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초대
악크샨은 성전에 앞서서 뒤통수를 맞았다.
그러나 그게 악크샨의 절멸로 이어졌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지.
‘악크샨은 하루아침에 사라졌거든.’
왜, 악마 사냥꾼이 전멸했다고 해도.
악크샨이란 지역은 남아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니까.
하지만 악크샨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내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간만에 탓해본다.
10년 하고도 수년의 공백기.
그래도 플레이어 각성 직후.
공백을 채우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던 나였다.
덕분에 뒤늦게 알게 됐지.
악크샨은 패치로 삭제된 게 분명하다는 걸.
‘애초에 공지할 이유가 없었던 거야.’
악마 사냥꾼은 망캐 그 자체였다.
악크샨 또한 플레이어들의 관심 밖이었을 터.
클래스 퀘스트에서도 알 수 있다.
‘나밖에 없었을 테니깐 악마 사냥꾼은.’
수년 전에 접속 기록이 끊긴 나를 위해.
업데이트 내역을 띄우진 않았겠지.
애초에 아르카나에서 사라진 클래스는 악마 사냥꾼만 있는 게 아니다. 수만 개의 클래스가 존재하는 아르카나 대륙 전기였다. 플레이어에게 선택받지 못한 클래스는 쥐도 새도 없이 사라졌겠지.
‘삭제와 창조라.’
흉조의 능력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러자 확신이 생겼다.
역시, 악크샨은 흉조에게 통째로 집어삼켜진 거구나.
‘개연성을 위한 존재라고 했겠다…….’
그런 엄청난 적 앞에서도.
나는 물러날 수 없을 터.
이유야 간단하다.
“원망하지 말거라.”
다른 것도 아니고 악크샨을 삼켰다잖아?
“그들을 담아두기에 네 그릇은 벅찰 터이니.”
진짜 막막했을 것 같다.
왜, AAU 박 지부장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애초에 흉조는 잡으라고 만든 몬스터가 아니니까.
‘이질적인 악마족도 언젠가는 등장할 몬스터였다.’
하지만 흉조는 몬스터와는 결이 다르다.
악마족도 아니라 나의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천적관계]를 내세울 수 없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선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구나.
‘우리 악크샨 선배님들.’
나, 이호열.
사회생활에서 알게 된 교훈이 있다. 자타공인 소문난 미친놈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그런 미친놈이 내 편일 때는 또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는 걸.
‘대단하셔, 정말?’
내가 현실에서도.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많은 인간군상을 봐왔다만.
우리 선배님들은 같은 캐릭터는 본 적이 없거든.
그러니까 삭제가 되면서도 남기셨겠지.
이런 퀘스트를!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식 양동 작전]
설령 아르카나 대륙이 악크샨을 저버렸을지라도 악크샨은 꺾이지 않았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크샨의 집념을 이어받아 악크샨 최후의 작전을 완수하라.
─악크샨을 삼킨 남쪽 바다의 흉조를 추적하라. (진행 중)
●악크샨이 남긴 최후의 표식을 찾아라. (진행 중)
말 그대로 ‘집념’이시다들.
“악크샨을 간과했군.”
악크샨 삭제를 승인했을 레이먼 션.
너도 이건 몰랐을걸?
어디 예상이나 했겠냐.
성전의 배신으로 이미 큰 피해를 당한 악크샨.
그들이 이런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을 줄 말이야.
그리고 이것도 모를 거다.
이 순간, 그들의 긍지가 내게로 이어진 걸 말이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지.”
당연한 말이겠지만.
긍지에 시동이 걸린 이상.
설령 가라앉는 한이 있다고 한들.
나는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신세를 한탄할 시간은 없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선 계획적이고 효율적으로 발버둥 쳐야 하니까.
1분 1초를 소중하게.
그랑펠식 표현으로 오후의 티타임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
이내, 회전하는 두뇌가 답을 내놓는다.
“영지로 복귀한다.”
현실에 나의 영지는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하게도 클라우디 가문의 영지를 말하는 것이다.
흉조라고 했겠다.
‘좋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흉조라는 말도 안 되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들이밀어야 하지 않겠어?
“성대하게 준비하도록 하라.”
*
아젠트레스는 일대를 둘러보았다.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구나.”
어머니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태초의 악.
시슬리에서 벗어나 아르카나 대륙에 풀려난 녀석을 찾기 위해 행보를 멈추지 않은 아젠트레스였거늘. 그 흔적을 어디에서도 수소문할 수 없었다.
“내게 맡겨주신 일이거늘.”
어머니가 택한 존재, 여명.
자신과 동족들을 믿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 그였다. 그러나 맡은 일에 조금의 진척도 없다니. 이래서야 그와 마주할 면목이 없지 않은가?
“도마뱀…….”
이런.
영겁의 세월 동안 입버릇이 단단히 들었다.
아젠트레스가 재빠르게 정정한다.
“아니, 드래곤들 또한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악과(惡果)를 삼켰다고 했던가.
‘제길.’
잘근─
아젠트레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들이 본분을 다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터. 애써 안타까움을 삼킨 채 시선을 돌린다.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은 황망하기 짝이 없다.
이런 대륙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에게.
엘프로 태어나 처음으로 경외로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토록 나약한 육체와 정신으로 이런 대륙에서 버티고 있다니.
감탄과 동시에.
희번뜩!
악마들에겐 냉랭한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정말로 끝이 없군.”
긍지를 되찾은 덕분일까?
엘프의 선민의식은 긍정적으로 발휘되고 있었다.
서걱─
아젠트레스가 걸어온 길.
“더러운 육체로 자연을 더럽히지 마라.”
그 길 위에 악마란 악마는 단 한 녀석도 살아있지 못했으니.
과거와 별다를 게 없는 행보가 아니냐고?
겉으로 본다면 그럴 수 있겠지.
그러나 아젠트레스는 알고 있다.
커다란 귀.
타고난 감각을 파고드는 작은 소음.
“……배고파.”
“쉿. 조용히 해.”
“그치만 배가 고픈걸…….”
“주위가 잠잠해지면 그때 뭐라도 찾아보자.”
악마를 피해 몸을 숨긴 인간들의 목소리.
과거였다면 귀를 기울이지도 않을 음성이었다.
하지만 영겁의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우월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젠트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제 부족함을 용서하십시오, 여명이시여.’
당신이시라면 저들에게 도움을 베풀었을 터.
하지만 아젠트레스는 자신이 없었다.
호열을 제외한 인간을 스스럼없이 대하기에는.
자꾸만 잔상이 떠올라 정신을 흩트려 놓았으니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마을, 폴스타의 광경.
‘제겐 아직 인간과 마주할 자격이 없습니다.’
칠죄종 식탐과의 거래.
폴스타의 주민을 제물로 영생을 거머쥐려고 했던 자신이었으니까.
저벅─
아젠트레스는 기척을 지우고 인간들을 향해 나아갔다.
평범한 인간이 아젠트레스의 접근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툭─
“……어?”
은신처 코앞에 떨어진 식량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함정이 아닐까?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식량을 챙기는 인간들.
아젠트레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라.”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긍지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걸음을 서두르자.
아젠트레스가 엘프의 발놀림으로 숲속을 가로지르던 순간이었다.
팔랑─
“?”
별안간 허공에서 무언가가 나부꼈다.
아니, 마치 처음부터 아젠트레스를 향해 날아왔다는 것처럼.
나풀거리던 무언가가 아젠트레스의 손아귀에 얌전히 붙잡혔다.
“……양피지?”
아르카나 대륙.
자신에게 서신을 보내올 이들은 동족밖에 없었거늘.
동족들이 텔레파시를 두고 번거롭게 서신을 보내올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아젠트레스의 눈에 살기가 깃든다.
‘칠죄종 식탐, 녀석인가?’
거악이라 불리는 녀석이라면.
어쩌면 태초의 악에 관해서도 알고 있는 바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젠트레스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생각하며 양피지를 펼쳤다.
“!”
그리고 흠칫했다.
──────
초대장
──────
초대장이라는 단어에 놀란 게 아니었다.
“당신께선 정말 제 마음을 꿰뚫고 계시는군요.”
아젠트레스가 놀란 이유는 그 발신인인 때문이었으니까.
발신인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듯.
용건만 간단하게 적은 초대장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
클라우디가 그대를 초대한다.
──────
.
.
.
클라우디가(家)의 초대.
그것은 아젠트레스에게만 전해진 게 아니었다. 현 아르카나 대륙에서 클라우디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이들에게 전해진 초대장이었으니까.
『클라우디가 주최하는 연회에는 대륙이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초대를 받은 이들은 모두가 아르카나 대륙의 거물. 그럼에도 초대에 불응하는 이는 여태껏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광을 마다할 이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그러나 몰락하고 잊혀버린 클라우디 가문이기에.
초대장을 받아 든 이들은 많지 않았다.
허나, 모든 것은 관점의 문제였다.
다르게 보자면.
현재 아르카나 대륙에서 클라우디에 관해 알고 있는 이들은 거물 중에서도 거물로 분류될 인물들이었으니. 그들이 클라우디의 초대장을 받아 드는 것만으로도.
“진정 클라우디가 돌아왔다는 말인가?”
“……이건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늙은이를 불러내는 걸 보면 클라우디가 확실하군.”
[붉은 눈의 샤힌이 아르카나 대륙에 등장합니다.]
[다이아몬드 상단주 가몬드 필이 아르카나 대륙에 등장합니다.]
[대현자 라이즈가 아르카나 대륙에 등장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이 요동칠 정도였으니까.
물론, 4가문에도 클라우디의 초대는 전해졌다.
허나, 가주들의 반응은 다른 이들과는 명백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랑펠이라고?”
“대체 그 녀석이 어떻게……?”
“……다들 초대에 응하실 겁니까?”
4가문의 가주들이 고뇌하는 와중에도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네 배가량 빠르게 흘러갔다. 그 말인즉. 하나둘, 거물들이 클라우디의 영지로 모여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
.
.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 과거 사교계에서 그랑펠의 존재는 사막의 오아시스 혹은 신기루와 같았다. 사교 자리를 즐기지 않았기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은 많지 않았거늘. 홀연히 등장하는 날에는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말았으니…….』
모양새를 가다듬어보는 [스왈린 공작의 애장품].
연회복과 다를 것 없는 여명 세트.
나는 읊조렸다.
“감내해야겠구나.”
천하의 그랑펠도 달갑지 않아 하는 연회.
그럼에도 뜬금없이 연회 초대장을 돌린 이유?
간단하다.
악마는 몰라도, 흉조 그 녀석은 도무지 견적이 나오지 않았거든.
상대가 어떤 수준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한 지금.
다다익선.
‘내 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렇다.
클라우디의 영지를 발견하면서.
이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짐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아주 그냥 막중한 무게를 짊어진 이상.
억울해서라도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거든.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현시점에서 클라우디는 아르카나 대륙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래도 다들 간만에 얼굴을 맞댈 필요가 있잖아?
유낙서스, 아젠트레스, 그리고 다른 이들까지.
그래,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근데 속으로 되뇌는 와중에도 속이 쓰린 이유는 왜일까…….
‘……젠장.’
왜긴 왜냐.
그놈의 초대장을 작성할 때.
결국, 내 손으로 적고야 말았으니까.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라고!!
클라우디의 초청이라면서 나, 이호열의 이름을 내세운다면 그건 누가 봐도 장난 편지처럼 보이겠지. 때문에 정말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빌어먹을 풀네임을 적어넣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감당해야 할 무게겠군.”
책임지겠다고 말한 마당에.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도 안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그래 어쩌면……?’
이거 차라리 아르카나 대륙에선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현실에서야 끔찍한 이름이지만.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그럴싸한 귀족 이름처럼 보일 테니까.
물론, 귀족 이름치고도 길긴 하지만…….
‘좋아, 분리하는 게 낫겠다.’
현실에선 이호열.
아르카나 대륙에선 그랑펠.
두 이름을 내세우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쨌든,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은 완전히 다른 세계 아니겠어?
‘나만 잘 숨기면 된다. 나만.’
그러나 오판이었다.
이미 나의 두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게 하필이면 목청이 제일 큰 양반들이었다……!
대지룡(大地龍), 쿠드하낙스.
클라우디의 영지에 착륙.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친다.
“대지룡 쿠드하낙스가 흑암룡, 이호열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초대에 응하여 이곳, 클라우디의 영지를 찾아왔습니다!”
이호열 그랑펠 뭐시기?!
제발…….
그 입 좀 어떻게 좀……!
너 진짜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