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99화 (299/489)
  • ◈ 299화. 흉조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누구보다 총책임자님께서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마탑은 특별합니다. 모든 게요! 계획 단계부터 굉장히 공을 들였거든요. 여러 방면에서 말입니다.”

    마탑.

    아르카나 최고의 무력 집단이란 설정에 걸맞은 배경이 필요했다.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고대 왕국 유스라의 황금 궁전과는 다른 의미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확실히 마법만으로 표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죠. 그때는 저희도 밸런스란 걸 생각해야 했으니까요. 마법이 만능으로 소문이 나서 모든 플레이어가 마법사를 선택하는 일은 피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마탑에도 ‘그 설정’을 써먹었다.

    “마탑이 흉조의 창조물이라는 설정을요.”

    덥석.

    박민재는 종이컵을 집었다.

    마른 입을 좀 축이고 싶었다…….

    “앗뜨뜨!”

    아니, 뭐가 이렇게 뜨거워?!

    ‘이런, 격식 없게 호들갑을.’

    재빠르게 정신을 차리기도 잠깐.

    맞은편에 앉은 호열에게 박민재의 경이로운 눈빛이 향한다.

    이렇게 뜨거운 녹차를 어떻게 표정 변화도 없이 들이켜신 거지?

    ‘……아니, 그런 거에 감탄할 때가 아니다.’

    흉조에 관해서 설명해 드려야 할 때가 아닌가?

    밥값을 하리라.

    다짐한 박민재가 말을 잇는다.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흉조는 일종의 개연성을 위한 존재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밸런스 패치만을 위한 설정이랄까요?”

    또 하나의 세계를 표방했던 아르카나였지만, 아르카나는 엄연하게 게임이었다.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엔 제작사, 코스모의 밸런스 패치 및 업데이트가 지속해서 이뤄져 왔다는 뜻. 물론, 그 과정의 전권을 쥐고 있는 건 레이먼 션이었다.

    “어쨌든, 패치 과정에서 삭제는 필수니까요.”

    아르카나는 보통 게임이 아니다. 단순하게 삭제한다고 끝나는 게 아닌 삭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무언가’를 아르카나 대륙에 풀어놔야 했다는 의미다.

    “간략하게 흉조가 삼키는 건 삭제, 뱉어내는 건 창조랄까요?”

    그 역할을 맡은 게 바로 [흉조]였다.

    “사실상 뭐든 가능한 존재가 흉조입니다. 애초에 그런 역할이 필요해서 부여한 설정이었으니까요. 마탑의 경이로운 기능도 흉조의 힘에서 비롯된 거죠.”

    오래된 과거.

    흉조가 머물렀던 터.

    그 터에 세워진 게 바로 마탑이었다.

    박민재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이야기를 드리고 보니까 민망합니다, 총대장님. 플레이어들이 알 수 없는 요소라고 적당히 일 처리를 했던 게 드러난 것 같아서 면목이 없습니다.”

    흉조처럼 적당한 설정을 가져다 붙이는 게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합당한 설정을 부여했다면……. 총책임자님께 보다 결정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과거여도 너무 한참 전의 일이었다.

    물론, 상념에 빠져있을 새도 없었지만.

    “네?! 그럼 지금은 괜찮은 건가요?”

    아뿔싸.

    박민재는 호들갑을 떠는 성현준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녹차도 아주 그냥 입천장 다 까지게 뜨겁게 타 놓더니.

    이젠 격식 없이 대화에 끼어들기까지?

    박민재는 가까스로 꼰대 본능을 억누르고 웃어 보였다.

    “뭐가 괜찮냐는 거야, 성 사원?”

    “그……. 저희는 이미 아르카나가 실존했던 또 하나의 세계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박 지부장님? 실제로 현실엔 저희가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 대륙의 요소들이 업데이트됐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그럼 그 무지막지한 흉조라는 것도 나중에……!!”

    어떤 질문을 하나 싶었는데, 저런 궁금증이면 화를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총책임자님께 그에 관한 부연 설명을 드리려던 참이었으니까.

    박민재가 어울리지 않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좋은 지적이야, 성 사원.”

    “……성 사원이요? 그냥 평소처럼 성현준이라고 해주세요.”

    “허허, 농담도.”

    슬그머니.

    호열을 향하는 박민재의 시선.

    별다른 기색은 보이시지 않기에 말을 잇는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것 없어.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설정을 가진 흉조가 아르카나 대륙에 풀려나길 원했겠어? 꼼꼼하게 묻어뒀었다는 거지.”

    “묻어두셨다고요? 땅속? 아니면 지옥이요?”

    “그럴 리가 있나.”

    지하나 지옥은 실존한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래, 흉조는 실존하면서도 실존하지 않아야만 했다.

    박민재가 호열에게 덧붙였다.

    “흉조가 위치한 곳은 아득한 심해입니다. 심지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는 사해(死海), 아르카나 대륙 남쪽 바다의 깊숙한 곳이죠.”

    본론이 끝나는 순간.

    마침내 호열이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음성으로.

    “좋은 이야기였네, 박민재 지부장.”

    “감사합…….”

    “한 가지를 간과한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네.”

    “……예?”

    “남쪽 바다는 죽음의 바다가 아니다.”

    또다시 폭탄을 터트렸다.

    “그러니 흉조 또한 심해에서 살아 숨 쉬고 있겠지.”

    .

    .

    .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애초에 남쪽 바다라는 설정부터가 흉조 때문에 덧붙여진 설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박민재가 당황한 표정으로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어쩌겠냐.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와서 하는 말인데.

    엘프의 땅, 시슬리.

    그렇다.

    시슬리가 남쪽 바다 위에 위치해 있었거든.

    이번에는 기이의 관점에서 남쪽의 바다를 바라보자.

    ‘채 실현되지 못한 떡밥들이 모여있는 장소란 거지?’

    쉽게 말하자면.

    훗날 아르카나 대륙 전기에 업데이트될 요소들이 남쪽 바다에 갇혀있었다고 볼 수 있을 터. 다만, 그중에서도 흉조라는 녀석은 차원이 다른 녀석이겠고…….

    ‘그나마 다행이네.’

    만약, 그 흉조라는 게 악마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그랑펠의 오지랖이 어김없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삭제와 창조의 능력을 가졌든, 뭐든.

    드높은 긍지께서는 절대 물러나지 않았을 테니까.

    한시름 놓은 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기이를 향한 진보 (진행 중)

    ●마탑의 근원을 파악하라. (성공)

    박민재의 말은 정답인 모양이었다.

    다음 퀘스트 목표는 떠오르지 않아서 알 수 없다만.

    아마도 흉조와 관련된 목표이지 않을까, 싶군.

    박민재가 말을 더듬으며 물어온다.

    “남쪽 바다에 흉조가 살아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니……. 혹시 남쪽 바다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계시는 겁니까, 총책임자님?”

    “물론.”

    그냥 아는 걸 넘어서 엘프 지도자, 아젠트레스와 함께 세계수와 태초의 악에 얽힌 비밀까지 밝혀냈던 나였다. 덕분에 한껏 당당하게 편 가슴팍. 입술 사이로 저절로 흘러나오는 거만한 음성.

    “그곳에도 나의 안배는 존재하니 말일세.”

    이번에도 안배냐?

    표현 한번 거창하시다, 정말.

    그래도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아젠트레스를 비롯한 엘프들에게 [지휘권]을 넘겨받을 정도로 관계도와 영향력을 쌓아뒀으니까.

    물론, 과정까지 따지자면 [축복의 위계질서]를 내세워 협박했던 것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또 적성에 맞지 않는다.

    “안배라니. 이런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경악한 박민재에게 나는 핵심만 전달했다.

    “엘프, 그들이라면 남쪽의 바다 흉조 또한 감시해 왔을 터. 그들을 통해서 흉조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습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박민재.

    그리고 윤수겸, 성현준이라고 했었나.

    세 사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엘프에, 엘프의 고향 시슬리에,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겠지.

    내가 생각해도 진도가 빠르긴 한 것 같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네 배나 빠르거든.’

    쉽게 말해.

    네 배 많은 일이 벌어졌었단 거지.

    나는 말을 이었다.

    “벅차다면 받아 적어도 좋다.”

    “……아, 넵! 그렇게 하겠습니다.”

    볼펜, 스마트폰, 각자가 자신의 방법대로 나의 발언을 받아 적는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니까…….

    이거 또 불안해지기 시작하는데?

    “엘프는 쓰디쓴 교훈 끝에 긍지를 되찾았다.”

    이놈의 입방정은.

    “세계수는 아르카나 대륙에 새로운 씨앗을 뿌렸다.”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걸.

    “드래곤과 엘프, 그들은 혈육의 긍지 또한 회복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거든……!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세 사내가 혼이 빠진 얼굴로 받아적기를 끝마친다.

    절레절레─

    고개를 털어내 정신을 차린 박민재가 물어온다.

    “그보다 총대장님, 이런 극비 정보를 저희에게 말씀해 주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저야 짐작할 뿐입니다만, 이야기만 들어서는 엄청난 퀘스트가 엮인 것 같은데요?”

    한때 아르카나의 운영자들이라 그런가.

    플레이어의 세상을 잘 알고 있구나.

    특히나 이런 대형 퀘스트에 관한 정보?

    아는 사람이 많아져서 좋을 게 없긴 하지.

    그러나 그랑펠이 누구인가.

    “모든 것은 주고받음이다.”

    내뱉은 말은 지켜야만 하는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

    “그대들이 신뢰를 주었으니, 신뢰를 줄 뿐.”

    물론, 나 이호열은 누구처럼 성인(聖人)이 아니다.

    흔쾌히 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지.

    그도 그럴 게.

    엘프, 세계수, 드래곤과 얽힌 태초의 악.

    녀석과 관련된 퀘스트는…….

    [클래스 퀘스트 : 선악과]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최후의 악마 사냥꾼.

    나밖에 수행할 수 없는 클래스 퀘스트거든.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감사하자, 호열아.

    ‘진짜 여기서도 악마가 튀어나왔으면 어쩔 뻔했냐?’

    상위 마왕이다, 거악이다, 태초의 악이다, 뭐다.

    신경 쓸 악마가 하나둘이 아닌데.

    마탑의 근원, 흉조마저 악마와 엮여있었으면 숨돌릴 새도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그래, 어떤 무지막지한 놈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고맙다. 흉조야.

    ‘그리고 되도록 오랫동안 잠잠해 줘라, 퀘스트야.’

    온전히 정신을 차린 세 사내.

    그들의 눈빛이 이전과는 다르게 반짝거린다.

    다 죽어가던 얼굴에 활력이 돌아온 듯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감격했습니다. 총책임자님. 그럼 총책임자님의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업적을 곧장 AAU 모든 지부에 발표하겠습니다!”

    “각 지부에서 정보를 취합해 보면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퇴근은 물 건너간 것 같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총대장님!”

    ……이렇게 퍼져 나간 업적이 또 어떻게 내게 돌아오게 될까?

    짐작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무래도 한동안 낯짝을 들고 살 수는 없을 것 같구나…….

    *

    일렁이는 바다를 내려다본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외면한다.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고는 말한다.

    “저기 말이야, 최근 더 수다스러워지지 않았어?”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는 심해의 대흉(大凶)을 향해 말했다. 고향, 가족, 친구, 연인…….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흉조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속삭여 오고 있었다.

    “멸망이라니. 욕심도 그득하지.”

    떨리는 손으로 궐련에 불을 붙인다.

    후─

    독한 궐련을 피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찰나에 불과하지만, 머릿속이 맑아지곤 했으니까. 덕분에 흉조, 녀석이 집어삼킨 이들이 한둘씩 선명히 떠오른다.

    “알고 있어? 매캐나의 깃털펜은 말이야, 굉장한 명품이었어. 그리핀의 깃털로 만들어졌거든. 설화국은 기억하니? 지금쯤이면 온 땅에 설화가 만발했을 텐데.”

    아득한 과거의 고대 왕국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흉조는 채 일백 년이 지나지 않은 최근에도.

    심해에서 기어나와 모습을 드러냈었으니까.

    마녀는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집어삼킨 ‘그거’. 너는 그걸 삼키고도 만족하지 못한 거냐?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러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

    어느샌가 끄트머리까지 타들어 간 궐련.

    툭─

    마녀는 궐련을 남쪽 바다를 향해 던졌다.

    “하지만 알고 있니?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에 삼킨 그건 명백히 잘못 건드렸어. 어딜 가도 소문이 자자하거든. 그 정신 나간 녀석들은.”

    그들이라면.

    설령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수모를 잊지 않을 테니까. 강하고 약함을 떠나서 그들은 마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이들보다 끈질긴 집단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마녀는 쓰게 웃었다.

    ‘더는 당신께 도움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클라우디시여.

    .

    .

    .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노안이 왔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눈앞의 퀘스트창이 점멸하고 있었다.

    확인하기도 전에 한탄이 나온다.

    그래, 내 팔자가 그러면 그렇지.

    ‘내가 이렇게 일복이 과로사로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많다……!’

    여느 때처럼 한탄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반짝이는 퀘스트가 내가 생각하던 게 아니었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식 양동 작전]

    ……클래스 퀘스트라고?

    이 타이밍에?

    양동 작전은 또 뭔데?!

    그와 동시에 지껄이는 입방정.

    “그렇군.”

    갱신되는 퀘스트 목표.

    ─악크샨을 삼킨 남쪽 바다의 흉조를 추적하라. (진행 중)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흉조, 너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렸구나.

    건드려도 우리 선배님들을 건드렸어?

    ‘그 양반들이 어떤 양반들인데.’

    악마가 돼서 지옥에 떨어져서도.

    악마를 사냥하는 양반들이라고.

    근데 겁도 없이 그걸 집어삼켰다고?!

    그 뒤끝이 벌써부터 퀘스트 목표에 나타나고 있었다.

    “새로운 사냥감인가.”

    ●악크샨이 남긴 표식을 통해 흉조의 행적을 추적하라. (진행 중)

    “바라던 바다. 악크샨이여.”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