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93화 (293/489)

◈ 293화. 간과하고 있었군 (2)

대격변.

누군가에겐 재앙에 불과했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겐 기회이자 행운이었다.

대한민국의 경우엔 후자였다.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 마탑이 수도인 서울에 업데이트된 것도 모자라서. 최상위권 랭커, 남태민을 필두로 머릿수에 비해 높은 수준을 가진 플레이어의 존재까지.

그런 대한민국의 국민 중에서도 최고의 행운아는 여의도 정치인들이었다.

과거, 국제 정세가 불안하던 시절에야 이따위 반도에 나라를 천도한 단군을 원망하기도 했었지만.

짠─

부딪히는 술잔.

“누가 알았겠습니까? 중국에 치이고, 일본에 치이던 게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덕분에 요즘엔 아주 살맛이 납니다. 으하하.”

다시 강조하지만.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운이 지나치게 좋았다.

다른 국가를 보아라.

멀리 갈 것도 없이 일본만 하더라도.

랭커 플레이어인 히사기가 일본 정부와 대립 구도를 형성하다가는.

아예 조국을 등져버리지 않았던가?

살맛이 나서 그런가, 술맛도 좋다.

“크! 남태민, 그 녀석이 덩치에 맞지 않게 고분고분한 덕분이죠.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대한민국 국민성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당해놓고도 나라말은 참 잘 들어.”

대한민국의 영웅.

호칭에 걸맞게 남태민의 행보는 올곧기 그지없었다. 그 탓인가, 근육 탓인가. 빨대를 꽂으려고 해봐도 빨대의 입구조차 들어가지 않는 건 심히 유감이긴 했다만.

그럴 때일수록 돌아가기도 해야지.

“아무리 살판이 났다고 하더라도 욕심이 과하면 체하는 법입니다들. 알고 계시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가늘고 길게.”

3선, 4선, 5선 의원, 장관 등등.

플레이어들의 경험을 증명하는 게 레벨이라면, 그들의 경험을 증명하는 건 금배지라는 훈장이다. 자리에 모인 이들은 경험을 통해 쌓은 처세술의 대가들이었다.

짠─

다시금 부딪히는 술잔.

취기가 오른다.

본심이 나온다.

“완전히 체면을 구겼죠, 대국은 무슨.”

“리안웨이. 그 자식 표정이 궁금합니다. 으하하하.”

“지금은 얌전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때지요. 천하통일이 궁지에 몰렸습니다. 구석에 몰리면 몰릴수록 콩고물을 흩뿌려 댈 게 뻔하지 않습니까?”

조급하리라, 중국과 천하통일은.

그럴수록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활로로 눈을 돌리게 될 터.

활로 앞에 떡 버티고 서있는 게 바로 자신들이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들이 오간다.

“이거 통행료를 좀 올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확실히 그렇지요?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하하.”

“뒤에서 얼마나 득달하고 있겠습니까, 류오쥔춘 그 녀석이.”

감투가 감투인지라 가만히 있어도 들어오는 게 정보였다.

류오쥔춘에 관한 소문도 마찬가지.

그런 의미에서 높으신 분들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운입니다.”

“뭐가 말입니까?”

“남태민은 물론이고, 이호열까지.”

“……!”

“이쪽으로는 큰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류오쥔춘이라는 예시가 있었기에.

공감을 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류오쥔춘 정도 되는 플레이어조차도 중국을 흔들어 놓고 있지 않은가? 그런 류오쥔춘보다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게 바로 이호열, 그였으니까.

이 순간, 모인 이들은 같은 생각을 품었다.

만약, 호열이 류오쥔춘처럼 나서기 시작한다면?

절레절레.

저절로 고개가 내저어질 정도로.

그 후폭풍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러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견제해야겠지요.”

이호열의 영향력은 적당히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 대화를 듣고 있었다면 코웃음을 뱉을지도 모르겠지.

다 늙어빠진 정치계의 여우들이 이호열에게 무슨 걸림돌이 될 수 있겠냐고. 솔직하게 맞는 말이다. 자신들의 역할은 단순히 화두를 던지는 것뿐이니까.

“물고 뜯는 건 언제나 국민이지 않았습니까?”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는 한 마디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 의문에 반박하는 데에는.

수십 개의 증거가 필요한 법.

“물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조심합시다.”

무려 이호열이다.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

두 세계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이뤄낸 플레이어.

자신의 안위를 무엇보다 걱정하는 이들이 섣불리 호열을 건드릴 리는 없다.

게다가.

“거악을 처치한 지금은 잠자코 있는 게 좋겠지요.”

호열은 거악을 쓰러트린 것도 모자라서.

천하통일에게 완벽하게 한 방을 먹여버린 덕분에.

세계적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꼴깍─

술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떠올린 단어.

“……그나저나 다들 들으셨지요?”

“?”

“클라우디 말입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

마지막으로 클라우디.

이호열과 관련되어 있다고 밝혀진 세 가지 존재들.

그중에서도.

여전히 의문인 건 클라우디의 정확한 뜻이었다.

“이거, 적당히 의문을 제기하는 척하면서 몰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 클라우디를 부르짖던 게 바로 악마들이지 않습니까?”

“오호라.”

“잠깐만, 근데 정작 악마를 처치한 것도 이호열이잖아요?”

“하하. 스토리는 만들기 나름이지요, 장관님.”

정치인끼리 단순히 악수를 나누는 사진.

그런 사진 한 장만으로도 말도 안 되는 소설을.

그런 소설을 사실로 둔갑시킬 수 있는 게 자신들이었다.

그런데, 클라우디라니.

이건 더없이 적합한 떡밥이 아닌가?

“듣고 보니까 일리가 있습니다?”

“큰 그림 한번 제대로 그려볼 때가 온 거지요. 하하.”

“이거, 다시 생각해도 우린 행운아인 것 같습니다?”

짠─

기울여지는 술잔.

자신들이 계략을 꾸미는 지금.

호열은 자신들에게 관심조차 없을 테니.

모인 이들은 새삼스럽게 호열의 긍지에 감사하고 있었다.

“세간의 평가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영웅이라니. 그야말로 우리가 원하던 세상을 가져올 수 있는, 우리들의 영웅이지 않습니까? 으하하하!”

*

나는 3호이자 웬수.

이예림의 메시지를 정독했다.

그러고는 울프에게 말했다.

“남은 이야기는 모두가 깨어나면 하도록 하지.”

그랑펠의 뒤끝.

그림자 용병단의 미래 계획을 울프에게만 듣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혹시라도 울프의 뜻에 반발하는 단원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전원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거지.

울프가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총대장님.”

나는 곧장 별실을 빠져나왔다.

무엇이 그리도 급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럴만한 일이 생겼으니까……!

-호열아

-이 누님은 왜 이렇게 익숙하지?

-그 클라우디라는 단어가???

-(음흉하게 웃는 멍멍티콘)

아득한 기억을 되새겨본다.

내가 저거한테 그랑펠의 풀네임을 말했던가……?

‘미쳤다고 그랬겠냐!’

아무리 중증의 중2병을 앓았던 나라고 해도 그 상대는 가려가면서 발병했다. 큰누나라면 또 모를까. 나를 쥐잡듯이 잡을 게 뻔한 웬수 앞에서 그런 이름을 지껄였을 리가 있겠냐……!!

‘뭘 알겠다는 거야, 이거?’

속으로 진땀을 흘리던 순간이었다.

불현듯 스쳐 가는 기억이 있었으니.

……그래.

노트였다.

내 모든 흑역사가 적혀있던 노트가 분명하다!

가세가 기울면 집의 평수가 좁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는 건 무슨 뜻인가?

웬수가 나의 생활반경을 침범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언제는 서로 책가방 바꿔 들고 간 적도 있었으니까.’

저거, 그때 내 흑역사 노트를 들춰봤던 거 아니야?!

진땀이 식은땀이 되는 순간.

일단, 정신을 부여잡아 본다.

무엇보다 클라우디 말고는 알고 있는 게 없어 보였으니까.

‘알고 있다면 저렇게 얌전할 수 없지. 저거 성격에.’

게다가 웬수의 본론은 클라우디가 아니었다.

-근데 막내야…….

-어째 엄마 아빠가 오늘따라 걱정이 많으시네?

-요런 기사 때문에

-(링크)

제목만 봐도 알겠군.

그 내용은 나도 익히 봐서 알고 있었다.

말했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기이 탐구, 인터넷 서핑이라고.

그래서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읊조리기까지 했다.

“과연.”

기사를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의도가 선명하게 보이네.’

내 행보마다 따라붙었던 흔한 비판 기사였거든.

왜, 네티즌들에겐 눈치가 보이니까.

결론은 없고 떡밥만 던져댔던 그런 기사들.

그동안의 예시를 들어볼까?

-정부 관계자, “역시나 긴밀한 협력이 없는 건 유감…….”

-전문가 曰, “중국과 천하통일의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

-[심층 취재] 어쩌면, 막을 수 있었던 참사였다.

당연하게도 나, 이호열은 그따위 기사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왜냐니.

천하통일을 언급했을 때부터 속내가 훤하게 보였다. 뭣보다 내 곁엔 가온의 남태민이나 신화의 백이설 같은 대한민국 최정상 플레이어들이 있었으니까.

‘정부가 나한테 폐를 끼친 적은 없어도.’

그들을 통해 들어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는 거지.

그랑펠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남의 평가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드높은 긍지의 소유자이시니까.

뭐라고 떠들어대든 그동안 신경 쓸 가치조차 없었던 것뿐.

그런데.

-[집중 취재] 클라우디의 정체는 무엇인가?

-익명의 전문가, “이호열, 악마와 접점이 있을지도 몰라…….”

-악마가 울부짖었던 그 단어, ‘클라우디’…….

이건 좀 이야기가 다르다……!

‘클라우디가 뭐긴 뭐냐, 내 한없이 깊고 어두운 흑역사지.’

그런데 기어코 그걸 들추려고?

집중 취재도 모자라서.

악마와의 관련성까지 언급하면서?!

물론, 그 복잡한 진실을 알고 있는 건 나뿐이다.

평범한 대중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겠지.

‘그냥 악마도 아니고 마왕도 클라우디를 울부짖었으니까.’

아마 웬수가 말한 엄마, 아빠가 우려한다는 게 이거구나.

그런 의미에서 이 기사들은 선을 넘어도 제대로 넘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간과하고 있었군.”

그래, 그동안 내가 너무 봐줬지?

처절하게 발버둥 치느라 소홀하고 말았구나.

격식의 교육을.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을.”

……근데 잠깐만.

갑자기 엄마, 아빠는 왜?

그리고 간과하기는 누가 간과했다는 거냐, 그랑펠.

‘나 같은 효자가 또 없다, 너?’

구구절절.

지금도 한결같이 새벽마다 자필 편지를 써서 안부 인사를 올리는 게 나다. 거기에다가 매달 용돈도 꼬박꼬박 챙겨드리고 있단 말이다. 허나, 나의 반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지는 말.

“세간의 평가가 나에게만 향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가문의 명예를.”

그렇다.

이건 클라우디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이씨 가문까지 건드린 셈이었으니까. 결국,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생각하는 오지랖이 이씨 가문의 명예까지 챙기겠다는 거구나……!

“후계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후계자?

그래, 클라우디 가문의 후계자도 맞고.

이씨 가문의 후계자인 것도 맞기는 하는데…….

‘그걸 꼭 그렇게 거창하게 중얼거려야겠냐?’

치유마법학파 별실 앞.

클레를 비롯한 숙련 마법사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심각한 분위기에 무어라 반응하는 이는 없었지만…….

‘전부 들었겠지, 내 혼잣말.’

그러나.

또각.

이미 결심한 나의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으니.

이쯤 되면 걱정이 앞선다.

항상의 자세.

그 어떤 마왕, 거악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랑펠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된 이 순간 고요하게 분노하고 있었으니. 나도 나의 행보가 예측되지 않아 우려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달칵.

노른자를 올린 쌍화차.

한가롭고 평화로운 티타임을 깬 건 핫라인 연락망이었다.

정장을 갖춰 입은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전해온다.

“AAU 대한민국 지부, 박민재 지부장의 연락입니다.”

흰머리가 지긋한 중년 사내가 되묻는다.

“박 지부장? 그 인간이 왜? 먼저 연락할 위인이 아닌데.”

수행원이 난처한 표정과 함께 답한다.

“그게 이호열 플레이어가 대통령님과 대담을 원한다고…….”

“?!”

대한민국 대통령, 정한택.

플레이어 아니, 그 흑암룡 이호열이 나와 대담을……?!

그가 기겁해서는 머금고 있던 쌍화차를 뿜어냈다.

“어푸푸. 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겐가 지금?!”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행보.

그 첫걸음부터.

체크메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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