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283화 (283/489)

◈ 283화. 너는 특별하지 않다 (2)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재킷]

[등급 : 에픽]

[제한 : Lv.700 / 높은 수준의 명성]

[장인의 손재주로 착용 제한이 대폭 완화되었습니다.]

[적용된 장인의 손재주 효과 : - Lv.300]

[효과 : 세트 아이템 착용 시, 발현]

[설명 : 오직 ‘여명을 기다리는 자’를 위해 제작된 장비. 명품, 수작, 대작.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고귀함을 표현할 수 없기에 그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았다.]

나, 이호열에게 가장 익숙한 행동이 무엇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것과 옷매무새 다듬기라고 답할 수 있겠지. 덕분에 어깨에 걸친 여명의 재킷을 걸치는 동작은 더없이 자연스럽고 신속했다.

‘여러 의미로 감격스럽다.’

출근 첫날.

재킷을 걸쳤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나?

펄럭거리는 재킷이 얼마나 부끄러웠길래.

첫 출근이랑 비교하고 있는 거냐, 호열아.

스스로 놀라기도 잠깐.

나는 뒤바뀌어 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포탈의 빛 무리 끝.

이내, 목표 좌표 [장미 덩굴의 성채]가 보인다.

‘그나저나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네.’

자연스럽게 레오니를 향하는 시선.

흘러내린 피에 흠뻑 젖은 게 확실히 옷매무새에 죽고 못 사는 그랑펠이 멈칫할만한 상태긴 하다. 그러나 그놈의 격식보다도 위에 있고, 또 복잡한 게 긍지라서 말이야.

‘눈쌀을 찌푸릴 리가 있겠냐.’

물론, 나는 레오니의 긍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 공감대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내뱉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격식에 관해 크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레오니. 허나, 지금은 넘어가겠다. 지금은 긍지를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말에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건가.

레오니가 희미하게 눈을 뜨고는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나지막이 입을 연다.

“……오늘따라 유달리 반짝거리시네요.”

……반짝거려?

누가?

내가?

뒤집어쓴 피 때문에 가늘게 눈을 뜬 줄 알았더니만.

내가 반짝거려서였나?

그보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고 싶었건만.

“언니!!”

레오니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휘청거렸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거대 연합, 버서커의 길드원들.

보자, 포탈을 발현하느라 소모한 마력은 상당하지만.

치유마법을 발현하는 데엔 무리가 없다.

“일단 포션부터……?!”

인벤토리를 뒤지던 플레이어들이 멈칫한다.

『마법』과 [스킬]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힐러의 전유물인 치유를 사용하는 걸 보고 흠칫한 거겠지.

그러나 놀랄 정도는 아니다.

‘기껏해야 중급 수준도 못될걸, 이거?’

뭐든 닥치는 대로 손을 뻗는 그랑펠이라 해도.

효율에 관해선 생각하는 법.

[첫 세계수의 축복]이 존재하는 이상.

나는 치유마법을 깊게 파고들 필요성이 떨어진다.

‘그 시간에 다른 마법서를 들췄단 거지.’

한마디로 나의 치유마법은 교양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랑펠의 재능은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조금 전 하이엘의 광범위 버프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 온 상태였다.

‘좋은 영감이었다, 하이엘.’

그걸 모방, 간섭 과정에 추가한다면…….

“으으……. 미친…….”

레오니가 곧장 욕지거리를.

아니, 정신을 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급격하게 밝아진다.

“뭐라 말씀드려야 할까요. 감사합니다, 총대장님……!”

“언니랑 버서커를 대표해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고개를 들지 못하는 플레이어들을 보고 다시금 실감한다.

……반짝거린다는 게 마냥 흘려들을 게 아닌가 본데?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거울이나 스마트폰 전면 카메라로 이 낯짝을 확인해 보고 싶었건만. 몬스터를 코앞에 두고 그런 짓을 할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진 않다, 내가.

그러니 지금은 눈으로 살피는 것이 최선.

슬그머니 눈을 돌려 내 차림새를 살피는데…….

잠깐만.

이, 이게 대체 무슨 휘황찬란함이냐?!

흔히 후광이 비친다는 표현이 있다.

근데, 이건 후광을 넘어선 ‘자체발광’ 수준이다.

과장이 아니다.

짙은 남색을 바탕으로 수놓아진 은색 실.

하나하나가 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여명.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는 거야, 뭐야?!

펄럭거리는 재킷이 원망스러워서도.

한시라도 빠르게 레벨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거늘.

이래서야 레벨을 올리고 재킷을 착용한 이유가 없잖아.

왜, 상상해 봐라.

재킷을 어깨에 걸치는 것보다 이게 훨씬 수치스러웠거든.

‘전신에 반사판을 붙이고 다니는 수준…….’

내가 어쩐지 경험치가 쏠쏠하다 싶었다!

모든 게 새옹지마라고 마냥 기뻐할 수가 없다, 진짜.

진심으로 복잡한 심경이다.

애써 착용한 재킷을 곧바로 내던지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하지만 그럴 순 없다.

‘녀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차원의 틈] 균열.

그곳에서 조우했던 물음표의 악마가.

그날을 되돌아본다.

찢어진 차원의 틈 너머에서 육체 일부분만 드러낸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그 비범함을 느낄 수 있었지.

그래서 녀석의 강함이 어느 정도일 것 같냐고?

마침 적절한 비교 대상이 있다.

‘차원을 찢었다는 건 기이에 진입한 존재라는 것.’

나.

혹은 드래곤과 비견될만한 악마라는 뜻이다.

이거, 진짜 공략 대상은 따로 있었군.

‘물론, 녀석에겐 카림제바의 협조가 있긴 했다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접속기의 구조를 모방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빨리 아르카나 대륙으로 포탈을 열 수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뱅그릿을 제물로 삼킬 수 있을 정도.’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녀석은 아마도 상위 마왕을 제외한, 다른 마왕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하겠지. 그런 녀석과 마주해야 하는 지금. 자체발광이 수치스럽다고 재킷을 벗어 던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무엇보다 내겐 간절했거든.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트라우저]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셔츠]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베스트]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벨트]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재킷]

무려 올 에픽 등급.

드워프표.

대작 아이템의 세트 효과가 말이다……!

그러니까 다들 양해를 구하겠다.

“이해하겠다.”

“감사합니…….”

“그러니 그대들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악마 사냥꾼.

그리고 그랑펠의 복잡한 긍지가.

모순적이게도 외치고 있었거든.

제로 산맥에 악마가 숨 쉬고 있는 꼴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으면서도, 고작 악마 때문에 계획을 포기할 수도 없다는 긍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이 시간부로.”

나는 귀철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공략은 끝이다.”

.

.

.

남철민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시간부로 공략은 끝이다.”

총대장님은 쓸데없는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공략은 끝났다.

선언하셨다는 건 정말로 끝이 났다는 것.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건 남철민만이 아니었다.

“수, 수석 분석관님?”

“혹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걸까요?”

“역시, 저희가 수준이 떨어져서……?”

남철민은 말을 아끼고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혹시 내가 주제넘었나?’

총대장님께 섣부르게 지원을 요청해서?

자신의 잘못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 거대 연합의 수준에 실망하신 거라면…….

‘그러신 거라면 답이 없어.’

자신의 잘못은 고칠 수 있지만, 거대 연합의 능력 부족은 단기간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순식간에 전신의 땀샘에서 솟구치는 땀방울.

“직접 여쭤보는 수밖에 없겠지.”

두렵지만 확인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후우─”

남철민이 심호흡을 하던 순간이었다.

호열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부터는 사냥의 시간이다.”

“……?”

처음에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거대 연합에 실망하신 게 아닌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바빴으니까.

그러나 지켜보면서 알게 되었다.

저절로 튀어나오는 헛웃음.

“공략이 끝났다는 게 이런 말씀이셨군요.”

공략과 사냥.

그 어감의 차이는 아르카나의 플레이어라면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공략에선 준비, 전투, 휴식, 모든 요소를 신경 써야 한다면 사냥은 그보다 훨씬 단순했으니까.

그래, 지금 호열이 보여주는 것처럼.

분석관이 말을 더듬는다.

“이호열 총대장님께서 [장미 덩굴의 성채]에 진입하신 지……. 정확하게 3분 30초를 넘어선 현재……!”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금 모니터를 살피곤 말한다.

“보,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셨습니다……!”

[장미나무 목각인형 : Lv.750]

보스 몬스터의 위용?

압도적인 무력 앞에선 제아무리 보스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무기력했다. 흔히 페이즈라고 일컫는 패턴들을 쏟아내기도 전에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흩어졌으니까.

“이래서야…….”

같은 시각.

분전하고 있는 남태민 쪽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호열 씨가 짊어진 짐을 함께 나눠 들고 싶달까?”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아무래도 그래선 안 됐었다.

남철민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훨씬 열심히 해야겠다, 태민아.”

지금처럼 어중간한 각오와 노력으로는.

호열에게 절대로 도움이 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경악 끝.

상황파악을 마친 분석관들이 하나둘씩 입을 연다.

“이렇게 되면 [장미 덩굴의 성채]는 클리어입니다.”

“계획과는 많이 틀어졌는데요? 이거,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수석 분석관님……?”

“일단, 총대장님께 어떤 계획이 있으신 건지 확인부터 하는 게 어떨까요……?”

그래, 당연히 확인해야지.

남철민이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 쓴다.

플레이어를 통해 호열과 의사소통을 시도하려던 순간이었다.

슥─

호열의 시선이 정확하게 앵글을 향했다.

“읏.”

순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

강렬한 빛 때문이었다.

남철민이 다급히 입을 연다.

“카메라 초점이 나갈 정도로 강렬한 빛이라고……? 혹시 렌즈가 고장이 난 건가? 아니, 이번에 전부 새로 산 거라서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호열이 내뿜는 자체발광.

고작 옷에서 뿜어져 나온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으니까.

여명, 말 그대로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러나 그와 정반대로.

-“남철민 분석관.”

호열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부릅─

남철민은 힘겹게 눈을 뜨고 답했다.

“듣고 있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끄덕─

위아래로.

잘게 흔들리는 플레이어의 앵글.

그러자 호열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후 상황은 전적으로 그대의 판단에 맡기겠다.”

“……네?”

-“말했다시피 이제부터는 사냥의 시간이니.”

사냥이라고……?

[장미 덩굴의 성채]는 총대장님께서 보스몹을 처치.

이미 클리어된 상태였다.

다른 동굴을 말씀하시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

남철민은 곧 의미를 깨달았다.

‘……이게 총대장님께 사냥이 될 리가 없잖아?’

방금의 그건 사냥이라 부를 수 없었다.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했지.

더 나아가 고작 750레벨짜리 보스 몬스터가 총대장님의 경험치에 사냥이라 부를 정도의 경험치를 드롭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 뜻을 알아듣지 못하다니.”

나야말로 한참 멀었다, 남철민!

그렇다면 총대장님이 말씀하시는 사냥감은 무엇일까?

내가 그 사냥감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남철민이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오싹!

다시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걸로 두 번째.

남철민은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정답이라는 듯한 호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대가 느끼고 있을 ‘그것’이 나의 사냥감이다.”

“……!”

남철민은 다시금 경악하고 말았다.

그 말의 뜻은 호열은 동굴 속에서도 제로 산맥의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런 호열에게 정말로 내가 도움될 만한 건 하나도…….

“젠장.”

남철민이 고개를 떨구던 순간이었다.

분석관 이전에 플레이어.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분석관이라면 모를 수 없는 출현 메시지였다.

적정 레벨,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음].

그런 제로 산맥에 출현 메시지라니.

버그가 아닌가?

의문이 들 수도 있었건만.

남철민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메시지의 ‘그것’은 충분히 그럴 만한 존재처럼 보였으니까.

남철민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총대장님께 제로 산맥의 상황을 전달하겠습니다!”

[거악, 칠죄종 질투가 출현합니다.]

[제로 산맥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요동칩니다.]

[필드가 변형됩니다.]

.

.

.

거악.

칠죄종 질투라.

막 부활했던 탐욕이 600레벨이었던 걸 생각하면.

녀석의 레벨은 대충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긍지는 모순적이게도 악마의 앞에서 가장 드높아진다.』

거악이든, 마왕이든, 하찮은 임프든.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랑펠에겐 똑같은 악마에 불과했으니.

『어쩌면 악마가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악마 사냥꾼이란 그랑펠의 클래스가 아니라 그랑펠이란 인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향해 읊조렸다.

[거악, 칠죄종 질투가 출현합니다.]

“거악이라. 착각이 심하구나.”

긴장은커녕.

“너는 일말의 일말조차 특별하지 않다.”

독설을 뱉었다.

“사냥감.”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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