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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85화 (285/489)

◈ 285화. 여명

[거악, 칠죄종 질투가 출현합니다.]

[제로 산맥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요동칩니다.]

[필드가 변형됩니다.]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존재.

그중 하나인 드래곤.

빙룡은 필드를 바꿔 히든피스를 생성했었다.

질투도 마찬가지다.

급격하게 시들어가는 산맥의 식물들.

생기를 잃어가는 대지.

산맥에 몰려드는 먹구름.

과연, 거악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군.

그러나 그랑펠이 누구인가?

“요란하구나.”

거악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 것을 떠나서.

거악조차도 하찮게 여기는 긍지의 소유자.

그런 그랑펠이 이런 꼴을 두고 볼 수 있겠냐.

“두려워 말거라. 가볍기에 소란스러운 법이니.”

식물에게 진지하게 말을 거는 것?

그동안 해왔던 긍지 어린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이엘의 축복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내가 이래 봬도 히든피스, [품격의 화원] 주인이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천자문을 외운다는 말이 있다. 그랑펠의 재능이 비약초가 커가는 걸 마냥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고오오오─

내가 발산한 마력이 산맥에 스며든다.

그와 동시에 다시금 제 빛깔을 되찾아가는 산맥의 풍경.

그래, 이 또한 악마에게 무엇 하나 내어주지 않겠다는 긍지.

“두려움에 질려 아름다움을 잃지 말거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심미안.

덕분에 고생하는 건 나였다만.

지금은 괜찮다.

어떻게 현실에 업데이트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악마.

그것도 한 번 놓쳤던 거악이 굴러들어 온 덕분에 간만에 [천적관계]가. 그것도 제대로 발동된 상황이거든. 이 정도의 마력 소모로는 엄살 부릴 이유가 없다는 거지.

어디 그것뿐이냐.

떠오르는 메시지.

[여명을 기다리는 자 5/5]

[세트 아이템 효과가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 중인 세트 효과 : 5/5]

자체발광.

반짝이 의상을 입은 듯한.

수치심을 참아내고 착용한 여명의 세트가 있단 말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에 뜬 태양을 바라본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고 하던데…….

잘도 지껄이는 입방정.

“거악이 두려워서 숨은 것인가, 태양이여.”

이젠 식물을 넘어서 태양에게도 말을 거는 경지.

“내가 있으니 무리하게 나설 필요는 없다.”

정말로, 거악을 앞에 두고도 한결같은 게 나답다.

마지못해 한탄을 삼키기도 잠깐.

더없이 날카로워진 악마 사냥꾼의 감각이 움찔거렸다.

새로운 대륙이라 불릴 정도로 거대한 제로 산맥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천리안 같은 스킬로도.’

제로 산맥에서 원하는 표적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천적관계]에는 상식을 초월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여태껏 체감해 왔기에 알 수 있거든.

‘채 100레벨도 안 될 때부터.’

수백 레벨에 이르는 악마를 사냥했던,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버텨온 나란 말이다. 덕분일까? [천적관계] 효과로 발달된 청각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거기로군.”

내게 오른팔이 절단당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녀석의 목소리가.

그런데,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 의뢰의 내용은……. 무엇이었지?”

-“그에 관해 알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다……. 난 단장이 된 지 며칠 안 됐거든.”

혹시나 했는데.

의뢰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확신했다.

저거 울프의 목소리잖아?

‘울프가 왜 제로 산맥에…….’

사실 이유는 짐작하고 있다.

키치를 찾기 위해서 움직인 거겠지.

그런데 제로 산맥이라. 제로 산맥에서 접속기를 획득할 방법이라도 습득하게 된 건가.

머리를 굴리기도 잠깐.

나는 귀를 기울였다.

‘거악의 의뢰.’

그렇지 않아도 내심 궁금하던 참이었거든.

거악이 그림자 용병단에 의뢰를 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의뢰가 뭐였길래.

키치가 책임을 지겠다는 소리를 남기고 자취를 감췄는지도.

그러나.

내겐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을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어지는 질투의 목소리.

-“클라ㅇ…….”

뭐어어어어?!

클라우디?!

그 이름이 왜 또 거기서 나와?!

아니, 거기까지 들어도 알 것 같으니까.

제발 클라우디 가문에 관해서는 떠들어대지 마라.

포탈을 발현하면 늦다.

더 빠르게 녀석의 입을 막아야 한다……!!

“템페스트.”

[스킬, ‘악크샨의 수호령’이 발동됩니다.]

“아우우우우─!”

나의 흑역사를.

아니, 클라우디 가문의 잔혹사를.

기어코 들춰내려는.

저 악마를 물어뜯어라!

*

치명상을 입었을지언정 육체의 감각은 꺼지지 않는다.

짐승의 하울링.

그 근원지는 아득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울린 거지?’

더없이 선명한 울음소리.

울프는 옆구리를 붙잡은 채 거악, 칠죄종 질투를 바라봤다.

환청을 들었나 싶었으니까.

‘착각이 아니야.’

허나, 울음소리는 질투의 귓가에도 명백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반응이 놀라웠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동요하지 않았던 거악이 육체를 바르르 떨었으니까.

“……놈이다.”

놈이라고?

별안간 혼잣말까지 내뱉으면서.

울프는 생각했다.

놈이라는 건 혹시 저 울음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는 것인가?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상대는 거악이다.

악마 중에서 서열을 따지자면…….

‘마왕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마왕성 균열을 공략하며 마왕과 조우했던 울프와 그림자 용병단이다. 과장이 아니라 마왕과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의 강함이었다.

‘그런 거악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존재라고?’

떠올릴 수 있는 건 총대장님.

호열밖에 없었다.

그러나 울프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총대장님이 아우우우우……?”

커헉─

듣고 있던 육체도 어이가 없다는 듯 피를 내뱉지 않는가.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울링을 내뱉은 건 보통 늑대가 아닌.

폭풍(Tempest).

거창한 이름에 걸맞은 존재였으니까.

팟!

“우우!”

이윽고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늑대가 질투를 향해 달려들었다.

몰아치는 폭풍처럼 질투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울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

그림자 용병단.

아르카나 대륙.

뒷세계의 거물.

돈이 된다면 어떤 의뢰라도 마다치 않는다.

그런 그림자 용병단에게 아르카나 대륙의 정보?

수집하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들어 오는 수준이었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최근 제국 남부 헤시야시에선 영주에 관한 원성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거, 분란을 일으킬 좋은 명분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관심 없는 제국의 정세부터.

-“내가 원하는 건 그 건방진 남작 놈이 보유하고 있다는 보물이다. 남쪽 바다에서 주웠다던 골동품 말이지. 그 값어치를 떠나서 그놈이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금은보화에 관한 이야기.

-“혹시 악크샨의 늑대에 관해 들어보셨습니까?”

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믿지 못할 소문까지.

악크샨의 늑대.

마찬가지로 그림자 용병단에 들어왔던 포획 의뢰.

울프는 악크샨 늑대에 관한 소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울프(Wolf)니까 울프가 맡는 게 어떨까, 흐흐?”

그 당시 부단장이었던 키치의 시답지 않은 농담 덕분에.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도 기억하게 되었으니까.

어째서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고, 악크샨과 대적하게 되면서까지 늑대를 손에 넣으려고 했는지 말로만 전해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건 늑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습니다. 마치 하나의 조각상 같달까요? 그러나 용맹함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악크샨 거렁뱅이들에게는 아까워도 심히 아까운 녀석이라는 거지요.”

이유를 막론하고, 오는 의뢰를 마다하지 않는 자신들이다.

그러나 악크샨 늑대 포획 의뢰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의뢰를 수행하던 도중 알게 됐거든.

‘그건 동물이 아니야.’

무언가를 수호하는 존재, 수호령.

그림자 용병단의 수호령, 그림자 까마귀가 아지트를 수호하듯.

악크샨의 수호령, 악크샨 늑대도 악크샨을 수호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악크샨, 그 자체였다는 거지.’

그러니까 이 순간, 울프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대륙에 악크샨은 더 이상 없다.

악크샨은 성전 도중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아우우우─”

하지만 칠죄종 질투를 시종일관 압도하는 늑대가.

악크샨의 늑대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움직임을 지켜보는 순간.

겹치듯 떠오르는 악크샨 늑대에 관한 정보.

울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건 악크샨 늑대가 확실하다고.

“……악크샨이 부활했다?”

울프가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아악!!”

악크샨 늑대에게 육체가 갈가리 찢겨나간 질투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째서인가. 잘려나간 모습에서 재생되지 않는 오른쪽 팔뚝을 붙잡고는.

“대체 어떻게, 어떻게 네가 여기에……!!”

무언가에게 따져 묻듯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분명 들었단 말이다……! 네놈은 한동안 동굴에서 자리를 뜰 수 없을 것이라고. 똑똑히 전해 들었단……? 빌어먹을, 설마……!!”

이윽고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트렸다.

“류오쥔춘. 역시, 그 빌어먹을 놈과 한패였구나! 감히 이 거악을. 칠죄종 질투를 사냥하기 위해서. 나를 속이려고 든 것이구나……!!”

울프는 침음을 삼켰다.

“좋다. 제대로 어울려 주마.”

쿠득─

쿠드득─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속수무책이던 질투가 육체의 형태를 바꾸어 간다. 그러더니 자신들에게 입었던 상처도, 악크샨 늑대가 입혔던 상처가 무색하게도.

완벽하게 탈바꿈을 끝마쳤다.

“인정하겠다. 나는 너를 질투할 수밖에 없구나.”

팟─!

어깻죽지에서 펼쳐진 거대한 악마의 날개.

경악하던 순간, 알카리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2페이즈.”

“페이즈라뇨, 영감?”

“클클.”

덜덜덜─

알카리는 떨리는 손으로 포션병을 열어 목을 축였다.

엘릭서.

귀하디귀한 비약초를 극도로 정제한 포션으로 그 값어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 알카리가 울프 쪽으로 또 다른 엘릭서가 담긴 병을 굴렸다.

데구루루─

“키치, 그녀가 자네들 몫으로 달아뒀던 것이라네.”

“……단장이요?”

“클클. 이런 걸로 등 처먹을 생각 없으니 안심하게.”

엘릭서의 효과는 대단했다.

치명상의 상태이상을 무마할 정도.

알카리는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진 단원들을 살폈다.

락키드의 몰골을 보니…….

“쯧.”

저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락키드와 핸더슨을 제외하고는 목숨을 건질 수 있겠군.”

단둘이서 거악과 맞서던 두 사내.

그들은 천하의 비약, 엘릭서가 무색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알카리는 질투를 바라봤다.

“울프 단장 대행, 정중하게 묻겠네.”

“얼마든지.”

“거악은 모험가들의 말로 다음 패턴으로 돌입했네.”

알카리는 나이가 무색하게 개방적이다.

모험가들의 세계에 떨어진 지도 한참이 흘렀으니.

모험가들의 언어에 관해서는 대충 파악했다는 이야기다.

“앞으로 몇 번이나 저런 탈피를 반복할지 모르지.”

그렇기에 격차를 실감했다.

고작 첫 번째 패턴에 전멸하다시피 한 자신들이다.

두 번째 패턴에 돌입한 질투를 상대로 승산은 없겠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알카리는 울프에게 물은 것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싸울 텐가?”

울프는 간신히 엘릭서를 비우고 자신의 육체를 살폈다. 엘릭서의 효과로 빠르게 생명력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뜯겨나간 옆구리에 실시간으로 뼈와 살이 차오를 순 없다.

냉철한 지휘관의 두뇌가 말한다.

승산은 없다고.

최고의 선택지를 내놓는다.

가망이 없는 핸더슨과 락키드를 버리고 일대를 떠나야만 한다고. 그래, 과거 패배했던 아군을 외면하고 배신자가 되었던 과거의 자신이 윽박을 지르고 있었다.

울프는 작게 웃었다.

“이제 와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도 웃긴 데요, 영감.”

너무 고심해서 들여다본 게 화근일까?

류오쥔춘을 신뢰하다가 죽어나간 모험가들.

그들과 자신을 믿다가 쓰러진 단원들이 겹쳐 보였다.

그러니 울프는 석궁을 집어 들었다.

“쓰레기에도 급이 있지 않겠어요?”

철컥─

울프는 석궁을 장전하며 생각했다.

‘이런 걸 긍지라고 하는 건가?’

글쎄, 자신에게 긍지 같은 단어를 언급할 자격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의 결단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다.’

총대장.

호열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다.

악크샨 늑대가 합세한 지금이라면.

어느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알카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키치를 닮아가는군. 자네도.”

하지만 비로소 그림자 용병단답군.

비틀리지 않았다면 우리의 동료가 아니니까.

알카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안주머니를 뒤졌다.

“보자, 이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독약이 무엇이 있던가.”

기억을 헤집던 순간이었다.

……움찔!

핸더슨의 머리에 돋아난 핏줄이 움찔거렸다.

굳게 닫혀있던 락키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울프와 알카리는 두 눈을 의심했다.

‘……뭐지?’

머리까지 근육으로 차있는 것 같은 두 사내라고 하더라도.

저건 인간인 이상, 자연 치유될 수 없는 수준의 부상이었다.

혼자서 의식을 차린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이들에게도 변화는 찾아왔으니까.

또각─

“상황에 관해서는 후에 듣도록 하겠다.”

그것은 등장만으로도.

“그러니 사냥이 끝날 때까지 전원 기상하도록.”

산맥에 깔린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존재.

“내가 고용한 그림자 용병단은 하찮은 악마 하나 따위에 쓰러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으니까.”

여명이었다.

.

.

.

[여명을 기다리는 자 5/5]

[세트 아이템 효과가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 중인 세트 효과 : 5/5]

[1. 지휘관일 때 아군의 사기가 ‘최대치’가 됩니다.]…….

아르카나 시스템에서 ‘최대치’가 의미하는 바는 크다.

예를 들자면…….

죽은 사람도 되살려 낸다는 정도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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