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화. 나를 위한 것이라면 (1)
정치판에선 인정하는 즉시 끝이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뻔합니다. 내부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거지요.”
“……!!!”
“호, 혹시 그 장소에 뭔가 도청장치라도?”
“그 전에.”
한 노쇠한 정치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우왕좌왕하는 정치인들 사이로 울려 퍼진다.
“다들 결백하십니까?”
설령 대통령이 엄포를 놓았다고 하더라도.
필사적으로 부정해야 살 구멍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호열이 두 가문의 명예 회복을 위해.
직접 포탈을 열어 청와대를 방문.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다짐을 받아냈을 줄.
애초에 그 당사자.
호열부터 자신의 행보를 예측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허나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을지언정.
“명단을 입수했다고 하던데……. 아니겠죠?”
“그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으레 겁을 주는 거겠죠.”
“대체 청와대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 건지.”
이들 역시, 정치판에서 비워온 밥그릇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순진하게 저런 말을 자백했다가 정치 인생이 끝장난 이들을 한두 명 봐온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다.
이럴 땐 오리발을 내미는 게.
정치 생활의 기본이자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의 전개에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 그 쥐새끼들.”
자수해서 광명을 찾은 인원, 0명.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대통령, 정한택의 인내심이 바닥에 다다른 순간.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아, 아니……!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감히 체포…… 윽!”
금배지의 불체포 특권?
대격변 이전에나 먹히는 소리다.
시대는 바뀌고, 법도 바뀌었다.
-줄줄이 구속. 檢, “이미 명단 확보 끝내…….”
-국가 기밀, 천하통일에 누설 확실해 보여…….
-檢 관계자, “최대 무기 징역까지 선고 가능.”
대격변 이전.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건 비유에 불과했다.
그래, 비리 몇 번을 저지른다고 한들.
평화의 시대에 정말로 나라가 휘청거리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대격변 이후엔 다르다.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플레이어가 존재하는 이상.
국가는 안보를 위해 정보에 더욱더 만전을 기울여야 했으니까.
-“대통령, 정한택.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의 긍지를 바로 세우겠습니다.”
그래, 새로운 상식이었다.
동시에 새 시대의 법이었다.
국민조차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갑자기 이게 뭔 일임??
-아니;; 나라에 도둑놈이 저렇게 많았다고?!
-신화는 이해해도 천하통일? 진짜 선 넘네ㅋㅋㅋㅋ
-류오쥔춘이 괜히 발이 빠른 게 아니었네 ㄷㄷ
그런 대중의 반응에 가장 민감한 게 언론이었다.
VBC.
“흡.”
회의에 참석한 현용석은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얌전히 자리에 앉아 참석자들의 면면을 둘러보고 있자니.
훤하게 보였거든.
‘이야, 받아드신 분들이 이렇게 많았어?’
특히 보도국.
다들 하나같이 얼굴이 죽상이 돼서는 고개만 떨구고 있다. 우리 집 불구경이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니. 현용석은 얄밉게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럼 잘 생각하게.”
회의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자수해서 체면치레라도 해라.
금배지들조차 속수무책으로 구속된 마당에 일개 사축들이 시치미를 잡아뗄 재간이 있을까? 그런 능력을 가지고 방송국에 붙어있는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종진아. 오늘따라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
“확실히 얼굴이 피셨네요, 선배.”
“저것들 나더러 뭐? 미친놈?”
사회생활 못하는 현용석이 지금껏 방송국이란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순전 능력 덕분이었다.
그래서일까, 통쾌함은 배가 됐다.
“그 잘난 사회생활의 결과가 그거냐? 쇠고랑?”
벌써부터 짐을 싸고 있다는 몇몇 상사들의 소식이 들린다. 얄미운 상사의 퇴직보다 즐거운 게 없는데. 퇴직금도 챙겨주지 않는 불명예 퇴직이라니.
“흐흐흐.”
“선배, 지금 굉장히 이상해 보이는 거 아세요?”
“야, 종진아. 들어봐봐.”
“……?”
실실 웃음을 흘리기도 잠깐.
자타공인 VBC의 미친놈이 이번에는 본업에 미친 눈빛으로 돌변했다.
현용석이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잇는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불가능하겠죠, 아마도?”
“그래, 근데 그 방임주의를 고집해 온 대통령님께서 하루아침에. 그것도 야밤에 속보까지 내보내시면서 나라 팔아먹은 놈들을 잡아들이시는 이유가 뭐겠냐?”
윤종진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답한다.
“모르겠는데요? 뭔데요?”
“나도 모르지, 그건!”
“뭐야? 그럼 왜 물어보신 건데요?”
현용석이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인다.
“그게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이니까.”
“네?!”
“대체 누가 청와대에 어떤 압력……. 아니지, 압력이라고 하면 좀 그런가? 그래!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하루아침에 매국노들이 싸그리 잡혀가게 생긴 건지. 밝혀내면 이거 대박은 따놓은 거 아니겠냐?”
“……그, 그건 그런데요.”
그 말은 곧 청와대를 캐겠다는 말 아닌가?
미친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뒤가 없을 줄이야.
윤종진은 벌써부터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물론, 현용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굴렸다.
“일단, 시간대를 보면……. 오후에서 저녁 시간대에 분명 무슨 일이 있던 건데……. 보자, 그때면 마탑의 수석이 천하통일의 민낯을 밝히고 한참 난리가 났을 때 아닌가? 근데, 잠깐. 그때 호열 씨는 뭘 하고 계셨으려나?”
*
남태민이 목소리를 낮추고 입을 연다.
“상황이 참 뭣 같네요.”
작은 목소리지만, 잔뜩 화가 났다는 게 느껴진다.
확실히 화가 날만도 하다. 나와 거대 연합이 동시에 세 개의 동굴을 공략할 거라는 정보가 천하통일 측에 새어나간 모양이었으니까.
나는 속으로 흠칫했다.
‘나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잖아?’
내가 동굴 공략에 집중하는 틈을 타서.
거악에게 제물을 바치려고 하다니.
하마터면 영락없이 놓칠 뻔했군.
‘정작 결정적인 걸 놓쳤지만.’
나의 클래스, 악마 사냥꾼.
악마 사냥꾼과 악마의 절대적인 [천적관계]를.
천적관계 때문에 나는 동굴 공략을 일단락 맺고, 칠죄종 질투를 찾아 나설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새삼스럽게.
‘이래서 비밀이 필요한 건가.’
‘숨김’의 중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내가 악마 사냥꾼이란 걸 알고 있었다면.’
류오쥔춘 정도 되는 작자라면 더욱더 치밀하게 질투에게 제물을 바칠 계획을 세웠겠지. 수치심을 떠나서 이거, 우습게 볼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숨겨진 패를 공개하는 거니까.’
객관적으로 나는 베일에 싸인 상태였다.
왜, 레벨도 클래스도 명확하게 드러난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칠죄종 질투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단서가 드러났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
클라우디까지.
물론, 그것만으로 확신할 순 없을 거다.
‘갖가지 마법, 검술, 하이엘, 디엔드…….’
그동안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써먹었던 덕분에.
내가 악크샨과 관계는 있어도.
악마 사냥꾼이라는 여론은 없었거든.
그에 관해서 새삼스럽게 감사하게 된다.
‘악마 사냥꾼의 초라한 스킬창에 말이지.’
내가 악마 사냥꾼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악크샨과 악마 사냥꾼에 낚여서 치를 떨며 캐릭터를 삭제한 플레이어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생각하던 도중 남태민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일에 관해서는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열 씨. 애써 귀한 시간을 내어주셨는데, 내부에서 정보가 새어나가다니.”
기본적으로 인간에겐 자비로운 그랑펠 님이시다.
뒤통수를 맞은 게 잘못이 아니다.
뒤통수를 때린 놈이 잘못이지.
다행스럽게도 남태민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분명, 신규 분석관 쪽일 겁니다.”
동굴 공략을 준비하며 분석관의 수를 대폭 늘린 거대 연합이었다. 그중 천하통일의 스파이가 숨어든 거겠지. 그와 관련해서 남철민은 이미 행동에 돌입했다.
-“고의적으로 다른 정보를 풀어서 지켜보려고 합니다. 어떤 거짓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가는지 확인한다면 그 꼬리를 밟을 수 있겠죠.”
확실히 사람마다 전문분야가 있다니까?
‘백이설도 그렇고, 남철민도 그렇고.’
신뢰할 수 있는 아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물론, 나도 전문분야를 발휘할 때겠지.
남태민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그건 그렇고……. 될 수 있으면 호열 씨 도움 없이 클리어하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도움을 받게 돼서 면목이 없네요. 하하.”
히사기, 레오니와 다르게.
남태민은 혼자서 동굴의 심층부까지 공략을 끝마쳤다.
거기서 확실히 깨닫게 됐지.
역시 레벨이 전부가 아니구나, 하고.
‘클래스 퀘스트.’
프로스트 탈환을 계기로 클래스 퀘스트를 시작한 남태민이었다.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두 사람과 눈에 띄는 격차가 드러나기 시작한 거겠지.
‘악마 사냥꾼만 하더라도…….’
초라하기로 유명한 악마 사냥꾼의 스킬 목록. 하지만 나도 클래스 퀘스트를 진행하며 새롭게 습득한 클래스 고유 스킬들이 있었다.
[악크샨의 유지].
[악크샨의 수호령].
발동 조건이 까다로워서 그렇지.
그 효과는 상당한 스킬들을 말이지. 남태민의 클래스는 바바리안이니까. 나보다 훨씬 범용적이고 뛰어난 고유 스킬을 습득했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노력하고 있었군.”
“에이, 아닙니다.”
“끝맺음을 내게 맡겨도 되겠는가?”
보스 몬스터의 전리품은 상당하다.
같은 보스 몬스터라고 하기엔 뭣하다만.
칠죄종 질투를 처치하고 받은 전리품을 되돌아볼까?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흑암룡]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750]
[능력치]
근력 : 170 / 민첩 : 175 / 마력 : 660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5
[보유 포인트 : 0]
우선, 그 레벨은 한계치인 50레벨이 단번에 상승했다.
물론, 레벨보다도 더 큰 보상은 거악의 드롭템이었지.
‘내심 궁금했었다.’
거악을 처치하는 건 탐욕에 이어 두 번째.
하지만 거악의 전리품을 습득한 건 처음이었다. 왜, 인간에게 빙의한 상태로 처치된 악마는 전리품을 드롭하지 않았으니까.
‘탐욕은 하쿠나에게 빙의한 상태였으니.’
그래서 나름대로 기대를 했다는 거다.
확실히 마왕과는 무게감부터 달랐으니까.
그리고 전리품은 나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질투로 응어리진 고치]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전설급 아이템!
귀철에 이어 두 번째 전설템이었다. 정화하기 전까지 그 효과는 짐작할 수 없겠지만, 귀철을 통해서 전설급 아이템의 성능을 체감하고 있는 나였다.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만, 정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성능을 보여주겠지. 물론, 우려되는 부분이 하나 있기는 하다.
‘친화력.’
귀철을 손에 넣었을 때 알게 된 정보.
전설 등급 아이템은 ‘친화력’이라는 특수한 착용 제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귀철이야, 원석 시절부터 나를 주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나에 대한 호감도가 높았으니까 걱정할 게 없었는데…….
‘이건 좀 말이 다르지.’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다.
왜, 마찬가지로 귀철을 습득해서 얻게 된 칭호.
효과가 있었으니까.
[업적 : ‘전설’을 써내려가는 자]
[효과 : 모든 ‘전설’ 등급 아이템 친화력이 소폭 상승]
[지속시간 : 영구지속]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소폭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윽고.
남태민의 대답에 나는 곧 생각을 정리했다.
“물론입니다. 제게 필요한 건 경험치나 전리품이 아니라 경험이니까요. 하나도 빠지지 않고 머릿속에 담겠습니다. 호열 씨의 움직임을요!”
그것참 심히 부담스러운 각오로군…….
하지만 마냥 겸손을 떨 상황이 아니긴 하다.
하르콘에게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검기』를 발산하게 된 남태민이었거든. 거기엔 히사기와 레오니를 비롯한 몇몇 플레이어도 포함이다.
‘그래도 검강이거든, 이래 봬도.’
어쩌면 남태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지.
그나저나, 이런 대화를 나누니까.
동굴에 재진입하기 전.
남철민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총대장님의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나의 동굴 공략 영상을 교육 자료로 쓰고 싶다고 했었지? 뭐, 교육을 통해 전력을 향상시키는 걸 마다할 총사령관은 없을 테니까. 나는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뭘 교육한다는 거지? 내 발버둥에서 보고 배울 게 있나?’
.
.
.
무엇을 교육하는가?
간단했다.
참교육이다.
남철민은 분노에 이를 갈았다.
‘아직도 주제 파악이 부족한 거였냐?’
분석관에 스파이를 섞어놓았을 줄이야.
고작 스파이 몇으로.
총대장님과의 격차를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정말로 주제 파악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류오쥔춘.
남철민이 중얼거렸다.
“못 하겠다면 강제로 시켜주마.”
마침 총대장님께도 허락을 받았으니.
딸깍─
클릭과 동시에 세상에 공개된 호열의 모습.
당연하게도 세상은 또 한 번 뒤집어졌다.
-ㅁㅊ 내가 지금 뭘 본 거냐?
-바, 방금 바위에서 검 뽑은 거 맞지?!
-엑스칼리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