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88화 (288/489)
  • ◈ 288화.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필요한 건 압도적인 승리다.

    전 세계가 거악과 나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엄격한 경고가 되기 위해서는. 설령 상대가 거악이라고 한들, 나는 조금도 휘청거려선 안 된다.

    ‘성전을 선언했을 때부터 각오했던 바다.’

    나의 존재로 유지되는 평화.

    그랑펠은 모르겠다만.

    소시민, 이호열에게 그런 위치에서도 편한 배짱은 없다.

    나도 낯짝이라는 게 있거든.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 반짝거리는 옷차림새나 신경을 쓰는 내가.

    어떻게 완벽한 절대자를 자처할 수 있겠냐.

    하지만 그런 절대자를 연기할 수는 있다.

    ‘내키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다.’

    이놈의 입방정이 그동안 떠들어온 게 워낙 많아야지.

    그러니까 이번 전투의 난이도는.

    또 한 번 자체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다.

    거악.

    악크샨이 인정한 숙적이라고 한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나는 필사적으로 뻔뻔함을 연기해 내야 한다.

    누군가는 묻겠지.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그런 게 가능한 거냐고.

    그렇다면 나는 되물어주겠다.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걱정하는 거냐고 말이야.

    쥐뿔도 없던 시절부터 그렇게 발버둥쳐 온 나였다.

    이제 와서 그런 걱정을 받기엔.

    ‘좀 낯간지럽거든.’

    게다가 그때와는 다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알카리가 탄식을 뱉는다.

    “악크샨, 진정 그들이 돌아왔다는 말인가……!”

    지옥에서도 긍지를 잃어버리지 않으신 우리 든든한 선배님들도 모자라서. 그런 선배님들을 기다려온 악크샨의 수호령, 템페스트. 거악에게 나름대로 쌓인 게 있을 수밖에 없는 그림자 용병단까지.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빌어먹을.”

    “우하하.”

    “웃음이 나와? 단단히 미쳤구만.”

    핸더슨과 락키드.

    가장 상태가 좋지 않았던 두 사내조차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켜 세운다. 누구보다 놀란 건 그들의 상태를 잘 알고 있던 그림자 용병단이었다.

    알카리가 흠칫해서는 무언가를 찾는다.

    그러고는 찰랑거리는 포션병 두 개를 집어 든다.

    “……엘릭서를 들이켠 것도 아닌데, 어찌?”

    어찌는 뭐가 어찌겠냐.

    여명의 세트 효과 덕분이겠지.

    하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락키드가 인상을 찌푸렸거든.

    “거, 눈이 부셔서 얌전히 감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

    ……대단하다, 여명!

    빈사 상태에 빠져있던 사람을.

    눈부심만으로 깨울 수 있을 정도라니.

    이래서야 전 세계 카메라가 나를 찾는 건 일도 아니겠구만.

    자체발광, 그 자체야 아주 그냥.

    나를 바라보는 락키드와 시선이 마주친다.

    “보나 마나 당신일 줄 알았지.”

    퉁명스럽게 내뱉더니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 당신이실 줄 알았습니다. 빌어먹을, 평생 존댓말이란 걸 해보질 않아서……. 미안하게 됐수다. 부상자니까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고용 관계를 내세운 게 효과가 있던 건가?

    엘프, 엘시도어에게도 굽히지 않았던 락키드가 고분고분히 대답해온다. 겉으로만 척하는 거 아니냐고? 락키드 성격에 남의 눈치를 볼 리는 없다.

    게다가 여명의 세트 효과는 나를 지휘관으로 생각한 이들에게만 적용된다. 그보다 확실한 증거도 없겠지.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단원들이 먼저 웅성거린다.

    “……저거 아무래도 머리를 심한 게 다쳤나 본데.”

    “내버려둬.”

    “저렇게 말할 수도 있으셨군요, 락키드 씨……!”

    그 웅성거림이 부끄러웠나.

    락키드의 얼굴이 울그락거렸지만 타이밍이 좋았다.

    칠죄종 질투가 고함을 내질렀거든.

    “거악을, 이 몸을 앞에 두고 여유가 넘치는구나!”

    [천적관계] 효과로 잔뜩 날이 선 감각.

    오감이 변화를 포착한다.

    악마에 관해서는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다. 보스 몬스터 공략에 필수적인 패턴 파악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준다는 뜻.

    나는 경고했다.

    “어둠을 주의해라, 제군.”

    히든피스, [질투의 어귀].

    진입한 후로 산맥의 풍경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어둠을 조심하라는 건 사방을 조심하라는 그랑펠식 화법.

    이윽고.

    꿈틀─!

    어둠 속에서 거대한 손들이 뻗어져 나왔다.

    울프가 소리쳤다.

    “전원, 전력으로 피해!”

    황급하게 흩어져 공격을 피하는 그림자 용병단.

    템페스트도 폭풍처럼 날쌘 움직임으로 달려드는 질투의 손아귀를 피해낸다. 물론, 나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질투를 바라볼 뿐.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했잖아?

    평범한 사냥으로는 부족하다.

    내게 필요한 건 압도적인 승전보.

    거악 앞에서도 조금도 휘둘리지 않는 모습이다.

    ‘보여.’

    그런 의미에서 또 한 번 그랑펠의 재능에 감사할 수밖에 없겠군. 필드 단위에서 공격을 뿜어내는 질투의 패턴이, 구조가 공식화되어 머릿속에 떠올랐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차원의 틈을 이용하는 시도는 나쁘지 않다.”

    물론, 지껄이는 와중에도.

    쌔애애액!

    갈 곳을 잃은 질투의 손아귀는 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랑펠이 누구인가.

    고작 악마 따위의 방해에 굴하지 않는 긍지의 소유자.

    내뱉던 말은 기어코 끝까지 내뱉는다는 것이다.

    “허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것이 오판이다.”

    더없이 효과적이었겠지.

    기이의 영역에 진입하지 못한 상대에게는.

    기이로 얼마나 날로 먹을 수 있는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동안 기이로 해먹은 게 또 얼만데, 내가. 그 경험 덕분에 깨달았다.

    기이에는 기이로 대응해야 한다는 걸.

    칠죄종 질투.

    강한 게 당연하다.

    그 레벨은 어쩌면 700레벨을 달성한 나보다도 배는 높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담할 수 있다. 기이의 영역에서는 내가 녀석보다 앞서있다고 말이야.

    ‘넌 혼자 힘으로 현실로 넘어올 수 없었잖아?’

    뱅그릿 선임을 노리던 질투에게는 카림제바라는 조력자가 있었다.

    물론, 카림제바도 혼자의 힘으로 차원의 틈을 열 순 없었으니까.

    서로가 협력했던 거겠지.

    그러나 중요한 건 혼자의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접속기의 구조를 모방했다고 한들.’

    그건 그랑펠의 잘난 재능 덕분이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었거든.

    쉽게 말하자면 너는 큰 실수를 했다는 거야.

    “차원에는 그리 간섭하는 게 아니다.”

    발현하는 기이.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게 너뿐이라 착각하지 마라.

    열렸던 차원의 틈을 닫아버린다.

    상상해 보자.

    “……!”

    육체에서.

    차원의 틈을 매개체로.

    필드 곳곳에서 뻗어져 나오던 질투의 손아귀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기는.

    그대로 잘리는 거지.

    그때 그 오른팔처럼.

    “으, 으아아아아아악!!”

    질투의 비명에도 태연하게 읊조렸다.

    “오른팔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투둑.

    툭.

    두둑.

    그대로 절단되어 떨어지는 팔뚝들.

    악크샨 선배님들과 시선이 맞닿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에게 놀라움이란 없다.

    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는데.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악크샨에서 칭찬 같은 건 들은 기억이 없거든.

    그러나.

    ‘나도 어쩔 수 없는 악마 사냥꾼이다, 진짜.’

    슬슬 익숙해진다, 악크샨의 소통이.

    무미건조한 눈빛만 봐도 통한다는 의미다.

    말보다 행동.

    “!”

    철컥.

    한 손에 들었던 석궁을 잠시 거둔 채.

    스릉.

    다른 한 손으로 쥐었던 검을 치켜들고 쇄도하는 악마 사냥꾼들. 지옥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선배님들의 집념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근접전이 시작된 순간.

    “내게 달라붙지 말거라!”

    필사적으로 그들을 떨쳐내려고 해도 역부족일 거다.

    단련 퀘스트를 함께 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끈기가 하나같이 장난이 아니시거든.

    타다다닷!

    나보다도 프로다우시다들.

    악마 특유의 재생력이 발휘되기 전.

    상처 입은 질투를 향해 검격을 쏟아낸다.

    서걱서걱.

    내 단출한 스킬창을 봐서 알 수 있듯.

    악마 사냥꾼에게 화려한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집념]에서 비롯된 압도적인 스탯의 총량.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괴력.

    그건 간결한 동작조차 거창하게 보이게 할 터.

    “끄아아아악!!”

    당연하게도 유효타일 수밖에 없겠지.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언제까지 선배님들에게 맡긴 채 물러나 있을 생각은 없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는 악마를 앞에 두고 뭘 하고 있느냐고.

    언제 선배님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내게 필요한 것은 승리.

    혼신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다하지 않은 듯.

    여유가 엿보일 정도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기회가 될 때 몰아붙여야 한다.’

    나는 귀철을 치켜들었다.

    -주인이여, 내가 베어야 할 게 녀석인가?

    귀철과 함께여야 발산할 수 있는 『긍지의 검로』.

    그 변화무쌍한 검술을 지금 사용하기엔 조금 아깝겠지.

    상태를 보아하니, 지금의 패턴은 오래가지 않을 것 같았거든.

    나는 귀철에게 답했다.

    “녀석에겐 그러할 가치조차 없다.”

    오만한 게 아니냐고?

    글쎄, 이게 오만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나는 자신이 있었다.

    동시에 나의 발버둥을 믿고 있다.

    설령 중간과정을 뛰어넘었다고 한들.

    나는 절대 쉬운 길만 골라서 걸어오지 않았다.

    -주인이 그렇게 말한다면 따르겠다.

    귀철의 사용만 해도 그렇다.

    검성, 셰그윈과 치뤘던 『시공간의 결투』.

    그 경험을 통해서 나는 귀철의 성능을 최대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건 귀철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허나 그날 이후로 귀철에게 다시는 나의 육체를 맡기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다.

    기이를 통해 날로 먹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상황에서도.

    육탄전만으로, 순수한 마법만으로, 혹은 검술만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아온 나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나는 그랑펠의 입방정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거악의 앞에서도 꼿꼿할 수 있다.

    그 상태로도 녀석에게 치명타를 날릴 수 있다.

    반짝─

    히든피스.

    현실의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공간.

    균열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제로 산맥에 피해가 전달될 걱정은 하지 않고 날뛸 수 있다는 뜻.

    스스스스─

    창공에서 점멸하던 빛이 점차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다.

    그 압력은 쉴 새 없이 거악을 난도질하던.

    악크샨 선배님들조차 한 발자국 물러서게 할 정도.

    화르르르륵─

    이내, 빛이 붉게 타오르며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무언가를 목격하면 까먹지 않는 그랑펠의 재능 중에서도.

    유달리 특출난 마법적 재능.

    메테오 스트라이크.

    그렇다, 폭주하던 탑주의 육체가 발현한 그 마법이다.

    압도적인 승리를 위해서는.

    압도적인 파괴력이 필요한 법이니까.

    “……?”

    맹공에 속수무책이던 질투.

    녀석이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러고는 강렬한 메테오의 빛에 흠칫해서는 말한다.

    “……여명?”

    어둠 속에서 내리꽂는 메테오 스트라이크.

    굳이 표현하자면 여명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거악.

    “유감스럽게도.”

    “……유감이라고?”

    “열등한 네게 여명이 비추는 일은 없다.”

    여명 세트의 효과는 아군에게만 유효하거든.

    “알아들었다면 서둘러라.”

    “서둘러? 이 몸이? 무엇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

    “신의 심판.”

    “시, 신의 심판……?”

    “아마겟돈을.”

    ……어째 내가 잠잠하다 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라는 정식 명칭을 두고.

    굳이 신의 심판, 아마겟돈이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가진 이명을 가져다 붙이는 이유는 또 뭔데?!

    이것도 성전 일부여서 그런 성스러운 이름을 붙인 거냐, 하여튼…….

    ‘이해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은 작명 센스구나.’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아마겟돈…….

    아니, 메테오 스트라이크의 위력은 절대 가볍지 않을 거라는 걸.

    [천적관계]로 증폭된 전투력에는 서클의 효과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나의 발현력은.

    1,000퍼센트에서.

    다시금 비약적으로 증가했을 테니까.

    달아오르는 수치심 따윈 가볍게 능가할 만큼!

    *

    불합리하다.

    질투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악마 사냥꾼, 녀석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예상했던 수준을 뛰어넘었다.

    뒈져버린 악마 사냥꾼들을 지옥에서 불러내지를 않나.

    죽음이 드리웠던 그림자 용병단을 다시금 일깨우질 않나.

    모든 것이 불합리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천적관계 때문이 아니다.’

    나는 칠죄종이다.

    마계의 잡종들과는 다르다.

    천적관계 따위는 애초에 극복한 지 오래전이란 말이다.

    녀석에게는 악크샨의 그늘만 있는 게 아니다.

    질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대체 뭐지?’

    필사적으로 그 이유를 찾았다.

    애송이 악마 사냥꾼.

    녀석이 특별할 수 있는 이유를.

    그리고 한 가지 가능성에 도달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의복.

    그 탓에 뒤늦게 알아차렸다.

    녀석의 머리칼 빛깔을.

    “……은발.”

    이내, 질투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은발, 호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녀석은…….”

    .

    .

    .

    메테오 스트라이크 작렬.

    과연, 예상은 적중했다.

    2페이즈의 막타를 확실하게 쳤다는 거지.

    ‘보자, 다음 패턴은…….’

    일단, 히든피스는 2페이즈가 끝인 모양이군.

    걷혀가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질투.

    그런데 어째서인가, 녀석이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발.”

    그러더니 말을 잇는다.

    “네 녀석은……. 클라우디로구나.”

    아니, 그걸 이제야 알았냐?

    그보다 알았으면 가만히나 있지.

    세상 모두가 지켜보는 지금.

    또박또박 그 이름을 지껄이는 이유가 뭔데?!

    나는 감정을 담아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라.”

    “……역시!”

    “내뱉었다면 그에 관한 책임을 져라.”

    스스스─

    솟구치는 적합한 마력.

    내 흑역사를 언급한 대가는 더없이 가혹할 테니까……!!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