대들을 환영한다.”
진심으로 여기가 현실이 아니고, 보는 눈이 없어서 다행이다.
덕분에 심적으로 안정되어서인가.
그게 아니면 뻔뻔한 철면피 덕분인가.
나는 안색 변화도 없이 쏟아지는 시선들과 마주했다.
먼저 입을 여는 건 얼굴에서 윤기가 나는 사내였다.
“다이아몬드 상단주, 가몬드 필. 클라우디의 귀환에 무한한 축하를 올립니다! 말로는 제 진심이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아 준비한 것이 있사옵니다만…….”
자신을 가몬드라 소개한 이가 앞으로 나선다.
확실히 외관부터 상인 티가 팍팍 나는군.
매끈한 얼굴에서 나타나는 표정도 상당히 풍부하다.
덕분에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역시, 잔뜩 몰고 왔던 마차가 그 선물이라는 거였구나?
사실 세상에 선물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 이호열도 마찬가지다.
‘일종의 집들이 선물 같은 거잖아?’
다이아몬드 상단이라고 했었나?
잘은 몰라도 이름만 봐도 엄청나게 부자 같다.
뭣보다 클라우디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런 상단주 가몬드의 입장에서 저 정도의 선물이야 두루마리 휴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냥 속 편하게 두 눈 딱 감고.’
받으면 서로서로 좋다는 거지.
그러나 그랑펠이 누구인가.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분하는 원칙주의자.
우려했던 주둥이가 날뛰기 시작한다.
“정말로 호의가 담긴 선물인가.”
“네, 물론…….”
“그것이 아니라면 저의가 담긴 뇌물인가.”
아주 그냥 대놓고 물어보는구나, 대놓고.
나의 말에 작은 웃음이 들려온다.
복잡한 인간사를 즐겁게 바라볼 이들이야 뻔하다.
드래곤과 엘프가 감상을 주고받는다.
“여기선 현명하게 대답해야겠는데?”
“모독이군. 나였다면 베었다.”
“먼저 경고라도 하다니. 확실히 유해졌군, 아젠트레스.”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
가몬드의 머릿속엔 분명 장사꾼의 견적서가 있겠지. 하지만 그 상대가 누군데. 백날 계산기를 두드려 봤자 긍지에서 비롯되는 언동은 견적을 낼 수 없을걸?
‘나부터도 예측을 못 하는데.’
그러나 역시 대상인이라는 건가.
“물론, 순수한 선물입니다! 그 품목을 보신다면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영지 재건에 도움이 될만한 물건들로만 구성했으니 말입니다. 하하.”
마치 처음부터 견적서 따윈 없었다는 것처럼.
안색을 내비치지도 않고 흔쾌하게 답한다. 저렇게나 밝은 표정을 지으니까, 괜한 의심을 한 것 같아서 미안해지는구만. 오해가 풀렸으니, 나는 인자하게 말했다.
“이해하겠다.”
거기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말했잖아?
하지만 이놈의 주둥이는 무엇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고.
나는 시선을 옮겼다.
이것은 비단 가몬드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허나, 그대들은 한 가지를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군.”
“……?”
좌중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당황하지 않은 건 오직 한 사람.
아니, 한 드래곤 쿠드하낙스뿐.
그도 그럴 게 쿠드하낙스는 먼저 한소릴 들었거든.
“클라우디는 돌아온 것이 아니다.”
무엇이 성대한 ‘복귀’란 말인가?
그랑펠의 기준에서 클라우디는 애초에 아르카나 대륙을 떠나지 않았는데. 붉은 눈의 사내, 자신을 샤힌 듄이라 소개했던 사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한다.
“클라우디의 가주시여. 듄 일족의 지도자, 샤힌 듄이 감히 질문을 아뢰어도 되겠습니까?”
듄 일족이라고 했었지.
거친 외형과 다르게 공손한 태도를 보였기에.
격식의 관점에서는 합격점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샤힌이 말을 잇는다.
“감히 위대한 가문, 클라우디를 의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하게 의문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돌아온 게 아니시라는 것은 곧 떠나지 않으셨다는 말일 터인데……. 그렇다면 그간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던 것입니까?”
어디서 뭘 하기는.
‘클라우디 말고, 그 이씨 가문도 기울어서 말이야.’
아르카나 대륙 전기를 반강제적으로 접고, 현생을 사느라 바빴지. 하지만 천하의 그랑펠식 화법이 그런 사정을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을 리 있으랴.
따라서 나는 당당히 답해주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아르카나 대륙을 지켜보았다.”
……거참,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구만.
아르카나 대륙 전기를 접었어도 그에 관한 굵직한 소식들은 건너건너 듣곤 했었으니까. 다만, 샤힌을 비롯한 이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라…….”
“아르카나가 아닌 신대륙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후후.”
나 혼자였다면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몰랐겠군. 그러나 이 자리엔 그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활강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던 경험자가 있지 않던가?
쿠드하낙스가 웃음을 멈추고 말한다.
“완전히 다른 세계란 우리 드래곤조차도 안간힘을 써야 접근할 수 있는 세계. 조금 더 친절하게 말하자면 모든 모험가의 고향이라는 것이지.”
웅성대는 소리가 이어진다.
“모험가라면 부활의 권능을 가졌던 이들인가?”
“그 모험가들의 고향이라니…….”
“드래곤조차도 안간힘을 써야 접근할 수 있는 세계란 말이라니. 그런 험한 세계엔 대체 무슨 뜻으로 진입하신 것입니까?”
그야 나부터가 모험가니까!
이전에 현실이야말로 나, 이호열의 진짜 고향이니까.
속 시원하게 말해주고 싶었건만.
그렇게 되면 이거 그랑펠을 자처한 게 무색하게도.
이호열에 관해서도 설명해야 하는 거잖아?
‘클 호에 기쁠 열…….’
딸 부잣집 넷째로 태어난 나를 보고.
할아버지께서 크게 기뻐하며 지어주신 내 이름을.
이들 앞에서 설명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되면 분명 뒷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그랑펠은 뭐고, 이호열은 또 뭐냐고.’
이야기가 거기까지 진행된다면…….
나에겐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어진다.
내 흑역사를 훤히 드러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클라우디가 움직였다, 뻔하지 않은가?”
“……설마?”
“그렇네, 인간들이여. 무너지는 아르카나 대륙과 모험가들의 세계. 두 세계를 클라우디께서는 지켜오신 것이라네. 나와 동족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쿠드하낙스가 과분하기 짝이 없는 설명을 덧붙여 준 덕분에 수치사는 면했군. 만물의 왕, 드래곤이 단언하듯 말하니, 아무리 믿지 못할 이야기라고 해도.
“과연, 저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게 당연했습니다.”
꾸벅─
의문을 제기했던 샤힌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한시름을 놓아서일까.
그제야 연회의 주최자로서 자각이 든다.
‘암만 그래도 연회의 절차는 따라야지.’
좌중을 둘러본다.
정령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준 덕분에 다들 그 손에 잔을 쥐고 있었다. 모든 잔을 채우고, 내가 잔을 치켜드는 것으로 연회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겠지.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도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
달칵─
내가 잔을 집어들자 정령들이 분주하게 모든 잔을 채워간다. 정령을 볼 수 있는 건 쿠드하낙스와 아젠트레스뿐. 둘이 가볍게 정령에게 감사를 표한다.
“고맙군, 작은 친구여.”
“고맙다.”
“…….”
“가, 감사합니다……?”
드래곤과 엘프가 허공을 보고 말하니, 눈치를 보던 이들도 한마디씩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그게 웃긴 걸까. 꺄르르─ 정령들이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그래, 나도 웃고 싶은 심정이구나.
‘……진짜 분위기 와장창 깨는구만.’
이윽고 잔을 채운 건 붉은 포도주도 아니요, 투명한 물도 아니었다. 그렇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짐작했겠지? 호화스러운 잔에 담긴 것은 녹색의 액체.
그렇다, 녹차였다.
클라우디의 영지에선 클라우디가 곧 법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값비싼 잔에 로켓 배송으로 받아서 챙겨온 가루 녹차는 좀 아니지 않냐?!
청렴결백과 위대한 귀족으로서의 품위.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을 이런 식으로 실현하는 사람은.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통틀어도 나밖에 없을 거다, 진심으로……!
.
.
.
연회의 분위기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하하, 이젠 접시 위에 올라가라니요.”
“그야 돼지가 있을 곳은 저곳이 아닌가?”
“그럼 듄 일족은 오늘 마구간에서 주무실 겁니까? 하하.”
……뭐, 거물들 사이의 신경전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클라우디령에서 내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아무리 취기가 올라온다고 한들 유치한 말장난 수준에서 끝나겠지.
그보다.
‘역시 대단한 양반들이셨군.’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르카나 대륙이 쑥대밭이 되어도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탑이 복잡한 사정으로 행동할 수 없었던 것처럼.
‘너무 강해서 설정으로 묶여있던 거야.’
물론, 그 설정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설정보다도 클라우디의 초대가 더욱 강력했다는 거겠지. 괜히 어깨가 우쭐해지는군.
‘내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지?’
흉조가 됐든, 레이먼 션이 됐든.
내 흑역사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테니까 각오해라.
속으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다짐을 하던 순간이었다.
“이거 늦어서 죄송합니다.”
툭.
별안간 허공에서 남루한 차림새의 노인이 나타났다. 일단, 나는 놀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랑펠의 체면 때문에 놀라고 싶어도 그럴 수 없거니와 방금 그건 포탈의 마력이었잖아?
‘클라우디령의 정확한 좌표를 알고 있다.’
그건 불청객이 아니라는 증거와도 같았으니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린 노인과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이런. 제가 받은 것은 분명 클라우디 가문의 최연소 가주, 그랑펠 경의 초대장이었거늘…….”
그는 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께서는 누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