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제로부터 시작하는 (5)
아르카나 대륙엔 인류에게 익숙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건 아르카나가 AAU의 전신, 코스모가 개발하고 서비스했던 게임이기 때문이다.
남철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AAU 측에서부터 아르카나가 단순한 게임이 아닌 원래부터 존재하는 세계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도 했다만……. 확실한 건 아르카나엔 반갑게 느낄만한 떡밥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용과 같은 전설의 동물부터.
이 순간.
모니터 위에 나타난 호열의 손에 들린 무기까지.
엑스칼리버.
아서왕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뽑을 수 있다는 바위에 꽂힌 명검(名劍). 분석관들이 흥분해서는 하나둘씩 입을 연다.
“지, 진짜 엑스칼리버라고요?”
“뭘 묻고 그래? 보면 몰라? 총대장님이 손으로 뽑아내시는 거. 바위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단단하게 박혀있던 검을 그냥 쑤욱! 쉽게 뽑아내신 거!”
“무엇보다 장소가 심상치 않습니다. 작은 챔피언의 성소. 저렇게 성스러운 장소라면……. 확실히 엑스칼리버로 추정되는 아이템이 묻혀있던 것도 납득이 되죠.”
듣고 있던 남철민을 비롯한 분석관 전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사자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손발을 움츠려들었을 광경이었건만.
그 당사자는 화면 너머, 동굴 속에서 훈육에 집중하고 있었으니.
“누가 그랬었지?”
“……?”
“보도자료로 뿌리면 싹 조용해질 거라고.”
“제, 제가 그랬습니다.”
“아주 좋은 발상이었어.”
남철민은 주먹을 쥐었다.
‘모든 건 총대장님의 뜻에 달린 일이다.’
그러나 남철민은 앞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세상은 총대장님을 조금 더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호열이라면 지금도 충분한 존경을 받고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 세상은 끊임없이 증명을 원한다.
애초에 인간이란 만족할 수 없는 생물이니까.
정부?
-고위 관계자, “정보 공유가 없는 건 유감이다.”
-“국민 안전과 직결될 수 있는 사항은 확실해….”
-“천하통일의 경우를 본받아야….”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호열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플레이어들은 정부와 기밀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지속적인 여론몰이를 해왔다. 그때마다 남철민은 조소로 대응했다.
‘그 정보가 어디로 넘어갈진 뻔해.’
대체 천하통일쪽에 얼마나 처먹은 걸까, 하고는.
여론?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ㄹㅇ 정보 공유만 돼도 민간인 피해는 제로 아님?
-솔직하게 이호열이 뭐하고 다니는지 궁금하긴 함;;
-막말로 드래곤들이 날뛰었을 때도…….
대중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편향적인 정보가 쏟아지면 그런 의견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올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러나 호열이 걸어온 행보는 태양처럼 찬란했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순 없어.’
어쭙잖은 언론 플레이 따위?
가뿐하게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지금도 그랬다.
-아니 흑암룡 없었으면 지구 멸망이었잖아ㅋㅋ
-ㄹㅇ 깔끔하게 정리했구만 억까 심하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나ㅋㅋㅋㅋㅋ
그러나 남철민은 알고 있다.
누군가는 질리지도 않고 다시금 호열을 물어뜯으리라는 걸.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금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벅찬 건지도 모른다.
그려지는 큰 그림.
‘제로 산맥 동굴 동시 공략으로 밑밥을 깔고.’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흑암룡에 버금가는 존재, 여신으로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끝으로 화룡점정.
‘바위에서 뽑아낸 엑스칼리버로 결정타.’
그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영웅 서사 한 편이 튀어나왔다. 물론, 모든 걸 세상에 공개하느냐 마느냐는 호열의 의중에 달린 거겠지. 그러나 남철민은 아무래도 좋았다.
“계속해서 증명해 내시는군요, 총대장님께서는.”
호열은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으니까. 게다가 이 모든 게 고작 공략 돌입 1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의미.
남철민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하나하나 놓쳐선 안 된다.’
호열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 부여된 의미를.
빠짐없이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할 일일 터.
다른 분석관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엑스칼리버를 원래부터 보유하고 계셨는지, 이번에 발견하신 건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검을 뽑으셨다는 거겠죠. 왕의 그릇, 용군주라는 이명이 헛된 게 아니다.”
“그러고 보니까 용군주도 있었죠? 워낙 이명이 많으셔서…….”
“이거 어쩌면 저희에게 각오하라고. 미리 경고하시려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
덕분에 그들 사이에선 활발한 의견이 오갔다.
“최종 편집할 때 자막으로 주석을 달아놓는 건 어떨까요? 총대장님의 행동에 담긴 이런 깊은 뜻을, 저희끼리만 알고 있는 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요!”
남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인데?”
긍지를 품은 자에겐 설명 따위 하지 않아도 알아보겠지만, 세상엔 긍지로운 자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분명 총대장님이시라면 그런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겠지.
타다다닥!
혹시라도 깨닫게 된 의미를 까먹을라.
타이핑으로 기록을 남기는 분석관들.
열중한 그들이 찰나지만 흠칫했다.
“……?”
오소소─
순간,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이 느껴진 탓이었다.
남철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철민의 경우에는 오히려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
그 불쾌한 감각이 낯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흔치 않은 ‘경험’ 덕분이란 걸.
당장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니. 한눈팔 때가 아니다, 남철민.’
불쾌감의 근원을 쫓기에.
제로 산맥은 광활하고.
분석관으로서 짊어진 무게는 막중했으니까.
*
천하통일.
제로 산맥 제7구역, 집결 장소.
일곱(七)이라 적힌 붉은 깃발이 흩날린다.
거구와 평균 이하 신장의 사내.
둘은 작게 속삭이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륙에서나 여기에서나 똑같군.”
“무엇이 말인가?”
“별것도 없는 놈들이 더 요란하다는 거. 퉷!”
락키드는 슬쩍 가면을 들어 올리고 침을 뱉었다. 까마귀 가면이 아니다. 천하통일의 자칭 오성(五星)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이다.
“흐하핫! 본성을 어찌하겠나.”
“본성?”
“인간도 결국엔 짐승이 아니겠는가? 자네는 맹수가 무리 지어 사냥하는 걸 본 적이 있나? 나약한 동물일수록 뭉쳐 다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란 말이지!”
“아아, 내가 혼자 다니는 이유가 바로 그거구만.”
“으하하! 역시, 자네는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어.”
락키드와 호탕하게 어울려주는 건 3석, 핸더슨이었다.
두 사내는 목적을 위해 천하통일의 집결 장소에 잠입한 상태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그런 것치고는 외관부터 상당히 눈에 띄는 조합이 아니냐고?
반박의 여지는 없다.
집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
하얗게 뒤집힌 눈동자.
“부단장. 그……. 꼭 저 둘이어야 했을까요?”
8석, 나디보.
그의 능력은 『감각공유』.
나디보가 핸더슨과 락키드, 두 사내의 감각을 그림자 용병단 단원 전원에게 공유했다.
나디보의 물음에 대답 대신 한숨이 흘러나온다.
“내가 저럴 줄 알았지. 저 바보들! 저래서야 무슨 잠입이야? 그것보다 락키드, 저 미친 새끼는 왜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고른 건데?!”
돼지도, 늑대도 아니고, 토끼 가면이라니!
“이자벨마를이 원래 토끼를 살려놔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의심부터 받아서 잠입이고, 계획이고, 뭐고 전부 틀어지고 말았을 망측한 외관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만드라고라를 삶아 먹었나?
“둘 다 목소리는 왜 저렇게 크냐고……!!”
5석, 헤르키오라는 머리를 붙잡고.
“……그래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4석, 핌비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다.
“뭘 그리 고민하는가들.”
알카리는 클클 웃었다.
단장, 키치는 가끔 신뢰할 수 없는 구석이 있어도.
부단장, 울프는 아니었다.
그는 겉보기보다도 훨씬 유능한 사내였으니까.
“안심해. 계획대로니까.”
울프는 나디보로부터 전해져오는 감각을 관조했다.
패잔병의 우두머리.
불명예스러운 과거도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익숙한 풍경과 냄새.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천하통일의 비정상적인 통치 구조는 구성원 간의 경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 이 순간, 천하통일의 집결지는 전장과 다름없었다.
핸더슨과 락키드.
어째서 저 둘을 붙여놓았느냐고?
이유야 간단하다.
“전장에서 빛을 발하니까, 두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 핸더슨과 락키드는 단원 중 전장에 가장 익숙했다. 전장의 분위기를 빠르게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읽어낸 분위기가 나디보를 통해 와 닿았다.
“폭풍전야 같네요…….”
핌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보자, 금방이라도 폭발할 플라스크 같구만.”
알카리의 비유는 정확했다.
“누가 진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사실 우리가 진입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테니까. 결국, 집결지에선 유혈사태가 벌어질 거거든.”
“유혈……? 피를 흘릴 거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아군이잖아? 우리가 진짜 전문가답게 분란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저것들이 손바닥 뒤집듯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까?”
핌비와 헤르키오라의 의문에 울프는 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천하통일이란 집단은.”
구성원들이 상호의 이익을 위해 뭉친 것을 집단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천하통일은 이질적이다.
구성원들을 위해서 행동하는 게 아니다.
오직 한 사람.
군주, 류오쥔춘을 위해 사고하고 움직였으니까.
“사실 아르카나 대륙의 군주란 그런 존재지.”
불합리조차 합리로 뒤바꿀 수 있는 존재.
그렇기에 위험한 존재.
그러나 그건 군주에 한정된 이야기다.
구성원들의 충성심은 오직 군주를 향한 것이지.
집단이나 다른 구성원들을 위한 게 아니었으니까.
알카리가 울프의 말을 거들었다.
“애송이 군주가 건재하다고 하더라도 천하통일은 곪을 대로 곪아 터질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지. 우리가 한 일은 언제가 터질 고름을 슬쩍 건드린 것뿐이고. 클클.”
서로가 서로에게 거침없이 날을 겨누던 모습이 그 증거.
알카리의 말에 단원들은 그제야 이해한 모양이었다.
울프는 계획을 다시금 확실히 했다.
“분란이 퍼져 나가면 퍼져 나갈수록 윗선에서 개입이 시작될 거야. 우리 냉정한 천하통일의 군주께서 언제 모습을 드러내실지는 알 수 없겠지만…….”
조만간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 어떤 협박에도 꿈쩍하지 않을 류오쥔춘이라고 한들.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다면 접속기를 내놓을 수밖에 없을 터.
“그때까지는 오히려 시끄럽게 날뛰는 편이 좋거든.”
그런 면에서 핸더슨과 락키드는 적격이었다.
“하긴. 시끄럽기는 엄청 시끄럽지, 저 두 명.”
헤르키오라가 구시렁거리는 것으로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단원들의 의문을 사라졌다.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거늘.
울프는 계획에 돌입하기 전부터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몰랐을까.’
류오쥔춘.
그쯤되는 군주가 자신의 집단이 썩어가는 걸 정말로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 이건 무지한 걸 넘어서 내분을 부추기는 수준이었다.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구조의 취약점이 훤히 보였다는 의미다.
하지만 울프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알면서도 그럴 이유는 없다.’
자신의 손으로 거둬들인 군주의 목숨이 열이 넘는다.
덕분에 군주에 관해선 잘 알고 있는 울프였다.
군주의 힘은 집단에 비례한다.
집단이 무력해진다면 군주도 무력해진다는 것.
군주가 자신의 집단을 곪게 하는 짓을 할 이유는 없다.
알카리의 말대로 류오쥔춘은 단순히 미숙한 구석이 있을 뿐이겠지.
그는 아르카나 대륙의 군주가 아닌 모험가였으니까.
울프는 고개를 저었다.
‘초점이 흐려졌군, 울프 사카린.’
키치가 모습을 감추고.
단장의 자리를 떠맡게 된 지금.
나는 작은 것에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모든 건 계획대로야.’
스스로 다그치고는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던 중.
핸더슨과 락키드의 시야에서 시선을 끄는 존재를 발견했다.
“……?”
그건 높은 수준의 무장을 자랑하는 천하통일의 모험가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색을 띤 사내였다. 외관상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누구지?”
사내에겐 오른팔이 없었다.
.
.
.
악마는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자란다.
그것은 악마의 본질이며.
거악도 예외는 아니다.
허나 거악이라고 한들, 천적관계를 피해 갈 순 없다.
아니, 오히려 거대한 악이기에.
광활한 제로 산맥에서도 천적에게서 숨을 수 없다는 뜻이다.
깊은 동굴 속에서도 그 악취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천적.
악마 사냥꾼.
호열의 시야에 메시지가 출력된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주제넘게도 내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구나.”
냉랭한 목소리가 울린다.
“처분을 기다리고 있거라, 물음표(???)의 악마여.”