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간과하고 있었군 (3)
청와대는 비상이었다.
정한택.
온화하기로 유명한 대통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적당히라는 걸 몰라, 적당히를.”
도대체 받아 처먹어도 얼마나.
손을 뻗쳐도 어디까지 손을 뻗친 것인가?
정한택은 자신의 손가락이 원망스러웠다.
빠드득!
원망스럽다 못해 이를 갈았다.
“내가 그놈의 협약만 아니었어도……!”
국제 AAU 협약.
대격변 이후.
플레이어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균열 침식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낼 거라는 믿음에서 맺어진 협약. 그 조항 첫 장에는 똑똑히 명시되어 있었다.
──────
국가는 플레이어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
정한택은 필사적으로 AAU 협약을 지켜왔다.
말했듯 대한민국은 아르카나의 선택을 받은 행운국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아르카나는 자신의 분야가 아니었다.
영향력을 끼쳐봤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웃 나라에 좋은 반면교사가 있었으니까.
AAU 협약에 가입조차 하지 않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오히려 플레이어인 류오쥔춘에게 잡아먹히고 만 중국부터. AAU 협약을 어기고, 플레이어에게 목줄을 채우려다가 오히려 이나즈마라는 대들보를 상실한 일본 정부까지.
‘굳게 믿었다.’
남태민, 그 뒤를 이어 맹활약을 보이는 이호열.
정한택은 그들을 보고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안도했다. 플레이어를 신뢰하고 바라보며 자신은 쌍화차나 들이켜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나한테 엿을 먹여도 이렇게 먹여?!”
대격변으로 뒤집어진 세상에서도.
구태 정치를 선보이고 있는 그 새끼들이.
이런 난리를 부리고 있을 줄이야.
정한택은 다시금 자책했다.
“내가 믿을 새끼들을 믿었어야지.”
그들과 함께 정치판에서 굴러왔던 정한택이다.
같이 몸을 부대껴 보았기에.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자신의 잘못이라면…….
‘놈들이 신화에 빌붙어 먹던 걸 알아차리고도 넘어간 것부터겠지.’
신화 그룹 소속.
신화 길드.
일반적인 길드가 아니다.
‘새로운 계열사라 생각한 게 실책이었어.’
단순히 재벌가에서 뇌물을 받아 처먹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신화 길드였기에 묵인한 게 실책이었다.
정한택의 눈이 서슬 파랗게 빛난다.
“그때 싸그리 도려냈어야 했는데.”
AAU 협약을 어겨서라도 개입했어야 했다.
방치한 게 지금까지 왔으니.
신화가 이나즈마가 되고 결국에는 천하통일에까지 손을 뻗쳤다.
그 결과.
“오죽했으면 이호열, 그가 직접 나를…….”
정한택은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떨군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한숨이 흘러나온다.
“……후우.”
늦어도 한참 늦다는 것을 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꼴인지도 모른다.
불현듯 떠오르는 히사기의 얼굴.
‘어쩌면 이호열이 대한민국을 등질 가능성도…….’
히사기라는 선례가 있지 않았던가?
현실에 나타난 아르카나의 고대 왕국, 유스라.
추악한 조국과는 연을 끊고 유스라 왕국에 망명한 히사기였다. 그리고 그런 유스라 왕국에서 국왕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바로 이호열이었고.
정한택은 주먹을 쥐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젠장, 만장일치 탄핵감이군.”
그런데도 바로잡을 건 바로잡아야 한다.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이호열, 그에게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듯.
여의도 쥐새끼들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걸 보여줘야만 했다.
그러나 정한택은 막막했다.
“……어디서부터 털어야 하는 거냐, 대체?”
쥐새끼들만 털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 능구렁이들은 받아먹는 데 도가 튼 인물들이니까.
결국,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터.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까?’
저절로 고개가 내저어진다.
청렴결백 그 자체.
이호열의 행보에 관해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정신 빠진 쥐새끼라도 한들, 설마 그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랴?
고뇌하던 정한택은 일단 고개를 들었다.
“주제넘게 바랄 걸 바라야지.”
은연중에 호열에게 도움을 바라다니.
“염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정한택.”
대통령이 정신을 추스르던 순간.
삐비빅─!
청와대에 마력 반응이 포착되었다.
대격변 이후, 아르카나의 위협에 대응하는 건.
모든 정부의 숙원이었다.
수행원의 무전을 타고 전달되는 위협.
“대통령님……!”
수행원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정한택은 짐작하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살피자 정확하게 약속 시간 정각이었으니까.
“알고 있네.”
그러고는 호열을 맞이하러 직접 청와대 입구로 향했다.
이내, 포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형체.
그런데.
……한 명이 아니다?
하나, 둘, 셋.
심지어 모두가 익숙한 얼굴이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순간.
정한택은 한시름 고민을 덜 수 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이호열.
그리고 남태민과 백이설.
이거 아무래도 쥐새끼들을 제대로 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정말 뒤가 없구나, 그랑펠.
시작부터 대통령이라니.
‘진짜 내 팔자야.’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만.
갑자기 대통령과 얼굴을 맞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거지.
하지만 이해는 된다.
‘내가 언제 파고 있냐, 부정부패를.’
아무리 오지랖이 넓다고 한들.
이쪽까지 건드렸다가는 정말로 하루 24시간이 부족해지겠지.
게다가 이쪽 방면은 나도, 그랑펠도 전문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지 않은가?
남태민과 백이설.
대한민국 1위, 2위 길드.
가온과 신화의 길드 마스터.
“그동안 귀찮아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대통령님. 진짜로요!”
가해자는 몰라도 피해자는 잊지 않는 법이거든. 특히나 백이설의 경우엔 서큐버스 때문에 수많은 정치계 인사들과 주고받은 게 있지 않았던가?
덕분에 백이설에겐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졌다.
“대격변 시대에 사과 박스에 신사임당이 오가는 일은 별로 없죠. 아이템 혹은 아티팩트. 실체를 추적하기 어려우면서도, 가치는 확실하게 보장되는 아르카나 세계의 뇌물이 있으니까요.”
하긴 기본적으로 억 소리가 나니까…….
확실히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정보가 상당했다.
백이설의 말엔 남태민도 연신 감탄을 삼켰다.
“아니, 그렇게 치밀하게 주고받았어? 장난 아니었구나, 너네? 하긴 그러니까 맨날 언론에서 신화는 찬양하고, 우리한테는 시비에 억까에…….”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부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알지. 놀라서 그래 놀라서.”
물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본업에 충실하니까 이런 날도 오는구나.’
구마의식.
덕분에 백이설과 접점이 생긴 덕분에.
하마터면 굉장히 귀찮아질 뻔한 일을 수월하게, 날로 먹고 있었다.
만약, 혼자서 청와대를 찾아왔다고 가정해 보자.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군.
‘대화에 진도가 안 나갔겠지.’
대통령에게 독설만 쏟아냈을지도 몰라.
하지만 백이설에겐 구체적인 명단이 존재했다.
거기서 깨달았다.
어째서 받아먹은 놈들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워 억지를 부리는지 말이야.
‘사이가 틀어졌다간 모든 게 드러나게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랑펠의 청렴결백에 감사하게 된다.
나, 이호열.
플레이어로 각성하고 난 뒤엔 정말이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거든.’
덕분에 나는.
테이블에 놓인 쌍화차에는 손가락도 대지 않고는.
입을 열었다.
“몰랐다면 무능이고, 알고도 방치했다면 공범이다.”
“……!!!”
아주 그냥 듣는 사람들 가슴 철렁하게 하는 돌직구를.
이 또한 무엇 하나 대충 넘어갈 수 없는 그놈의 긍지 때문.
역시나 뒷수습은 나의 몫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절차가 있었다면 이해하겠다.”
정한택 대통령.
그가 나서지 못한 이유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AAU 협약 때문이었다. 협약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또 AAU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인 내가 잘 알고 있지.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일 중독자거든, 내가 또.
‘다른 변명이라면 그놈의 처분을 내렸겠지만…….’
덕분에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단 거다.
더는 길게 대화를 나눌 거리가 없었다.
말했다시피 절차, 협약은 중요한 법.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나도 사양이다.’
그랑펠, 너는 몰라도.
포탈로 청와대를 들락날락하는 건.
소시민인 나는 상당히 거북하다고.
대통령님께서 알아서 말을 정리해서 다행이었다.
“믿어주신 만큼 반드시 뿌리를 뽑겠습니다.”
정한택의 다짐은 머지않아 대한민국 모두가 알게 되었다.
야밤에 끊이질 않는 속보.
그 쥐새끼란 작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기사가.
말 그대로 끊이지 않았거든.
-[속보] 鄭 “나라 좀먹는 세력 척결하겠다.”
-[속보] 鄭 “더러운 돈과 국가 안보를 맞바꾼 대역 행위 용서할 수 없어……. 여야 가리지 않고 엄중 처벌하겠다.”
-[속보] 靑 관계자, “이미 명단 입수……. 자백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
호언장담이 빈말이 아니었다는 건가?
정치면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강한 발언이 끊이질 않는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나설 일은 없겠지.
“악취가 풍겨오지 않는 이상.”
악취는 당연하게도 악마의 기척을 말하는 것. 예상치 못하게 들르게 된 청와대에서 악마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도 안도할 일이라면 안도할 일이려나.
생각하기도 잠깐.
‘보자.’
나도 일과에 충실할 시간이 왔군.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찻잔을 바라본다.
‘쌍화차 때부터 입이 근질근질했겠어, 아주?’
달칵─
갈증을 해갈하듯 티백 녹차 한 모금을 들이켜고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나름대로 어마어마한 전과를 거둔 참이잖아?
거악, 칠죄종 질투 처치.
눈앞에 어지럽게 떠올랐던 메시지들.
그 전리품을 하나씩 감상할 시간이 왔다는 거다……!
*
시공간의 사교장 상층.
상층에는 어중간한 초월자가 입성할 수 없다.
초월자, 그 이상의 자격을 증명해야 했으니까.
“확실히 낯설군.”
과거에는 하층에 비해 한적하기 그지없는 장소였건만.
4가문의 가주, 자신들만이 상층에 머무르고 있는데도.
상층이 하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났다.
“죽어 나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고작 마계의 잡종들에게 당하다니.”
“이거 같은 초월자로 취급받기엔 억울한데요.”
초월자.
도매급으로 묶이는 게 달갑지 않았기에.
하층으로 내려가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황금의 막시마 가문.
숲의 유그릭 가문.
용맹의 캔설 가문.
전율의 아카몬드 가문.
네 명의 가주는 속내를 숨긴 채 대화를 나눴다.
“제국이 다시 일어서려 하고 있더군요.”
오늘의 메인코스는 제국이었다.
분명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제국이었다. 서로서로 눈치를 살피며 언제 행동을 취해야 아르카나 대륙의 패권을 쥘 수 있을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거늘.
“영지에 웅크리고 있으려니 답답하기 그지없으시겠습니다?”
전능한 자신들이라고 하더라도.
대륙 구석에 위치한 가문의 영지에서 제국의 소식에 능통할 순 없었다. 지금 대륙엔 소문의 창구 역할을 할 도시도, 마을도 온전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예측할 순 있었다.
“역시 흑암용밖에 없겠지요.”
흥, 비웃음이 돌아온다.
“클라우디?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몰락하여 유일한 생존자만 남은 클라우디라고 한들.
무너져 가는 제국.
그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게 할 능력 정도는 충분하겠지.
“사실 제국 주변에 있는 놈들이라고 해봤자 마계의 잡종들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이빨이 빠진 클라우디라고 해도 그 정도는 능히 해낼 수 있겠지요.”
“그것조차 해내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건 확실히 클라우디에 관한 모욕……. 동시에 우리 선대님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 아니겠습니까?”
“후후. 어차피 발버둥에 불과할 텐데요.”
4가문이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간단했다.
제국의 실질적인 주인인 자신들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의 정보를 쥐고 있었으니.
악마의 위계질서에 관한 정보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때.
팔랑─
샹들리에에서 떨어져 내리는 종잇조각.
“……이런 시기에 심사인가요?”
『시공간의 사교장 상층 출입 심사 요청서』
명시된 업적을 목격한 4가문.
가주들의 동공은 휘둥그레졌다.
거기엔 똑똑히 명시되어 있었으니까.
“거악, 칠죄종 질투를 압살……?”
마계의 잡종들과는 다른 진정한 악(惡).
거악이 처참하게 사냥당했다는 증거가.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업적을……?”
시공간에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그런 말도 안 되는 업적을 남긴 이의 이름이 적혀있을 터.
이윽고, 그 이름을 확인한 가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
황금의 막시마.
가주, 이그나이트 막시마.
그의 황금빛 동공이 속절없이 요동쳤다.
“시, 시공간이여. 이건 분명 무언가 잘못됐다!”
그가 샹들리에를 향해 소리쳤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
처분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
첫 번째, 부정.
그 감정을 격하게 드러냈다.
“그, 그랑펠이라니! 그 자가 살아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