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97화 (297/489)

◈ 297화. 생지옥이다……! (1)

악마에게 지옥이 있다면.

나, 이호열에겐 현실이 있다.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정도면 아르카나 대륙이 낫지 않나?’

한없이 깊은 어둠이다, 흑암룡이다, 뭐다…….

거추장스러운 풀네임 빼고는 웬만한 게 까발려진 지금.

정신상태를 위해선 현실보다 아르카나 대륙이 낫지 않을까 싶다.

‘거긴 적어도 웬수라도 없으니까.’

참교육.

남철민의 말대로 효과는 상당했다.

거악 칠죄종 질투를 처치하고.

한껏 뜨거워진 나를 향한 관심도에 기름을 끼얹었달까?

-괜히 거악을 쓰러트린 게 아님ㄷㄷㄷㄷ

[엑스칼리버의 선택을 받은 자, 이호열]

동영상엔 내가 검을 뽑는 장면만 찍힌 게 아니었다. 기이의 탐구, 댓글을 살펴보는 도중 자동으로 재생되는 동영상에서 플레이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 여신이다……!!”

그렇다.

동굴의 특수성에 영향력을 받지 않았던 하이엘이 있었다.

과연, 플레이어들의 시점으로 보니까…….

‘여신 소리가 왜 나왔는지 알 것만 같네.’

진짜 옷자락만 보였구나, 이거?

카메라 앵글을 아무리 치켜들어도 하이엘의 얼굴은 찍히지 않았으니. 댓글의 반응은 뭐 말하나 마나 아니겠냐. 그럼에도 마치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여유롭게 지껄이는 나의 주둥이.

“애초에 신은 존재하지 않거늘.”

그렇게 중얼거릴 거였다면 일찍 좀 해주지 그랬냐……!

물론, 이제 와서 투덜거린다고 한들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겠지.

그리고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거늘.

역시나 잔뜩 부풀어가는 거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하다.

게다가 그 거품이 그냥 거품이냐?

반짝반짝한 게 아주 그냥…….

똑똑.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투덜거리던 나를 일깨운 건 노크였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는 철면피.

낌새를 지울 것도 없이 곧장 답한다.

“들어오게, 마르셀로.”

“복귀하시자마자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경.”

“당치도 않은 말이군.”

마르셀로 덕분에 천하통일.

류오쥔춘의 개수작을 완벽하게 받아치지 않았던가?

그 반격이 고작 며칠 사이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보자.

‘눈엣가시 같았던 걸 빼낸 기분이야.’

클라우디와 이씨, 두 가문의 명예 회복.

그를 통한 효자 노릇까지 잊지 않았으니까.

그랑펠의 까다로운 기준에서도 합격이란 소리다, 마르셀로.

마르셀로는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그렇다면 생각해 주신다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남아있던 일은 잘 처리하셨는지요. 저도 나름대로 기이를 통해 탐구하기는 했지만…….”

그러면서 꺼내 드는 건.

내가 개통해서 선물했던 스마트폰.

역시 마르셀로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고.

알아서 기이를 탐구.

아니, 인터넷 서핑을 할 정도로 사용법에 익숙해진 모양이구나?

“물론이네.”

“그 역시도 다행입니다, 경.”

사사로운 잡담을 나누려 마르셀로가 면담 요청을 해왔을 리는 없을 터. 곧 마르셀로가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는 진짜 [『기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르셀로의 동공에 비장감이 깃들었다.

“기이, 그 연구에 관한 진척이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점멸했다.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마법사의 탑,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한 차원 진보한 마법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수석의 무게 (반복) ▲

─기이에 대한 접근 (성공)

─기이를 향한 진보 (진행 중)

간만에 보는 마르셀로의 퀘스트다.

간만인 만큼 진행 중이던 퀘스트 목표가 성공으로.

그리고 새로운 퀘스트 목표가 떠올라있다.

두둥실.

마르셀로가 들고 있던 양피지가 허공을 부유한다.

양피지를 가득 채운 건 마르셀로의 필기체였다.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기에 손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습니다. 깃털펜을 놀리며 경에게 새삼스럽게 감탄했습니다. 경께선 어찌 이렇게 방대한 개념을 머릿속에 담고 계실 수 있는 겁니까?”

감탄할 것 없다, 마르셀로.

항상의 자세.

표정 변화는 조금도 없다만.

‘나도 그래 봤었거든.’

왜, 스킬과 마법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

넷튜브에서 봤던 플레이어들의 스킬을 이해하려고 밤을 새워 깜지를 쓰던 게 나였거든. 역시나 경험 덕분인가, 아니면 재능 덕분인가.

마르셀로의 연구논문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르카나 대륙을 향한 새로운 접근법인가.”

정말 마르셀로 없으면 어쩔 뻔했냐?

마탑 역사상 최고의 재능.

이론물리학의 창시자.

마르셀로가 접속기의 간섭 과정을 글로 완벽하게 풀어낸 것이었다! 역시나 접속기의 발현 과정을 모방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던 나였기에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그따위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훌륭한 간섭 과정이군.”

여기서 그따위 것은 접속기를 말하는 것.

그랑펠에게 있어서 악마와 다를 바 없는 레이먼 션.

그런 레이먼 션이 만든 접속기다.

그랑펠에게 푸대접을 받는 건 당연하지.

‘아니, 그거랑 별개로 대단하다 마르셀로.’

기이의 영역에 진입하지 않고도 이런 결과물을 낼 수 있다니. 무엇보다 간섭에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없다. 덕분에 마력 소모 또한 크게 줄일 수 있을 터.

마르셀로가 그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다.

“마탑의 포탈에 그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면 아르카나인들은 물론, 모험가들도 아르카나 대륙에 제한 없이 진입할 수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마탑의 포탈이라.

마탑, 로비의 포탈은 특수하다. 그 원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만, 마력에 구애받지 않고 상시 발현. 플레이어를 세계 곳곳으로 이동시켜 주는 마탑의 포탈이다.

나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옳네, 마르셀로.”

다다익선.

믿을 수 있는 동료는 많을수록 좋다.

지금도 봐.

마르셀로가 아니었다면.

나는 세월아, 네월아 마력을 향상시켜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을 발현해 보려고. 또 그 말도 안 되는 무게를 혼자서 감당하려고 발버둥을 쳤겠지.

새삼 감사하기도 잠깐,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필요한 게 뭔데?’

그에 대한 답은 메시지가 내놓았다.

─기이를 향한 진보 (진행 중)

●마탑의 근원을 파악하라. (진행 중)

마탑의 근원이라.

방금 말했다시피 마탑은 특수하다.

『마법』에 무지했던 시절에야…….

‘그냥 마탑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낙하산이 아니라 진짜 수석의 자격을 갖추고 나니까.

마탑에 의문점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친절하게 예시를 들어볼까?

일단 마탑 자체의 외관부터 시작이다.

외부에서 볼 때 마탑은 절대 거대하지 않다.

높게 솟기는 했다만 서울의 빌딩들보다는 낮거든.

그러나 그 내부는 어떠한가?

허공에 발현되는 마탑의 계단은 끝이 보이질 않을 정도.

내부의 공간도 마찬가지다. 인벤토리에 갖가지 아이템이 끝없이 들어가는 것처럼. 마탑도 방대한 홀과 셀 수 없이 많은 장소를 품고 있으니까.

절대 『마법』만으로 세워진 장소가 아니라는 뜻.

사실 마탑의 지하, 무간(無間)만 하더라도.

내가 여태껏 봐온 모든 것보다 의문스럽고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장소다. [균열]이나 [히든피스], 심지어는 칠죄종 질투가 바꿔놓았던 필드조차도 무간을 따라갈 순 없으니까.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경?”

끄덕.

내가 고갯짓하자 마르셀로가 책꽂이로 다가간다.

마르셀로가 앙상한 손가락이 책을 훑는다.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의문을 느끼긴 힘듭니다. 그러나 경께서도 짐작하시다시피 마탑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마법이 아닙니다. 고갈되지 않는 마력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쿠구궁.

그와 동시에 책장의 구조가 뒤바뀐다.

당연하게도 놀라지 않는다.

‘나도 수석이라니깐.’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자세.

낙하산으로 수석의 자리에 앉았어도 매뉴얼은 꼼꼼하게 정독했었거든. 마력도 필요 없다. 그저 의지만으로 집무실의 구조는 뜻대로 바꿀 수 있다.

“실례했습니다, 경.”

쿠구궁.

마르셀로가 집무실 구조를 원상복구 한다.

그러고는 말을 잇는다.

“그런 마탑의 포탈에 간섭 과정을 추가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론에 따라 마탑, 자체를 탐색하는 게 우선이겠지요. 다시금 경의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겠습니다.”

마르셀로는 우려조차 하지 않는 눈빛이다.

나를 신뢰하는 건 좋은데…….

이건 또 나름대로 심란한 기분이군.

‘마탑의 근원이라.’

이걸 어디서부터 파악해야 하는가.

고민하는데.

부탁해 온 마르셀로가 웬일로 한숨을 뱉었다.

그러더니 화들짝 놀라서 말을 잇는다.

“이런. 죄송합니다, 경.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한숨이나 뱉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경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게 아닌가 싶어서…….”

마르셀의 시선이 집무실.

아니, 그보다 근본적인 마탑을 훑는다.

이론마법학의 창시자. 마르셀로 성격에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탑을 파헤쳐야 하는 꼴이었으니, 좀처럼 내비치지 않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달칵─

경청 끝.

들이켜는 녹차 티백이 담긴 찻잔.

섬세하게 보온 마법을 걸어둬 여전히 따끈한 녹차를 삼킨 뒤.

여느 때처럼 뻔뻔하게 입을 연다.

“걱정할 것 없네, 마르셀로.”

“……설마 무언가 감을 잡으신 겁니까?”

“물론.”

유달리 그럴싸하게 말을 잇는다.

“기이는 답을 알고 있는 법.”

“……!”

마르셀로의 휘둥그레진 동공을 보고 있자니 양심이 찔리는구나.

그럴 수밖에.

여기서 내가 말하는 기이가 별다른 게 있겠냐.

‘마탑이 궁금하면 그 설계자를 털면 되는 거니까.’

그렇다.

마탑의 수석에 이은 또 하나의 감투.

AAU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

‘데이터베이스엔 마탑의 설정이 존재할 테니까. 일단, 찾아보자.’

그게 바로 나, 이호열이거든.

*

천하통일의 오성(五星).

다섯 플레이어는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상태였다.

주군께서 자신을 지켜보고 계신다.

‘나를 믿어주셨어.’

‘나야말로 진정한 오성이다.’

‘이런 기회를 하사해 주시다니……!’

오성과 다섯 개의 접속기.

이 순간.

천하통일의 오성은 접속기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한다.

주군께서 접속기를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던가?

자칭 오성들이 서로를 노려본다.

“기대에 배반하지 않게 주의해라.”

“흥, 누가 할 소릴.”

“주군이 용서하셔도 내가 용서치 않을 테니.”

오늘을 위해.

세상과의 모든 교류를 끊고 진입을 준비한 오성이었다.

천하통일의 막대한 지원 아래.

새로운 장비들 또한 갖추게 된 참.

사내의 결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목표 또한 잊지 않았을 거라 믿겠다. 우리는 아르카나 대륙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주군에게 전달해야만 한다.”

이미 아르카나 대륙을 밝은 선구자, 이호열이 있긴 했다만.

그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서 작은 신경전이 오가던 참이었다.

삐이이─

정각.

요란한 알림 음과 동시에.

오성이 접속기의 몸을 눕혔다.

접속기 속에서 비장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모든 건 나의 주군, 류오쥔춘 님을 위하여.”

.

.

.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성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눈을 떴다.

“……!!!”

그리고 후회했다.

완전히 다른 세계.

때문에 닿을 리가 없는 목소리로 주군, 류오쥔춘에게 소리쳤다.

“으아아아아!!”

[멸망을 향해가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다.]

꿈과 희망이 넘치는 아르카나 대륙이 아니었습니다, 주군!!

사방에 들끓는 사체와 구더기.

시종일관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메시지.

[마안이 호기심을 가지고 당신을 주시합니다.]

[정신력이 너무 낮습니다.]

[상태이상, ‘공포’가 발생합니다.]

하늘을 수놓은 거대한 악마의 눈동자까지.

오성은 겁에 질린 와중에도 이를 갈았다.

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다 이호열……!

“이런 장소에 몇 번이나 진입하고 멀쩡했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두려움에 떨던 오성은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었다. 말했다시피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가져온 아이템이라면 상태이상을 회복하고, 주군께 필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 터.

“……?”

생각하던 이들의 머리 위에서 문득.

투두두두─

어쩐지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저건?!”

그것은.

마치 헬리콥터가 프로펠러를 돌리듯.

하늘을 날고 있는 거대 비행정.

오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아르카나 대륙이 그대로 멸망했을 리가 없지. 이호열, 그 녀석은 분명 저런 신흥 세력에게 도움을 받은 거다.”

“그러고서는 그렇게 잘난 척을 한 거야?”

“억울해할 것 없다. 우리가 이런 정보를 입수하게 된 이상. 저 비행정을 타고 있는 게 누군지는 몰라도 곧 주군께 충성을 맹세하게 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비행정에게 신호를 보내야겠지.

[스킬]과 [아이템].

각각 비행정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려 신호한다.

투두두─

그 간절함이 닿았나.

비행정의 톱니바퀴가 멈춰 섰다.

“이, 이쪽을 봤다!!”

.

.

.

비행정, 아이언 캐슬 호.

드워프 지도자, 체인워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물었다.

“……저건 모험가들이 아닙니까?”

그 질문을 듣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이엘.

하이엘의 시선이 땅바닥에 붙어있는 다섯의 남녀를 향했다.

정확하게는 그들의 어깻죽지에 수놓아진 붉은 휘장으로.

‘붉은 휘장…….’

저들은 나의 주군.

한없이 깊은 어둠.

흑암룡을 음해하려 드는 자들이 아니던가?

“기어코.”

진정한 주군, 호열을 향한 하이엘의 충성심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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