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간과하고 있었군 (1)
마법과도 같은 반전.
그 반전에 세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국을 자칭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쾅!
대국의 지도자, 지안웨이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쓰라린 주먹보다도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건, 화면 너머에서 떠들어대는 외신들이었다.
흘러가는 자막.
-마법처럼 밝혀진 진실……. 천하통일의 잔혹한 민낯
-류오쥔춘, 그는 어째서 참상을 부추겼나?
-익명의 랭커, “천하통일의 길드원들 상태이상에 시달리고 있을 가능성 多”…….
그 소식을 곁에서 함께 지켜보던 수행원들이 말을 건넨다.
“외부에서 떠들어대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습니까? 늘 그랬듯 인민들의 눈과 귀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을 소식들입니다. 우려하지 마시지요.”
빠득.
지안웨이는 이를 갈았다.
내가 인민을 우려해서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것 같나.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류오쥔춘……!’
이 순간, 지안웨이가 두려워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류오쥔춘이었다. 이로써 체면을 구겨도 극심하게 구겨버린 류오쥔춘이었으니까.
오들오들!
숙청.
숙청.
숙청의 연속.
그동안 류오쥔춘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오한으로 몸이 떨려올 정도였다. 아직도 자신에게 경고하던 류오쥔춘의 서슬 퍼런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내 심기를 거스르지 마십시오, 지 주석.”
-“내가 당신을 살려둔 이유를 압니까?”
-“당신에겐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나의 기대를 배반하고, 그대의 이용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땐 나도 당신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빌어먹을!
지안웨이는 뼛속 깊은 후회에 사무쳤다.
‘내가 내 손으로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대격변 이후에 등장한 말.
아르카나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지안웨이는 그 말에 혹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류오쥔춘과 천하통일에게 무한적인 지원을 한 결과를 보아라.
세계를 지배하는 건 자신이 아닌 류오쥔춘이 되게 생기지 않았는가?
지안웨이는 직감했다.
‘이대로라면 나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다.’
류오쥔춘이 체면을 구겼든.
구기지 않았든.
그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의 이용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 것.
직접 카메라 앞에 얼굴을 내밀었지 않았던가?
천하통일을 향한 공격은 대국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농담이 아닌 엄중한 경고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보다시피 전무(全無).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가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이호열!’
류오쥔춘 이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행보를 보여준 플레이어.
이호열에게 세간의 평가나 예측 따윈 통하지 않았다.
지금만 하더라도 그렇다.
‘머리를 굴릴 시간이라도 벌 수 있으리라 여겼다.’
예상치도 못하게 그림자 용병단이 휘말린 상황.
사건의 진상을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전 세계에 뿌려댄 막대한 뇌물과 인맥은 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얼굴을 내민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무의미했다.’
이호열, 그에게는……!
지안웨이는 손목시계를 살폈다.
류오쥔춘의 복귀까지 대략 대여섯 시간이 남았다.
‘……그가 돌아온 시점에서 나는.’
과연, 숨통이 붙어있을 수 있을까?
지안웨이는 저울질 끝에 결론을 내렸다.
류오쥔춘, 그가 돌아오기 전.
조국을 뜨기로.
‘더 이상 내겐 이용 가치가 없다.’
내가 허수아비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걸.
류오쥔춘처럼 냉철한 사내가 알지 못할 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용 가치는 상대적인 법.
왜, 화면 속에서도 가능성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이호열, 그라면…….’
류오쥔춘 따위에겐 굴복하지 않을 게 분명해 보였으니까.
지안웨이는 자신이 있었다.
류오쥔춘과 천하통일의 치부?
그에 관해 자신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없을 테니.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준비하게나.”
“무엇을 말입니까, 지 주석님?”
“미래 설계를 다시 할 때가 왔네.”
지안웨이는 우수하고, 충직한 수행원들만을 곁에 남겨뒀다. 그들이라면 정보가 새어 나갈 염려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에 돌입한 게 원인이었다.
“알아들었다면 움직이지.”
수행원들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아듣지 못했나? 이곳에 내 미래는 없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달라진 어조에 지안웨이는 수행원을 바라봤다가 흠칫했다.
어째서인가, 그 눈빛이 썩은 동태 눈깔처럼 탁하다.
마치 인형처럼,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세뇌’를…….
‘잠깐만, 세뇌라고……?’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TV 속 오디오.
마법으로 떠올랐던 제로 산맥.
천하통일 플레이어의 목소리.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세요! 혹시 천하통일의 내부 정보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를 이용하세요! 저는 더 이상 류오쥔춘의 꼭두각시 따위가 아닙니다……!”
지안웨이가 말을 더듬었다.
“어, 어느 틈에 자네들에게까지 손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놔라. 놔라. 이 새끼들아!!”
양측에서 지안웨이를 억압하는 수행원들의 거센 손길뿐.
설령 진심이 아니라고 한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더없이 맹목적인 충성심.
“주군을 배신할 생각을 하시다니요.”
“저는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지 주석.”
“이대로 얌전히 주군의 처분을 기다리시지요.”
“……!!”
풀썩.
지안웨이의 다리가 그대로 풀려버렸다.
*
끼익─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마탑의 집무실을 나섰다.
세상은 난리가 난 와중.
집무실에서 무얼 하고 있었느냐, 묻는다면.
“기이에 관한 탐구.”
그렇다.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었다.
그게 살짝 우려됐었거든.
‘혹시라도 클라우디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 하고는.’
당연하면서도 다행스럽게도.
클라우디에 관한 관심은 일단 뒷전인 상태였다.
나의 입방정이 화끈하게 나대준 덕이었지.
‘천하통일이라는 폭탄을 터트렸으니까.’
물론, 뒷수습은 언제나 나의 몫.
나는 그림자 용병단을 벨리에에게 맡기고 난 다음.
곧장 마르셀로를 찾아갔다.
마르셀로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거든.
CCTV를 대신할만한 마법에 관해서도.
역시나 마르셀로는 나의 기대에 화답했다.
‘어지간히 속 좀 타들어 가겠어들?’
천하통일의 민낯.
그건 나의 예상보다도 훨씬 추악했다.
류오쥔춘, 아무래도 정이 가지 않았는데…….
“썩은 내가 진동하더군.”
확실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나 할까?
덕분에 그림자 용병단에게 남아있던 의문도 해결이 됐다.
‘먼저 위협을 가한 게 천하통일이니까.’
세상은 꽃밭이 아니다.
플레이어의 세상은 더더욱.
누군가의 목숨을 노렸다면 자신의 목숨 또한 잃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게 플레이어들의 세계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 이호열은 그림자 용병단을 너그럽게 이해한다.
‘그래도 흑막치고는 젠틀하던데.’
아르카나 대륙 최악, 최흉의 범죄 집단.
하지만 같이 있던 게 천하통일이라서 그런가?
상대적으로 그림자 용병단이 의리가 넘치는 집단으로 비쳤다.
팔이 안쪽으로 굽은 게 아니라 세상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핸더슨과 락키드.
두 사내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꼴을 보고도.
거악에게 달려든 그림자 용병단의 모습이 세상에 퍼져나갔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는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고 싶었단 거지.
그러나.
그랑펠이 누구던가.
단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칼 같은 긍지의 소유자.
무엇하나 대충 넘어갈 수 없는 귀찮은 성격의 소유자. 그러니까 집무실을 빠져나온 나의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치유마법학파의 별실이 될 수밖에.
또각.
존재감 충만한 나의 기척에 익숙한 얼굴이 흠칫한다.
치유학파 숙련 마법사, 클레였다.
넙죽, 고개를 숙여오는 클레.
“이 수석님, 간만에 얼굴을 뵙습니다!”
나는 그녀의 격식 있는 인사에 너그럽게 화답했다.
“고생이 많군, 클레 오디아.”
“아닙니다!”
마탑에 그 밉상 고양이(탑주)를 제외하고, 고생하지 않는 이들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중에서도 치유학파는 최근 노고가 많았다. 드래곤이 삼킨 악과를 정화할 방법부터 그림자 용병단의 치유까지.
‘내가 부탁한 일이 워낙 많아야지.’
그러나 역시나 그랑펠이 누구인가?
누구보다 피곤한 매일을 살기에.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훈수할 수 있는 철인(鐵人).
“그럼에도 연구에 소홀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물론입니다, 이 수석님!”
“그대의 연구엔 그만한 가치가 충분하니.”
칭찬 끝에 꼭 사족을 덧붙이는 게.
얄미운 상사가 따로 없구나, 정말…….
클레가 성격이 좋아서 다행이지.
이윽고, 별실의 문을 열자 병상에 누운 환자들이 보인다.
총 아홉.
키치를 제외한 그림자 용병단 전원.
유일하게 정신을 차린 울프만이 몸을 일으켜 세운 상태였다.
“아직은 무리가 아닌가.”
“……!”
나의 목소리에 급히 울프가 고개를 돌린다.
그러더니 나지막이 입을 연다.
“어째서 저희를 거두어 주신 겁니까, 총대장님……?”
울프, 고개는 돌렸지만 들지는 못하고 있다.
그걸 보아했을 때 울프도 짐작하고 있는 거겠지.
나, 클라우디와 관련된 거악의 의뢰를.
‘아니, 그거 진짜 신경 쓸 거 없다니깐?’
애초에 그 시절의 그림자 용병단에는 키치를 포함해서 지금의 단원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잖아? 아무리 절차를 중시하는 그랑펠에게도 용퉁성은 있다.
‘연좌제를 물을 생각은 없다는 거지.’
게다가.
‘그건 괜히 파고들어서 좋을 게 없다고……!’
결국, 모든 원흉은 나의 흑역사로 귀결되고 말 테니까……!
그 한없이 어두운 과거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지 말자고, 울프.
나는 그러한 뜻을 담아서 말했다.
“자네들에겐 책임을 묻지 않겠다.”
“……어째서?”
“키치, 그대들의 단장이 이미 책임을 짊어지지 않았는가.”
“!”
울프에게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으니, 적절하게 키치를 언급하는 게 최선이겠지. 물론, 훗날 키치를 만나게 되더라도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만.
그런데도 울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희에겐 총대장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자격이 없습니다. 추악하기 그지없는 저희와 엮이신다면 분명 총대장님에겐 흠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말을 잇는다.
“지금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목적과 사정이 있었다고 한들. 저희는 모험가의 목숨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만약,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아, 그거?
거참,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백날 여론몰이를 하려고 해도 마르셀로의 마법이 그 시간대에 있던 진실을 보여준 덕분에. 아무리 뇌물을 받아먹은 이들이라고 해도 당분간은 할 말이 없을걸?
왜, 지금만 하더라도 역풍이 불고 있었거든.
-옆에서 칼 들고 협박하는데 어캐 참음?
-ㄹㅇ 먼저 명을 재촉했지 천하통일 그것들이
-위장 안 해도 죽이려고 하고 해도 죽이려고 하고……
-이거 제로 산맥에서 행방불명된 플레이어들 좀 더 구체적으로 조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님?? 이건 뭐 길드 없이 쟤네 만났으면 비명횡사했겠는데??
인터넷 여론보다 확실한 건 천하통일과 중국의 반응이었다.
최고 통치자님께서 내뱉으셨던 패기로운 선언이 무색하게도.
그 민낯이 드러난 지금에는 어떤 반응도 내놓지 않고 있었거든.
그러니 나는 당당히 말했다.
“그 또한 우려할 것 없다.”
“……네?”
“그대들은 내게 누가 되지 않는다.”
……이게 언뜻 듣기엔 참 괜찮은 말 같은데.
‘그냥 잘난 척이지, 이거?’
그랑펠식 화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의 귀엔.
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구나.
하지만 어째 울프는 다시금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평생을 노력해도 보답하기 어렵겠습니다.”
물론, 말했다시피 그랑펠이 원하는 건 확실한 끝맺음.
그러니 나는 정확한 경위를 들어야 했다.
앞으로 그림자 용병단의 행보에도 확실하게 물어야 했다.
위이잉─
하지만 울리는 진동에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위잉. 위이잉. 위잉.
끊이지 않는 진동.
익숙한 알림의 간격.
그것만으로도 심각성을 알아차렸으니까.
……이 집요함은 웬수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